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라도 이 매임을 풀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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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ration

이재명 대통령 수석보좌관회의 발언
"자살 문제가 정말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주요 국가들의 자살률이 감소 추세를 보이는 것과 달리 우리는 20년 넘게 OECD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쓰고 있다.
자살로 내몰린 국민을 방치하면서 저출생 대책을 논하는 것은 명백한 모순이고, 국가의 책임을 방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자살은 사회적 재난이란 관점에서 정책 패러다임을 전면 전환해야겠습니다.
자살예방 예산과 인력 확충은 물론이고 책임 있는 정책 추진을 위해서 범부처 전담총괄기구 구성을 포함한 자살예방 정신건강지원 정책을 정교하게 만들어서 추진해주시기 바란다”
이재명 대통령의 지난 8월 21일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발언한 내용입니다.
대한민국의 자살율 문제를 한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지 않고 사회적 재난이라는 관점으로 전환한 점이 아주 인상 깊게 다가왔습니다. 단순히 관점의 변화 뿐 아니라 국가가 나서서 풀어야 할 문제로 바라보고 국가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정책과 부서를 통해 풀어 가겠다는 실천적 발언이어서 더욱 인상적이었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바라보고 대하는 이대통령의 태도가 남다르게 다가왔습니다.
그도 어린 소년공 시절 삶이 너무 힘들어서 극단적인 시도를 한 기억이 있고,
노동현장에서 팔이 끼는 사고 때문에 지금도 팔이 굽어 있는 장애를 안고 있습니다.
그의 남다른 삶의 이력이 사람을 대하고 삶을 바라보고 생명을 대하는 태도와 관점이 다릅니다.
그러기에 한국의 자살문제와 산업재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와 안전한 노동환경을 만들려는 노력이 어쩌면 한 생명, 한 사람의 인생을 대하는 그의 관점과 태도가 남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른 관점과 다른 태도는 다른 행동과 결과를 가져옵니다.
18년된 장애인을 바라보는 두가지 시선-회당장과 예수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18년동안 늘 그 회당에 있던 한 장애인을 남다른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회당을 유지하고 관리해야하는 회당장의 입장에서는 늘 보아오던 장애를 가진 한 여인에 불과했습니다. 그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어떤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관심과 관점 보다는 회장을 유지하고 관리해야는 입장에서 그저 아무일 일어나지 않고 회당의 질서가 잘 유지된다면 등이 굽은 여인의 존재는 크게 문제될 건 없었습니다. 회당장의 눈에는 회당의 질서를 잘지키고 안식일 규례를 잘 지키는지 안지키는지가 사람을 대하는 큰 기준과 관점과 태도였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이 여인이 남다르게 보입니다. 사단의 속박으로부터 풀려나야할 아브라함의 딸로 보입니다. 여인의 사단의 매임에서 풀려나야할 여인으로 필요와 어려움이 보이고, 여인이 장애를 가진 존재이지만 본래적으로 가진 존재의 뿌리 아브라함의 딸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샬롬 가운데 사는 것, 안식일의 쉼이 참된 자유와 해방으로 나타나는 것이 중요한 기준과 관점과 태도였을 것입니다.
회당장은 규칙과 관리의 관점에서 법적이고 형식적으로 사람을 대하고 있고
예수님은 생명과 긍휼의 시선으로 공감과 존중으로 장애입은 여인을 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가까울까요?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주일에 가정교회로, 맑은물 공동체로 모일 때 서로를 바라보고 대하는 우리의 관점과 태도는 어떠할까요?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 가정에서 나는 나의 자녀와 배우자와 가족을 어떤 마음과 태도로 대하고 있을까요?
사회 생활을 하면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 그리고 뉴스 속에 등장하는 위기와 재난과 가난에 직면한 이들을 대하는 나의 마음과 태도는 어떠할까요?
우리의 사람대하는 관점과 태도는 자본주의 삶의 방식에서 기인할까요?
하나님의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것에서 기인할까요?
우리가 만나는 가족과 공동체와 이웃에게 예수님이 가지신 시선과 태도가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길 소망합니다.
안식일에…, 안식일은…
문제는 안식일에 일어났습니다. 다른 날이면 괜찮았을텐데… 하필이면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손을 대어 고쳐주자 회당장이 일어나 공개적으로 발언을 합니다.
14절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것에 분개하여 무리에게 말하였다. "일을 해야 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엿새 가운데서 어느 날에든지 와서, 고침을 받으시오. 그러나 안식일에는 그렇게 하지 마시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소중하게 여긴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분개하며 했을 법한 이야기입니다.
왜 엿새를 놔두고 하필 안식일에 이렇게 병고치는 ‘일’을 하느냐?
안식일을 어기면 어떻게 하겠다는거냐?
회당장으로서 지역공동체의 신앙과 사회질서를 유지할 책임이 있는 그로서는 분노하며 합리적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회당장에게 안식일은 지켜야할 규범이었습니다. 어기면 안되는 것, 지켜야할 것!
회당장으로서 사람들이 이 규범을 잘 지키도록 가르치고 관리 감독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이 회당에 등장하는 사건들을 보면 예수님도 안식일을 소중히 여기고 안식일을 지키고 계셨음을 알 수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회당장이 이야기하듯이 다른 6일을 놔두고 안식일에 이사단을 벌이시는 걸까요? 예수님에게 안식일은 무엇이었을까요?
본문에 여인을 치유하는 사건에서 등장하는 단어와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발언에 답변하는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무엇인지 찾아 보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찾으셨습니까?
네!!
“풀어주다.”라는 단어입니다.
12절에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15절에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16절에 “안식일에라도 이 매임을 풀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풀어주다”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회당장은 14절에서 이 사건을 병고침이라는 의료적 행위로 보고 있지만
예수님은 이 사건을 매임에서 풀어주는 생명과 해방의 일로 보고 있습니다.
고쳐주는 것은 치료의 일이지만 풀어주는 것은 구원의 사건입니다.
구원이 치료를 포함하고 있지만 해방, 풀어줌, 자유롭게 함이라는 말로 더 잘 설명됩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4장에서 이사야의 말씀을 읽으시며 자신이 보냄받은 것은 포로된 자와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 계명은 크게 두가지 맥락에서 제시됩니다. 하나는 창조의 맥락에서 하나님께서 엿새동안 창조하시고 7일에 안식하셨으니 너희도 그 안식을 지키라는 창조의 맥락과 다른 하나는 출애굽의 맥락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너희를 풀어 해방하셨으니 안식일을 기억하고 지키라고 하는 출애굽의 맥락입니다.
한번도 지배계급에 있어보지 못한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창조맥락의 안식일 계명은 지배계급만이 누릴 수 있는 쉼과 안식으로의 초대와 끝없는 노동과 종과 을의 삶에서의 해방과 놓임이었습니다.
이집트의 노예생활과 삶의 방식에서 놓여 자유민으로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는 출애굽의 맥락 또한 이집트의 지배와 종살이로부터의 풀려남으로 자유와 해방을 누리고 경험하는 것이었습니다.
안식일은 놓이는 날이고, 풀려나는 날이고, 해방의 날이고, 자유의 날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도 죄와 죽음으로부터 놓이고, 풀리는 해방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구원의 날이고, 해방의 날이고, 놓이고 풀려나는 날이고, 자유와 회복의 날입니다. 이 정신과 가치와 내용을 지키기 위해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단순히 지키기 위해 지키는 날이 아니라 해방을 경험하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회당장에게 안식일은 지켜야할 규범이었지만 예수님에게 안식일은 해방의 날이요, 풀려남의 날이요, 자유의 날, 구원의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회당장은 18년 동안이나 장애를 입은 여인의 필요는 보지 못하고 그녀가 규범을 잘 지키나 지키지 못하나만 감시하는 눈만 가졌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단에 매여 18년동안 고통받았던 그녀의 고통과 필요를 아시고 안식일에 정말 있어야 할 일 그녀를 사단의 매임에서 해방시키시고 병에서 놓임을 받게 하셨습니다.
어쩌면 회당장은 안식일 규례에 매여서 정작 안식일의 참된 해방과 자유를 보지못하고 경험하지 못하는 또 다른 매인자인것 처럼 보입니다.
오늘 안식일로 대표되는 주일은 우리에게 어떤 날일까요?
가정교회의 예배와 맑은물가족의 예배는 어떤 모습일까요?
주일이 그리고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에 의한 참된 해방과 자유의 은혜를 경험하는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 어떤 형식을 지키고 어떤 규칙을 잘 행하느냐보다 세상이 주는 기준과 가치와 이야기들로부터 놓임을 받고 하나님나라의 가치와 이야기로 새로워지고 변화되는 날이길 바랍니다.
주일의 예배와 흐름이 우리가 가진 상처로부터 풀어지고 자유케되는 날이길 바랍니다.
우리가 가진 두려움과 걱정과 염려로부터 해방되고 소망 중에 바라고 인내하는 삶이길 바랍니다.
함께 모여 앉은 이들 중에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얽매여 있다면 그의 필요를 돌보고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참된 평안과 자유를 맛보도록 돕는 관계 안으로 함께 나아가길 바랍니다.
반복되는 주일의 예전과 해방과 구원의 삶의 방식이 우리에게만 머물지 않고
세상 가운데 얽매이고 매여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자유와 구원을 전하는 삶이 되길 바랍니다.
위선자들!!! 아브라함의 딸!!!
예수님은 안식일 규범에 매여 참된 해방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랜동안 함께 해온 이를 방치한 회당장과 그를 따르는 무리를 향해 위선자들이라고 비난하십니다.
본질을 잃어버리고 껍데기만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을 향한 아주 강한 질책입니다.
겉으로는 신앙심이 깊은 척 율법을 아주 잘 지키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율법의 본질적인 정신인 사랑이나 자비 같은 것은 외면하는 그런 이중적인 태도를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겉과 속이 다른거지요.
전통을 수호하고 규칙을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일 수록 이런 위선적인 신앙의 형태로 빠지기가 쉬운 것 같습니다. 공동체에서 전통을 지키고 규칙을 지키는 것은 소중한 일입니다. 하지만 전통과 규칙이 지향하는 가치와 정신은 잃어버리고 규칙만 남게 될 때 우리는 위선적인 신앙의 탈을 쓰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닮지 않으면서 신앙생활을 오래 할 수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자아가 죽지 않고 여전히 체면과 인정이 중요시 하며 살 수 있습니다.
주일을 지키고 성경을 다독하고 기도생활 하면서 가장 가까운 이들이게 화를 쏟아내고 주변 사람을 무시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기 희생과 섬김과 헌신은 멀리하면서 공동체의 혜택을 누리는 자리는 잘 찾아갈 수 있습니다.
위선의 문제는 본인은 잘 모르지만 주변 사람들이 너무나 잘 안다는 것입니다.
위선자들아!!! 이 질책과 경고는 저의 마음을 뜨끔하게 합니다.
공동체 앞에서 말하는 사람으로 ‘이렇게 삽시다’라고 말하는 사람으로 있지만 정작 삶이 따라가 주지 않는 모습을 봅니다. 척해야 하고, 척하며 살기 아주 쉬운 사람입니다.
“니는?” “니나 잘 살아라!”라고 한다면 할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는 만큼 말하고, 말한 만큼 살아야 하는데…
몰라도 아는 척, 이래라저래라 훈수두는 말은 많고, 말한만큼 몸이 움직이 않는 저를 두고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신앙과 삶이 일치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번 읽은 책에서 사각지대라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누구나 사각지대가 있다고… 자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데 공동체의 다른 이들의 눈에는 보이는 사각지대가 있다고… 그래서 공동체에서 그 사각지대를 서로 알려주고 함께 성숙하고 변화해 가야한다고 말해주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맑은물에서는 예수님께서 질책하시고 경고하시는 ‘위선자’들이 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에는 언제나 이런 위험과 함정이 있습니다. 서로의 사각지대를 말한다는 게 쉽지 않지만 서로가 보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알려주고 서로가 서로를 온전케 하는 공동체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그렇게 맑은물이 흠없고 온전한 사람들고 공동체로 자라가길 바랍니다. 저 또한 사각지대는 예외가 아니니 저의 사각지대를 본다면 언제든지 이야기해주세요.
위선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던 아브라함의 딸이 예수님의 눈에는 보입니다.
규정을 붙들고 전통을 지키던 회당장의 눈에는 그저 늘 있었던 등이 굽은 장애인일 뿐입니다. 당시 병과 고난은 죄로 인한 것이라는 사회적인 인식으로는 한낱 죄인일 뿐이었습니다. 회당의 숫자를 채우는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는 아브라함의 딸이 보입니다. 장애를 안고 있지만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존귀한 백성인 아브라함의 딸이었습니다. 이후에 나오는 누가복음 19장에도 예수님은 죄인으로 취급받던 세리 삭개오를 향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여인은 고침을 받아서 아브라함의 딸이 아니라 고침받기 전부터 아브라함의 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이 여인의 정서적 사회적 매임에서도 아브라함의 딸이라는 표현으로 풀어주십니다.
예수님은 회당에 가르치시다가 이 여인을 주목하시고 그녀를 부르시고 그녀를 향해 말씀하시고,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손을 얹고 해방을 선포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시선과, 말과, 행동들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녀를 향해 가지신 긍휼과 사랑의 마음을 엿볼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딸인 그녀가 18년 동안 사단에게 고통받고, 등이 굽은 채로 살아왔던 육체적 고통과, 그로 인해 받아야 했던 정서적 어려움과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외면 당했을 그녀의 아픔과 필요가 공감됩니다.
우리가 가진 눈과 시선은 회당장의 눈에 가까울까요? 예수님의 눈에 가까울까요?
신앙의 본질을 잊고 형식에 치우치고, 믿는 것과 삶의 일치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우리 또한 회당장의 시선을 가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상대의 문제점만 눈에 들어오고 그래서 선을 긋고 적당한 종교적이고 합리적인 핑계를 대며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본질을 추구하고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려고 자기를 넘어서서 신앙과 삶의 일치를 추구하며 살아가다보면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시선과 마음이 일어나겠지요.
내가 경험한 자유와 평화를 소개하고 알려주고 싶겠지요. 상대방의 문제 이면에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고 있는 그대로를 용납하고 함께 자라나가는 기쁨을 누려갈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과 마음이 예수님을 닮아가길 소망합니다.
나가며…
이 사건을 통해 위선은 율법의 껍데기만 붙들고 인간의 고통과 본질적인 사랑의 정신을 외면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진정한 믿음은 율법의 참된 의미인 사랑과 자비를 바탕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해방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실천적인 행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삶에 중심에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삶과 예수님이 빠지고 종교적인 형식만 있다면 우리는 위선적인 종교인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내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삶과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려는 지향이 있다면 우리의 존재와 삶을 통해 안식일의 참된 정신인 해방과 구원을 전하는 삶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 맑은물 안에 안식일의 참된 정신인 해방과 구원이 넘쳐나길 기도하고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