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어선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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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ration

사랑은 어렵다!
좀 오래된 곡인데 이길승님의 1집, 4집, remastered 에 수록된 ‘철수엄마’라는 곡을 듣고 말씀나눔을 시작하겠습니다.
철수의 엄마는 듣지못하고 말도하지 못하는 해녀랍니다 그렇게 어렵게 오형제를 키운 엄마를 철수는 사랑합니다 수화도 못하는 엄마이기에 온몸과 숨소리로 말했답니다 어느날 철수는 책방에 들러 한글공부 그림책 사가지고는 글씨와 그림을 보여드리며 신나게 하나둘 가르쳤는데 철수가 엄마에게 하고싶던말 사랑이란 단어위에 덜렁그려진 하트모양 그것을 설명하려다 너무너무 어려워 울었습니다 너무너무 속상해 울었습니다..
"너무너무 어려워 울었습니다. 너무너무 속상해 울었습니다..."
사랑을 말하기 어려웠던 철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과 얼마나 닮아있습니까?
사랑은 참 어렵습니다. 아무도 사랑이 쉽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족을, 친구를, 이웃을 사랑하고 싶지만... 현실에서는 사랑하려다 상처받고, 사랑의 무게에 지쳐 마음이 상합니다. 주는 자리에서 알아주지 못할 때, 사랑의 언어가 다를 때... 받는 자리에서 받는 것이 익숙하지 않을 때, 상대방의 진정성을 알아차리기까지 시간이 필요할 때... 사랑은 우리의 한계와 경계를 허물고 넘어서야 하기에 어렵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어렵다고 포기하고 적당한 수준에 머물 수 있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랑은 우리 존재의 근원적인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옛 찬양의 노랫말처럼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그리고 그 사랑 전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분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의 존재와 삶 또한 사랑으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보여주신 사랑의 절정을 담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배신하고 떠난 그 어두운 순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 13:34). 이 말씀은 단순한 윤리적 지침이 아닙니다. 이는 그 어렵고 고약한 사랑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말고 이어가라는 초대입니다. 포기하지 말라고, 적당함에 머물지 말라고 예수님의 자리까지 나아오라는 초대요 명령이요 부탁입니다. 예수님은 제자공동체를 떠나시면서 유언처럼 명령하고 부탁하고 초대하신 것은 우리의 경계를 허물고 한계를 넘어서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주셨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충분한 사랑과 애정을 받고 구김없이 자란 아이들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에 큰 어려움을 겪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성인 아이'들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낮은 자존감으로 쉽게 상처받고, 자신도 모르게 형성된 방어기제가 관계에서 작동합니다.
여기서도 '부익부 빈익빈'이 존재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이 내면의 자라지 못한 아이도 보듬고 다독이고 품어가면, 점차 사랑하고 사랑받는 삶이 자연스러운 존재로 자라납니다. 결핍과 한계가 오히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를 경험하는 도구가 됩니다.
하지만 이 성인 아이도, 내면에서 자라지 못한 아이도 보듬고 다독이고 품어가면 점차 사랑하고 사랑받는 삶이 자연스러운 존재로 자라게 됩니다. 결핍과 한계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를 경험하는 도구가 됩니다. 깨어진 틈 사이로 빛이 뚫고 들어오듯 깨어진 삶의 자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는 통로가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내가 참 귀한 존재라는 것을 발견하고, 예수님께서 나의 부족함과 상처와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경험할 때 점점 나다운 존재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이 자연스러운 삶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요한복음 13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보여주신 사랑의 절정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 직전,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요 13:1-17). 당시 발을 씻는 것은 하인의 일이었습니다. 종들의 일이었습니다. 어느 선생도 그와 같은 파격적인 섬김과헌신과 사랑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먼지와 땀으로 더러워진 발을 씻는 일은 누구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허리를 굽히시고 제자들의 발을 하나하나 씻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한계와 경계를 넘어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심지어 배신할 가룟 유다의 발까지 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사랑은 경계가 없고, 한계가 없었습니다. 31절에 “유다가 나간뒤에”라는 구절이 참 인상깊게 남습니다. 유다는 나가서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은30에 예수님을 팔아넘깁니다. 그 상황에서 예수님은 다 아시면서도 유다의 발을 씻기시고, 유다의 배반을 허용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유다까지도 아끼고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31절과 32절에 영광이라는 단어가 네번 반복됩니다.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 [하나님께서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께서도 몸소 인자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렇게 하실 것이다.” 여기서 영광은 십자가를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는 것이 ‘영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이야기하는 영광은 바로 십자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유다가 나간 뒤… 배신의 그 순간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영광의 순간이고 십자가를 지는 그 일이 영광의 받는 일이었습니다. 기독교의 역설이지요. 십자가가 영광이 됩니다. 왜요? 어떻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일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라고 증거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한계와 경계를 넘어서 사랑하기 어려워하는 우리들에게 두가지 이미지를 보여주십니다. 한가지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그림이고, 다른 한가지는 십자가의 그림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듯이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상처를 싸매고 치유하시는 분이십니다. 십자가는 진정한 사랑이 어떻게 한계와 경계를 허물고 보여진 증거입니다.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사랑하기 아픕니다. 사랑하기 버겁고 두렵고 화나기도 합니다. 내 안에 그어둔 경계와 한계가 사랑을 나아가는데 어렵게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안에 머뭅시다. 주님이 나를 이끄시도록 내어드립시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묵상해봅시다. 하나님이 또한 저를(이웃을, 타자를, 사랑하기 어려운 상대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떠올려봅시다. 주님이 보여주신 사랑이 우리를 그 사랑의 자리로 나아가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드립시다. 요한일서 4:10-11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한계와 경계를 넘어선 사랑은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게 아닙니다. 사랑은 한계와 경계를 넘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에 머물 때 우리의 한계와 경계를 넘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어렵지요? 그런데 그 어려운걸 내 힘으로 할려고하니 더더욱 어려워집니다. 사랑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갑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사랑의 자리로 이끌도록 내어드립시다.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과 십자가 앞에 우리를 두고 그 사랑 안에 거하십시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있습니다. 이제 조금만 지나면 제자들은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예수님 없이 살아가게 될 제자들의 공동체에 주시는 마지막 명령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예수님이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 명령입니다. 유언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재를 경험할 제자공동체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명령은 “복음을 전파하라”라거나 “하나님나라를 이루어라”가 아니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말과 행실을 따라는 사는 것이겠지요! 예수님으로 가득찬 존재, 예수님으로 드러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듯이, 서로의 부족하고, 모나고, 상처입고, 부끄러운 것을 감싸고 감당하고 품는 것일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부터 십자가를 지셨듯이, 사랑받을 만하기 때문에, 내 맘에 들고, 내 기준에 적합하기 때문에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십자가를 통과한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일 것입니다. 하나이면서 셋이요, 셋이면서 하나라는 불가사의한 존재방식은 사랑이 아니면 결코 이애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가 제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는 삶을 통해 드러나고 나타나기를 예수님은 바라셨습니다.
자신이 그어놓은 경계와 한계를 넘어서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사랑의 삶을 제자 공동체가 살아내길 예수님은 원하셨습니다. 서로의 발을 씻기고, 서로의 십자가를 짐으로 사랑 가운데 살아내길 예수님은 바라셨습니다. 제자 공동체의 사랑의 기준은 예수님 처럼입니다. 내가 만든 기준이 아니라 예수님처럼이 그 기준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명령하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따라 살때, 우리 안에 사랑없음을 발견합니다. 내 안에 사랑이 굽어져 있는 것을 깨닫습니다. 서로를 향해, 너를 향해, 타자를 향해 나타나야할 사랑이 나를 향해,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나의 기분과 나의 만족을 위해 굽어져 있음을 발견합니다. 나의 힘과 나의 의지와 나의 능력으로는 사랑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적인 면으로는 도저히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나를 발견합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96년이었을 겁니다. 복학하고 학교에서 리더가 되었습니다. IVF에서 굴러먹은 것도 있고, 주서들은 것도 있고, 읽은 책들도 있어서 ‘뭐 하면 되겠지!’ 생각하고 1학년 리더를 맡았습니다. 제가 있잖아요. INFP에 I/P점수가 극단이거든요. 말이 없기로 유명했습니다. 지금은 많이 인간이 되었습니다. 아직 부족하지만… 하루는 후배랑 강의실에서 동아리 방으로 가는 약 10분 정도 길이었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도 모르고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그냥 말 없이 둘이서 보조만 맞추고 걸었거든요. 근데 후배가 “선배 말좀 해보세요.”하는거에요.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말” 그러자 후배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그뒤로도 말없이 동방까지 보조맞춰서 간 기억이 납니다. 그정도로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몰토크 잘하는 친구들을 보면 참 부러웠고 지금도 부럽습니다. 말없고 무표정으로 살았으니 후배들이 많이 무서워했습니다.
너무 곁길로 샜네요. 아무튼 리더를 하고 후배들에게 무언가 지식적으로는 전달해주겠는데 정작 사랑하려고 하니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더라구요. 저의 말없음과 무표정이 관계에서 얼마나 어려움을 주는지… 그게 상대에게 얼마나 불편을 주는지 점점 크게 와닿았습니다. 당시 금요철야기도회가 있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철야기도회를 갔지요. 하나님 제 안에 사랑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찾고 기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불렀던 찬양이 “항상 진실케”라는 곡이었는데 주는 토기 장이 나는 진흙이라고 부르는데 제가 진흙이 아닌거에요. 하나님이 빚으시기에 진흙이어야 하는데 돌덩이 같아서 하나님 저를 다듬어주세요. 저를 진흙으로 만들어주세요. 주님 빚으시기에 합당하도록 저를 다스려주세요라고 기도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랑하려니 사랑없음을 깨닫습니다. 사랑하려니 그 사랑이 왜곡되고 구부러져있음을 발견합니다. 사랑하려니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가 필요함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하십니다. 내가 그어둔 경계와 내가 정해둔 한계를 넘어서서 사랑하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발씻기시고 십자가를 지셨듯이 서로 그렇게 사랑하라 하십니다. 사랑에 한계를 짓지마라 하십니다.
맑은물 가족이, 가정교회에서 서로 사랑하는 자리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한계와 경계를 넘어서 서로가 서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을 보여주는 관계 안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맑은물은 경계에 있는 공동체라 생각합니다. 어중간한 공동체인거죠. 가정교회와 교회 사이 어딘가에 있습니다. 교회건물이 없기에 타임제로 빌려서 쓰는 어려움과 불편함이 있습니다. 전임사역자의 의존도가 약하면서도 전임사역자의 필요성이 있습니다. 상호돌봄을 지향하면서도 리더의 역할은 존재합니다. 이런 경계와 어중간함이 불안요소와 불편함으로 자리합니다. 전체예배시에 차량. 가정교회 예배시 예배의 질? 지역성은 없지만 또 지역성이 있는, 교회 공간을 구하는 점에서 서로의 필요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막막함 등. 그러기에 더욱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더욱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자기 한계와 경계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랑이라면 우리는 앞으로 이길을 더 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한계와 경계를 넘어선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나타난다면 때론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이길을 함께 걸어가고 그 길 안에서 우리 안에 일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함에 게으르지 맙시다. 서로 사랑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서로 사랑합시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내가먼저 사랑합시다. 각각 나를 돌아볼 뿐더라 각각 서로의 일을 돌아보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공동체의 표지입니다.
아주 오래된 떼제 찬양입니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하는 자리는 사랑할 때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 임재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주저하고 두려워하고 회피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35절에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정체성을 외적인 표지/ 예배, 건물, 의식, 지식, 상징/이 아니라 서로 사랑이라고 정의하십니다. 이 말씀은 놀라운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사랑이 세상 앞에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증거한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은 비로소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로 알아봅니다.
초대교회의 이상을 보여주는 사도행전 2장의 말씀은 서로가 자기 재산을 나누고, 서로를 섬기는 사랑의 공동체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런 예루살렘 공동체에 사람을 더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성서일과의 사도행전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이 유대 공동체를 넘어 이방인 공동체로 확장되고 퍼져나가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사랑은 경계짓고 한계짓지 않고 확장되고 뻗어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세속주의 개인주의 소비주의는 우리를 파편화시키고 고립시킵니다. 모든 것을 홀로 감당하게 하고 두려움을 조장해서 더 한계 안에 경계 안에 가두려합니다. 교육문제, 노후문제, 육아문제 이 모든 것들을 개인이 홀로 감당해야하는 짐으로 부과합니다.
노후문제만 예를 들어봅시다. 안정적으로 살려면… 집을 가지고 있고, 통장에 3-4억은 있어야 노후에 손벌리지 않고 안정적으로 살 수 있다고 합니다. 보험은 따로 또 있겠지요. 하지만 어떤 책의 제목처럼 “혼자만 잘살면 무슨재민겨?”
갈수록 각박해져가는 세상은 경계와 한계를 넘어선 사랑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드라마 폭삭속았수다가 그렇게 대중의 사랑을 받는 것은 자녀를 향해 보여주는 한계없는 경계없는 사랑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은 사랑하는 공동체를 통해서 입니다.
세상은 참사랑을 찾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주는 안전한 공동체 실수와 부족함이 부끄럽지 않은 공동체 그 공동체를 기술사회가 더 발전할 수록, 자본주의가 더 커져갈 수록 사람들은 찾고 있습니다. 맑은물이, 각 가정교회가, 그리고 우리 서로가 사랑이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보여주는 공동체로 나아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