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냐 돈이냐
본문
Celebration

들어가며… 어렵다!
본문의 내용은 어렵습니다.
이 본문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청지기 비유만큼 다양한 해석과 논란의 여지가 있는 말씀도 그리 많지는 않다. 누가가 주요한 신앙의 과제로 삼고 있는 재물에 대한 매우 색다른 이야기이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불의한 청지기’ 이 비유만큼 해석자를 어렵게 하는 비유도 없다.”
“이 비유에 대한 관점과 해석의 수는 아마도 읽는 독자들 수만큼 많을 것이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매우 심각한 신학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데, 그중 가장 핵심적인 것이 이 비유의 주인공인 불의한 청지기를 본받으라는 권고이다.”
아무튼 본문은 어렵습니다. 이 어려운걸 우리가 함께 풀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부분이 어려웠습니까? 본문을 보며 어떤 질문들이 생겼습니까?
어려운 이유는 불의한 청지기가 배임에 해당하는 일을 함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그를 칭찬하고 있고, 나중에는 불의한 청지기의 슬기로운(슬기롭다고 할 수 있을지? 오히려 약삭빠른) 행동에 예수님도 동의하시며 그의 행동의 패턴을 본받아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씀이 참 당혹스럽게 합니다. 또 다른 한가지는 ‘돈’, ‘부’를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돈에 대한 주제는 우리를 늘 불편하게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다다익선이 선인 사회에서 돈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돌아보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늘 불편한 주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따라야할 길이 무엇인지 돈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태도를 지니고 살아야 하는지 정직하게 대면하는 시간이길 바랍니다.
어려운 본문이지만 함께 하나씩 차근차근 살펴보면서 본문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함께 귀기울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공부해봅시다.
1. 본문에 반복되는 단어나 문장, 대조되는 단어나 문장, 강조되는 단어나 문장이 있는지 살펴봅시다.
반복되는 단어 청지기(1,2,3,4,8절)/ 재물(1,9,11,13절)/ 주인(3,5,8,13절)/ 충실(10,11,12절)
반복되는 단어를 통해 본문은 재물에 대한 청지기로 어떻게 충실할 것인가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대조되는 단어 이 세상의 자녀들 vs. 빛의 자녀들(8절) 불의한 재물 vs. 참된 것(11절) 남의 것 vs. 너희의 것(12절) 재물 vs. 하나님(13절) 업신여긴다 vs. 떠받든다(13절) 미워한다 vs. 사랑한다(13절)
재물과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대조하고 있고, 어디에 더 충실할 것인가? 무엇을 사랑하고 미워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2. 전체적인 문맥을 살펴봅시다.
전문맥은 세리와 죄인들을 가까이 하시는 예수님과 이를 못마땅해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이야기 배경에서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동전,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가 이어집니다.
본문과 이어지는 후문맥에는 14절을 시작하며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나서, 예수를 비웃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비유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입니다.
전후문맥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청지기로서 바리새인의 실패가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이 가진 재산과 신분으로 오히려 경계를 짓고 자신을 이롭게 여기며 배제하고 혐오하며 살아왔던 바리새인의 삶과 태도를 드러내고 거기에서 돌이켜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가지 더 특이한 표현이 있습니다. 특이한 표현이라기 보다는 다른 본문에서 같이 사용된 단어입니다. 본문 1절에 “낭비하다”라는 단어입니다. 원문으로는 (διασκορπίζω, 디아스코르피조)라고 합니다. 단어의 뜻은 ‘흩뿌리다’, ‘허비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낭비하다에도 충분히 의미가 담겨 있지만 돈을 막 흩뿌리면서 썼다고 생각하면 조금 더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이 단어가 특이한 것은 앞 장 15장에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서 ‘허랑방탕하게’ 썼을 때에 사용된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문맥적인 상황에서 실패한 청지기 바리새인은 자신이 받은 지위와 재산과 삶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낭비한 존재처럼 비춰집니다. 여기서 저는 집안에 있었던 첫째 아들을 떠 올립니다. 아버지 곁에서 집안일을 하며 살아왔지만 그 또한 아버지의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산(재산, 신분, 삶)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낭비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문맥을 종합해볼때 바리새인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이 실패한 청지기, 해고 위기에 놓인 청지기, 퇴출 위기에 놓은 청지기로 묘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존재와 삶을 통해 하나님의 복을 흘려보내는 청지기로 세상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신을 위해 재물을 쌓으며 하나님의 복을 자신의 경계 안에 가두어두고 흘려보내지 않았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고 혐오하며 살아왔습니다. 흘려보내야 할 하나님의 복을 자신 안에 가둠으로 청지기의 삶을 낭비해왔습니다. 본문이 조금 더 분명하게 말하려고 하는 바리새인, 이스라엘의 청지기 삶의 실패의 원인은 재물, 재산, 돈에 대한 그들의 생각과 태도입니다.
이제 본문의 이야기로 들어가 봅시다.
해고 위기에 놓인 불의한 청지기가 있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에 대한 큰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문서를 관리하고, 계약을 체결하고, 심지어 주인의 이름으로 거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퇴출 위기에 내몰린 이유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 것입니다. 무얼 어떻게 낭비 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는 주인에게 해고통보를 받습니다. 아마도 언제까지 그만둘 것을 예고한 듯 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런 저런 고민 끝에 묘수를 생각해냅니다. 바로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의 빚을 덜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내가 호의를 베푼 것을 통해 나중에 해고가 되더라도 베푼 호의를 통해 삶을 이어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름 백말을 빚진 사람에게 50말로 줄여주고, 밀 백섬을 빚진 사람에게는 80말로 줄여주었습니다. 기름 백발이나 밀 백말을 당시 노동가치로 환산을 하면 대략 5년치 년봉에 해당하는 가치였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청지기는 1억을 빚진 사람에게 각각 5천이나 2천만원의 빚을 탕감해준 셈이 됩니다. 적은 돈이 아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주인의 반응입니다. 주인의 재산을 더 축낸 셈이 되는데 주인은 오히려 이 청지기를 칭찬합니다. 오늘로 치면 자신의 지위를 위배하여 주인의 재산에 손해를 입힌 배임 죄에 해당할텐데 주인은 오히려 칭찬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주인은 ‘하! 요놈봐라’하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왜 이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고 있을까요? 본문의 제일 어려운 질문중에 하나일 것 같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낭비한 것도 모자라 재산상의 손해를 끼치는 배임을 하는 상황인데도 주인은 왜 칭찬하고 있을까요?
이스라엘은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행위가 일절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상에서 자주 쓰는 기름과 밀을 빌려줌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규정을 교묘하게 빠져나가고 있었습니다. 법의 빈틈을 활용한 것이지요! 그래서 주인은 흔히 보는 좋은 주인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교묘하게 이자놀이를 하고 있었으니깐요. 그래서 주인이 청지기에게 배임을 걸면 자신의 교묘한 이자놀이가 드러날 것이고 드러내지 않으면 이 청지기의 행동으로 인해 관대한 채권자로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주인은 청지기를 고발하지 않고 교묘한 이자놀이의 빈틈을 이용해 영리하게 행동한 청지기를 칭찬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예수님의 평가는 임박한 해고 위기 앞에서 남의 것을 가지고, 이자 놀이를 하는 불의한 재물을 가지고 영리하게 행동한 청지기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자기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슬기롭다” 해고 위기에 놓인 세상의 자녀 청지기는 자신이 가진 지위와 역할을 가지고 이후의 삶을 대비하는 모습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청지기의 영리한 행동을 보며 빛의 자녀들이 임박해 온 하나님나라의 삶을 대비하고 준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나라가 이 세상에 임하고 있고 임했습니다. 그리고 빛의 자녀들 즉 실패한 하나님의 청지기인 이스라엘이 세상의 자녀들이 영리함을 통해 다가오는 하나님나라의 삶을 준비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즉 불의한 재물, 남의 것을 가지고 친구를 사귀라는 것입니다. 재물을 축적하고 쌓아두고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베풀고 나누고 흘려보냄을 통해 사람을 얻고 친구를 얻으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래서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지극히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충실하고, 지극히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불의하다.
너희가 불의한 재물에 충실하지 못하였으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또 너희가 남의 것에 충실하지 못하였으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인들 내주겠느냐?”
다가오는 해고를 직면한 청지기가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을 통해 해고 이후의 삶을 대비한 것 처럼, 임박한 하나님나라의 도래 앞에 지금 가진 소유를 가지고 친구를 사귐으로 이후 하나님나라의 삶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재물에 대한 태도, 돈에 대한 인식을 바꾸라는 것이지요. 모으고 쌓고 불리는 세계관에서 나누고, 베풀고, 흘려보내는 세계관으로 변화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재물에 대해, 돈에 대해 비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불의한 재물/ 지극히 작은 것(돈을 작은 것, 사소한 것으로 묘사합니다. 우리는 돈을 중요한 것, 소중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남의 것(돈을 남의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내가 번 돈 내 돈으로 생각하지만 생각이 다릅니다. 우리의 존재와 삶이 청지기라 생각하면 내 삶과 소유와 존재는 엄밀하 나의 것이 아닌게 됩니다. 맡겨진 것이지요.) 불의한 재물, 남의 것, 작은 일은 ‘돈’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돈’에 충실하다는 것은 친구를 사귀는 행위 즉 나누고 베풀고 흘려보내는 돈에 대한 인식과 태도의 실천의 변화입니다. 돈에 대해 그렇게 살지 않으면 큰 것에도 불의할 것이고, 참된 것을 맡길 수 없을 것이고, 자신의 몫을 제대로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반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돈을 섬길 것인지?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 돈을 사랑할 것인지? 하나님을 사랑할 것인지?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그가 한 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 쪽을 떠받들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예수님은 유독 돈에 대해서만 하나님과 대등한 위치에서 경쟁하는 것으로 이야기하십니다. 돈이 뭐라고 그렇게까지 묘사하는 것일까요? 돈은 가치중립적인 것 같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위험하고 불의한 것입니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하나님도 섬기고 돈도 불리는 양다리는 없다. 한 쪽을 중요시하면 한 쪽을 등한시 할 수 밖에 없다.
예수님은 해고위기에 놓인 불의한 청지기의 슬기로운 처신의 이야기를 통해 실패한 청지기 이스라엘이 임박해온 하나님나라의 삶 앞에 돈에 대한 욕망과 태도와 삶을 변화시켜 나누고, 베풀고, 흘려보내어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대비하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통해 돈에 대한 생각-돈은 내 것이 아니라 맡겨진 것이라는 돈에 대한 태도- 자기 중심적으로 쌓고, 불리고, 모으는 삶에서 나누고 베풀고 흘려보냄을 통해 사람을 얻는 삶으로 변화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오늘 자본주의를 사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크엘룰의 ‘돈이냐 하나님이냐’라는 책을 소개하는 것을 통해 오늘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서 돈에 대한 생각과 태도를 돌아보고 하나님을 섬기고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우리이길 바래봅니다.
엘룰은 돈은 단순히 재화의 교환 수단을 넘어서 깊은 영적인 문제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돈을 가리켜 맘몸이라고 부르신 것을 보면 돈은 중립적인 도구가 아니라 영적인 권세로 규정한 것입니다. 돈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우리 삶의 주인이 되려는 인격적인 힘입니다.
그래서 돈은 하나님과 대립합니다. 돈은 하나님처럼 사람에게 ‘섬김’, ‘충성’을 요구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라고 한 것처럼 돈은 하나님과 대립합니다.
돈은 세상의 관계를 ‘매매’로 변질시킵니다. 모든 것에 값이 매겨지고, 사람을 포함한 모든 것이 사고파는 대상이 됩니다. 원래 스펙은 사물에 붙이는 것인데 노동시장에서 사람에게 사용되어 가치를 매기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관계를 이득과 손실을 통해 가치를 매깁니다.
돈은 인간을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단순히 우리의 소유욕을 자극하는데 그치지 않고 유혹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드는 영적인 힘을 가집니다. 돈은 스스로 신뢰할 만한 존재처럼 보이게 하여 인간의 믿음을 요구하고, 결국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를 빼앗습니다.
개인주의와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두 주인, 즉 하나님이냐 돈이냐의 사이에서 끊임없는 영적인 싸움의 과정입니다. 이 선택은 단순히 더 나은 소비습관이나 더 많은 헌금으로 보여지는 윤리적인 실천과 결단을 넘어서서 두개의 상반된 세계관과 태도와 실천 사이에서 한쪽에 온전히 충성하는 실존적인 결단이 필요합니다.
엘룰이 이야기하는 맘몬의 세계와 하나님의 세계를 보여주는 도표입니다.
맘몬의 세계 vs. 하나님의 세계
계
매매 vs. 은혜 증여
여
소유, 지배, 경쟁 vs. 사랑과 섬김, 나눔
눔
돈의 노예, 소외 vs. 하나님의 자녀, 자유
유
죽음과 무 vs. 생명과 영원
원
엘룰은 두 세계를 조화시키는 삶은 결국 돈을 섬기는 삶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그리스도인으로 자본주의 삶의 가치와 방식을 저항하고 하나님나라의 은혜의 두가지 실천을 제안합니다.
하나는 증여이고 다른 하나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태도와 실천입니다.
증여는 단순한 자선 행위가 아니라 매매와 이윤 추구라는 악순환 고리를 끊는 예언자적 행위라고 엘룰은 말합니다. 대가 없는 나눔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자본주의 세상에서 맘몬의 질서를 깨뜨리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의 질서를 침투시키는 실천으로 바라봅니다. 돈을 축적과 교환의 수단이 아니라, 사랑과 관계를 맺는 도수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증여에는 두가지 방향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입니다. 헌금이라고 하지요! 예배와 헌신을 통해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모든 재물의(모든 존재의) 근원과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돈을 본래의 주인인 하나님께로 되돌립니다. 두번째 방향은 공동체와 이웃과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대가없이 주어지는 선물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세상 가운데 흘려보내지고 은혜가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임을 실천하고 증거합니다.
엘룰은 증여와 동냥을 구분합니다. 동냥은 여전히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의 권력관계가 유지되고 주는 자의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행위이지만 증여는 자신과 함께 자신을 내어줌으로 주는 자와 받는 자가 모두 은혜의 세계로 초대되는 행위라고 말합니다.
엘룰은 가난한 자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릅니다. 가난한 자는 변장하여 찾아오는 예수님의 형상이자, 부유한 세상을 향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던지시는 끊임없는 신학적 질문이라고 보고 있으며 우리가 어떻게 실천하느냐가 우리의 믿음과 신앙을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부요하며 강하신 하나님이 가난하고 약한 우리와 함께 하셨듯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향한 우리의 삶과 실천이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을 보여주는 신앙고백이라고 말합니다.
맘몬의 세상에서 하나님나라를 살아가는 맑은물이길 소망합니다.
돈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겠지요. 우리의 욕망과 근심과 두려움의 기저에는 늘 돈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맘몬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으려하고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와 마음의 충성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나라가 이미 도래했고 또 완성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해고 위기에 놓인 불의한 청지기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엘룰이 이야기하는 것 처럼 매매의 삶의 방식에서 증여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구체적인 실천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삶의 구체적인 자리에서 다양하고 급진적인 실천과 훈련과 실험들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귐으로 영원한 처소를 준비하는 맑은물이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