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본문

Celeb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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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가을이 왔습니다.

지난 목요일 7일이 입추였습니다. 가을이 왔습니다. 아직도 여름인듯 덥지만 여름이 지나고 있고 가을이 시작되었습니다. 언제 이 더위가 꺽일까? 이렇게 더워서 어떻게 사노?하며 염려하고 걱정했지만 때가 되니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고, 시간이 차니 가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때가 되면 계절이 바뀌고 변하듯이 때가 차면 하나님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시간이 다가오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일하시심을 신뢰하며 오늘 하루를 신실하게 살아가는 우리 맑은물이길 바랍니다.


잠시 나누어봅시다.

요즘 나의 삶에서 내가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본주의와 두려움

자본주의는 우리의 불안과 두려움을 먹고 자랍니다.

‘뒤쳐질까봐’

‘모자랄까봐’

‘경쟁에서 밀릴까봐’

이런 두려움과 걱정이 소비를 부추기고 끝없는 노동을 정당화합니다.

미래에 있을 자유와 평안을 위해 오늘의 자유를 빼앗기고 오늘의 기쁨을 저당잡히는 삶을 삽니다.

광고와 SNS(인스타와 페북)는 우리에게 늘 부족함과 외로움을 느끼게 하고, 소비에 대한 갈증을 일으키게 합니다.

입시로 대표되는 교육과, 취업의 좁은문은 우리를 생존경쟁으로 밀어넣습니다.

학자금대출부터 시작된 빚진자의 삶은 이후 자동차 할부, 전세금 및 내집마련 대출, 심지어 휴대폰 약정까지 끝없는 빚진자의 삶으로 우리를 구겨 넣습니다.

나이는 들어가고 건강 걱정, 노후의 삶의 불안은 점점 커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안전, 안정을 찾기 위해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소비하고, 더 많이 쌓아두어야 하는 삶으로 내 몰립니다. 자본주의 삶을 학습하고 그것을 믿고 그것이 일상이된 삶을 삽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삶의 방식이 우리의 두려움을 해결하는게 아니라 더 지속적으로 생산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안과 염려, 두려움을 먹고 자란 자본주의 사회는 우리가 계속해서 두려움과 염려 속에 살아가길 부추깁니다.

결국 우리는 두려움을 피하려다가 두려움 자체에 잠식 당해버립니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관대하게 나누고 베풀며 자족의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기보다 경쟁하고 배제시키고 경계를 짓고 쌓고 축적하는 삶만이 남게 됩니다. 

적은 무리여 두려워말라!

제자들도 두려워했을까요?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적은 무리여 두려워말라!”

제자들은 무엇이 두려웠을까요?

오늘 본문의 전문맥을 살펴보면 지난주에 나누었던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에 이어서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꽃도 입히시니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인 너희들을 돌보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먼저 하나님나라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 것을 도전하십니다.

오늘 우리 일상의 염려와 고민처럼 제자들도 늘 생존과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을 안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사회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었고, 예수님을 따라 나서며 안정된 직업과 삶의 터전을 포기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점점 확장될 수록 당시 유대 사회의 지도층과 로마 제국의 견제와 감시, 미움과 핍박에 노출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당시 주류 사회와의 갈등과 사회적 소외와 물리적 박해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따라나섰지만 일상의 삶은 오늘의 생존에 대한 염려와 내일의 삶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사는 것이 제자들의 현실이었습니다.

이런한 제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보시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적은 무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애정과 사랑을 상상해봅시다.

생존의 염려와 미래의 불안을 안고 자신을 따라나선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애틋한 마음을 느껴봅시다. 제자들이 아니라, 베드로, 마태, 바돌로매, 안드레 한 사람, 한 사람 눈을 마주치며 그들의 상황을 알고 있으며 이해하고 있다고 깊은 공감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해봅시다.

적은 무리여는 ‘미크론 포인니온’으로 ‘작은 양떼’를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관계를 양과 목자의 관계로 자주 이야기하듯이 예수님은 사회적으로 소수이고, 보잘 것없고, 힘없는 존재였던 제자들을 이해하고 계시며, 그들을 아끼고 사랑하시고 돌보는 목자의 마음으로 그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일상에서 느끼는 불안과 염려과 걱정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동일한 음성과 눈빛으로 말씀하십니다.

“적은 무리여! 두려워하지 말아라!”

우리 삶의 연약함과 두려움과 염려를 아시는 주님께 우리가 가진 염려와 걱정과 두려움을 맡겨드립시다. 스스로 목자되려했던 삶을 내려놓고 우리의 참목자되신 예수님께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맡겨드립시다. 하나님의 먹이시고 입히시는 돌보심을 믿고 신뢰합시다. 

하나님나라를 몰입하라

“적은 무리여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그의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오늘의 생존에 대한 염려와 내일의 삶에 대한 불안으로 두려워하는 제자들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리고 있습니다. 땅의 염려와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말고 하늘 하나님의 풍성함과 기쁨에 몰입하라고 하십니다.

땅의 염려와 두려움을 이기는 것은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말만이 아니라 두려움을 이기는 하나님나라의 사랑의 통치와 다스림에 있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예수님이 오셨고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이 세상에 뚫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나고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중심에는 사랑과 능력으로 세상을 휩쓰는 주권이 있습니다.

오늘 생존의 염려와 내일 삶의 불안을 뛰어넘는 평안과 자족과 기쁨과 풍성함이 넘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돌보심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즐겁게 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이 넘칩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이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무엇을 더 아끼지 않으시겠습니까?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는 이가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기쁨으로 내어주실 것입니다.

생존에 대한 불안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두려워하지 말아야지!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를 향해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시고 돌보시는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 때 염려와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무서운 꿈을 꾸고 울면서 깼을 때 엄마아빠가 아이를 품에 안고 다독이기 시작할 때 엄마아빠품에서 안정감을 누리고 다시 잠자리에 들어가듯이 목자되신 예수님의 다독임을 통해 두려움에서 안정감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생존의 염려와 내일의 불안이라는 땅의 다스림이 아니라 베품과 관용과 자족이라는 하나님나라의 통치가 내 안에 임할 때 우리는 염려와 두려움에서 벗어나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땅의 염려와 미래의 두려움에 고정되어 있는 제자들의 시선을 하나님나라와 그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에게로 바꾸십니다. 유진피터슨이 메시지에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부분을

“하나님이 실체가 되시고, 하나님이 주도하시며,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삶에 흠뻑젖어 살아라. 너희 매일의 삶에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서 모두 채워주실 것이다.”

땅의 염려와 내일의 두려움을 이기는 삶은 하나님과 하나님나라에 몰입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염려가 찾아 올 때, 두려움이 밀려 올 때,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우리 삶에 이미 뚫고 들어와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나라를 열망합시다. 눈에 보이는 세계가 우리를 염려와 두려움으로 몰아갈 때, 하나님을 감각하고 하나님나라에 몰입합시다. 믿음의 눈을 들어 이미 우리 안에 뚫고 들어와 역사하고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나라를 바라봅시다.

하나님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찾고, 자족함을 누리며, 베푸는 삶의 비밀을 발견하고 관대한 삶을 살아가는 맑은물 가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나라에 몰입하는 삶의 방식

예수님은 생존의 염려와 미래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하나님나라에 몰입하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나라에 몰입하는 삶일까요?

종교가 아니라 삶.

먼저는 성서일과 전체에서 보여지는 하나님나라에 몰입하는 삶의 방식은

종교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을 반영하는 삶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에서 하나님은 삶의 변화 없는 너희의 종교적 삶에 역겹다고 말씀하십니다. 선을 행하고, 정의를 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도와주고, 고아와 과부의 편이 되어주라고 하십니다.

삶이 빠진 더 많은 예배와 더 뜨거운 기도회와 더 많은 종교생활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기를 원하고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만큼 변화된 긍휼과 사랑의 삶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순종의 삶을 원하십니다.

시편의 말씀에서 재판관으로 오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달아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에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이땅의 것을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나라에 몰입하며 살았는데 그들은 나그네처럼 거류민처럼 장막에 거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더 좋은 곳을 바라고 살았기에 땅에서 쌓고 축적하는 삶이 아니라 나그네와 거류민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나라에 몰입하는 삶의 방식은 더 많은 종교생활이 아니라

종교생활의 본질인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만큼 삶의 변화와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을 닮아 나의 존재와 삶에서 그분의 형상이 드러나고 나타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고, 무한히 용서하시고 용납하시는 분이시기에 정의를 구하고 관대한 삶을 살며 용서와 용납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와 모임을 돌아봅시다.

우리는 예배에서 우리의 만족스러운 종교생활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지? 하나님을 만남으로 내 존재와 삶에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지?

더 관대해지고 너그러워지고 사랑스러워지고 있는지?

나에게로 굽은 사랑이 바로 펼쳐져서 하나님과 공동체와 이웃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나와 다른 이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용납하고, 나에게 상처준 이들을 용서하고 있는지?

자본주의 삶의 방식을 벗어나 하나님나라의 삶의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는지?

종교생활이 아니라 존재와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 맑은물이길 바랍니다. 

관대한 삶.

예수님은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하십니다.

염려와 두려움에 이끌리는 삶의 방식은 땅에서 더 많이 쌓고 축적하고 지키려는 삶의 투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나라에 몰입하는 삶의 방식은 소유를 팔아 자선의 삶을 사는 삶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몰입하면 할 수록, 하나님나라가 내 존재와 삶에 침투해 들어와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면 날 수록 더 관대한 삶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하늘은 어떤 영적인 차원의 미래 차원이 아닙니다. 사후에야 비로소 소유하게 될 보물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나라의 통치가 드러나는 영역적 개념입니다. 주기도문에서 시사하듯이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온전히 이루어지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재물을 쌓아두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통치가 존재와 삶에서 더 풍성하고 온전히 드러나고 나타나는 삶을 추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관대한 삶에 대해 바이블프로젝트의 영상을 잠시 보겠습니다. 약 5분가량 되는 영상인데 잠시 시청하시겠습니다. 


https://youtu.be/q_21APRnrO0?si=X4vWndlOQBHUGWwe


하나님나라에 몰입하는 삶은 관대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가치와 삶의 방식이 우리 존재와 삶에 뚫고 들어와서 땅의 염려와 미래의 불안으로 탐욕적인 삶을 거부하고 관대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더 많이 관대해지고 더 많이 하늘에 재물을 쌓아길 바랍니다.

준비된 삶, 깨어 있는 삶

이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

허리에 띠를 띠고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고대 근동 지역 사람들의 옷은 길고 품이 넓은 겉옷을 입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두루마기와 같습니다. 이 옷은 간단한 일상생활이나 휴식을 취할 때는 괜찮았지만, 육체적인 노동을 하거나 먼 길을 여행할 때는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노동을 하거나 먼 여행을 위해서는 허리를 동여매어서 움직이기 편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출애굽의 상황을 연상케 합니다.

출애굽 당시 유월절 식사를 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희가 그것을 먹을 때에는 이렇게 하여라.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들고, 서둘러서 먹어라. 유월절은 주 앞에서 이렇게 지켜야 한다.” 출애굽기 12:11

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허리에 띠를 띠는 것은 단순히 옷을 정돈하고 활동할 태세를 갖추는 것을 넘어서서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하라는 의미입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언제든지 자리를 털고 일어날 준비를 갖추며 살라는 것입니다.

성서일과 히브리서의 말씀과 연결점을 찾자면 믿음의 사람들이 그 땅에서 안주하지 않고 나그네와 거류민으로 살며 장막(텐트)가운데 늘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등불을 켜놓고 있으라는 마태복음의 열처녀의 비유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열처녀의 비유에서도 혼인잔치의 신랑이 언제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깨어 있을 것을 이야기합니다.

누가복음에서도 혼인잔치의 상황에서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종들이 깨어 기다릴 것을 이야기합니다.

갑작스럽게 생각지도 않은 때에 주인이, 인자가 올 것이기에 늘 깨어 있어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군대 이야기가 좀 거시기 하지만…

제 동기들 중에 먼저 군에간 친구가 첫 휴가를 와서 그 친구 집에서 하룻밤 같이 보냈습니다. 얼마나 피곤했든지 그 친구는 먼저 잠이 들었죠. 그런데 친구 어머니께서 같이 먹으라고 야식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자고 있는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같이 먹자고 깨웠습니다.

순간 친구는 벌떡 일어나면서 “이병! 우지호!”라고 외쳤습니다. 군생활을 얼마나 긴장가운데 보내고 있었는지 지금도 짠하게 생각나는 친구의 모습입니다.

관등성명이라고 하지요! 신병배치를 받으면 언제든지 관등성명이 나오도록 긴장하고 그것이 습관처럼 몸에 배이도록 합니다. 누군가 갑자기 예측하지 못하는 상황에 부르거나 몸에 스치기만해도 반사적으로 반응하도록 훈련하고 습관을 만드는 것입니다.

준비된 삶, 깨어있는 삶은 어쩌면 관등성명처럼 존재와 삶의 일부가 되도록 훈련되고 습관화된 하나님나라의 삶의 방식이 아닐까싶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느날 주님이 오실 것입니다. 그 날을 알지 못하기에 늘 깨어서 준비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가지 예수님께서 비유로 너희가 내가 주릴 때에 먹였고, 목마를 때에 마실물을 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의인들은 우리가 언제 그랬습니까?라고 물으니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이에게 행한 것이 나에게 행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똑 같은 반대상황도 이야기하시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나에게 행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준비된 삶, 깨어 있는 삶은 어쩌면 이렇듯 관대한 삶이 늘 습관처럼 나타나는 삶이 아닐까요? 보잘 것 없는 이에게 베풀고 보살피고 돌보는 관대한 삶이 훈련되고 습관처럼 자리잡아서 부지중에 나타나는 삶의 태도와 모습일 것 같습니다.

주님이 언제 어떻게 어떤 모습과 어떤 상황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실지 모릅니다. 보잘 것 없는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가 준비되어 있는지? 깨어 있는지 보실 것입니다.

관대한 삶의 태도와 습관이 훈련되어서 부지중에 나그네를 대접하고 보잘 것 없는 작은 자를 환대하는 삶으로 나타나길 바랍니다. 

주인이 섬길 것이다.

오늘 이 본문에서 한가지 재미있고 놀라운 장면이 있습니다.

준비되고 깨어 있는 삶을 산 종들에 대해서 주인이 와서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주인이 직접 허리를 동이고 시중들 것이라고 하는 장면입니다.

신분 사회가 분명한 사회에서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파격적이고 뒤집어진 장면을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종의 모습으로 섬길 것이다. 착하고 충성된 종들에게…

준비된 삶을 살고 깨어 있는 삶을 살었던 종들에게…

관대한 삶을 훈련하고 몸에 밴 습관처럼 베풀며 살았던 종들에게…

하늘에 재물을 쌓았던 종들에게…

종교생활이 아니라 변화된 삶을 살았던 종들에게…

이것이 하나님나라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섬기시고 우리를 위해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수고와 눈물과 땀을 기억하시고 친히 닦아주시고 어루만져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왕의 잔치식탁을 베푸시고 우리를 먹이시고 섬기십니다.

얼마나 놀랍고 신비한 광경입니까?

이런 주인을 열망하고 이런 나라에 몰입하고 살고싶지 않으십니까?

하나님께서 땅의 염려와 미래의 불안에서 자유케 하십니다.

하나님을 열망하고 하나님나라에 몰입하여 사는 맑은물이길 바랍니다.

관대한 삶이 습관처럼 나타나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 그 날을 위해

나의 아버지 그 거룩한 사랑(우리 그날을 위해)를 들으면서

주중에 묵상한 말씀과 오늘 나눈 말씀을 생각하며 기도하는 시간 갖겠습니다. 


https://youtu.be/zLcwtoIxXy8?si=NWGb6Hb1cYhHJW-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