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3

본문

Celeb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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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 아이들에게는 처음 듣는 이야기겠죠?
한 날 우리 아이가 이야기 하더라구요. 
“다 아는 것처럼 가정하고 성경 이야기의 한 본문을 가져와서 이야기하면 이해가 되겠냐고?”
설교시간에 무슨말하는지도 모르겠고 앉아 있는게 참 힘들다고요.

이미 여러번 들어서 알고 있는 사람과 처음 이야기를 접하는 사람의 간극
이미 여러번 들어서 식상?할 수 있는 지점과 처음 접해서 생소한 지점의 간극
그 사이에서 설교를 한다는 것이 참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여러번 들은 사람도 그리고 처음 듣는 사람도 한 이야기에 같이 동참하고 그 이야기 안에서 각자의 의미들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설교가 일방적인 전달이 아니라 함께 참여하고 나누는 시간이 될까요? 
우리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설교준비 시간은 참 막막한 시간이고 더 어려운 시간이 되었습니다. 

말주변도 없고, 설명하는걸 어려워하고, 묵상 스타일이 추상적이고 의미지향적이라 참 쉽지 않네요. 

그래서 말인데요.
성서일과 본문을 여러번 읽고 와주세요. 바쁘면 복음서의 말씀을 여러번 반복해서 읽어주세요. 가능하다면 질문을 댓글로 달아주세요. 주일에 읽혀진 말씀과 설교로는 휘발성이 너무 강하잖아요. 일주일의 흐름에 이야기가 우리 마음에 남겨지면 좋겠습니다. 수요일에 올라오는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설교에서 들려지는 이야기가 그 읽고 묵상한 것에 더해지고, 월화에 한두번 더 읽고 묵상함으로 성경의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에 존재에 남겨지고 새겨지길 바랍니다. 그래서 성경의 이야기가 우리의 인격을 형성하고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길 바래봅니다.

여기까지 설교준비에 어려움을 겪는저의 푸념이었습니다.^^

오늘은 약간 실험적인데요. 성경공부하듯이 본문의 이야기를 가지고 서로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조금 더 본문의 이야기에 우리가 집중해 보면 좋겠습니다. 처음 듣는 사람이든, 여러번 보았던 사람이든 본문의 이야기에 우리의 눈과 귀를 집중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가지 질문들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진행을 해보구요. 그리고 중간에 혹시 여러분 중에 질문이 생기거나 의견이 있다면 같이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을 해봅시다. 

질문들.

1. 관찰 (Observation): 본문에서 무엇을 보았나요?

목표: 본문의 세부사항, 인물, 사건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주요 인물은 누구이고, 어디서 일어났나요? (힌트: 21:1-2, 디베랴 바다)
제자들이 밤새 무엇을 했고, 예수님의 지시 후 어떤 일이 일어났나요? (21:3, 6)
베드로가 “주님이시다”를 듣고 무엇을 했으며, 예수님은 해변에서 무엇을 준비하셨나요? (21:7, 9)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며 무엇을 물으셨고, 어떤 명령을 주셨나요? (21:15-17)



2. 해석 (Interpretation): 본문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목표: 본문의 신학적 메시지와 맥락을 탐구합니다.

베드로가 고기 잡으러 간 이유는 무엇일까요? (21:3, 힌트: 요한복음 18:15-27의 부인 사건)
예수님께서 숯불을 피우시고 아침을 준비하신 행동(21:9)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힌트: 요한복음 18:18의 숯불)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자의 “시몬 베드로”나 “베드로”와 어떻게 다른가요? (21:15-17)
예수님께서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고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21:15-17)



3. 적용 (Application): 본문을 내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나요?

목표: 본문의 메시지를 삶에 연결하고 실천 계획을 세웁니다.

베드로처럼 사랑하려다 실패하거나 실망했던 경험이 있나요? 예수님의 은혜를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식탁(21:12-13)은 사랑과 용서를 상징합니다. 내가 누군가와 관계를 회복하거나 공동체에서 사랑을 실천하려면 무엇을 할 수 있나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신 사명은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예: 이웃 돕기, 섬김)
“나를 따르라” (21:19)는 예수님의 부르심입니다. 이번 주,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구체적인 한 가지는 무엇인가요?


들어가며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실패하고 배반한 제자 베드로를 다시 일어키시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하노라 장담했던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히시고 법정에서 심문 받으실 때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 앞에서 세번이나 “나는 예수님을 모른다”라고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넘어지고 깨어졌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났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 여전히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따르고 싶지만 과거의 실패와 배신이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한 뒤 다시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에는 마음의 짐이 너무나 큽니다. 부활 후 예수님의 세번째 나타나심(14절)은 이런 베드로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그를 다시 교회의 리더로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비단 베드로뿐 아니라 실패한 제자공동체 전체를 회복시키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흔들리고 실패하는 우리를 위한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며 살아가려다 넘어지는 우리 모두를 향한 예수님의 찾아오심! 그분의 아침 밥상 이야기입니다. 

마주보고 보듬어가기

본문에는 실패한 베드로가 과거의 상처와 트라우마, 그리고 실패를 마주보게 하는 두가지 장치가 등장합니다. 혹시 눈치채셨나요? 한가지는 우리가 잘 아는 세번의 물음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세번의 물음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나는 모르오! 나는 모른단 말이오! 예수가 누구요? 난 모르오!” 그 순간 한없이 무너진 자신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의 세번의 질문은 베드로의 세번의 부인을 마주보게 하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17절에 세번이나 물으시므로, 불안해합니다. 마음에 깊은 파장을 일으킵니다.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순간, 그 장면, 그 말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또 한가지는 무엇입니까? 베드로가 세번 부인했던 장소에 있었던 무엇입니다. 대제사장의 문 앞 뜰에서 피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네 숯불입니다. 불멍입니다. 베드로에게 불멍은 과거의 자신의 실패와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하는 트리거 입니다. 그 때 그 장소, 그 사람들, 그 당시의 온도와 분위기를 생각나게 하는 트리거입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감추고 싶은 자신만의 아픈 기억과 상처가 있습니다. 아프고 괴롭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레 감추고 내면 깊은 곳에 숨겨두고 삽니다. 그리고 그 아픈 기억과 상처는 우리의 성장을 가로막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덮어두면, 끄집어 내지 않으면 아무런 일이 없겠지 하며 억눌러 두지만 그 상처를 건드리는 말이나 이미지나 행동을 만나면 트리거가 되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과거의 상처나 트라우마는 감추고 덮어두고 억누를 것이 아니라 마주보고 보듬어야 합니다. 그래야 과거의 상처와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성장과 성숙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과거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마주보게 하심으로 그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그가 깨어지고 부서진 존재임을 마주보게 하시고, 그것을 보듬어 가게 하십니다. 실패하고 깨어지고 연약한 것이 자신의 존재됨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김창옥쇼를 다들 한번씩은 보셨겠지요? 과거의 상처와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김창옥씨가 보여주는 처방은 무엇입니까? 과거의 상처입고 아프고 어려웠던 나를 마주보게 하고 보듬어가게 합니다. 그리고 그 상처입은 나에게 지금의 나가 괜찮다고 수고했다고 말을 건네게 합니다.

내 안에 감추고 싶고 모른 척 덮어두고 억누르고 있는 아픔과 상처와 트라우마가 있습니까? 과거의 상처와 트라우마는 감추고 덮어두고 억누른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어두운 가운데 두면 더 어려워질 뿐입니다. 빛 가운데 나타나야 합니다. 마주보고 보듬어가고 수용해 갈 때 과거의 상처와 트라우마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제자들 특별히 베드로를 세번째 찾아오신 예수님은 베드로가 그 실패를 마주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이 부서지기 쉽고 깨어지기 쉬운 존재임을 받아들이고 보듬어가게 하십니다. 부끄럽고 괴로운 과거이지만 마주보고 보듬어가는 과정을 통해 더 아름답고 성숙한 존재로 자라가게 하십니다. 상처가 부족함이 아닌 더 아름다워지는 과정이 됩니다.

킨츠키 공예가 있습니다. 깨진 도자기를 옻칠과 금속 공예를 통해 새롭게 하는 기법입니다. 낡고 부서지고 깨어진 것을 끌어안아 아름다움으로 승화하는 방법입니다.

과거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마주보고 보듬어가는 과정은 킨츠키 공예처럼 과거의 부끄러움과 아픔을 끌어안아 더 아름답고 성숙한 과정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 과정에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실패를 아시는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주님을 신뢰함으로 과거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마주보고 보듬어감으로 더 아름답고 성숙한 자리로 나아가는 맑은물이길 바랍니다. 

첫 사랑

예수님을 처음 만난 기억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분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을 때가 고기잡을 때였습니다. 그 날도 밤새 고기 잡이를 나갔다가 한 마리도 못잡았습니다. 낙심한 마음에 축 쳐진 어깨로 그물을 정리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다가와 베드로의 배에 오르시고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반강제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지요. 그리고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이 깊은데로 나아가 그물을 던져보라는 말에, 마지못해 말씀에 따라 그물을 던졌을 때 그물이 찢길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순간 베드로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주소서!”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는 이날 이 사건을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찾아와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는 말씀과 함께 나를 따르라고 했던 그 날은 잊을 수 없는 날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 사건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묘한 분위기가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 날 밤에는 고기를 한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3절
이미 동이 틀무렵이 되었다. 4절
밤새 한마리도 못잡았습니다. 
이모든 상황을 아시는 듯 예수님은 “애들아~, 무얼 좀 잡았니?”라고 묻습니다. 
제자들은 아니요! 못 잡았습니다라고 답이 돌아옵니다. 
예수님은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보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손에 묵직하게 당겨집니다. 끌어 올릴 수 없을 지경이 됩니다. 
그 순간 요한이 “저분은 주님이시다”라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곁에 있었던 요한이 이 장면에서 처음 예수님을 만났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똑 같은 경험을 통해 바닷가에 서서 말을 걸어오신 분이 예수님이셨던 것을 알아차립니다. 
주님이시다는 말에 베드로는 겉옷을 다시 입고 바다로 뛰어듭니다. 약 100여미터를 헤엄쳐서 예수님에게로 달려갑니다. 실패하고 깨어진 베드로지만 여전히 예수님을 향한 마음과 열정이 있음을 그의 행동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깨어진 베드로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의 연출이 참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첫만남을 떠올리게 하는 사건을 통해 베드로를 찾아오십니다. 베드로는 “주님이시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헤엄치며 예수님 앞에 설 때까지 처음 예수님을 만날 때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을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처음 엎드렸을 때, 그분의 이야기와 기적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경험했을 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자신의 발을 닦으시며 하셔던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를 위해 살겠다고 다짐하고 살아왔던 모든 일들이 스쳐지나갔을 것입니다.

지금 이순간 그의 실패의 기억과 경험보다 자신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헌신했던 기억과 경험이 더 크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자신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가 자신의 실패와 깨어짐의 한계보다 더 크고 넓다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부끄럽고 감추고싶고 뒤로 숨고 싶은 마음보다 주님을 향해 달려가고 싶고 주님 앞에 서고 싶은 마음이 더 크게 일어났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기잡으로 가고싶었던 것이 아니라 다시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 앞에 서고 싶은 마음이 더 컸습니다.

오늘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첫사랑을 회복시키시는 장면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며 깨어졌지만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습니다. 고기 잡는 기적은 단순한 이야기의 반복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처음 사랑, 처음 부르심을 생각나게 하는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맑은물 가족 여러분! 우리도 베드로 처럼 실패하고 깨어집니다. 그 실패와 깨어짐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부끄럽고, 사람들 앞에 서기가 괴롭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실패의 자리 깨어짐의 자리에 찾아오십니다. 베드로의 디베랴처럼 우리의 디베랴로 찾아오십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나게 하시고, 다시금 주님의 은혜에 기대어, 주님의 사랑을 따라 살고싶은 마음과 열정을 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주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봅시다. 한없이 주님을 위해 살고싶고, 내 젊음과 인생을 걸고 주님을 따르고 싶었던 때를 떠올려봅시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큰지 다시 생각해봅시다. 우리의 실패와 깨어짐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큽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나를 숨쉬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다시 일어서게 합니다. 실패의 자리 깨어짐의 자리에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고 떠올리며 다시 회복의 자리로 나아가는 우리이길 바랍니다. 

밥먹자

할머니에게 혼이 난 다음 날에도 아침밥은 차려져 있었습니다. 아침 밥상 앞에서 할머니는 지난밤에 대해 긴 말씀을 하지 않으셨고, 저도 어떤 변명을 늘어놓지 않았습니다. 그저 조금은 어색한 기류와 함께 밥을 먹었죠. 밥을 먹으며 괜히 어제도 밥상 위에 오르고, 그제도 올랐던 콩나물 반찬을 짚으며 "맛있네" 이런 말을 했던 것도 같습니다. 이게 저와 할머니의 대화 방식이었어요.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어제 한 잘못은 잘못이고, 오늘의 밥은 밥이라는 사실을, 내가 어떤 잘못을 한다 한들 이 식탁에서 쫓겨날 일은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알고 있었다는 말과 믿고 있었다는 말 사이에서 무엇이 더 정확한 문장인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아침 밥상이 계속되었다는 것이고, 또 그 계속되는 아침 밥상의 밥으로 제가 자랐다는 것입니다.

청어람 세속성자 이번주. 성서일과 묵상나눔의 한 구절입니다. 
이 식탁에서 쫓겨날 일은 없다는 사실말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아침 밥상이 계속되었다는 것이고, 또 그 계속되는 아침 밥상의 밥으로 제가 자랐다는 것입니다. 
라는 문장이 인상 깊습니다. 
예수님은 밥새 고생한 제자들을 위해 아침 밥상을 차리십니다. 그리고 그 밥상에 제자들이 잡은 고기도 더 하십니다. 베드로의 실패의 트리거인 숯불 위에 예수님의 밥상이 더해집니다. 베드로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받아들임과 용서와 사랑이 이어집니다. 베드로는 숯불위에 차려진 밥상안에서 예수님의 한없는 용서와 사랑과 받아들여짐을 경험합니다. 베드로뿐 아니라 함께 했던 모든 제자들의 공동체가 경험합니다.

이 예수님이 차려주신 밥상은 제자들이에게 이런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너희들이 한 번도 내 식구가 아닌적이 없다. 비록 너희가 나를 떠나고 배반했을 지라도 여전히 내 식구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이 아침밥상에서 예수님께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용서받고 있고 받아들여지고 있고 사랑받고 있고 존중받고 아낌을 받고 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위의 인용했던 성서일과 묵상의 나눔처럼 베드로도 ‘이 밥상은 내가 잘해서 받는 상도, 못해서 받는 벌도 아니구나! 이 밥상은 영원히 계속 되겠구나!’하며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차려주신 아침 밥상을 통해 밥상의 은혜를 베드로는 깨달았을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숯불은 더이상 과거의 상처와 실패와 트라우마의 트리거가 되지 않습니다. 영원히 계속되는 예수님의 밥상을 통해 이제 실패와 상처와 트라우마의 트리거가 아니라 회복과 치유와 성장의 상징이 될 것입니다. 숯불하면 세번의 배반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이제 숯불하면 그럼에도불구하고 식구로 받아들여지는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가 더 크게 다가올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킨츠키 공예처럼 숯불은 깨어지고 상처난 흔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복과 치유의 상징이 됩니다.

주님의 밥상이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과거 주일 예배후에 함께 먹는 밥상공동체가 참 그립습니다. 
예배 후 간식시간… 어쩌면 주님의 밥상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즐겁게 동참합시다. 
가정교회에서 식사-매번 밥먹는 것이 숙제가 되겠지만 함께 밥먹는 일을 통해 이 일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매달 반복되는 성찬을 통해 우리는 실패와 깨어짐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몸으로 경험합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의 몸을 입으신 주님이 성찬을 통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있고 영원히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우리는 용서받고 있고 영원히 용서받을 것입니다. 우리의 실패와 아픔과 죄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밥상은 여전히 계속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온전케 하십니다. 사람이 깨어진 도자기를 킨츠키 공예로 더 아름답게 만들었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빚으시면 킨츠키 공예보다 더 아릅답지 않겠습니까? 과거의 상처와 실패와 깨어짐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때문에 더 아름답고 온전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들이 아침을 먹은 뒤에(15절) 예수님은 베드로를 따로 불러 원투원하십니다. 역시 중요한 일은 밥먹고 해야됩니다.^^ 
예수님은 세번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베드로의 마음을 파고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야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너도 나를 사랑하지? 우리의 관계가 끝난 것은 아니지? 물으십니다. 반복되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자신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더 깊이 성찰하고 반추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베드로를 예수님을 부인했던 그 날 밤으로 데려갑니다. 뿐만 아니라 두려움에 감추어졌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여전히 타오르고 있음을 보게 합니다.

과거 자신 만만하게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고 사랑하겠다던 그 맹세와 의지가 다 꺽인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답합니다. 나의 의지와 맹세는 너무 약합니다. 깨어지기 쉽습니다. 나의 의지, 맹세, 신실함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에 기대어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깨어짐을 아는 고백입니다. 이전의 고백은 자신의 강한 의지에 기대어 표현했다면 지금의 고백은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기대어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베드로를 향해 예수님이 부르는 호칭이 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예수님은 베드로의 원래의 이름 시몬으로 호칭하십니다. 누구누구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당시 서로간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냅니다. 서로 아끼고 애정할 때 부르는 호칭입니다. 애정어린 눈빛과 어조로 시몬아 그의 본래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세번 다 그렇게 부르십니다. 예수님이 지어주신 반석이라는 베드로라는 이름 대신 인간적이고 깨어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 시몬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다 아십니다. 그럴 수 밖에 없었음을 이해하십니다. 
요한복음의 재미있는 지점은 이 사실을 아는 요한이 반복해서 ‘시몬 베드로’라는 호칭을 쓰고 있다는 겁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주로 ‘시몬’과 ‘베드로’를 따로 쓰고 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시몬 베드로’라는 표현을 자주 쓰고 있습니다. 깨어지기 쉬운 반석이라는 것이지요. 베드로는 반석인데 깨어지기 쉬운 반석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더 기댈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호칭 / 목사박주현. 인간 박주현으로 존재하기.

사랑의 물음과 대답이 오가고 주님은 내 양을 먹이라 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앞에서 이어졌던 예수님의 차려주신 아침 밥상과 이어지는 듯 합니다. 내가 너에게 무한한 받아들임과 용서와 사랑의 밥상을 차려주었듯이 너도 나를 따라 다른 이들에게 밥상을 차리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주님께 받은 용서와 사랑을 혼자만 누릴 것이 아니라 그 용서와 사랑을 함께 나누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영원한 밥상을 내어 주었듯이, 너도 나를 따라 나의 밥상에 홀로 앉을 것이 아니라 다른이들과 함께 둘러 앉아 이 밥을 먹고 나누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치유되고 회복된 베드로는 보냄을 받습니다. 주님의 식탁을 베풀고 나누라는 보냄을 받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시던 예수님의 부름이 우리에게도 드립니다. 
…야. 주현아! 지영아! 두수야! 서현아! 옥숙아!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아시고 부르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물음은 우리에게도 반복해서 들려옵니다. 
과거 말고, 지금. 너의 마음은 어떠하냐? 우리의 관계는 지속적이냐?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십니다. 
우리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주님 잠깐만요… 이것만하고요… 가 되어서는 아니되겠지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아는 사람은 보냄을. 받습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나누라는 보냄입니다. 오늘 내 주변에 그 사랑을 나눌 사람은 누구 입니까? 어떤 사랑으로 다가가야 할까요?

나가며

 오늘 우리는 베드로의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그는 실패했지만, 예수님은 그를 찾아오셔서 숯불 위에 아침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는 배신했지만, 예수님은 그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시며 사랑을 물으셨습니다. 그는 연약했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내 양을 먹이라”며 보내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이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려다 실패하고, 넘어지고, 상처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는 우리의 숯불, 우리의 트라우마를 아시고, 그 위에 은혜의 식탁을 차리십니다. 그는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품으십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보내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사랑하며 따르라.”

예수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울려 퍼집니다. “애들아, 밥은 먹었니? 사랑하느냐? 나를 따르라.” 이 부르심에 응답하며, 사랑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를 찾아오셔서 은혜의 식탁으로 초대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실패를 아시고, 우리를 “시몬”처럼 부르시는 예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사랑과 사명의 길로 이끄시는 은혜를 찬양합니다. 이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게 하시고, 교회가 예수님의 식탁처럼 약한 자를 품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