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부활주일 일곱번째주일 / 승천주일
본문
Celebration

들어가며/ 이것이 영원한 삶.
영원한 사귐에 날 초대하시네/ 주님을 누리며 사는 것
날 지으신 대로 날 부르신 대로/ 주님과 함께 걷는 삶
이것이 영원한 삶 이것이 영원한 삶/ 참하나님과 그 아들 아는 삶
이것이 영원한 삶이 것이 영원한 삶/ 내가 주안에 주는 내 안에 늘 거하는 삶
영원한 교제에 우릴 초대하네/ 당신이 밝히신 그 나라 안에서
‘이것이 영원한 삶’이라는 곡의 가사입니다. 이곡은 영원한 삶이 무엇인지를 요한복음 17:3의 말씀을 통해 잘 보여줍니다.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네! 영생은, 시간적인 영~원, 영혼이 붕붕 떠다니며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 속의 삶으로 오해합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이 말하는 영원한 삶은 다릅니다. 영원한 삶은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삶입니다. 아는 것은 지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온 존재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거하는 신비의 하나 됨을 경험하는 것이 영원한 삶, 바로 영생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을 알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영생은 혼자 경험되어지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을 읽고, 기도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갈 수 있지만 이 영원한 삶은 공동체적으로 더 깊이 더 생생하게 경험되는 신비입니다. 그래서 곡의 가사 내용을 날을 우리로, 우리가 주 안에 주는 우리 안에로 바꾸어 부르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삼위하나님의 하나됨을 제자들의 공동체가 깊고 충만하게 경험하고 나타나길 기도하십니다. 영원한 삶은 공동체 안에서 하나됨을 통해 참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이것이 영원한 삶입니다.
질문들///
1. 본문을 한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기도하고 계시나?
2. 예수님은 제자 공동체의 하나됨을 어떤 유비(~과 같이)를 통해 나타나기를 기도하시는가?(21, 23절)
3. 제자 공동체의 하나됨의 근거는 무엇인가?(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주셨는가?)(22절, 24절)
4. 제자 공동체의 하나됨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21, 23절)
질문들을 정리해볼까요?
1. 예수님은 제자 공동체의 하나됨을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과 연합 안에서 제자 공동체가 하나 되어, 세상이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보내심을 알게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2. 21절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23절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하나됨의 근거는 삼위일체의 신비이다.
3. 22절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24절 내게 주신 내 영광을, 그들도 보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하나됨의 신비에 참여하는 길: 예수님의 영광(십자가의 영광)
4. 21절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23절 그것은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됨의 목적: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
오늘 설교의 뼈대가 완성되었습니다.
제자공동체의 하나됨을 위해 기도하시다. 1. 하나됨의 근거/ 삼위일체의 신비 2. 하나됨의 길/ 십자가의 영광 3. 하나됨의 목적/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
1. 하나됨의 근거/ 삼위일체의 신비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제자들과 함께 하신 마지막 순간에 드리신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소원을 가장 깊이 보여줍니다. 20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나는 이 사람들만을 위하여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구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뿐 아니라, 그들의 말을 듣고 믿는 모든 사람들—곧 오늘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이 기도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아버지와 내가 하나이듯, 제자들도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제자 공동체의 하나됨의 근거와 뿌리를 아버지와 예수님 자신의 관계 안에 두십니다.
21절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23절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제자 공동체가 하나되게 해달라는 기도 앞에 예수님이 하나됨의 근거로 삼고 있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ἐν” (en, 안에)이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 이는 단순한 물리적 위치가 아니라, 깊은 연합과 내주(內住)를 나타냅니다.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거하시면서도 서로 섞이지 않고, 하나이면서도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신비의 연합입니다. 여기에 성령 하나님이 언급되지 않았지만 좀더 확장해서 살펴보면 삼위일체의 신비의 연합입니다.
제자들의 하나됨의 근거는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하나이면서 셋이고, 셋이면서 하나임을 보여주시는 삼위일체의 신비 말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가 하나됨의 근거이고 뿌리입니다.
공동체의 하나됨의 근거는 "우리 하나 되자"는 주장이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되자라는 구호는 쉽게 바뀌는 우리의 마음때문에 쉽게 깨어집니다. 하나됨을 이루는 이유보다 하나됨을 깨뜨리는 이유가 우리 속에 만사천칠백팔십두개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성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됨, 일치를 이루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쉬이 일치와 하나됨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자기 한계와 경계를 짓는 자기중심성은 삼위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할 때에 허물어지고 하나됨과 일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흑연과 다이아몬드의 탄소 결합구조.
삼위일체 교리가 어렵습니다. 셋이 하나이고 하나가 셋이라는 산수로 풀수 없는 난해한 공식 같습니다. 그런데 이 삼위일체의 진리는 뛰어난 신학자와 신학교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초기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 살아가면서 예수 안에서 성부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을 알고 경험하면서 나타난 진리입니다. 그러기에 어려워서 난 몰라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만큼이나 우리의 존재와 삶에 아주 중요한 진리입니다. 다 이해하지 못해도 알아야 할 진리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 교재의 원 안으로 우리를 당기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홀로 외롭게 존재하는 어떤 단일한 존재가 아닙니다. 영원 전부터 성부, 성자, 성령이 세분의 깊은 사랑과 사귐 안에서 관계 그 자체로 존재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관계는 내부 안에 머물지 않고 확장되고 퍼져나갑니다.
삼위일체를 페리코레시스라고 표현을 많이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서로를 향한 완전한 사랑 안에서 끊임없이 서로를 내어주고 받아들이는 춤과 같은 연합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이 춤은 우리가 강강수월래를 하듯 더큰 동심원을 이루며 퍼져나갑니다. 21절에 아버지가 내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는 23절에 내가 제자들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로 확장되고 퍼져나갑니다.
공동체 하나됨의 근원과 뿌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 머물고 그 신비를 알고 경험 할 수록 우리는 하나됨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됨은 우리의 구호와 노력이 아니라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초대입니다. 하나님은 그 친밀하고 역동적이고 영원하고 깊은 사랑의 관계속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및 영성과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일상 삶에 실제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살아있는 신학’입니다.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알고 이해하는 것은 매일의 삶에 영향을 줍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은 삶을 변화시키는 체험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생생한 관계는 종교 관행 전체를 바로잡고, 인간 관계를 혁신시키며, 돈과 소유에 대한 태도를 바꾸고, 두려움과 염려에서 우리를 구해줍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 관계를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관계가 비뚤어지면 인생 전체가 비뚤어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고, 깨어진 관계가 우리를 쇠약하게 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의'는 올바른 관계를 의미하며, 예수님은 우리를 성부와 화해시키고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화해하도록 오셨습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면적 지식 속으로 함께 끌어당겨지므로 서로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우리는 서로를 하나님과 '함께 사랑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으며, 우리의 관계는 항상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맺는 관계입니다.
우리는 삼위 하나님과 함께 사랑으로 초대되고 참여하며 함께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삼위일체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향한 사랑으로 초대받습니다.
2. 하나됨의 길/ 십자가의 영광
그렇다면, 제자들은—그리고 오늘 우리를 포함한 제자 공동체는—어떻게 삼위일체의 신비로운 연합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22절에서 그 방법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또 24절에 “내게 주신 내 영광을, 그들도 보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고 간구하십니다.
여기서 “영광”(헬라어: δόξα, doxa)은 단순한 명예나 찬란함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에서 영광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이 예수님의 영광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여기기를 포기하시고 종의 몸을 입고 종에 의해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신의 경계를 넘어 피조물인 인간이 되신 것이고, 십자가는 신의 한계를 넘어 죽기까지 복종하신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사랑하시기에 자신을 희생하기까지 순종하신 사랑의 극치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사랑의 절정입니다. 십자가는 자기 경계와 한계를 넘어서는 사랑의 영광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영광을 제자들에게 주셨다는 것은, 우리도 십자가의 길을 따라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가라는 초대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에 참여하는 길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그 길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길은 자기 한계와 경계를 넘어선 십자가의 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길을 따라 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연합을 경험합니다.”
캠퍼스에서 간사하면서 그때가 2000-2005년이었네요. 20년도 후울쩍 지난 이야기입니다. 한 학기를 마무리하는 지점에 리더들과 잠포를 합니다. 한 학기 동안 있었던 좋았던 것, 아팠던 것, 섭섭했던 것들을 나눕니다. 바쁘고 힘들고 그만두고 싶었던 리더의 삶을 마무리하며 한결같이 고백합니다. 이제 다음 학기에는 또 누가 리더로 설까? 고민하며 한명한명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런데 리더들의 의외의 고백이 들립니다. 알바해서 후배들 밥사주고, 늘 같은 옷과 신발을 신고 다니며 용돈 아껴서 후배들 책사주고, 후배들 앞에 큐티나눔 말씀 나눔을 하려니 자연히 말씀 앞에 설 수 밖에 없었다고. 리더로 살면서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고 만났다. 자기 한계를 넘어서서, 나의 경계를 넘어서서 사랑의 자리로 나아가니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 밖에 없었고, 그럴 때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깨닫게 되었다. 다음학기에도 리더로 살고 싶다. 물론 늘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 자기를 넘어서서 사랑의 자리로 나아가는 이들의 한결 같은 고백입니다. 자기를 넘어서서 사랑의 길을 걷는 이들 곁에 예수님은 함께 계십니다.
그러니 하나됨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자기 한계와 경계를 넘어 사랑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의 기준이 있다면 내 감정과 내 상황이 아니라 영광의 십자가가 사랑의 기준입니다. 나의 헤아림으로 상대를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눈과 마음으로 상대를 헤아리고 예수님의 길을 따라 사랑의 자리로 나아갈때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삼위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하고 하나됨의 자리로 나아갈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길 위에 함께 거하는 저와 여러분이길 바랍니다.
3. 하나됨의 목적/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
그렇다면 이 하나 됨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무엇을 위한 하나됨일까요? 예수님은 21절과 23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그것은 세상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들을 사랑하신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세상”(κόσμος, kosmos)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력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구원하시려는 대상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 공동체가 하나 됨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로운 연합을 세상에 증거하기를 원하십니다.
아까 페리코레시스의 삼위하나님의 춤이 강강수월래로 퍼져가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는 끊임없이 이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고 하나됨을 이룬 공동체를 통해 세상에 하나님을 드러내고 나타내길 원하십니다.
하나됨은 하나님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선교입니다. 제자 공동체의 하나 됨은 세상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회복을 알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방법입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거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하나 됨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위기는 어쩌면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교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교회 미출석 교인들이 늘어나는 것은 다른 이유들도 있겠지만 교회에서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본주의 논리가, 세속적인 가치가, 일치보다는 분열과 혐오의 담론이 가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상은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도 보기를 원합니다. 인종과 나이와 소득과 성적지향과 성별과 사는 지역과 추구하는 가치와 삶의 방향이 다를 지라도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해서 사랑의 일치를 이루고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심을 … 보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맑은물 가족 여러분. 우리 맑은물이 사랑의 일치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공동체가 되길 바랍니다. 6월 수련회가 열립니다. 각자의 상황은 여러가지이지만 이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서로를 아끼고, 부대끼면서 하나됨을 이루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시간이길 바랍니다.
결론: 세상을 향한 영원한 사귐의 초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26절에서 이렇게 기도를 마무리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게 하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합니다.” 우리가 하나를 이룰 때,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신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한 사귐으로 초대하십니다. 이 초대는 나 홀로 신앙의 신비를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게 보내주신 이들과의 연합과 하나 됨의 일치를 통해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 됨은 우리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 됨이 온 세상을 구원하고 새롭게 하시는 초대로 나타나는 것처럼, 우리의 하나 됨은 하나님의 선교를 드러내는 도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를 향한 사랑으로 부름받았습니다. 그 사랑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삼위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한 사귐으로 초대하시고, 우리를 통해 세상을 영원한 사귐으로 초대하시길 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