성서일과 묵상
2026. 9. 20.
⎮ 성령강림 후 열일곱번째주일 창조절 셋째주일 성서일과 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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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요나 3:10-4:11 (새번역)
10 하나님께서 그들이 뉘우치는 것, 곧 그들이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1 요나는 이 일이 매우 못마땅하여, 화가 났다.
2 그는 주님께 기도하며 아뢰었다. "주님,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서둘러 스페인으로 달아났던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실 것임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 주님, 이제는 제발 내 목숨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4 주님께서는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하고 책망하셨다.
5 요나는 그 성읍에서 빠져 나와 그 성읍 동쪽으로 가서 머물렀다. 그는 거기에다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다. 그 성읍이 어찌 되는가를 볼 셈이었다.
6 주 하나님이 박 넝쿨을 마련하셨다. 주님께서는, 그것이 자라올라 요나의 머리 위에 그늘이 지게 하여, 그를 편안하게 해주셨다. 박 넝쿨 때문에 요나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7 그러나 다음날 동이 틀 무렵, 하나님이 벌레를 한 마리 마련하셨는데, 그것이 박 넝쿨을 쏠아 버리니, 그 식물이 시들고 말았다.
8 해가 뜨자, 하나님이 찌는 듯이 뜨거운 동풍을 마련하셨다. 햇볕이 요나의 머리 위로 내리쬐니, 그는 기력을 잃고 죽기를 자청하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9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씀하셨다. "박 넝쿨이 죽었다고 네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가 대답하였다. "옳다뿐이겠습니까? 저는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
10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11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요나 3:10-4:11을 묵상하십시오.
본문 배경
니느웨는 앗시리아 제국의 수도로, 주전 722년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나라의 심장부입니다. 요나서의 최종 형태는 대체로 포로기 이후(주전 5-4세기)로 보는데, 이는 에스라-느헤미야의 민족적 경계 강화 시기와 겹칩니다. 4:2의 고백은 출애굽기 34:6-7 — 이스라엘 신앙의 헌법 같은 문장 — 의 인용입니다. 요나의 문제는 신학을 몰라서가 아니라 정확히 알아서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비로우실 것을 미리 알았고, 그래서 도망쳤습니다(4:2). 히브리어를 보면 구조가 더 선명합니다. 3:10에서 니느웨가 돌이킨 "나쁜 길"과 하나님이 거두신 "재앙"은 같은 단어 라아(רעה, 악·재앙)인데, 4:1의 "매우 못마땅하여"는 문자적으로 **"요나에게 큰 라아가 되었다"**입니다. 니느웨에서 사라진 악이 요나에게로 옮겨 앉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요나를 처벌하지 않으시고 두 번 질문하시고, 질문으로 책을 끝내십니다(4:4, 9, 11). 요나의 대답은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 빈칸에 독자가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관찰 질문
요나는 4:2에서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말합니까?
그가 화가 난 이유는 하나님을 잘못 알아서입니까, 정확히 알아서입니까?
하나님은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고 몇 번 물으십니까(4절, 9절)?
요나는 각각 어떻게 반응합니까?
책은 어떻게 끝납니까?
묵상질문
나에게는 "잘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 용서받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마음을 하나님께 요나처럼 솔직하게 말씀드린다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시편
시편 145:1-8 (공동번역)
1 나의 하느님, 나의 임금님, 내가 당신을 높이 받들며 언제까지나 당신 이름 찬양하오리이다.
2 날이면 날마다 당신을 기리며 언제까지나 당신 이름 찬양하오리이다.
3 "높으시어라, 야훼, 끝없이 찬미받으실 분, 그 높으심, 측량할 길 없음이여."
4 당신의 업적 세세에 전해지고 찬란한 그 공적 대대손손 알려지리이다.
5 당신의 명성, 그 찬란함, 이룩하신 놀라운 일 전하고 또 전하리이다.
6 당신의 무서운 힘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이며 나는 당신의 위대함을 이야기하리이다.
7 끝없이 어지신 일들 기억하며 사람들은 당신의 정의를 기뻐 외칠 것입니다.
8 야훼는 자애롭고 자비로우시며 화를 참으시고 사랑이 지극하시다.
시편 145:1-8을 묵상하십시오.
본문 배경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를 따라 각 절이 시작하는 **이합체시(acrostic)**입니다. 시편 145-150편이라는 최종 찬양 묶음의 문을 여는 시이기도 합니다. 8절은 출애굽기 34:6의 인용입니다. 이합체 형식은 "ㄱ에서 ㅎ까지"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완전성의 선언입니다. 주목할 것은 찬양의 확장 방향입니다. 1-2절의 "내가"에서 시작해 4-7절에서 "대대손손"과 "사람들"로 넓어지고, 8절에서 하나님의 인격 묘사에 도달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8절이 요나가 분노하며 인용한 문장입니다. 이 시편을 이날의 예배에서 회중이 소리 내어 부르는 순간, 회중은 요나가 견디지 못한 문장을 자기 입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관찰 질문
1-2절과 4-7절을 비교해 보십시오. 찬양하는 주체가 "나"에서 누구에게로 넓어집니까?
8절은 하나님을 네 가지로 묘사합니다. 무엇입니까? (요나 4:2와 나란히 놓고 읽어 보십시오.)
묵상질문
8절을 소리 내어 천천히 읽어 보십시오. 이 문장을 찬양으로 부르기 어려웠던 순간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누구에게 자비로우실 때 그렇습니까?
서신서
빌립보서 1:21-30 (새번역)
21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22 그러나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 보람된 일이면, 내가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23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
25 나는 이렇게 확신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발전과 믿음의 기쁨을 더하기 위하여 여러분 모두와 함께 머물러 있어야 할 것으로 압니다.
26 내가 다시 여러분에게로 가면, 여러분의 자랑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 때문에 많아질 것입니다.
27 여러분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십시오. 그리하여 내가 가서, 여러분을 만나든지, 떠나 있든지, 여러분이 한 정신으로 굳게 서서, 한 마음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함께 싸우며,
28 또한 어떤 일에서도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소식이 나에게 들려오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징조이고 여러분에게는 구원의 징조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29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를 위한 특권, 즉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특권도 주셨습니다.
30 여러분은 내가 하는 것과 똑같은 투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을 보았으며,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을 지금 소문으로 듣습니다.
빌립보서 1:21-30을 묵상하십시오.
본문 배경
바울이 감옥에서 쓴 편지입니다(1:7, 13). 빌립보는 로마 식민시(colonia)로 퇴역 군인들이 정착한 도시였고, 시민권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27절의 "생활하십시오"가 의미심장합니다 — 폴리튜오마이(πολιτεύομαι, 시민으로서 살다)로, 바울은 빌립보 사람들이 가장 자랑하던 로마 시민권의 언어를 복음의 시민권으로 뒤집습니다. 사형 가능성이 추상적 가정이 아닌 상황에서 쓰인 글입니다. 바울의 딜레마는 "사는 것과 죽는 것 중 무엇이 좋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남에게 유익한가"입니다. 21절의 "유익"은 케르도스(κέρδος, 이득·이문), 22절의 "보람된 일"은 카르포스 에르구(καρπὸς ἔργου, 일의 열매)로, 둘 다 장부에 쓰는 말입니다. 바울은 손익계산서를 펴놓고 계산하는데, 결론이 자기 이익의 포기입니다. 29절은 더 놀랍습니다. 고난을 "주셨다"는 동사가 카리조마이(χαρίζομαι, 은혜로 거저 주다)로, 카리스(χάρις, 은혜)에서 나온 말입니다. 고난이 은혜로 선물되었다는 것입니다.
관찰 질문
바울은 두 가지 중 무엇을 더 원한다고 말합니까(23절)?
그런데 왜 다른 쪽을 택합니까(24-25절)?
29절에서 하나님이 주신 "특권"은 몇 가지이며 무엇입니까?
묵상질문
떠나는 것이 나에게 더 좋은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를 위해 그 자리에 남아 있었던 적이 있습니까? 그때 무엇이 나를 남게 했습니까?
복음서
마태복음 20:1-16 (새번역)
1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고용하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어떤 포도원 주인과 같다.
2 그는 품삯을 하루에 한 데나리온으로 일꾼들과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원으로 보냈다.
3 그리고서 아홉 시쯤에 나가서 보니, 사람들이 장터에 빈둥거리며 서 있었다.
4 그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여러분도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시오. 적당한 품삯을 주겠소' 하였다.
5 그래서 그들이 일을 하러 떠났다. 주인이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 나가서 그렇게 하였다.
6 오후 다섯 시쯤에 주인이 또 나가 보니, 아직도 빈둥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에게 '왜 당신들은 온종일 이렇게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소?' 하고 물었다.
7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기를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켜주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그는 '당신들도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저녁이 되니, 포도원 주인이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기를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까지, 품삯을 치르시오' 하였다.
9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을 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10 그런데 맨 처음에 와서 일을 한 사람들은, 은근히 좀 더 받으려니 하고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11 그들은 받고 나서,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말하였다.
12 '마지막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도, 찌는 더위 속에서 온종일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였습니다.'
13 그러자 주인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보시오, 나는 당신을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14 당신의 품삯이나 받아 가지고 돌아가시오. 당신에게 주는 것과 꼭 같이 이 마지막 사람에게 주는 것이 내 뜻이오.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내가 후하기 때문에, 그것이 당신 눈에 거슬리오?' 하였다.
16 이와 같이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
마태복음 20:1-16을 묵상하십시오.
본문 배경 이 비유는 19:16-30에 이어지는 대답입니다. 부자 청년이 떠난 뒤 베드로가 묻습니다 —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받겠습니까?"(19:27) 그리고 19:30과 20:16의 같은 문장("꼴찌가 첫째 되고…")이 비유를 앞뒤로 감쌉니다(봉투구조).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일용직 노동시장은 실재했고, 포도 수확은 비가 오기 전 며칠 안에 끝내야 하는 급한 일이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일용직 하루 품삯이자 한 가정의 하루 생계선입니다. 주인은 하루에 다섯 번 장터에 나갑니다. 이것은 인력 관리가 아닙니다. 오후 5시에 고용하는 것은 경영적으로 무의미합니다. 그는 일할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서 있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여기서 번역을 하나 짚어야 합니다. 3, 6절의 "빈둥거리며"는 한국어에서 게으름이라는 도덕적 판정을 담지만, 원어 아르고스(ἀργός, 일이 없는·할 일 없는)는 에르곤(ἔργον, 일)의 부정형으로 게으른 상태가 아니라 일거리가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7절이 직접 말합니다 —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켜주지 않아서." 15절도 번역에서 힘이 약해졌습니다. 직역하면 "내가 선하기 때문에 당신의 눈이 악한 것이오?"입니다. 아가토스(ἀγαθός, 선한·후한)와 포네로스(πονηρός, 악한)의 대조이고, "악한 눈"은 시기와 인색을 가리키는 셈족 관용구입니다. 문제는 주인의 후함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눈입니다. 13절의 "이보시오"도 그냥 호칭이 아닙니다. 헤타이로스(ἑταῖρε, 친구여)는 마태복음에 세 번 나오는데(20:13, 22:12, 26:50), 세 번 모두 잘못을 지적받는 사람에게 건네는 말입니다. 다정하면서 동시에 서늘한 호칭입니다.
관찰 질문
주인은 하루에 몇 번 장터에 나갑니까?
마지막에 고용된 사람들은 왜 그때까지 서 있었다고 말합니까(7절)?
11-12절에서 처음 온 일꾼들이 불만을 제기한 내용은 정확히 무엇입니까?
그들은 약속보다 적게 받았습니까?
묵상질문
이 비유에서 내 자리는 어디입니까?
나는 몇 시에 부름받은 사람입니까?
그리고 지금 내 마음은 누구 편에 서 있습니까?
성경묵상 가이드
우리는 '뿌린 대로 거둔다'는 인과응보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고, 기여한 만큼 대우받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의 표준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도덕어 역시 '공정'입니다. 정규직 전환 논란, 입시 제도 논쟁, 성과급 배분, 병역 특례에 이르기까지 모든 갈등이 공정의 언어로 표현됩니다. 이러한 요구는 대부분 정당합니다. 반칙과 특권에 대한 정당한 저항이자 투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언어 안에는 잘 보이지 않는 엄혹한 전제가 하나 숨어 있습니다. 바로 "내가 치른 비용을 남도 똑같이 치러야 한다"는 능력주의의 문법입니다. 성공은 오롯이 내 노력의 결과이므로 나의 당연한 몫이고, 실패는 타인이 노력을 덜 치렀기 때문이라는 냉정한 계산입니다. 마이클 샌델이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지적했듯, 이러한 문법은 승자에게는 오만을, 패자에게는 굴욕을 남겨줄 뿐입니다.
이처럼 엄격한 공정성의 잣대는 결국 우리를 끊임없는 비교와 피로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누군가 나보다 적게 일하고도 같은 보상을 받는 것을 볼 때, 혹은 내가 증오하는 대상이 조건 없이 용서받는 것을 목격할 때 우리는 깊은 분노와 상실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매달리는 이 '공정함'의 이면에 더 크고 신비로운 생명의 원리, 즉 '은혜'가 있음을 역설합니다. 은혜는 자격 없는 자에게 거저 주어지는 선물이자, 내가 치르지 않은 대가를 받아 누리는 계산 불가능한 사랑입니다.
공정이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규칙이라면, 은혜는 메마른 삶의 자리에 호흡을 불어넣고 연약한 존재를 일으켜 세우는 생명의 원동력입니다. 자격과 공로를 따지는 팍팍한 세상의 문법을 넘어, 은혜라는 신비한 원리를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는 비교와 피로에서 벗어나 참된 평안과 상생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번주 성서일과의 주제는 '인간의 보응적 사고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주권적 은혜'입니다.
요나서는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용서에 분노하는 인간의 편협함을 대조하며, 생명을 아끼시는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을 강조합니다.
시편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자애가 지극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찬양하며 그 위대함을 선포합니다.
빌립보서는 그리스도를 위한 삶과 고난을 '특권'으로 규정하며, 복음에 합당한 성도의 자세를 촉구합니다.
마태복음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통해 일한 시간에 관계없이 동일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함과 이에 대한 인간의 시기심을 다룹니다.
전체적으로 본문은 인간이 정의하는 '공정'의 틀을 넘어, 모든 생명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선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