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와 거지 나사로
본문
Celebration

잘 아는 이야기 BUT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야기
부자와 거지나사로 이야기는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이야기를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를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이야기를 정직하게 대면하며 시간을 들여 묵상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이 이야기를 잘 모릅니다. 우리라고 표현했지만 사실상 저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야기를 잘 몰랐습니다. 단순히 부자에 대한 경고?나 죽은 이후 천국과 지옥이 분명히 있고 그래서 지금 회개하고 예수님 믿어서 천국을 준비해야한다?정도로 들려지고 알아왔던 이야기입니다. 전도집회. 새생명축제라고 하지요. 설교본문으로 자주 등장했던 이야기입니다. 맑은물 가족에게는 오늘 이 본문의 이야기가 어떻게 들려졌을지 궁금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는 가난한 이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실천을, 그리고 부에 대한 태도, 물질에 대한 태도와 실천을 급진적으로 변화할 것을 요구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나님께 부요한 삶은?
저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앞서 12장에 들려준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도 생각이 나고, 바로 앞서 살펴보았던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도 이 이야기에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재테크에 밝았던 부자는 죽음을 맞이하고는 모아두고 쌓아두었던 재산이 아무소용이 없게되었습니다. 이를 두고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야라고 하시며 세상에 부요했지만 하나님께 부요하지 않았던 삶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부요한 삶은 무엇일까요? 성경 열심히 읽고, 기도 많이 하고, 예배 빠지지 않고 교회에 헌금 많이 하는 삶일까요? 이런 예전적인 전통이 하나님께 부요하게 하는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이지만 이것 자체로 하나님께 부요한 삶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부요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여기서 안다는 것은 다들 알죠? 지성적인 앎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경험적인 앎이라는 것. 닮아가고 변하고 성장하는 앎이라는 것) 하나님을 닮아 삶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반영되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께 부요한 삶입니다.
하나님께 부요한 삶을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일 것입니다. 에수님과 하나님은 하나이셨고, 아버지의 일을 이루고 성취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부요한 삶이 무엇인지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보냄받은 세상에 사시면서 머리둘 곳 없는 나그네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일치되는 삶을 사셨고,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셨고, 경계를 허물고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을 가까이 하시며 이들을 돌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주린 백성을 먹이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자신의 전부를 온 세상과 온 인류를 위해 내어주심으로 증여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돌아보면 경계 밖으로 밀려나고 사회 경제 시스템에 의해 변두리로 내몰려진 이들에게 가까이 하시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하나가 되시고 친구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경계가 없고, 있는 경계마져 허물어졌습니다. 움켜쥐고 경계를 짓는 세상에 의해 소외되고 절망의 심연으로 빠져들 이들을 향해 자신의 전 존재를 주심으로 소외가 없는 경계가 없는 새로운 하나님나라의 부요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보여지는 하나님께 부요한 삶이란 경계가 없는 삶, 자신을 비워 내어주는 증여의 삶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 속편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는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 2편이나 속편처럼 보여집니다. 재테크를 통해 많은 재산을 움켜쥐고서 자신만을 향한 담을 짓고 살려고 했던 부자에게 경고가 주어졌습니다. “오늘밤 네 영혼을 취하면 네가 모아둔 재산은 뉘것이 되겠느냐?”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부자는 그 경고를 무시하고 호화롭게 살았던것이죠. 명품으로 몸을 치장하고 날마다 잔치를 벌리며 살았습니다. 자신의 집 담당 아래에 머물러있던 ‘나사로’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의 괴롭고 절망적이고 비참한 삶의 모습은 자신의 호화로운 삶에 거추장스러운 존재일뿐이었습니다. 저자(예수님)는 부자의 이름은 말해주지 않지만 거지의 이름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놀랍습니다. 이름을 나중에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이름을 똑바로 알려줍니다. ‘나!, 사!, 로!’ 그는 이름이 있는 존재, 소중한 존재,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나사로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도우신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신다라는 뜻을 가진 나사로였지만 그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도움심을 경험하고 맛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는 피부병을 앓는 거지로 살다 인생을 마감합니다. 하나님이 도우신다라는 이름을 뜻을 가진 나사로가 부잣집 대문 앞에 누워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부자가 나사로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이 되는 나사로가 될 수 있는 기회? 청지기라면 의무? 하나님께 부요했다면 부자와 거지의 경계를 허무는 친구가 될 수 있는 자리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부자는 철저하게 나사로를 눈감고, 외면하고, 무시하며 자신의 움켜쥐는 삶에만 몰두합니다. ‘어리석은 자야’라는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내 어리석은 삶을 고집합니다.
이어지는 아브라함과 부자의 대화에서 보면 이 부자는 ‘나사로’를 알았던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있는 나사로를 알아보고서는 나사로 손가락에 물 한방울 찍어 보내서 나신의 혀를 젹셔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형제들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어리석은 삶을 경고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이런 대화의 내용을 볼 때 부자는 나사로를 알았습니다. 그에게는 기회가 있었고, 자신의 경계를 허물고 움켜쥔 손을 펼쳐 나누고 베풀수 있는 매일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이를 철저하게 눈감고, 외면하고, 무시하며 자신에게만 집중하며 살았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경고와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삶이 영원할 것처럼 종말에 눈감고, 외면하고, 무시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하나님께 부요한 삶에 대해 눈감고, 외면하며, 무시하고 살았습니다.
부자의 삶은 그렇게 나사로를 외면함으로 하나님을 외면하고 그결과 하나님께 외면당하는 종말을 맞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난주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 대한 말씀을 나누며 자크 엘룰의 ‘하나님이냐, 돈이냐”라는 책을 소개했습니다. 엘룰은 부유한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가난한 자는 변장하여 찾아오는 예수님의 형상이자, 부유한 세상을 향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던지시는 끊임없는 신학적 질문이라고 보고 있으며 우리가 어떻게 실천하느냐가 우리의 믿음과 신앙을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부자는 그렇게 나사로를 외면함으로 부에 빠져 하나님의 도움을 거절합니다. 부자는 나사로를 거절함으로 자신의 집 앞에 찾아온 예수님을 거절합니다. 부자는 나사로에 대해 눈을 감음으로 ‘하나님께 부요한 삶을 살고 있느냐?’는 신학적 질문과 통찰에 귀를 막습니다.
그 결과 죽음이라는 끝을 만나고 뜨거운 불속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맞이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평생 거지 나사로를 외면했던 삶은 평생 하나님을 외면해왔던 삶이었고, 평생 나사로를 소외시켰던 호화로운 삶은 이제 하나님나라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키는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움켜쥠에서 펼침으로, 고립에서 환대와 베품으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듣고 나누며 오늘 우리의 존재와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어떤 무게로 다가올까요?
부자는 자신의 집 담벼락에 머문 거지 나사로를 외면하고 애써 무관심 함으로 영원한 지옥의 구렁텅이로 떨어집니다. 앞서 자크 엘룰의 이야기를 했듯이 가난한 사람들은 변장하여 찾아오는 예수님의 형상이요,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던지는 신학적 질문입니다. 가난한 이웃을 맞이함으로 예수님을 맞이할 것인지? 가난한 이웃을 향해 손을 펼치고 베품으로 하나님을 향해 부요한 삶을 살고 있는가? 에대한 끊임없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반문합니다. 우리는 부자가 아니라고… 하루하루 살기 빠듯하고 힘들다고…
자본주의 삶의 방식은 늘 우리에게 부족하다고 속삭입니다. 더 많이, 더 많이 소유하고 소비하고 움켜잡으라고 유혹하고 윽박지릅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필요한 것을 해주지 못할 때 자괴감이 들고, 직장동료가 주식과 코인으로 몇백씩 벌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나의 노동과 삶이 하찮게 여겨집니다. 위로는 늙어가는 부모님을 챙기고 아래로는 자라나는 아이들을 책임지며 나이들어가는 나도 돌보아야 하는 3중고에 시달립니다.
움켜쥐기도 모자라는 판국에 펼쳐서 나누고 베풀라니요? 아니! 안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지구가 100명의 마을이라면이라는 짧은 글에서는 우리는 이미 부요하다고 말합니다.
[출처] 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If the world were a village of 100 people)|작성자 올라이츠빌리지
지금 세계에는 63억의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세계를 100명이 사는 마을로 축소시킨다면 어떻게 보일까요? 20명은 영양실조이고 1명을 기아로 사망하기 직전인데 15명은 비만입니다. 75명은 먹을 양식을 비축해 놓았고 비바람을 피할 집이 있지만, 나머지 25명은 그렇지 못합니다. 17명을 깨끗하고 안전한 물을 마실 수 조차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은행에 예금이 있고, 지갑에 돈이 있고, 집안 어딘가에 잔돈이 굴러다니는 사람이라면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8명안에 드는 한 사람 입니다. 자동차를 가진 사람은 100명 중 7명 안에 드는 부자입니다. 마을 사람들 중 1명은 대학교육을 받았고 2명은 컴퓨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14명은 글 조차 읽지 못합니다. 만약 당신이 이 글을 읽을 수 있다면 그것은 3가지 축복을 의미합니다. 첫째, 당신에게 이 메시지를 보내준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고 둘째, 당신이 그것을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축복은 당신이 지금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세상에 풀어놓은 사랑은 다시 나에게 온다고. 그러니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노래를 부르고, 자유로움으로 몸을 흔들며 춤을 추세요. 그리고 그것을 당신 영혼에 심어두고 사세요. 그리고 사랑할 때는 마음껏 사랑하세요. 설령 당신이 상처를 받았다 해도 그런적이 없는 것처럼. 그리고 당신이 먼저 사랑하세요. 이 마을에 살고있는 당신과 다른 모든 이들을. 진정으로 나, 그리고 우리가 이 마을을 사랑해야함을 알고 있다면 정말로 아직은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찢어놓은 비열한 폭력으로부터 이 마을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짧은 글은 우리에게 이미 우리는 부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그래서 더 움켜잡으려 하기보다는 손을 펼쳐 베풀고 나눔으로 자유와 평화와 조화로운 삶으로 나아오라고 초대합니다.
더 움켜잡으라는 자본주의의 살을 답습하면 우리는 어리석은 부자, 경고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나님나라로부터 소외된 종말을 맞을 수 밖에 없었던 그 부자와 같은 종말을 맞지 않을까요? 하나님도 알고 아브라함도 알고 그를 아버지라고 불렀지만 삶은 전혀 상관없었던 부자처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나라도 알지만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하고 하나님나라를 살아내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닐까요?
부자가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는 나사로를 향해 움켜쥔 손을 펼쳐서 나누고 베품으로 그가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라는 응답이 되는 삶을 살았다면 그 역시 돈과 부가 나의 도움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도움이시다라는 믿음과 삶을 선물받지 않았을까요? 그 또한 나사로와 같이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있지 않았을까요?
성서일과에서 누가복음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계속해서 들려지는 울림이 있습니다. 나의 삶과 소유와 시간과 에너지의 주인은 누구인지? 그것을 움켜쥐고 안전과 안락함과 보장된 미래를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는 하나님을 알고 그분에 대해 부요한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니면 세상에 대해 더 부요해지려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질문들이 이 본문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 계속해서 울림을 통해 우리를 움켜쥠으로 세상에 대해 부요한 삶에서 베품과 풀어놓음의 환대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부요한 삶으로 나아가는 맑은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더 많이 움켜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를 서로에게 내어주는 증여와 환대의 하나님나라를 살아가는 맑은물이길 바랍니다. 가정교회에서 그리고 여러만남 속에서 나를 넘어서 서로를 향해 나를 내어주는 관계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우리의 이웃, 한국사회, 전세계에서 들려오는 ‘나사로’의 소식들 속에서 우리의 기도와 삶과 기부가 그들에게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는 응답으로 나타나길 소망합니다.
맑은물에는 살핌 나눔이라는 통장이 있습니다. 자유롭게 이곳에 기부하고 쓸모에 따라 우리 공동체와 이웃의 나사로에게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는 응답이 되는 통장입니다. 이 통장이 더 많은 나사로에게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는 응답으로 사용되길 바랍니다.
맑은물이 가진 힘과 에너지를 통해 지역사회와 이웃들에게 나사로가 되는 교회로 자라고 나타나길 소망합니다. 더 많이 꿈꾸고 그 자리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끄시길 기도하고 소망합니다.
오랜만에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의 4중 축복기도문으로 말씀을 맺겠습니다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의 4중 축복기도문
하나님께서 네게 쉬운 대답과 반쪽 진리, 피상적 관계에 대한 끊임없는 불편함으로 복 주시기를, 그래서 네가 과감하게 진리를 찾고 네 마음 속 깊이 사랑을 추구할 수 있기를.
하나님께서 네게 불의와 억압, 사람을 착취하는 것에 대한 거룩한 분노로 복 주시기를, 그래서 네가 모든 사람 가운데 정의와 자유, 평화를 위해 지치지 않고 일할 수 있기를.
하나님께서 네게 고통, 거절, 굶주림으로 인해, 혹은 소중한 모든 것을 잃고 아파하는 이들과 함께 흘릴 눈물로 복 주시기를, 그래서 네가 그들을 위로하고 그네들의 고통을 기쁨으로 바꿔주기 위해 손을 내밀 수 있기를.
하나님께서 네게 정말로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을 만큼 충분한 어리석음으로 복주시기를, 그래서 네가 하나님의 은혜로 다른 이들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을 해낼 수 있기를.
우리의 창조주시며 지극히 높은 왕 하나님 아버지의 강복하심과 성육신한 말씀으로 오셔서 우리의 형제이며 구원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강복하심과 우리의 옹호자이시며 인도자가 되신 성령 하나님의 강복하심이 너와 함께 계시고 이제와 영원히 너와 함께 남아 계시기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