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소서
본문
Celebration

함께 나누어봅시다.
기도 어떻게 하고 있나요? 평소 기도생활은 어떻게 하고 있나요?(시간, 주기, 장소, 방법 등)
기도에 대해 궁금한 것(어려운 것)은 무엇인가요?
어떻게 하면 기도를 잘 할 수 있을까요?
기도와 관련해서 필요는 무엇인가요?
1. 기도는 배우고 훈련해야 한다.
기도생활의 어려움은 배우고 훈련할 프로그램이나 코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IVF라는 단체에서 성경묵상, PBS, 성경개관은 많이 배우고 가르쳤지만 정작 기도는 잘 배우지 못했던것 같습니다. 그저 하는 것으로 익혔습니다. DPM(Daily Prayer Meeting)을 하면서 정신과 가치 안에서 기도한 것 같습니다.
기도가 무엇인지? 어떻게 기도해야하는지? 무엇을 기도해야하는지? 기도가 막히고 안될 때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등은 잘 배우고 훈련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기도를 잘하고 싶고, 깊이 있게 하고 싶지만 정작 기도의 삶은 늘 제자리 걸음인 것 같습니다.
제자들도 그랬을 까요?
제자들이 기도를 열심히? 꾸준히? 잘? 하시는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복음서 곳곳에는 예수님이 기도하셨다는 이야기가 종종 등장합니다.
예수님에게는 기도가 삶의 근간이었습니다. 새벽에도 밤에도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앞둔 순간에도 기도하셨고 제자를 세우기 전에도, 오병이어 직후 사람들이 억지로 왕으로 옹립하려 했을 때도 제자들을 먼저 보내고 따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늘 기도를 중심으로 사셨습니다.
기도가 삶의 근간이셨던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고 말씀하셨고, 인간의 삶을 사시는 동안 아버지의 보냄받은 일을 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을 성취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곁에서 지켜보던 제자들은 많이 궁금했을 것 같습니다. 기도가 무엇인지? 예수님은 어떻게 기도하시고 무엇을 기도하시는지? 그래서 예수님에게 요청합니다. 기도를 가르쳐주십시오!!!
제자들의 요청에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답하시고 기도를 가르치십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이 기도를 계속 가르치시고 훈련하시지 않았을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기도의 가르침을 받고 기도의 훈련을 했을 것 같습니다.
기도는 배워야 하고 훈련되어야 한다.
기도의 방법중에 자주 등장하는게 ACTS기도와 다섯손가락 기도가 있습니다.
ACTS기도. Adoration / confession / thanksgiving / supplication
5 finger prayer/ 엄지-말씀에 순종 / 검지- 국가와 민족 / 중지- 교회와 직분자 / 약지-가정, 환우, 사업채 / 소지-자신의 영혼/// 하나님/ 감사/ 회개/ 간구/ 아멘
이런것은 기도를 처음배우고 몇가지 기도의 자세와 순서를 익히는데 도움을 줍니다. 하지만 아쉬움이 남습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를 통해 기도가 무엇인지? 어떻게 기도해야하는지?를 배우고 기도를 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운동은 자세가 중요하다.
자세가 안좋으면 실력이 늘지도 않고, 잘못하면 부상을 입고 몸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에도 모범이 있습니다. 기도의 자세를 익히고 훈련하는데 가장 좋은 것이 주기도문일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오랜동안 예배 마칠 때 외우는 기도문 정도로 생각을 많이 해왔습니다. 목사님 없을 때 예배 마치는 신호였습니다. 축도대신 하는 것. 하지만 주기도문이 담고 있는 의미를 한구절씩 곱씹어 본다면 큰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시중에 주기도와 관련된 책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김기석목사의 주기도나 김형국 목사의 주기도문을 추천합니다.관심있는 분들. 열심이 있는분들은 찾아서 보시길 바랍니다.
기도를 잘못배워서 영혼이 상한 경우의 대표적인 형태가 최근에 뉴스를 통해 나타났습니다.
김장환목사의 기도. 채해병 특검을 통해 드러난 기사입니다. 그는 이렇게 설교시간에 말했습니다.
“‘사단장을 살려주라’고 그랬으면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야. 나는 기도해 준 죄밖에 없어. 그게 대한민국의 위법이라면 공산당 나라보다 더한 나라예요. 왜 아멘 안 하지?”기도한 죄밖에 없다고 말하는 그의 말에 기도한 죄. 기도를 잘못한 죄를 매길 수 있지 않을까요? 기도를 잘못하면 죄가 된다.
오랜동안 권력의 정점에 있으면서 자기 안으로 굽어진 사람의 기도입니다. 자기중심적이고 하나님의 마음에 일치되지도 않습니다.
그의 그도는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지는 몰라도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사라지고 자신의 생각과 욕망과 자아를 향해 기도할 뿐입니다.
또다른 기사가 있습니다. 전국적으로 아니 세계적으로 유명한 다니엘 기도의 어두운 그림자에 대한 기사입니다. 다니엘 기도를 운영하기 위해 사람을 쥐어짜서 결국 죽음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3주간 63시간동안 쉬지도 못하고 방송실에서 일하다가 과로사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교회가 보여주는 태도는 전혀 정의롭지도 상식적이지도 않았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멋드러지게 감동적이게 대중적으로 하더라도 전혀 하나님과 일치를 보지 못한 모습입니다. 성공적인? 기도회 이면에 어둡고 부끄러운 단면을 보여줍니다.
기도를 잘못하면 영혼이 상하고 뿐만 아니라 타인까지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기도의 전형적인 잘못된 예일 것이다.
이번주 두 기사를 접하며 참 안타깝고 부끄러웠습니다.
기도는 무엇이고, 어떻게 제대로 기도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하면 하나님과 일치를 보이고 영혼이 회복되고 사람을 살리는 기도를 할 수 있을까요?
짧은 시간에 주기도문을 다 나눌 수는 없습니다. 앞서 언급한 영상과 책을 참고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부족하지만 작년 상반기에 어린이 설교로 주기도문 시리즈를 주욱 했는데 유투브에서 찾아서 그부분만 보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기도는 사귐이다. 관계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한 뒤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십니다.
당시 제자들에게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신 예수님의 파격적인 부름이 얼마나 충격적이고 감동적이었을지 생각해보십시오. ‘아바’ ‘아빠’ 라 부르라고 초대하십니다. 야훼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부를 수 없어서 ‘아도나이’로 고쳐부르고 성경을 필사 할때는 야훼라는 단어가 나오면 목욕재개를 하고 적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이름은 신성시되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아버지, 아빠라고 부르라고 예수님은 초대하신겁니다.
기도가 단순히 종교적인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통한 사귐임을 말씀하십니다. 관계적이고, 가족적이고, 친밀한 것입니다. 제자들의 기도에 대한 관점과 전재를 뒤집어 놓으셨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아버지, 아빠라고 부르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기도는 관계적이고, 가족적이고, 친밀한 것입니다. 기도는 사귐입니다.
인생에서 따뜻하고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려봅시다. 기도가 그런 자리임을 상상해봅시다. 저멀리 낯설고 권위적이고 심술궂은 할아버지가 아니라 나의 존재의 근원이시고 나를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시고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시고 무한한 사랑으로 나를 채워주시는 아버지(어머니)같은분과 함께 친밀한 관계로 사귐으로 나아가는 자리임을 기억합시다.
아버지. 아빠라고 불러봅시다. 아버지가 그런 느낌이 안난다면 어머니라고 불러봅시다.
지금 우리 곁에 우리와 함께 하시며 나보다 더 가까이 계신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봅시다.
많은 말 하지 않아도 그저 함께 있는 것 만으로도 행복하고 즐거운 만남과 사귐이 여기 있습니다.
기도가 관계적이고 사귐이기에 기도를 하면 할 수록 우리는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닮아갑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면 할 수록 하나님 안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 점점 나다워집니다. 이것이 사귐의 기도가 가진 아주 큰 특징입니다. 기도를 할 수록 하나님과 조율되고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2. 기도는 하나님과 조율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한 뒤에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고,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 그분을 바라봅니다. 그분의 영광과 거룩함이 눈에 들어오고 내 전 존재와 삶이 하나님의 뜻에 맞춰지길 열망하고 그 뜻을 구하게 됩니다.
아버지를 부르고 당장에 나의 필요와 욕망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의 근원이신 나보다 나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 먼저 시선을 고정하고 그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이 그리고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와 사랑이 가득하길 바라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기도에 있어서 먼저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공명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일치되는 것입니다.
악기를 가져와서 무턱대로 연주하고 플레이하기 전에 조율을 먼저합니다.
먼저 각 현마다 조율되어야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조율되지 않은 악기의 소리는 소음일 뿐인거죠.
지난번 설교에서 리치빌로다스의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빚다’라는 책을 소개했습니다.
사람을 자기 안으로 굽어진 존재로 올바른 사랑을 할 수 없는 존재로 죄를 정의했습니다.
안으로 굽어진 존재가 하나님을 만나면 조율됩니다. 안으로 굽어진 것이 밖으로 펼쳐져 진정한 타자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존재로 빚어집니다.
자기 안으로 굽어진 존재는 하나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굽어진 것이 펼쳐질 수 있습니다. 기도는 어쩌면 안으로 굽어진 것을 펼치는 과정일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 안에서 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조율되고 하나님의 뜻에 조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를 드려봅시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조율하시도록 내어 드립시다.
나의 몸과 마음과 전 존재를 하나님께 내어드립시다.
나의 꿈과 지향과 욕망과 모든 것을 맡겨드립시다.
풍삶기에서 배웠듯이 이제 나는 주님의 것이 되었으니 나를 주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주님의 뜻에 일치되도록 빚으시고 다듬으시도록 내어드립시다.
그분이 나를 빚으시도록
조율되지 않아 듣기 싫은 소음이 아니라
조율되고 최고의 연주가의 손에 들려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삶이 되길 기도합시다.
안으로 굽어지고 틀어진 정서와 영혼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새롭게 되고
나의 인격과 삶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길 기도합시다.
3. 기도는 이제 시작이다.
하나님과 조율된 존재가 이제 필요와 관계와 세상을 위해 기도합니다.
나의 일상의 필요를 구하고, 바른 관계속에서 살아가길 소망하고(용서하고 용서받는), 악한 세상에서 보호를 위해 기도합니다.
과도한 나의 욕망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의 필요를 구하는 것입니다.
유진피터슨은 오늘의 본문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든든한 세 끼 식사로 우리가 살아가게 하소서.”
네끼 다섯끼가 아닙니다. 호화로운 부페나 오마카세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의 필요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른 관계를 구합니다. 평화의 삶을 구합니다. 깨어지고 앙갚음 하는 세상에서 용서받은 자로 용서하고, 또 용서를 구하고 용서받는 바른 관계 속에서 평화를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구합니다.
우리가 인지하든 인지하지 못하든 실제적인 악이 있고 악한 세력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도우심을 구합니다.
우리는 자본주의와 소비주의 시대를 삽니다.
돈을 벌고 마트를 가고, 쿠팡과 컬리를 주문하면 우리의 필요가 채워지는 세상에 삽니다.
관계에서 서로 맞지 않고 불편하면 단절하고 댓구하지 않습니다. 용서하고 용서받을 줄 모르기에 아니 싫기에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저 적당한 거리와 피상적인 관계속에 머물고 맙니다.
공중에 권세잡은 자는 사회의 구조와 질서속에서 우리의 자유를 뺏고 나도 모르게 악에 가담하게 만드는 구조적 악의 사회체계 속에 삽니다.
성경은 우리 존재를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아니면 하루도 제대로 숨쉬고 살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숨을 불어 넣으시지 않으면 우리의 호흡은 그치고,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가 없다면 우리는 이미 서로를 파멸로 이끌었을 것이고, 하나님의 정의와 선이 없다면 우리는 악에 물들어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기도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관계에서 주님의 자비와 용서를 닮아 용서로 나아가고, 악한 세상에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진실하고 허물없이 삶을 살아가도록 보호를 요청하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함을 고백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한다는 고백의 언어입니다.
오늘 나의 필요와 우리 가정, 우리 가정교회의 필요는 무엇입니까?
회복되어야 할 관계와 용서하고 용서를 구해야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신앙 안에서 자유를 잃고 죄에 얽매이거나 어려움을 겪는 지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구합시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시다. 우리의 아버지께 우리의 필요를 가지고 나아갑시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도록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길 기도하고 구합시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그러면 오늘 이 주기도문의 모범훈련교본의 맥락에서 이후의 이야기들을 살펴봅시다.
무엇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것일까요?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들을 끈질기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받아지고, 찾아지고, 열려지는 것일까요?
한때 유행했던 긍정의 힘, 잘되는 나등으로 알려진 조엘 오스틴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끌어당김의 법칙의 기독교버전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그에게 “번영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라는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가 전하는 메시지는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축복이 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에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당신의 꿈이 좀 더 높은 곳에 이르기 원하고 위대한 일을 하기 원하고 인류를 돕기 위해 돈을 벌고,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기를 원한다면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문제를 삼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타적인 말로 포장한 자기 욕망의 극대화가 아닐까요?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끈질긴 기도를 말하는 거는 맞습니다. 기도에 몰두하고 꾸준히 반복해서 끈질기게 구해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요?
기도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 1번 두르면 원하는 것이 나오는 자판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벽을 만나고,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이 맞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한계에 부딪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끈질기게 반복해서 간청해야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것이 나의 욕망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밤에 찾아온 친구 이야기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이야기의 맥락은 밤늦게 찾아온 친구를 위함입니다. 나그네가 온 것입니다. 고대근동이나 유대문화에서 나그네를 환대하고 대접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사회문화였습다. 그런데 우리집에 이 친구를 대접할 음식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급히 다른 친구에게 음식을 빌리러 간겁니다. 근데 난처한 상황입니다. 밤이 너무 늦어 자는 친구를 그 친구뿐 아니라 친구의 가족들까지 깨워야 하는 상황입니다. 친구는 귀찮다고 뭐하는거냐고 부탁하는 친구들 돌려보내려합니다. 그때 친구의 정이 아니더래도 간청하는 절박함을 보고 부탁을 들어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누구를 위한 간청입니까? 누구를 위한 끈질김입니까? 자신이 아닙니다. 이웃입니다. 나그네입니다. 나의 친구를 위함입니다.
나의 한계를 직면하고 어렵고 난처한 상황 속에서 간청하고 끈질기게 구하라는 것입니다.
맥락이 눈에 들어오십니까? 나의 필요와 욕망이 아닙니다.
타자를 위한, 이웃을 위한, 친구를 위한, 세상을 위한 간구와 간청과 끈질김입니다.
사실 나를 넘어서서 사랑을 할 때 우리는 한계에 부딪칩니다. 나의 경계를 넘어 설떼 어렵고 난처한 상황을 만납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끈질긴 간구입니다. 내 힘으로 안됩니다. 도와주셔야 합니다. 나의 자원의 한계를 경험하고 어려움에 직면할 때 주저 앉고 머뭇거리고 뒤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끈질기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도전입니다.
기도는 어렵습니다. 꾸준히 반복해서 간청하고 끈질기게 기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본성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지난주 취임예배를 드렸습니다. 맑은물 가족의 지지와 사랑을 느끼며 참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그러면서 부담이 있습니다. 아무리 상호돌봄과 주체성과 자발성을 강조하지만… 리더가 없는 언리더를 이야기하지만 그럼에도 소위 영적이라는 부담이 있습니다. 내 힘으로, 내 지식으로, 내 경험으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하셔야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으면 나는, 맑은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작년 은퇴예배 이후부터 이래저래 교회를 떠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내 탓이 아니라고 되뇌어 보지만 어쩔 수 없는 나의 부족함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하나님께 엎드려야 하지만,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하지만… 넉놓고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를 봅니다. 오늘 이 말씀은 저를 향한 도전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벗됨을 인하여는 아닐지라도 끈질긴 간청으로 줄 것이라는. 맑은물 가족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구하고 그분을 닮아가는 사람이길… 인격과 삶에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길… 그렇게 하나님이 일하시길 도우시길 기도하고 엎드리고 간청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내가 만나는 한계는 무엇입니까?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하는 상황은 무엇입니까?
나의 지식과 경험과 능력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자리는 무엇입니까?
함께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맑은물 가족이 되길 바랍니다.
아버지 이야기
친구의 이야기가 이타적인 삶에서 나타나는 한계상황의 기도라면
아버지의 이야기는 나의 필요를 구하는 기도의 이야기입니다.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아버지를 신뢰하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졸라대지 않아도 됩니다.
아버지는 이미 아시고 나에게 선한 것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그러니 조급해하거나 안달하거나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저 아버지를 신뢰하고 신뢰함으로 간구하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짜다보니 집에서 밥담당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뭐 먹고 싶다고 하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먹고싶은 것을 사주거나 해주게 됩니다. 무언가 갖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못해주는 거지만 마음 한켠에서는 이미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는 저를 발견합니다.
이게 아버지 마음, 부모의 마음이 아닐까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똑 같다는 것입니다. “악한 부모라도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너희 하나님 아버지일까보냐?”
하나님 아십니다. 더 좋은 것으로 우리를 채우시고 먹이시고 입히시는 분이십니다.
좋으신 아버지께 신뢰함으로 구합시다.
지금 나의 필요는 무엇입니까?
아빠 나 이거 먹고 싶어요. 우리 아이들이 그렇게 요청하듯이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편한 마음으로 구하고 기도합시다.
함께 기도하시는 성령
기도 참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낙망하거나 포기하기는 이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아니 이미 주셨습니다.
로마서는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성령이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성령이 우리와 더불어 간구하십니다. 성령이 이미 기도하셨고, 기도하고 계시고 기도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기도하셨고, 기도하고 계시고, 기도하실 성령 안에서 성령과 더불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의 사귐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뜻에 조율되어
기도하는 이들에게 성령이 함께 계십니다.
성령의 기도학교에서 함께 기도를 배우고 훈련함으로 기도가 우리 삶의 근간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