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본문
Celebration

어제는 예배팀 모임을 했습니다. 예배팀 모임에서 한번씩 책을 읽고 나누는데 이번에 읽은 책이 리치 빌로다스의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빚다'라는 책이었습니다. 원서의 제목은 ‘Good and Beautiful and Kind: Becoming Whole in a Fractured World’ 으로 선하고 아름답고 친절함. 분열된 세상에서 온전해지기입니다. 적대적이고 분열된 세상에서 예수님처럼 선하고 아름답고 관대한 삶을 살라고 초대하고 있고, 그 길에 이르는 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읽을만한 책 없나 찾고 계신분들은 일독을 권합니다.
책의 인상적인 부분은 첫장에 죄에 대한 정의였습니다. 저자는 죄를 사랑하지 않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어거스틴의 Incuruvatus in se(인쿠루바투스 인 세)의 개념을 빌어와서 자기 안으로 굽은 사랑이 죄의 핵심, 정의라고 이야기합니다. 가장 큰 계명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가장 큰 죄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이 계명을 거부하고 벗어난 것이라고 말합니다.
죄는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죄는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안으로 굽어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깨어지고 분열된 세상에서 우리는 그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죄는 타자를 향해 나아가야 할 사랑을 자기 안으로 굽게 만들고, 사랑과 선함과 관대함을 잃어버린 삶을 살게 합니다.
죄를 단순히 피해야할 어떤 것으로만 생각하니 도덕적인 우월주위에 빠지게 되고 하나님을 기뻐하지도 자기 경계를 넘어서 타자를 사랑하지도 않으니 기독교는 세상에 위선적인 종교로 비춰지게 됩니다.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지만 정작 삶에서는 선하고 아름답고 관대함을 찾을 수 없는 선을 긋고 배제하고 혐오를 일삼는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종교의 모습이 오늘 사회에 비춰진 교회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에게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물어온 율법교사가 위선적인 종교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제사장, 레위인의 모습이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듯 하지만 하나님을 전혀 닮지 않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우리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나에게 굽은 사랑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닮고 세상에서 선하고 아름답고 관대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영생은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율법교사가 예수님에게 하나의 질문을 하는 것으로 시작을 합니다. 그것은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입니다. 영생에 대한 질문입니다. 무엇을 해야,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느냐는 질문입니다. 그 질문에 예수님은 다시 반문하십니다. “당신이 율법교사이니 율법에는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습니까?” 그러자 당연한 듯이 이 율법교사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라고 답합니다. 그렇게 정답을 이야기하는 율법교사에게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로 행하십시오. 그러면 살 것입니다.”라고 답하십니다.
이 대화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영생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 삶을 사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영생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하고 그것을 살아내는 것이 영생의 삶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영생을 영혼만 둥둥 떠다니는 상태로 영원한 삶이 이어지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말하고 있듯이 영생은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는 것은 지식적인 차원이 아니라 경험적 존재적 차원의 앎입니다.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머무는 삶으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은 한분이시면서 세분이시며 세분이시면서 한분으로 신비의 연합으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경계를 넘어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사랑으로 세상을 만들고 사랑으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랑으로 사람을 구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하나님을 아는 것은 사랑을 아는 것이고, 영생은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앞서 소개했던 책의 내용대로 하자면 자기 안으로 굽어진 사랑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이 영생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은 사랑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나라를 누리는 것. 자기를 넘어서서 선하고 아름답고 관대한 삶을 사는 것이 영생이요, 그리스도인의 삶이요, 참 하나님을 아는 삶입니다.
보고 지나갔다 vs. 보고 가까이 가서의 차이
예수님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행동과 사마리아인의 행동의 차이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을 보고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가까이 가서 돌보고 끝까지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33절에 사마리아인이 제사장과 레위인과는 달리 다른 반응을 보인 이유는 그의 마음에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피하여 거리두기하며 지나친 것은 여러가지 마음의 동기가 있겠지만 자기 안에 굽은 사랑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이 자기 안에 굽은 사랑를 넘어서서 강도만난 사람을 향해 이웃을 향해 나아가게 한 것은 바로 측은히 여긴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 가엽이 여기는 마음, 그대로 두면 안되겠구나 하는 마음이 그를 자기 안에 굽은 사랑에서 타자를 향한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나게 만들었습니다.
여기 측은히 여기다라는 원문의 단어는 스플랑크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 splanchnizomai)로 신약성경에 12번 가량 사용되고 있습니다. 내장 창자를 어원으로 파생된 것으로 창자는 고대 헬라 문화에서 감정의 중심으로 여겨졌습니다. 우리말에 애끓는다는 말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측은히 여긴다는 것은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깊은 공감과 행동으로 이어지는 자비와 긍휼(compassion)의 의미로 예수님과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비롭고 긍휼한 하나님으로 묘사됩니다. 긍휼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라훔은 자궁이라는 레헴이라는 어원을 갖고 있고, 어머니가 자신의 자녀에 대한 깊은 애정과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심히 마음 아파한다는 의미도 갖고 있는데 솔로몬이 한 아이를 두고 자기 아이라고 다투는 두 엄마 사이에서 재판하는 이야기 속에 등장합니다. 아이를 둘로 갈라서 각각 나눠주라는 판결에 진짜 엄마가 보인 반응이 라훔입니다. 심히 마음 아파했다. 마음이 불타올랐다라는 표현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같은 마음으로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돌보시고 이끌어 오셨다는 이야기가 성경 곳곳에 나타납니다. 긍휼과 자비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고 말씀하셨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닮아 자비와 긍휼의 성품을 입어 그러한 삶으로 나타나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타자에 대한 깊은 연민, 자비와 긍휼이 자기 안으로 굽은 사랑을 넘어 온전한 사랑으로 나타나게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섬긴다고 자부했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서 지나쳐 갔습니다. 그렇게 행동한 여러 동기들이 있었겠지요. 바쁘거나, 죽은 사람을 만지면 부정해진다거나, 함정일지 모른다거나, 자신도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두려움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마음의 동기들은 자기 안으로 굽은 사랑. 인쿠루바트스 인 세 일뿐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으로부터 경멸과 혐오의 대상이었던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가까이 가서 그를 돌보고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의 마음 안에 측은히 여기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 자비의 마음이 일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정죄를 받아 지옥의 땔감정도로 취급받던 그 사마리아인이 하나님을 닮아 있고 타자를 향한 온전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이야기가 들려질 때 질문을 했던 율법교사와 이 이야기를 처음 접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저 따위 사마리아인이 하나님을 더 닮아있다고???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는 제목을 붙여 오랜동안 들어왔기에 사마리아 사람이 선하다는 인상이 있습니다. 사마리아인 = 착한 사람, 선한 사람. 그러나 당시 율법교사와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인은 죄인, 악한 사람, 경멸의 대상이요 혐오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자신들은 선민으로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으로 취급할 뿐이었습니다. 그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을 한 율법교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까?라고 묻는 질문에 율법교사는 사마리아인의 사자도 붙이지 않습니다. 차마 입에도 올리기 싫은 단어였던거지요! 대신 그는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표현할 뿐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강도만난 이웃에게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우리도 어쩌면 제사장과 레위인과 다를 바 없이 보고서 지나치고 있는 삶을 살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자신이 없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 수 없다는 논리로, 나 조차도 감당하기 힘든데 어떻게 하며 자기 안으로 움추러 든다면 우리도 어쩔 수없이 자기 안으로 굽어진 사랑. 인쿠루바투스 인 세의 삶의 살뿐일 것입니다. 인쿠루바투스 인 세를 넘어서는 삶, 자기 안으로 굽은 사랑을 타자를 향해 나타낼 수 있는 삶은 측은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얻지 못한 다면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매주 드리는 예배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마음과 존재가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 성품으로 빚어지지 않는 다면 영생의 삶에서 거리가 먼 것일뿐입니다. 하나님을 신앙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는 삶은 자기 안으로 굽어진 사랑을 펼쳐서 궁극적 타자이신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타자인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나는 삶입니다. 우리 안에 측은히 여기는 마음, 누군가의 불행과 곤경을 차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마음, 그래서 그 앞에 멈춰 서고, 그를 위해 시간과 물질과 삶을 쓸 때 비로소 우리는 믿음의 자리로 영생의 삶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엎드려 구합니다. 자기 안으로 굽어진 사랑. 자기 중심적인 존재의 변화는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할 때 일어납니다. 내 안에 선함이 없고, 아름다움이 없고, 관대함이 없음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선함과 아름다움과 관대함을 입혀달라고 구할 뿐입니다. 잘아는 사마리아인의 이야기 앞에 읽고 보고 지나칠 수 있지만 정직하게 머물러 섭니다. 그리고 죄를 이기시고 참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님 앞에 엎드립니다. 주님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주님 나를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나로 향해 굽어진 사랑을 펼쳐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온전한 사랑의 삶을 살게 해주십시오. 나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마음을 허락해주십시오라고 구할 뿐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을 닮아 존재와 삶에서 사랑이 나타나고 드러나게 해달라고 나로 굽어진 사랑을 타자를 향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그 삶을 실천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사랑하는 맑은물 가족이. 그리고 지금 함께 모여 예배하고 삶을 나누는 가정교회 가족이 영생을 누리고 나를 넘어서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나길 바라고 기도합니다.
자기 안으로 굽어진 신앙의 위험성.
여기서 우리의 믿음과 신앙의 내면의 변화와 성숙함 없이, 하나님을 닮은 사랑의 삶없이 나타날 때 위험성 두가지를 살피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첫번째는 율법교사의 예입니다. 그는 성경을 오랜동안 아주 많이 읽고 연구한 학자요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성경읽기와 성경의 지식은 자기 안으로 굽어 있었습니다. 그는 먼저 성경의 지식을 시험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그가 예수께 와서 영생에 관한 질문을 하고 있지만 그가 정말로 영생의 길이 궁금해서 구도자의 질문을 던진 것이 아니라 당시 유명하다는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 보이려고, 자신을 자랑하려고 “그럼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의 성경읽기는 자기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 안으로 향하고 있고, 성경 읽기를 자기 안에 가두어 놓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성경의 진리는 알지만 정작 삶을 살아내지 않는 아는 것과 삶의 괴리가 큼에도 불구하고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성경을 좀 읽고, 책도 읽고, 공부를 한 사람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제가 IVF를 통해 PBS라는 귀납적 성경연구를 배우고 말씀을 좀 알게 되었을 때 보인 반응과 거의 유사합니다. 물론 비평적으로 설교를 들어야 합니다만 예배시간 설교를 들으면서 이건 아닌데…. 문맥이랑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게 아닌데 하며 나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이 아니라 평가하고 비판하고 점수를 매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큐티나눔을 하거나 성경공부를 하면 논쟁적이거나 내가 좀 더 독특하게 말씀을 해석했다는 것을 자랑하려는 마음이 많이 컸던 것 같습니다. 전형적인 자기 안으로 굽어진 성경읽기였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오랜동안 반복해서 꾸준히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성경읽기와 묵상이 나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우리는 율법교사와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많이 알지만 정작 삶이 없는, 성경의 정답은 알지만 정작 영생과는 거리가 먼. 그러면서도 이런 괴리와 갈등을 인식하지 못하고 문제점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벌거벗은 임금님과 같은 모습일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나를 넘어서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지만 성경에 의해 우리가 읽혀져야 합니다. 말씀이 단순히 내 마음을 위로하고 기분좋게 하는 것을 넘어서서, 말씀이 단순히 자기 개발과 지적인 호기심을 넘어서서 먼저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야 합니다. 말씀이 수술하는 칼과 같다는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그 말씀이 나를 해부하고 새롭게 하는 말씀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말씀을 내 안에 가두지 않고 나를 통과해 지나가며 내 삶을 변화하고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나보다 크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개인 경건을 넘어서서 공동체와 사회의 정의를 추구하는 삶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펼칠 때 하나님 오늘도 나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내가 겸손히 듣겠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읽고 그대로 살아갈 힘과 용기를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저에게 있는 위험성입니다. 설교를 위한 성경읽기와 묵상으로 그칠때가 많습니다. 말씀이 먼저 나에게 부딪혀와야 하는데 누군가를 향한 말씀으로 먼저 읽힐 때가 많습니다. 설교자리에서 말씀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삽시다라고 말하면서 정작 나는 그 삶에서 거리두기를 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도 많습니다. 말씀 앞에 진실하고 정직할 수 있기를… 수많은 미사여구와 멋진 말과 신학적 지식이 아니라 깨달은 한 말씀을 나눌 수 있기를… 아니 나에게 그 깨달음이 있기를… 깨달은 말씀대로 살아낼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있기를 구합니다.
두번째이면서 마지막은 오래된 종교생활입니다. 종교생활은 오랜동안 하며 살아온 사람은 많지만 참된 신앙인의 삶을 사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믿은지 십수년이 지났지만 그의 인격과 삶에 전혀 변화된 흔적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예배를 지키고 기도하고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지만 거기까지 입니다. 종교생활 또한 자기 안으로 굽은 경우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교제하고 만남의 모든 과정이 어찌보면 하나님을 대면하고 만나는 과정일텐데 그 오랜 생활 종교생활을 하면서 정작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게 아닐까요? 하나님을 대면하고 만나면 성품과 삶에 하나님을 닮은 변화가 나타나고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야 할텐데 더 자기중심적이고 육신의 열매만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사장과 레위인은 누구보다도 성전에서 오랜시간을 보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강도만난 이를 보고서 거리두기 하며 의도적으로 지나쳐가버립니다. 그들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긍휼, 자비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안타까워하고 측은히 여기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성전에서 오랜시간을 보냈지만 정작 그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자기 안으로 굽은 종교생활만 할 뿐이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삶을 산다는 것은 구도자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신앙생활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대면하여 만나고 죄에서 나를 자유케 하시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삶을 사는 것.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이 작은 마음에 하나님의 마음을 품어내는 것. 내 존재와 삶에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이 묻어나는 것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삶이 아닐까요? 신앙이 오래되고 예배에 꼬박꼬박 참여하고 가정교회로 열심히 모인다고 한들 하나님의 사랑이 내 존재와 삶에서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사람들이 교회에서 등을 돌리고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가는 이유는 어쩌면 교회 안에서 신앙의 실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종교생활을 하는 교회 안 성도들보다 신앙의 갈등과 고민을 하며 신앙을 찾아가는 교회 밖 성도들의 모습에서 오늘 우리 맑은물은 어떤 교회로 어떤 공동체로 존재해야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봅니다. 우리의 맑은물과 각 가정교회의 모임과 예배와 만남에 참된 하나님을 대면하고 만나는 경험이 일어나고 있는지? 나는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지? 우리 서로가 하나님과의 만남을 격려하고 도전하고 있는지? 살펴보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경험이 우리 존재와 삶을 변화시키고 있는지? 우리의 관심과 사랑과 삶이 우리 안에만 머물고 있는건 아닌지? 이웃과 사회와 온 세계와 피조세계를 향해 나타나고 있는지 질문하고 이런 지향과 삶의 열매가 나타나길 소망합니다.
맑은물이 종교생활이 아니라 진정한 구도자와 신앙의 삶을 지향하고 살아내는 우리이길 바랍니다.
그대로 행하여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예수님은 영생에 관한 질문에 그대로 행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하십니다. 그리고 이웃에 관한 질문에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웃을 내 안으로 굽히지 말고 가서 이웃이 되는 삶으로 이웃에게로 사랑을 펼쳐 살라고 하십니다.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라고 하십니다. 종교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넘어서 자기 밖을 향해 사랑으로 삶을 살아내라고 하십니다.
영생은 자기 안으로 향했던 사랑을 바로 펼쳐서 하나님을 향하고 이웃을 향해 사랑으로 나타나는 삶입니다. 사마리아인처럼 고통받는 이웃에게 가까이 다가가 자신의 시간과 물질을 허비하며 자비를 베푸는 삶에 영생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강도만난 이웃은 누구입니까? 오늘 나에게 지극히 작은 소자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이들에게 어떤 반응을 보이고 어떻게 행동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자기 안으로 굽어진 것을 펼쳐서 이웃을 향하게 하여라.
내 안으로 굽어진 사랑을 펼쳐서 이웃에게로 향하는 사랑의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길 바랍니다. 우리 존재와 삶 안에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선하고 아름답고 관대한 삶이 나타나길 기대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