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본문

Celebration

이미지1

오늘은 좀 어려운 질문으로 말씀나눔을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날 때 어떤 말을 남기고 싶은가요? 
어떤 이야기를 어떤 부탁을 하고 싶은가요?
죽음의 문턱에서, 혹은 이별의 순간에, 당신은 사랑하는 가족, 친구, 동료에게 어떤 마음을 전하고 싶으신가요?


약 30년전… 이 책이 1997년에 나왔으니 30년에 조금 모자라네요.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루게릭병이 걸린 은사 모리 슈워츠와 그의 제자 미치 앨봄이 매주 화요일에 만나 대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모리는 루게릭병(ALS)으로 서서히 몸이 마비되며 죽음을 마주하고 있지만, 삶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잃지 않습니다. 미치는 매주 화요일 모리와 만나며 사랑, 용서, 관계, 죽음의 수용, 내면의 평화 같은 주제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눕니다.

죽음을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이며, 어떻게 살아야 의미 있는 삶인지 깨닫게 해줍니다. 이 책은 따뜻하고 감동적인 문체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삶의 교훈을 전하며,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간단히 말해, 죽음 앞에서 발견한 삶의 소중함과 사랑의 힘을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모리는 미치에게 말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망한다.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야.” 
모리는 죽음을 앞두고도 사랑과 관계의 힘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떠나면서 미치의 가슴에 사랑의 씨앗을 심고 싶어 했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14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보내는 마지막 시간에 나누었던 대화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과 불안으로 가득했죠. “예수님이 계속 떠나신다고 하는데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거지?”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고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순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사랑 가운데 거하라”고, 보혜사와 평화를 약속하십니다. 떠남의 순간에 사랑하는 제자들의 마음에 예수님이 남기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과 함께한 마지막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남기셨을까요? 함께 예수님의 이야기에 귀기울여 봅시다. 

1. 사랑 가운데 거하라

예수님은 가롯유다 아닌 다른 유다의 질문에 답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요,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실 것이며,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요 14:23). 
예수님은 사랑 가운데 예수님의 말을 따라 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명령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담긴 초대입니다.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게 아니지요. 사랑은 행동으로, 순종으로 드러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나타나는 반응입니다. 사랑하는 이가 잘됐으면 좋겠고, 그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그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것을 기뻐하는지를 찾아내고 사랑하는 이의 뜻을 행하고 그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여깁니다. 사랑하면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을 지키고 행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나를 사랑한다면, 내 가르침을 삶으로 살아내. 그러면 아버지와 내가 너희와 함께 거할 거야.”


예수님은 왜 순종을 말씀하셨을까요? 순종은 사랑의 자연스러운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것을 그대로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셨기에 십자가의 길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수용과 순종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뜻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그 일에 순종하십니다. 세분이면서 한분이신 한분이시면서 세분인 삼위일체 하나님을 사랑의 연합이라는 신비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은 사랑의 순종이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말을 따라 살아라.” 이건 강제적인 명령이 아니라, 사랑의 관계로 들어오라는 초대입니다. 억지 순종이 아니라 사랑 가운데 순종하라는 초대입니다.

모리 슈워츠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그는 미치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삶의 의미는 사랑이야.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고, 용서하고, 서로를 끌어안아.” 모리는 병상에서도 사랑이 삶의 중심이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도, 모리도, 사랑이 우리를 하나로 묶는 힘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말씀을 지키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그 말씀을 가슴에 품고 그 말씀을 살아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사랑하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입니다. “경계에 갇히지 말고, 한계에 주저 앉지 말고 경계와 한계를 넘어 자기내어줌의 사랑으로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습관이 영성이다라는 책을 쓴 제임스 스미스는 “당신이 사랑하는 것이 당신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내가 진정으로 욕망하는 것, 내가 정말 추구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본질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 안에 하나님 사랑하는(예배하는) 예전을(습관을) 끊임없이 훈련할 것을 도전합니다. 세속의 도전은 자기 욕망을 극대화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예전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안에 머물게 합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떠나시면서 그들에게 사랑 가운데 머물 것을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계시지 않을 때에도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을 통해 사랑 가운데 머물머 자신을 넘어서 사랑을 살아내기를 말씀하십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이 새로워지길 바랍니다.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내 존재와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나타나기를 기대하고 소망하는 마음이 커져가길 바랍니다. 그래서 삼위하나님께서 우리 존재와 삶에 함께 거하시는 삶의 증거나 나타나길 바랍니다. 

2. 떠남을 큰 그림에서 보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떠나간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다시 너희에게 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내 아버지는 나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이다” (요 14:2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떠남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제자들은 당장 예수님의 떠남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이해할 수 없었고, 혼란스럽고 불안했을 것입니다. 
“떠나신다고? 스승님이 왜? 어디로? 떠나셔야 해?” 
“이제 막 무언가 혁명적인 일이 일어날 것 같은데! 도대체 예수님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거야?”
하지만 예수님은 이해하지 못하고, 혼란스럽고, 두려운 제자들에게 더 큰 그림을 보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떠남은 끝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정점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는 나보다 크신 분이야.” 
이건 예수님의 겸손한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그의 떠남은 하나님의 더 큰 계획—세상의 구원, 부활, 다시 오심—을 위한 발걸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셨고, 자신의 뜻보다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를 원했습니다. “내 아버지는 나보다 크신 분이야”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아버지를 온전히 신뢰하고 아버지의 크신 계획 안에 자신이 있음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고 역설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부재는 슬픔과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랑 가운데 하나님의 아버지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으로 반응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떠남과 부재가 무엇을 위함인지, 왜 때문인지를 깨닫습니다. 
“내 아버지는 나보다 크신 분이야”는 예수님의 고백을 통해 크신 하나님의 큰 구원의 이야기 안에 이루어질 일들을 소망하게 합니다. 
십자가는 수치와 고통이지만 십자가는 영광과 치유와 회복입니다. 부재와 떠남은 슬픔과 두려움이지만 보혜사 성령으로 평화 가운데 함께 하시는 임재의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는 순간, 우리는 슬픔에 빠지기 쉽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장례식에서 우리는 눈물을 흘리지만, 동시에 부활의 소망중에 기쁨이 깃들어 있습니다.


기독교 안에 역설이 가득합니다. 우리 삶에도 역설이 있습니다. 때로는 실패한 것 같고, 때로는 앞이 보이지 않는 깜깜함 속에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할지 막막한 순간이 있습니다. 혼자서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할 것 같은 아무도 내 마음 알아주지 않는 순간도 있습니다. 이런 자리, 이런 순간들은 하나님의 크심을 경험하는 자리입니다. 우리 삶, 우리의 약함과 고통과 탄식 속에 찾아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노랫말의 가사처럼 나의 계획이 실패하고 나의 소망이 끊어질 때 삶의 주관자 되신 그 분 앞에 나의 무릎을 끓어 경배하네 나의 삶을 그분께 맡길 때 비로소 나의 마음 평안해 구원의 반석되신 예수의 이름을 소리 높여 찬송하네


제자들은 아직 이해하지 못합니다. 혼란스럽고 걱정되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지금 나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그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하려는 것이다.”
그 때가 되면 하나님의 크신 계획 안에, 예수님의 사랑의 순종 안에서 이해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왜 떠나야 했는지! 왜 십자가 일 수 밖에 없었는지! 



우리 삶에 일어나는 막막함, 외로움, 결핍, 두려움, 고통과 탄식은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크신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고,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습니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지만 때가 되면, 이해할 날이 옵니다. 아니 다 이해하지 못해도 그저 삼위하나님의 함께 하심만으로 위로가 되고 납득이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크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함 가운데 이해되지 않는 오늘의 자리를 믿음으로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이길 바랍니다. 

3. 보혜사와 평화의 약속

예수님은 자신의 떠남으로인해 제자들에게 찾아올 혼란과 두려움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 가지를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약속하십니다. 하나는, 보혜사 성령이시고, 다른 하나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보혜사, 곧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요 14:26). 
보혜사는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 곁에 부름 받은 자입니다. 내 옆에서 함께 하는 사람, 내 곁을 지키는 존재입니다. 보혜사는 법정에서 변호사로, 사회적으로는 조언자나 위로자 중재자로 사용되었습니다. 공인중개사, 심리상담가, 코치, 변호사의 의미가 담겨있는 용어입니다. 
공인중개사가 집을 계약할 때 계약사항을 꼼꼼히 살피고 큰 계약을 안심하고 도와주듯이, 변호사가 법정에서 나를 위해 변론하듯이, 심리 상담가가 나의 마음을 헤아리고 건강한 삶을 살도록 지도하듯이, 운동코치가 나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듯이 성령 하나님께서 보혜사가 되셔서 함께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떠난 뒤 막막하고 혼란스럽게 두려운 현실 속에서 보혜사는 오셔서 제자들을 홀로 남겨두지 않으십니다. 현실은 혼란스럽고, 막막하고, 두렵지만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을 기억나게 하고,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사랑 가운데 말씀으로 사는 삶을 친히 가르치시는 성령이 함께하십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삼위 하나님 가운데 한분이 성령님입니다. 우리가 잘 모른다고, 우리가 잘 못느낀다고 성령하나님이 안계신 것이 아닙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고 우리가 무의식 중에 호흡하는 공기가 있듯이 성령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던 그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각 사람의 마음에 들어와 계시고, 언제나 늘 함께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변론하시고, 지키시고, 이끄시고, 기억나게 하시고, 가르치시고,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 기도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막막하고, 외롭고, 부끄럽고, 두렵고, 고통스럽고, 아무말 할 수 없는 탄식이 흘러나오는 순간과 자리에 묵묵히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의 곁을 지키시는 성령이 계심을 기억합시다. 조용히 성령님! 성령하나님! 불러봅시다. 상황이 드라마틱하게 바뀌지는 않지만 함께 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한 걸음 내 디딜 수 있고, 오늘을 인내하고 살아갈 힘과 용기와 지혜를 얻을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고 지금 함께 하는 가정교회 식구들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진리를 붙잡읍시다. 우와! 내 안에 성령께서 계셔. 우와~~ 당신 안에도!!! 우리의 연약한 육체에, 우리의 누추하고 천박한 마음 안에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는 신비를 묵상합시다. 보혜사 성령께서 나와 너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로하시고, 변론하시고, 지키시고, 이끄시고, 기억나게 하시고, 가르치시고,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 우리를 통해 기도하시고 인도하십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부재를 경험하게 될 제자들에게 두번째 약속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안을 준다.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며,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요 14:27). 
이 평안은 무엇일까요? 세상은 돈, 성공, 안정으로 평안을 약속하지만, 그건 쉽게 흔들립니다. 오래가지 못합니다. 쉬이 변해버리고 나중에는 평안을 깨뜨리는 이유가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평안은 다릅니다. 세상이 주는것과 차원이 다릅니다. 근원적인 평안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평안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세상의 도전 앞에서도,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평화입니다. 이 평안은 하나님의 임재에서 옵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위에서 내려오네” 찬송가의 노랫말 처럼 땅의 것이 아닌 위로부터의 평화입니다. 세상보다 크신 하나님 안에 있는 임재가 우리를 요동치는 세상 가운데에서 평화를 누리게 합니다.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고 나보다 나를 더 잘아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일어나는 온갖 풍랑속에서 잠잠히 거하게 합니다. 성령의 함께하심과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맑은물 가족에게 늘 함께 하길 바랍니다. 

결론

모든 것은 사랑으로 귀결됩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죠. “Ama Deum et fac quod vis” –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러면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 (In Epistulam Ioannis ad Parthos, Tractatus 7, 8). 이 말은 자유방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우리의 욕망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가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라. 내 말을 지켜라. 그러면 아버지와 내가 너희와 함께 거할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이 떠난 뒤에서 여전히 사랑 가운데 거하며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것을 부탁하십니다.


예수님은 떠나시면서 제자들을 위로하셨습니다. “너희는 혼자가 아니야. 성령이 너희와 함께할 거야. 내 평화가 너희를 지킬 거야.” 오늘, 우리도 그 약속 안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떠남, 삶의 두려움,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랑 가운데 거하라. 내 평안을 받아라. 성령이 너희를 인도할 것이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랑의 삶을 살아갑시다. 이웃을 용서하고, 손을 내밀고, 서로의 곁을 지키고 하나님의 큰 그림을 신뢰하며 나아갑시다. 그 사랑 속에서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고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아멘. 

봄과 같아서-이대귀

삶의 막막함 가운데 찾아오시는 그 분의 손길이

삶의 답답함 가운데 빛이 되시는 그 분의 말씀이

내게 봄과 같아서 내게 생명을 주고

내게 신선한 바람 불어 새로운 소망을 갖게 하네


아직 추운 겨울 이해할 수 없는 일 여전히 많지만

내게 변함없이 다가와 말을 건내는 그분의 따뜻한 손길이 내 삶을 꿈꾸게 하네


삶의 막막함 가운데 찾아오시는 그 분의 손길이

삶의 답답함 가운데 빛이 되시는 그 분의 말씀이

내게 봄과 같아서 내게 생명을 주고

내게 신선한 바람 불어 새로운 삶을 꿈꾸게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