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인의 파송/ 보냄받은 삶
본문
Celebration

아버지로부터 보냄받은 기억.
몇살때인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입학 전후 였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양은 주전자와 돈을 손에 쥐어 주시고 쌀집에 가서 막걸리를 사오라고 보내셨습니다. 당시에는 아직 미성년자 주류판매가 법으로 금지되지 않은 시절이라 어른들이 술담배 심부름을 아이들에게 자주 시켰던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이었습니다.
근처 쌀집에 도착해서는 주인 아저씨에게 주전자를 내밀며 막걸리를 담아달라하고 값을 치뤘습니다. 그리고는 집에 오는 길에 어른들이 맛나게 먹는 막걸리 맛이 궁금해서 주전자 주둥이로 한모금씩 마셨습니다. 당시 맛이 좋았던지 주전자 3/1 가량을 마신 것 같았습니다. 집에 도착해서는 막걸리가 든 주전자를 아버지에게 드리고 저는 방에 들어가 골아떨어졌다고 합니다.
저는 아버지의 보냄받은 심부름을 잘 수행했을까요? 못했을까요?
1.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받았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70인을 보내시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 일이 있은 뒤에, 주님께서는 다른 일흔[두] 사람을 세우셔서, 친히 가려고 하시는 모든 고을과 모든 곳으로 둘씩 [둘씩] 앞서 보내시며
이 일이 있은 뒤에는 9장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이야기 속에 12제자의 파송, 베드로의 고백, 예수님의 십자가 예고,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손에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는 자는 합당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예루살렘으로 향하십니다. 십자가를 향해 묵묵히 나아가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다른 70명(72명)을 세우셔서 예수님이 가고자 하시는 마을로 둘씩 짝지어 보내십니다. 9장에 12제자를 보내셨던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마도 12제자를 제외한 70명을 이야기 하는 듯 합니다. 70명 72명 이렇게 나오는 것은 어떤 역본에는 70명 어떤 역본에는 72명으로 기록되어있어 둘다를 취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70명일 수 있고, 72명일 수 있다는 거죠. 예수님의 보내시는 일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12제자에서 70명으로 확대됩니다. 왜 70명일까? 의문을 가진 이들에게 성경학자들은 창섹시 10장에 홍수 이후 노아의 후손의 숫자를 70명으로 보고, 유대인들은 전 세계 민족을 상징하는 숫자로 70을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70명을 보내신 것은 모든 인류를 향해 보내신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출애굽의 장면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위해서 70인의 장로를 세웁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70인을 보내는 것은 하나님나라를 위해 봉사하고 전파하는 일에 대표자로 70명을 세워 보내십니다. 대표로 70인을 보내시지만 전체를 보내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70인을 보내시는 이야기는 예수님의 보내시는 이야기가 확장되고 연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고, 온 세상을 향해 예수님의 제자공동체 전체를 보내시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모두가 온 세상을 향해 보냄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70인을 보내시는 이야기가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 전체가 온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하나님께로 부름을받고 세상으로 보냄받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존재입니다.
우리가 보냄을 받았다. 교회가 보냄을 받았다라는 의식은 우리의 존재방식과 삶의방식을 바꾸어 놓습니다. 보냄받았다는 의식이 없다면 교회는 공간과 조직으로 사람들을 계속해서 끌어 모으려는 구심적인 역동에만 집중할 것입니다. 하지만 보냄받았다는 의식은 하나님의 관심이 피조세계에 있음을 알고 세상으로 흩어져 하나님의 보냄받은 일을 담당하는 일에 관심과 역량을 집중할 것입니다. 가정교회와 맑은물 전체의 모임에서 무슨일이 일어나야 하는가?에 대한 초점을 넘어서서 모임 이후 보냄받은 삶에서 어떤 역동이 일어나야하는가에 초점이 확장되어 일상의 삶과 이어지고 연결된 모임의 역동이 나타날 것입니다.
보냄받았다는 의식은 우리의 일상을 다르게 보게 합니다. 나는 사는 지역, 직장, 가정과 이웃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습니다. 보냄받은 자리에서의 삶은 단순히 착하게 성실하게 사는 삶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일상을 바라보게 하고 삶의 태도와 실천을 바꾸어 놓습니다. 주방으로 보냄을 받습니다. 육아하고 아이를 돌봄으로 보냄을 받습니다. 직장으로 보냄을 받습니다. 내가 보냄받은 자리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고 계시는가를 살피고 그 하나님의 일하심에 자신을 드리는 관점의 전환이 일어납니다.
가정교회 예배 순서지 마지막에 디아스포라 기도문이 있습니다. 청파교회에서 주일 예배 후에 함께 읽는 기도문입니다. 다시유가정교회 모임에 상훈형님의 의견으로 한때 열심히 모임을 마치며 읽고 기도했던 기도문입니다.
디아스포라 기도문
인도자/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평안히 돌아가십시오. 복음의 말씀을 들었으니 참 자유인답게 사십시오.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기다리며 사십시오. 응답하실 주님을 믿으며 밝고 기쁘게 사십시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는 이 땅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응답이 되어 사십시오.
다같이/ 아멘, 주님의 응답을 확신하지 못하고 의심하고 불안해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주님을 신뢰하겠습니다. 약속을 이루실 주님을 믿으며 기쁘게 살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많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응답이 되어 살겠습니다. 주님 우리의 동행이 되어 주십시오. 아멘
예배가 끝이 아님을 예배 후에 보냄받은 곳에서 삶이 이어짐을 기도문을 읽고 기도함을 통해 다시 떠올리고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비단 이 기도문 뿐 아니라 예배의 마지막이 축도로 마치는 것은 이 보냄받음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보냄받은 자리에 삼위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그리스도께서 앞뒤좌우위아래 함께 하셔서 보냄받은 삶을 충실히 살아내기를 축복하고 기도하며 파송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냄받았다는 것을 잘 기억합시다. 우리의 만남과 모임, 가정교회와 전체 예배에서 우리는 보냄받았음을 어떻게 기억하고 살아낼지를 격려하고 도전하는 자리이길 바랍니다. 그리고 일상의 자리가 보냄받은 자리라는 것을 기억하며 나의 일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나와 가족이라는 경계를 넘어 세상 가운데에서 사랑과 포용과 관대함의 하나님나라를 실천하는 자리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2. 보냄받은 곳은 어떤 곳인가?
예수님은 70인을 보내시며 걱정어린 말씀을 하십니다. 3절/ 가거라,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70인이 보냄받는 곳은 안전하고 편안한 곳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걱정에 담겨 있듯이 위험하고 적대적인 곳입니다. 양을 늑대 가운데로 보내면 어떻게 됩니까? 잡아 먹히겠죠! 예수님은 70인을 보내면서 그런 세상으로 이들을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했듯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세상이 미워할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박해와 핍박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보냄받은 세상은 만만한지 않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환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냄받았다는 사실을 우리만 알뿐이지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IVF라는 선교단체가 있습니다. 선교단체에서 꿈꾸고 훈련받았던 내용은 졸업 후에 영향력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졸업 후 겪게 되는 현실은 현실의 벽 앞에 판판히 깨어지고 자신이 가진 신앙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기는 커녕 나 하나도 변화하기 힘든 현실을 만나며 바닥을 칩니다. 양과 이리의 싸움임을, 게임이 안되는 상황임을 직시합니다.
복음의 가치와 정신을 가지고 살려면 비난과 거부와 불편함이 돌아옵니다. 사람을 이용의 가치로보고 다가오는 이들에게 사람이라는 존재의 가치로 대하기란 바보 같은 일 같습니다. 모두가 아파트 분양권과 갭투자를 통해 자산을 증식할 때, 노동으로 정직하게 벌어서 전세에 들어갔는데 전세비는 내가 더 많이 냈는데 더 적은 돈을 내고 아파트를 소유한 집주인이 전세비를 올려달라거나 월세로 전환하려고 할때 솔직히 현타가 오는게 사실입니다. 좋은게 좋다라고 넘어가는 분위기에서 잘못된 것을 시정하자고 말하면 혼자 분란을 일으키고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따가운 시선이 돌아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반대와 어려움과 위험이 존재하는 세상임을 아십니다. 우리는 반대와 어려움과 위험이 존재하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습니다.
반대와 어려움과 위험이 존재하는 세상은 또한 하나님이 일하시는 세상입니다. 예수님은 70인을 보내시며 이렇게 기도하라 말씀하십니다. 2절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적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 세상은 반대와 어려움과 위험한 곳이지만 하나님이 곡식을 거둬들이고 있는, 추수를 위해 일군들을 보내시는 곳입니다. 그리고 추수할 때가 가까웠다는 것은 긴급하고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종말적인 인상을 줍니다. 지난 주 예수님을 따라나선 이들이 장례와 작별인사를 청했을 때 “손에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는 자는 하나님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하셨던 이야기는 종말의 긴박함과 우선성을 말해줍니다.
보냄받은 자리에서의 삶의 긴박하고 우선성을 가지는 것은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일상의 모든 삶이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지만 그 일상의 삶에서 가장 긴박하고 우선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증인의 삶입니다. 증인의 삶의 우선성이 전도하고 선교하고 교회일에 먼저 뛰어들라는 말이 아닙니다. 증인의 삶이라고 표현을 했지만 오늘 주제의 내용대로라면 보냄받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보냄받은 삶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무슨일을 하고 계신가? 나는 일하시는 하나님에 일에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가?를 먼저 생각하고 그 보냄받은 의식에 따라 삶을 재조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말로 자기중심성을 넘어서서 하나님중심으로 삶을 재조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며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험하고 어려운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그렇지만 세상은 하나님이 일하시고 계시는 곳입니다. 그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살피고 하나님의 일에 참여합니다.
3. 보냄받은 곳에서의 삶과 메시지.
예수님은 70인을 이리 가운데 양을 보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절/ 전대도 자루도 신도 가지고 가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아라. 위험한 세상으로 70인을 보내면서 그들에게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가라고 하십니다. 보호장비나 호신술을 가르쳐도 모자랄 판에 무방비 상태로 보내십니다. 아무런 대비책 없이 무방비 상태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방문하는 곳의 호의와 환대에 철저하게 의존하여 살라고 하십니다. 7절/ 너희는 한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거기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자발적으로 가난을 택하고, 신변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상태에서, 최소한의 경비로, 타인의 환대에만 의존해서 지내야 합니다.
양을 이리가운데 보내는 것 같다고 하신 예수님께서 70인들이 보냄받은 자리에서 살아내야하는 삶의 태도는 너무나 취약하고 의존적인 삶의 지침을 주고 계십니다.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지침들입니다. 자신을 보호하거나, 자신을 책임질 만한 어느것 하나 없이 철저하게 타자의 환대에만 의존해야만 합니다. 누군가 문을 열어주면 들어 갈 수 있고, 밥을 내어주고. 잠자리를 내어주면 먹거리와 잠자리가 해결됩니다. 더 나은, 자신의 취향을 따라 선택할 수 없는 타인의 환대와 베품에 철저하게 의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방식으로 제자들을 보내셨을까요? 얼마든지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의 먹을 것과 잠자리 대책은 마련하고 갈 수도 있었을텐데 왜 이렇게 철절하게 타자의 환대에 의존해야 하는 취약한 모습으로 보내셨을까요?
본문에 그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제자들을 보내시고 70인을 파송하셨습니다. 그게 다입니다. 그게 보냄받은 삶의 양식이고 보냄받은 자리에서 살아내야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럼에도 이유를 생각해보면 몇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겠습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가장 취약한 모습으로 타자의 환대에만 의존해야 하는 존재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머리둘 곳없이 세상을 사시다가 가장 취약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보냄받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스스로 가난하고 권력을 내려놓고 타자의 환대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삶일 것입니다.
실제적인 상상/ 제자들이 아무것도 없이 이집 저집의 문을 두드리며 복음을 전했을 때, 문을 열고 환대해주는 이의 호의와 환대에 얼마나 기뻐하고 감사했을까요? 그러면서 하나님께 오늘의 일용할 양식과 잠자리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간절하게 구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면에서 이러한 삶의 양식은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하고 신뢰하게 만들고, 자신에게 호의와 환대를 베푸는 이들에 대한 감사와 그로 인한 연합이 아주 귀하게 다가왔을 것 같습니다.
교회사에서 탁발수도회가 있습니다. 이들은 수도원에 자급자족하는 공동체를 꾸리기보다 도시와 세상속에서 재산을 소유하지 않고 대중들의 자비와 환대에 의존함으로 삶을 꾸려나갔습니다. 수도사들이 엘리트주의의 성향을 따라 갔다면 탁발수도회는 도시에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실천했습니다. 이들은 청빈하게 살뿐 아니라 물질을 넘어서서 권력과 힘까지 포기하며 살았습니다. 종교가 권력이 되고 부의 원천이 되었던 시대에 이들의 삶은 세속화된 교회와 사회에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그러고보면 보냄받은 자리에서 하나님백성의 삶은 권력을 쌓고, 부를 추구하고, 안전하고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쌓은 권력과 부로 세상에 시혜하듯이 베푸는 것이 아닌것 같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돈이 없어서, 힘이 없어서, 건물이 없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가진 권력과 쌓은 돈과 지어올린 건물이 하나님의 복음을 가리고 방해가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 철저하게 의탁하고 신뢰할 때, 타자의 환대통해 먹이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때, 금과 은은 없지만 우리 안에 충만하게 임한 하나님나라를 증거하고 보여줄 때 복음은 전파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자본주의와 소비주의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4절/ 전대도 자루도 신도 가지고 가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아라. 7절/ 너희는 한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거기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는 말씀은 참으로 큰 도전입니다. 취약해져라. 타자의 환대에 의존해서 살아라. 하나님의 선교는 돈으로, 힘으로 빽으로 하는게 아니다.는 말씀은 참으로 비현실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돈과 힘이 하나님이 된 세상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이 말씀이 무겁게 우리에게 다가오길 바랍니다. 보냄받은 세상에서 우리의 삶의 태도와 지향은 스스로 가난과 청빈을 추구하고 섬기고 베푸는 것의 관점을 뒤집어 타자의 베품과 환대에 기댈 수 밖에 없는 삶이 주는 역설적인 메시지는 큰 울림을 주지 않을까요? 그러면서 베드로가 성전미문에서 “금과 은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것 네게 주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하며 참된 예수의 생명과 복음의 능력을 증거할 수 있는 삶이 나타나지 않을까요?
보냄받은 자들의 삶의 양식은 철저한 최약성과 의존의 삶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메시지는 ‘평화’와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5,6절/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거기에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있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사람에게 내릴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70인이 전하는 메시지는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로마의 평화와 다릅니다. 로마는 철저한 무력과 타자의 희생 위에 세워진 평화입니다. 누군가의 착취와 희생과 피과 눈물 위에 무력으로 유지되는 평화입니다. 가짜 평화인 것이지요. 사람들이 원했던 평화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보복과 응징의 평화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하는 평화는 참된 평화입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평화의 그림은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놀고, 어린이 독사 굴에 손 넣어도 물지 않는 세상입니다. 누군가를 착취하고 희생시키지 않아도 되는 세상. 강한자와 약한자가 함께 어우러지고 서로 돌보는 세상. 가난하고 취약하고 의존하는 삶이 부끄럽지 않은 세상. 보복과 응징이 사라지고 용서와 용납이 있는 세상.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입니다.
성경의 이상과 하나님의 통치의 이상이 ‘평화’ ‘샬롬’입니다. 우리는 말과 삶을 통해 하나님나라의 통치와 평화를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평화’와는 거리가 멉니다. 여전히 노동하다가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는 이들이 많습니다. 숨막히는 입시경쟁으로 꽃들이 지는 세상입니다. 수많은 택배노동자들의 노동으로 우리의 일상의 평화를 누리는 세상입니다. 귀를 열고 눈을 열면 지구촌 곳곳에서 내전과 전쟁으로 고통받는 세상입니다. 다르다고 차별받고 경쟁에서 뒤쳐졌다고 배제받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보냄받은 우리의 일상과 삶의 메시지와 증거는 평화이어야 합니다. 우리 삶에 참된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나고 그 참된 평화를 들려주고 살아내는 삶이 우리가 전해야 할 메시지입니다. 참된 평화를 살아내고 전하는 우리의 삶이길 바랍니다.
4. 보냄받은 자의 기쁨
보냄받은 70인이 돌아와서 예수님께 기뻐하며 보고합니다. 17절/ "주님, 주님의 이름을 대면,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
제자들은 놀라운 경험을 합니다. 귀신들이 떠나가고 자유가 선포되고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 일이 너무너무 기뻐서 예수님께 기쁨으로 보고합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보냄받은 이들이 하나님나라를 증거하는 것이 단순한 일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18절/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 이 말씀은 단순히 귀신이 쫓겨난 것을 넘어,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서 승리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보냄받은 자리에서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보잘 것없고 별거 아닌 것 처럼 보일지라도 그 삶을 통해 하나님은 일하시고 천상에서는 커다란 전투에서 승리가 일어나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보내심을 따라 살아내는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선포되고 악의 세력이 흔들리며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덧붙이십니다. 그런데 있잖아. 너희가 정말로 기뻐해야할 것은 20절 귀신들이 너희에게 굴복한다고 해서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보냄받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성공과 실패하는 일에 너무 일희일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더욱 중요한 근원적인 기쁨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영원하고 근원적인 기쁨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것으로 참된 기쁨을 삼으라고 하십니다.
눈에 보이고 결과적으로 나타는 일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일은 쉽습니다. 그러나 근원적인 기쁨은 우리가 그것을 기쁨으로 삼고 발견하고 추구할 때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 얼마나 보배롭고 기쁜일인지 기억하고 되뇌일 때 참된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할 때 작은 성취와 성공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근원적인 기쁨이 우리의 존재와 삶을 지탱하고 보냄받은 삶을 굳게 살아가게 할 것입니다.
웅덩이와 샘.
주님이 주시는 참된 기쁨과 평화가 우리의 존재 근원에서 솟아나고 울려나길 바랍니다.
보냄받은 사람-나아만집의 이스라엘 소녀
말씀을 마무리하며 보냄받은 삶을 살았던 인물이 어쩌면 엘리사 시대에 나아만 장군 집의 소녀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포로로 끌려간 소녀. 취약하고 의존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그러나 소녀의 마음에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가 깃들어 있었던 것 같다. 나아만의 병든 상황을 듣고 원수의 장수가 낫기를 바라며 엘리사를 만났으면 하고 알려준다. 평화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스라엘의 야훼가 시리아의 신보다 위대하다.는 메시지. 당시 한명의 사람으로 인정되지 않던 가장 취약한 포로된 소녀에 의해 시작된 나아만의 치유. 왕궁에 있던 이스라엘의 왕보다 선지자보다 이름없는 한 소녀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 보냄받은 자리에서 보잘것업어 보이는 순종과 평화를 추구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나라의 성취를 이루어 가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