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시대의 뜻은 왜 알지 못하느냐?

본문

Celeb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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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대략난감

오늘 말씀은 대략난감합니다.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 읽는 우리에게도 불편하고 예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의아합니다.

평화의 왕이라고 하시는 분이 불과 분열이라니! 어울리지 않습니다.

본문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긴장감이 높고, 꾸짖고 위선자라 비난하는 느낌까지 드니 이 말씀을 피해가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이 본문을 어떻게 설교하고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요?

난감합니다.

난감하고 불편하다고 해서 피해가면 안되겠지요. 말씀을 정직하게 대면하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불편하고 난감하지만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기울여 봅시다. 

예수님에 대한 인상?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에 대한 인상이나 이미지는 어떤 모습입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의 그림을 그린다면 어떤 모습으로 그리겠습니까?

아이를 안고 있는 예수님!/ 양들을 이끄는 목자이신 예수님!???

우리가 그리는 이미지는 옛날 예수 영화에 나오는 긴 곱슬머리를 가지고 온화한 미소를 띈 백인남성을 상상합니다. 미디어의 영향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국 BBC에서 ‘신의 아들’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공개한 예수님의 얼굴은 아주 생소하고 예기치 못한 모습이었습니다. 귀티나고 피부가 흭고 깨끗한 귀티나는 잘생긴 백인의 얼굴이 아니라 농민이나 노동자 계층의 키 153에 50kg 가량의 거무티티한 피부에 거칠고 투박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뜻밖의 모습이죠.

이스라엘과 영국의 법인류학자와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이 신약성서 기록을 참고하고 1세기 이스라엘 갈릴리 지방의 셈족(유대인) 유골과 고대 시리아 프레스코화를 컴퓨터 이미지로 합성, 분석한 결과라고 한다.

흔히 보여지는 예수님의 이미지와 우리가 상상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실제 예수님과 아주 거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너무 차이가 나지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제자들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이라고도 하고, 엘리야라고도 합니다라는 대답을 합니다(막 8:27-28).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아주 급진적이고 개혁적인 인물로 비춰졌던 것 같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사역이 얼마나 파격적이고 급진적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를 촉구하며 세상을 뒤집으려 했고, 엘리야는 바알 우상과 대적하며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선택을 요구한 선지자였습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예수님의 이미지 또한 우리가 상상하고 세상이 보여주는 예수님의 이미지와 거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급진적인 인물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 시대가 만들어낸 예수님, 또는 우리의 바람을 이상화한 예수님을 따르기 쉽습니다. 안락한 삶을 지켜주는 예수님, 내 마음을 위로하고 상처를 치유하시는 예수님! 우리의 바램과 기대를 채워주는 예수님.

성경이 이런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부분들이 있지만 이런 예수님의 모습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성경은 전혀 다른 차원의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성경을 날것으로 읽고 대면할 때 우리는 우리의 상상과 이상과 전혀 다른 예수님을 만납니다.

오늘의 본문처럼 낯설고 불편한 예수님을 만나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고 보여주는 예수님을 만나고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읽고 묵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 예수님을 알아가고 성경이 보여주는 예수님으로 우리 존재와 삶이 형성되고 변화되는 맑은물이길 바랍니다.

때론 낯설고 불편한 예수님을 만나더라도 피하거나 적당히 다른 이미지로 덫칠하지 말고 날 것 그대로의 예수님을 만나고 경험함으로 우리의 존재와 삶이 예수님의 모습으로 형성되길 바랍니다. 

불과 분쟁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봅시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불을 지르러 왔다. (방화범?)

나는 평화가 아니라 분쟁을 일으키러 왔다.(으잉?)

왜 이러시는 걸까요?

예수님의 이 말씀은 여전히 생소하고 불편합니다.

전후문맥을 좀 살펴봅시다.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맥락을 살피는게 중요하지요!

누가복음 12장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준비를 강조합니다.

1절부터 바리새파의 위선을 경계하시고,

재물을 쌓기에만 몰두하는 어리석음을 지적하시며,

깨어 있으라고 촉구하십니다.

충성스러운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41-48절)에서 보듯,

임박한 하나님나라와 세상나라간의 대결과 긴장. 그 사이에 경계하고 깨어있으라는 촉구가 이어집니다.

이후문맥에는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회개하고 변화하라는 이야기들이 이어집니다.

이 문맥 가운데 예수님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이 던지시는 불은 무엇일까요?

불에는 두가치 차원의 불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마냥 다 태워버리는 것입니다.

앞선 본문(9장 54절)에 제자들이 자신들을 거부하는 사마리아인들을 향해 불을 명해 다 태워버리면 어떨까요?라고 했을 때 나타나는 불은 맘에 안드는 상대를 향해 그냥 태워버리는 불입니다.

하지만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불은 새롭게하는 정화하는 불의 의미가 더 큽니다.

성경에서 불은 주로 정화하고 새롭게 하는 의미로 자주 사용됩니다.

예수님은 맘에 안드는 이들을 향해 홧김에 다 태워버리는 소멸의 불로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금을 정련할때 쓰는 불의 이미지로 불을 던지로 오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서일과의 연결된 본문 이사야서의 포도원의 노래를 보면 하나님께서 극상품 포도를 심고 정성껏 가꾸고 길렀지만 들포도를 낸 것을 안타까워하시며 포도원을 갈아엎는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갈아엎고 새롭게 하시겠다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그들이 선한 일 하기를 기대하셨는데, 보이는 것은 살육뿐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옳은 일 하기를 기대하셨는데, 들리는 것은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울부짖음뿐이다.(이사야 5:7)

포도원 주인의 이 밭을 황무지로 만들겠다는 선언은 다시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선언이고 이스라엘은 아주 긴 정화의 시간을 거칩니다.

예수님이 가져오시는 불은 정화의 불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세상 나라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뚫고 들어왔습니다.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 사이에는 필연적인 긴장이 있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세상 나라에 뚫고 들어와 세상 나라를 새롭게 만듭니다. 불로 태우고 정화합니다. 이 불은 세상의 불의를 태우고,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세우는 정화의 불입니다.

베드로전서 7:1은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단련하셔서, 불로 단련하지만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되게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에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던지시는 불은 우리의 존재와 삶을 단련하고 정화하는 불입니다.

당장 이불이 불편하고 두렵고 피하고 싶지만 예수님은 이 불을 통해 우리의 존재와 삶을 변화시키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주시려는 것은 평화가 아니라 분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족간에 서로 대립하고 분쟁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족간의 분쟁의 이야기는 미가서의 이야기를 확장시키는 이야기입니다. 미가서의 배경에서는 타락한 이스라엘이 결국 가정 마저도 분쟁하고 분열할 것이라는 경고로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미가서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하나님나라가 세상나라 가운데 뚫고 들어옴으로 나타나는 선명한 경계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분쟁과 갈등을 이야기하십니다. 서로 다른 가치와 지향을 가지고 살아가기에 분쟁과 갈등이 없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 나라의 질서와 논리대로 살면 특별한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질서대로 살면, 어려움과 갈등, 분쟁이 생깁니다. 가족 안에서도 "아버지가 아들을 거슬러, 아들이 아버지를 거슬러" 대립하고 갈등이 일어납니다(52-53절).

가족 안에 빨간당, 파란당이 있으면 대립하고 싸움이 일어나듯이 예수님으로 인해 갈등과 대립은 불가피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드러나는 하나님나라의 충실하게 살면 살 수록 피할 수 없는 갈등과 대립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에 불과 분쟁을 던지시는 분이십니다.

안락한 삶에 안주하고픈 우리의 마음에 불을 지르십니다.

세속적인 가치와 하나님나라의 가치 사이를 적당히 유지하며 살고픈 우리의 삶과 마음에 불을 지르십니다.

편안했던 공동체 생활에 갈등이 생기고 그 갈등을 통해 나의 죄성과 방어기제와 어두움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존재와 삶에 일으키시는 불편과 이질감은 회피하고 거부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견디고 버텨야 하는 변화와 정화의 불입니다. 참 포도를 얻기 위해 우리를 빚으시는 하나님의 정화의 불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고후 7:9-10)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은, 회개를 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일로 마음 아파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함으로써 여러분에게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여러분이 나타낸 그 열성, 그 변호, 그 의분, 그 두려워하는 마음, 그 그리워하는 마음, 그 열정, 그 응징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정화의 불을 잘 참고 인내하는 맑은물이길 바랍니다.

주님이 주시는 불로 인해 날마다 더 새로워지고 더 아름다워지는 우리의 존재와 삶이길 바랍니다.

세속적인 사람들과 갈등이 생길 수 있습니다. 다른 가치와 다른 지향을 가진 사람들과의 충돌입니다. 그것이 가장 가까운 가족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하나님나라의 가치와 삶의 지향을 도저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요 15:18-19).

예수님이 우리 존재와 삶을 정화하고 새롭게 하면 할 수록

우리의 삶이 하나님나라의 가치와 지향을 드러내면 낼 수록

경계는 분명해지고 갈등과 분쟁은 필연적으로 나타납니다.

이 갈등과 긴장과 대립과 분열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믿음과 삶을 더 분명하게 드러내고 나타내는 계기가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추구해야하는지, 우리의 믿음과 충성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더 분명히 합니다.

성서일과의 히브리서 말씀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과 대립하고 분열되어 전혀 다른 인생과 삶을 살았습니다.

때론 믿음으로 사는 우리 삶에 분쟁과 갈등이 찾아옵니다. 이 시기를 이상히 여기지 말고 히브리서에 등장하는 믿음의 선배들의 뒤를 따라 우리가 달려야 할 경주를 인내하며 달려나가는 맑은물이길 바랍니다. 

시대를 분별하라 – 깨어 있는 삶

본문의 후반부에서 예수님은 일기 비유를 통해 시대를 분별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너희가 서쪽에서 구름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렇게 된다. 또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덥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렇게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가 땅과 하늘의 기상은 분별할 줄 알면서, 어찌하여 이 시대는 분별하지 못하느냐?”(54-56절).

예수님은 병든 자를 낫게 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뚫고 들어와 하나님의 통치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통해 임하는 이 강력한 역사를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한낱 시골뜨기 선생과 귀신의 앞잡이로 왜곡시킵니다.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고 드러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애써 부인하고 감추고 외면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위선자'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드러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엿보면서도 거부하는 이들을 향해 위선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일상의 자잘한 것들에는 밝으면서도 정작 예수님으로 시작된 시대의 변화에 어둡고 무지한 삶에 대해 예수님은 경고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통해 도래하는 하나님나라의 시대를 분별하고 이 시대에 걸맞는 삶을 살라고 촉구하십니다.

기상은 분별하면서도 어찌하여 시대는 분별하지 못하느냐….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삽니다. 하나님이 실체가 되시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하나님나라를 삽니다. 문제는 하나님나라가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본주의와 소비주의 사회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힙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세상의 일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시대를 분별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나라보다 세상나라가 더 강력하고 영원할 것처럼 보여집니다.

아파트 값의 변화, 주식의 변동, 교육 학군의 움직임은 잘 읽으면서, 영혼의 일과 생명의 일에는 둔감합니다. 하나님나라가 우리의 일상과 삶에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보지못하게 합니다. 하나님나라가 가까이왔고 종말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보지못하고 느끼지 못합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생명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무시하며 재물을 쌓는 탐욕에 빠져 삽니다. 어느날 갑자기 생명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그의 생명을 취하십니다.

불의한 종들은 주인이 더디오고 안올거라 생각하고 방탕한 삶을 살고 불의한 삶을 살다가 갑자기 온 주인으로 인해 심판을 면치 못합니다.

우리는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나라의 중간기를 삽니다.

예수님은 이 중간기의 시기를 분별하고 깨어있는 삶을 살라고 촉구하십니다.

우리의 충성의 대상이 누구인지, 보이고 손에 잡히는 삶에 현혹되지 말고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지만 하나님나라의 가치와 지향을 가지고 살아 갈 것을,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우리의 삶에, 세상 가운데 어떻게 일하시고 함께하고 계신지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고 그분과 보폭을 맞추어 걷고, 하나님나라의 북소리에 맞추어 살아갈 것을 촉구하십니다. 

결론: 불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

결론: 불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불편하지만, 우리를 깨우치고 정화합니다. 예수님의 불은 세상을 태우는 심판의 불이 아니라, 우리를 새롭게 하는 정화의 불입니다. 분쟁은 세상과의 경계이지만,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분명한 시금석입니다. 세상 이치에 밝음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이치를 분별하며 깨어 있으십시다 . 하나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아직도 내 마음이 완고함과 고집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면 주님은 나에게 불을 던지고 분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치열하게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거짓 자아에 불을 지르고 진정 변화된 자신을 만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마침내 주님이 주시는 새로운 자아, 즉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돈과 우상의 잡목으로 우거진 이세상에 불을 질러 그것들을 다 제거하고, 거기에 새로운 성장과 살림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탐욕을 비우고 맘몬의 우상을 거부하며 덜어냄과 비움과 나눔을 실천할 수 있을 때, 주님의 십자가는 비

로소 보람이 있는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실 것입니다.

참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따르는 것에 있어서 방해가 되는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평화는 무사 안일이나 불의한 타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 믿음 진실한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셨던 십자가를 내가 삶 속에서 함께 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