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2025년 부활주일 나는 당신을 봅니다.

본문

Celeb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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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과정과정을 통해 오늘 찾아오셔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리라 믿습니다. 요한이 들려주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이야기를 짧고 굵게 살펴보길 바랍니 다.

성경을 공부하고 묵상하려면 질문을 잘 던져야 하는데요. 오늘 본문에서 두가지 질문 포인트를 가지고 살펴보길 바랍니다.

1. 요한은 누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나?

2. 반복되는 동사는 무엇인가? 동사가 반복되면서 어떤 전개가 펼쳐지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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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누구를 중심으로 풀어가고 있습니까?

네 막달라 사람 마리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첫 목격자, 그리고 그 소식을 전하는 전 증언자가 막달라 사람 마리아입니다. 놀랍죠? 별로 안놀라운 일인가요? 놀라운 일입니다. 부활의 첫 목격자와 증언자가 예수님의 12제자가 아닌 여자! 막달라 사람 마리아!라는 겁니다.

요한은 아주 중요한 사건, 정말 핵심적인 사건, 기독교의 정수와도 같은 부활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여자를 통해서 그것도 막달라 사람 마리아를 통해서 들려줍니다. 1세기 가부장적문화 안에서 여성의 증언은 법적으로 가치가 낮게 평가되었습니다. 그것도 일곱귀신들렸었던(정신병력이 있는?) 여자의 이야기는 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의 첫 목격자와 증인으로 막달라 사람 마리아를 세우십니다. 요한은막달라 사람 마리아의 경험을 담담하게 구체적으로 풀어가는 것을 통해 막달라 사람 마리아의 눈과 경험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합니다. 놀랍죠? 톰라이트는 마리아가 사도들의 사도가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12제자를 가리키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하고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파하는 특별한 사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그 사도들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도망가고 흩어져있는 사도들에게 부활의 증인으로 막달라 사람 마리아를 보내어서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있습니다. 17절을 보면 예수님은 막달라 사람 마리아에게 내 형제들/즉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가서 증언하라고 보내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참 놀랍습니다. 첫 증인으로 제자들이 아니라 여자 막달라 사람 마리아를 보내십니다. 1세기의 통념과 차별과 가치를 뒤집습니다. 제자들의 다 두려워 숨어 있을 때에도 무덤을 찾아가는 용기와 사랑을 보여줌으로 진정한 제자도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교회를 새롭게 하는 것은 멋진 설교가의 설교나, 많은 헌신을 하는 교회의 리더나, 건물과돈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증거와 삶이 교회를 새롭게 합니다. 그가 나이가 많든 작든, 남자이든 여자이든, 목사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늘 나의 삶에서 살아있는 신앙,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하는 삶과 증언이 있는 사람! 그 사람을 통해 주님은 교회를 새롭게 하십니다.

지난 3월 17일에 ‘평신도 교회가 온다’ 북토크에 다녀왔습니다. 평신도교회 운동을 하고 계시는 사교육걱정없는 세상의 대표로 지냈고 교육의 봄 대표인 송인수님의 책입니다. 2007년부터 17년에 걸쳐 평신도 교회를 이루며 고민하고 씨름했던 흔적을 기록한 책입니다. 저의 어떤 지향과 맞닿아 있어서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움직여서 오랜만에 남포동을 다녀왔습니다.

여기 평신도교회를 보며 한가지 비평하는 점이 있었습니다. 저도 일정부분 동의했던 부분인

데 북토크를 통해 그 비평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비평은 무엇이냐하면 “삶의 여유?와 어느정도 교육수준?이 있으니깐 가능하지!” 였습니다. 좀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똑똑하고 여유가 있으니깐 가능한거 아니야?” 입니다. 북토크에 참여하며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꼭 그렇지만은 않겠다. 아니 내가 잘못생각했구나!하며 반성도하고 새로운 소망도 생기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남긴 메모입니다.

“똑똑하고 여유로워서 평신도교회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을 향한 몸부림이다.” 사람은 똑똑하고 여유가 있으면 더 안일해지는 것이 관성입니다. 이분들은 그 관성과 본성을 거스르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살고 있는 이유는 이 시대에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온전한 제자로 살고자 하는 몸부림 때문이었습니다. 평신도 교회운동은 똑똑해서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신앙이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신앙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키우고 양육해야하는지? 아이들에게 어떤 엄마 아빠 삼촌이모로 비춰져야 하는지? 하나님나라 복음의 가치와 정신을 살아내기 위해서 어떤 공동체를 이루고 세워야 하는지? 를 고민하고 씨름하고 싸워온 삶의 흔적이 이분들을 평신도 교회운동으로 이끌었구나 하는 깨달음의 시간이었습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있는 신앙인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고싶다는 이렇게 살고 싶다라는 열망과 열정이 여기 이자리로 이끌어 왔다고 생각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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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물을 새롭게 하는 것은 어쩌면 이 살아있는 신앙, 깨어있는 믿음, 몸부림치는 삶일 것입

니다. 그리고 그 일은 특정 인물, 목사, 목자만의 일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막달라 사람 마리아를 사도들의 사도로 보내셨던 것처럼, 요한이 막달라 사람 마리아의 눈과 귀와 경험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것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살아 있는 증거를 가진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그 일을 하실 것입니다.


가정교회 모임을 풍성하게 하고 새롭게 하는 것은 살아있는 신앙이 만나고 확장될 때입니다. 주님의 그 증언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맑은물이 전체로 모일 때 왠지 모를 어색함과 허전함이 남습니다. 먼거리 1시간 1:30여분을 달려와서 2시간 30여분 남짓 머물다 돌아갑니다. 시간과 장소의 어려움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근원적인 질문! 우리 안에 하나님 경험이 일어나고 있나? 우리가 예배하고자하는 열정과 마음과 태도가 있나? 우리 안에 성도의 교제가 일어나고 있나? 나를 넘어서서 서로를 살피고 돌보고 아끼려는 사랑의 태도와 마음과 삶이 있나?를 먼저 물어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안도현 시인의 연탄재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우리 마음에 다시 금 질문해봅시다.

나의 신앙은 살아있나?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고 있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첫 증인으로 보냄받은 막달라 사람 마리아처럼 부활절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살아 있는 신앙으로 서로에게 세상 가운데 보냄받은 저와 여러분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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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즘이면 반복되는 동사를 다 찾으셨겠지요?

네! 본다라는 동사입니다. 7번정도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보는 것이 점점 상승 확장됩니다.

점점 뚜렸해집니다.

각절의 본다라는 동사의 흐름과 그것을 보는 마리아, 요한과 베드로의 마음을 살피면서 살펴봅니다.

1절 빈무덤// 마리아는 얼마나 당황스럽고 슬펐을까요? 마리아는 반복해서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11절에 서서 울고 있다고 하는데 마리아는 울음이 멈추질 않습니다.

마리아의 이야기를 듣고 무덤을 향해 달려가는 요한과 베드로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당혹감과 의문과 두려움의 얼굴이 그림에서 나타납니다.

5절 요한이 본 무덤 안 삼베

6절 베드로가 본 모덤 안 삼베와 개켜진 머리를 싸맸던 수건

8절 보고 믿었다. / 시신은 없는데 시신을 감쌌던 천이 남겨져 있다? 왜? 무슨일?

11절 마리아가 본 무덤 속 두천사/ 계속 우는 마리아, 누가 가져갔나?

14절 마리아가 본 동산지기 같은 부활하신 예수님/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은 이전의 모습과 다르다.

16-17절 본다라는 동사가 나타나지는 않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는 마리아/ 만지지 말라시는 예수님 왜? 누가 옮겨놓았다 어디 두었다, 그를 모셔 가겠다 VS. 손대지 마라.

18절 주님을 보았다는 증인으로 보냄을 받은 마리아/ 내 형제들에게 보냄받는 마리아. 17절의 의미. 내 형제들. 나의 아버지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

보는 것은 빈무덤에서 삼베로 삼베에서 천사로 천사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변해갑니다.

등장인물의 마음도 슬픔과 두려움 당혹감에서 의문과 기쁨과 확신으로 바뀌어 갑니다.

신앙은 시간이 가면서 보는 것이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요? 마리아는 빈무덤에서 주님의 몸을 감쌌던 천으로 그리고 천사와 부활하신 주님을 보는 것으로 바뀝니다. 사도바울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눈이 멀었다가 비늘이 벗겨지며 눈이 열렸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점점 보는 것이 바뀌는 것이지 않을까요? 지금 여기에 함께 하시는 주님의 임재를 잘 느끼지 못하다가 우리의 감각과 깨달음이 열리면서 지금 여기에 임재해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분의 존재가 언제나 내 곁에 계심을 믿고 바라보고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도 주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는 신비를 경험해가는 과정이 신앙의 삶일 것입니다.

마리아는 동산지기로 착각했던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감각하게 됩니다. 눈으로 보았다기 보다는 마리아의 전존재로 감각하는 예수님일 것입니다. 내 곁에 내 속에 내 주위에 어디나 계시다는 사실을 감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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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상과 신앙 사이에서 간극을 경험합니다.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일과 삶의 무게는 우리로 하여금 부활하신 주님을 빼앗기는 경험을 하게 합니다. 누가 내 주님을 가져갔다고

생각합니다. 기도의 출발을 무력감이라고 하듯이 주님의 부재를 붙들고 들어가면 우리 안에, 우리 위에, 우리 아래에, 우리 좌우 옆에 함께하시는 주님을 감각하게 될 것입니다. 단번에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보는 것이 점점 선명해지고 뚜렸해지는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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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에 개봉한 아바타 영화의 명대사 중에 하나는 I SEE YOU. 나는 당신을 봅니다.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눈의 감각으로 사물을 보는 감각이 아니라 영혼의 본질을 꿰뚫는 존재를 보는 감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인공 제이크는 나비족 아바타를 하고 나비족 네이티리의 인도를 받아 나비족의 삶의 방식을 배워갑니다. 나비족과 함께 먹고, 마시고, 대화하고, 사냥하고, 교감하며 재사회화의 과정을 거칩니다. 그러면서 나비족을 향한 봄이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공존과 사랑의 대상으로 바뀝니다. 나는 당신을 봅니다라는 대사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 중 백미는 인간 제이크(아바타 제이크가 아니라)를 네이티리가 만나면서 서로 “I SEE YOU”하며 서로의 겉모습이 아니라 중심의 본질을 서로 봄을 그렇게 감각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일상의 영성은 이렇게 나는 당신을 봅니다를 알아가는 과정일 것입니다. 빈무덤이, 몸을 둘러쌌던 천들이, 천사가, 동산지기 같이 보이다가 주님이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르며 이미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을 전존재로 감각하며 보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니 빈무덤일지라도 그 빈무덤으로 달려갑시다. 상실의 자리, 무력하고 공허함을 느끼는 그 자리가 주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 여기 계시다는 것을 믿으며 우리 존재와 삶에 이미 함께하고 계시는 주님을 감각하며 보게되는 자리까지 천천히 조금씩 알아갑시다.

우리 각자에게 일상의 삶의 자리에서 나는 당신을 봅니다. I SEE YOU하는 고백과 삶이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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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찬양을 하며 오늘 예배를 통해 말씀을 통해 찾아오신 주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엎드려 비는 말 들으소서

내 진정 소원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이전엔 세상 낙 기뻤어도

지금 내 기쁨은 오직 예수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이 세상 떠날 때 찬양하고

숨질 때 하는 말 이것일세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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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축복하고 예배를 마치겠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우리 앞에 계셔서

우리를 늘 좁고 바른 길로 이끄소서

부활하신 그리스도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 손을 붙드시고 용기를 주소서

부활하신 그리스도 우리 아래에 계셔서

우리가 넘어질때 받으시며 희망 잃지 않게 하소서

부활하신 그리스도 우리 위에 계셔서

우리 일상의 모든 순간을 거룩하게 하소서

부활하신 그리스도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성삼위 하나님,

항상 우리와 함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