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깨어진 세상, 깨어진 우리, 그 속에 일하시는 하나님

본문

Celebration

이미지1

우리는 깨어진 세상에서 깨어진 존재로 산다.

우리는 깨어진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전쟁과 분열, 불의와 고통, 질병과 상실이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깨어진 세상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깨어진 세상에서 깨어진 존재 로 살아갑니다. 
슬픔, 낙심, 불안, 절망, 비통함이 우리의 마음을 짓누를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좌절, 가정에서의 갈등, 관계의 상처, 그리고 내면의 혼란은 우리를 무력하게 만듭니다.

깨어진 세상에서 깨어진 존재로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의 깨어진 마음과 삶에 삼위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실까요? 
오늘 성령강림 후 둘째 주일의 성서 일과 말씀은 이 질문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깨어진 자를 회복시키시고 복음의 증인으로 보내시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시편의 시인은 절망과 불안함 속에서도 하나님을 끊임없이 구하고 찾고 갈망하는 마음을 노래합니다. 
열왕기상은 완전히 소진된 선지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려 줍니다. 
갈라디아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경계를 넘어 일치된 공동체를 보여줍니다. 
이 말씀들을 통해 깨어진 세상에서 깨어진 존재들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예수님은 깨어진 사람을 찾아오십니다.

누가복음 8장에 등장하는 거라사 지역의 한 사람의 이야기는 완전히 깨어져서 누구도 손쓸 수 없고, 회복시킬 수 없는 가망없는 한 존재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의 상태는 27절과 29절에서 잘 보여줍니다. 
그 마을 출신으로서 귀신 들린 사람 하나가 예수를 만났다. 그는 오랫동안 옷을 입지 않은 채, 집에서 살지 않고, 무덤에서 지내고 있었다.
귀신이 여러 번 그 사람을 붙잡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묶어서 감시하였으나, 그는 그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서 광야로 뛰쳐나가곤 하였다.

군대라는 수많은 귀신에 사로잡혀서 스스로 통제할 수 없고, 주변의 사람들도 통제할 수 없는 완전히 깨어진 존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스스로 회복할 수 없고, 주변의 어느누구도 그를 붙잡아둘 수도 없는 깨어져서 소망이 없는 무덤사이를 배회하는 완전히 깨어진 존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불쌍함을 넘어서서 가까이 하기에는 무섭고 골치 아픈 한 존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거라사의 광인을 보며 난 그 정도는 아닌데 하며 생각하겠지만 
거라사 광인은 완전히 깨어져서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깨어진 존재의 비참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에베소서 2장은 하나님을 떠나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우리의 실존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1   여러분도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2   그 때에 여러분은 허물과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3   우리도 모두 전에는, 그들 가운데에서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했으며, 나머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날 때부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저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도 거라사 광인과 별 다를 바 없는 깨어진 존재, 희망이 없는 존재, 허물과 죄로 죽었던,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깨어진 세상에 살면서 죄와 허물과 절망과 비통함을 어찌할 줄 몰랐던 깨어진 존재였습니다.

거라사의 깨어진 존재 군대귀신 들린 광인을 예수님은 찾아오십니다. 
“그들은 갈릴리 맞은 편에 있는 거라사 지방에 닿았다.”
예수님은 구지 갈릴리 반대편 이방인의 땅(돼지를 키우고 있음, 유대인은 돼지를 키우지 않음)에 이 한 존재, 깨어진 사람을 찾아 오십니다. 
그리고 그를 억누르고 있던 어둠의 권세 군대 귀신을 쫓아 내시고 온전함을 선물하십니다.
“귀신들이 나가버린 그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이 들어서 예수의 발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35절.
이전에 옷을 벗고, 쇠사슬로도 통제할 수 없었던 그가
옷을 차려입고 온전한 정신으로 가만히 예수의 발 아래 앉아 있는 모습은 이전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깨어진 존재를 찾아와 온전한 존재로 회복시키십니다. 복음의 이야기는 깨어진 존재가 온전함을 회복하는 이야기입니다. 
아까 읽은 에베소서 본문의 다음 구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4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5   범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6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범죄로 죽었던 깨어진 존재에 생명을 불어 넣으시고 뿐만 아니라 원래의 온전한 모습으로 회복하여 예수 안에서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깨어진 존재를 찾아와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십니다. 
깨어진 존재가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어 온전한 모습을 회복하는 이야기가 복음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 아닙니까? 나를 찾아와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경험한 존재들이 우리입니다. 우리가 만난 예수님! 우리가 가진 복음은 깨어진 존재가 온전히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과 소망입니다. 더이상 우리는 깨어진 존재가 아니라 회복된 존재,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온전함을 입은 존재입니다. 깨어진 존재를 찾아와 온전함으로 회복케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람이 변하는 죽을 때가 가까웠다고 농담으로 이야기도 합니다. 우리는 변하지 않는 나와 주변의 이웃들을 보며 복음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변화시키시고 회복시키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터부시 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변화를 경험하고, 복음은 여전히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가 아무리 군대 귀신이 들려 모두가 포기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복음은 그에게도 여전히 희망은 있으며 기회가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 안에서 변화와 회복의 희망과 소망을 가지고 예수를 닮고 신의 성품을 입어가는 저와 여러분이길 바랍니다. 사람에 대해 쉽게 단정짓고 포기하지 말고 변화시키시고 회복시키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신뢰하며 나아갑시다.

회복된 거라사의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가겠다고 하자 예수님은 그를 그가 살던 집과 마을로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낱낱이 알리며 증인으로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된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으로 보냄을 받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가족과 이웃과 공동체에 내가 만난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보냄을 받습니다. 우리의 나눔과 이야기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신일을 증거하는 나눔과 이야기로 풍성해지길 바랍니다. 깨어진 세상 깨어진 이웃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회복시키시고 나를 회복시키셨는지를 나누고 증거하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증인으로 이웃에게 가족에게 공동체에게로 보내십니다. 

회복되었어도 여전히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회복된 존재가 되었지만 다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시편 42-43편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시인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 처럼 주님을 간절히 찾습니다. 나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경험했지만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 같은 시간들이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그 누구도 채워줄 수 없는! 오직 하나님만이 채워줄 수 있는 근원적인 갈증과 목마름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고, 늘 함께 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 같은, 낙망하며 내 존재와 삶이 무언가 텅빈 것 같은 시간들이 있습니다. 신앙의 삶이 늘 순탄치만은 않은거죠.

그런데 하나님만 계시지 않은 것 같은 어떤 영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삶의 자리가 그런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삶이 꼬이고, 신뢰했던 관계가 틀어지고, 가정에 어려움이 닥치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오해받기도 하고, 하는 일들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순간들을 만날 때 ‘정말 하나님이 계시는 걸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데 왜 이렇게 점점 힘들어만 질까?’ 
슬프고, 낙심되고, 불안하고, 분노하고, 비통해지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시인은 이런 자신의 상황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밤낮으로 흘리는 눈물이 나의 음식이 되었구나.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 괴로워하느냐
시인은 슬픔이 차오르고, 자신감을 잃고, 불안하고 괴로워합니다. 
깨어진 세상에 살기에 그 안에서 삶을 살아내기에 무어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어려운 시기입니다. 이상하지만 우리 삶에 있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닙니다. 
삶을 살기에 찾아오는 영혼의 어두운 밤, 겨울 같은 인생의 시기, 어렵고 힘든 시간들입니다. 
이 시간들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은 들려오는 사람들의 말입니다.
“너의 하나님이 어디있느냐?”하며 비웃음이 더 마음을 괴롭고 어렵게 합니다. 
거기에 나의 마음도 갈대처럼 회의하며 동의가 될 때 더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걸까?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으실까?”


그런데 말입니다. 시인은 비틀 거리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찾습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하나님만을 찾고 또 찾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다시 찬양하련다.”
시인은 세번이나 자신의 영혼에게 외칩니다. 
하나님을 기다려라.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 다시 찬양하련다. 
여전히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않는 안개와 같은 상황이지만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시인은 심한 갈증 속에서 아무물이나 들이키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찾고 구하고 기다립니다. 
심한 갈증에 바닷물을 마시면 탈수로 인해 더 괴로워집니다. 
온전한 생수만이 갈증을 달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근원적인 목마름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어렵고, 힘들고, 불안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만을 찾고 기다립니다. 

인생의 어렵고 힘든 순간은 하나님을 찾고 기다려야 하는 순간인 것 같습니다. 
힘들고 괴롭다고 해서 다른 대체 수단들을 찾고 나면 더 심한 갈증과 어려움들이 찾아 옵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사람들의 인정이나 인생의 성공이나 즐거움등)이 근원적인 목마름을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치유와 회복을 경험했더라도, 깨어진 세상에서는 낙심과 불안이 찾아옵니다. 삶을 살기에 설명할 수 없는 힘들고 어려운 시간들이 찾아옵니다. 직장에서의 좌절, 가정의 갈등, 건강의 위협은 우리를 흔듭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세상의 위로를 찾기 쉽습니다. 사람의 인정이나 위로를 찾고, 인생의 성공이나 즐거움으로 도치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시은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깨어진 마음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주님 안에서 참된 평화를 찾으십시오. 여러분의 낙심 은 무엇입니까? 오늘 그 마음을 그대로 하나님께 드리고, 주님의 소망을 붙잡으십시오.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십시오. 주님만이 주시는 참된 평화와 위로를 구하십시오.  

우리는 모두 연약한 존재입니다.

엘리야는 위대한 선지자였지만 그도 지치고 절망하고 무너집니다. 성경은 이런 인간의 실존을 너무 잘 보여줍니다. 성경에는 슈퍼 히어로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지도자일지라도 한계를 지닌 연약한 인간입니다.

열왕기상 19장은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의 깨어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바알 선지자 들과의 영적 전투에서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지만 하나도 변함없는 세상과 오히려 더 악화된 상황이 그를 무너지게 만듭니다. 엄청난 승리 뒤에 완전히 깨어진 상태가 됩니다. 하나도 변하지 않는 이세벨의 위협에 눌려 광야로 도망칩니다. 로뎀 나무 아래에서 그는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열왕기상 19:4) 라며 절망하고 완전히 무너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엘리야도 깨어진 존재였습니다. 슈퍼 히어로는 없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리더일지라도 그도 한계를 지닌 연약한 인간일뿐입니다.

우리 모두는 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한계를 지닌 연약한 존재입니다. 어느 누구도 슈퍼 히어로이지 않습니다. 목자도, 목사인 저도 부서지기 쉬운 존재입니다. 한계를 모르고 달리면 탈진이 찾아옵니다. 낙심할 때가 있고, 다 묻어두고 도망치고 싶은 순간도 찾아옵니다. 우리 중에 겉으로 잘 지낸는 듯 하지만 지친 마음과 외로움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홀로두지 맙시다. 안부를 묻고, 곁을 지켜줍시다. 가정교회 모임이나 교회 일을 어느 한 사람이 과중하게 맡아서 지치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모두가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서로 짐을 지고, 상호 돌보는 공동체로 나아갑시다.

하나님 저 할만큼 했습니다. 그만 죽고 싶습니다. 라고 하는 엘리야를 하나님을 찾아오십니다. 완전히 탈진할 대로 탈진한 그를 어루만지고 먹이고 회복시키십니다. 탈진한 엘리야를 새롭게하시는데 하나님은 먼저 그의 몸을 돌보십니다. 몸의 컨디션이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먹이시고 돌보십니다. 
우리가 탈진하고 지친사람들을 돌보는데에 기도만 필요한게 아닙니다. 때론 먹이고 입히고 몸을 돌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몸을 지닌 존재입니다. 몸의 필요를 서로 돌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수고하고 애쓴이들에게 맛난 것으로 기프티콘으로 돌보고 챙기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몸을 회복한 엘리야는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하나님을 대면합니다. 
호렙 산에서 엘리야는 크고 강한 바람, 지진, 불 속에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세미한 소리” 속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엘리야는 보이지 않는 세미한 음성 속에서 여전히 일하고 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합니다.

엘리야의 이야기는 지치고 무너진 이들을 다시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입니다. 하나님은 탈진한 엘리야의 몸과 영혼을 돌보시고 새로운 힘과 용기와 마음을 주십니다.

혹시 쉬고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습니까? 사랑하고 섬기는 일이 지쳐서 다 그만두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이런 우리의 마음과 상황을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십니다. 돌봄받지 못하고 혼자서만 너무 애썼다고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습니다. 드러나지 않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게 소리 없이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기억합시다. 다 그만두고 싶다는 우리를 돌보시고 먹이시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깨어진 세상 경계를 넘어 일치를 만드는 복음

갈라디아서 3장에서 바울은 정말 혁명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다."

당시에는 정말 파격적인 말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이방인을 무시했고, 자유인은 종을 사람 취급도 안 했고, 남자는 여자를 함부로 대했습니다.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분명한 경계가 존재했고, 하나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깨어진 세상은 인종, 신분, 경제적 차이, 성별로 우리를 나눕니다. 우리는 이런 경계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분열을 만듭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장벽을 허물고,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연합시킵니다.

하나님은 깨어진 세상에서 벽을 허물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를 만드십니다. 기질과 성격과 연봉과 사는 지역과 삶의 배경이 어떠하든지 예수 안에서 새사람을 만들어 하나를 만드십니다.

교회는 이 하나됨의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깨어진 존재가 하나될 수 없는 존재가 예수 안에서 회복되고 하나가 됩니다. 교회의 일치와 하나됨은 그가 예수 안에서 회복되었음을 회복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다름으로 인해 갈등을 겪고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고 하나됨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나를 내려놓고 주님 안에서 너를 서로를 품고 받아들입니다. 차이와 다름이 경계지을 이유가 아니라 하나됨 안에서 다채롭고 풍성함을 누리는 증거가 됩니다.

깨어진 세상, 경계를 짓는 세상에서 하나됨 일치를 만드는 복음의 이야기가 맑은물 안에 가득 넘쳐서 하나됨과 일치를 드러내는 우리이길 기도합니다. 

깨어진 세상 회복케하는 복음

우리는 깨어진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도 깨어져 있습니다. 그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복음은 바로 이 깨어진 현실 속에서 시작되는 희망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깨어진 사람을 찾아가서 새 사람 만드시고, 
깨어진 시인은 절망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엘리야는 탈진 속에서 하나님의 세미한 위로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복음은 모든 차이를 넘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만듭니다.

나를 찾아와 깨어진 나를 회복시키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날마다 새로워지길 바랍니다. 
그 하나님의 크신 일이 나에게만 머물지 않고 깨어진 이웃과 세상에 전해지길 바랍니다. 
이유없는 괴로움과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기다리고 기다리는 인내가 있길 바랍니다. 
지치고 무너진 이를 다시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세심하고 세미한 일을 기억합시다. 
우리 중에 지치고 무너진 이들을 기억하고 서로 돌보고 위로하고 격려합시다. 
차이와 다름을 넘어서서 하나됨과 일치를 만들어가는 맑은물이길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