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를 표현한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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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ration

금련산 봉수대의 추억
2000년대 초반이었을 것 같습니다. 모교회 사상교회에서 대학부 간사할 때였습니다. 토요일 저녁 기도회를 마치고 봉고 한대에 정원 꽉 채워서 금련산 봉수대에 갔습니다. 부산시내가 다 보이는 야경을 보며 사상 촌사람들이 다들 우와~를 연발했습니다. 멋진 야경을 보며 연신 감탄사를 보였습니다. 그러던 중 한 친구는 “이 많은 사람들 중에 내 짝지는 어디있노? 아~ 외롭다!”고 이야기를 했고, 한 자매님은 “하나님 너무 감사해요. 이 많은 사람들 중에 나를 사랑하셔서 자녀삼아주시고 구원의 은혜를 알게 해주시니 너무너무 감사합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경관을 보며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마음에 있는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 나온 것이겠지요. 외롭다고 한 친구는 평소 외로움을 느끼다가 부산의 멋진 야경을 보며 그 외로움이 더 크게 다가온 것 같고, 하나님께 감사한 자매님은 대학와서 예수님 믿고 그 믿음이 너무 귀해서 이 자리에서도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이 흘러 나왔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이 자매님의 말이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같은 상황, 같은 환경에서 각기 다른 반응과 다른 태도가 나오는 것은 상황과 환경의 요인보다도 당시 그가 가진 마음이 무엇이었는지가 더 크게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마음에 감사와 은혜가 있다면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감사와 은혜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마음에 원망과 불평과 걱정이 있다면 더 나은 환경과 상황 속에서도 원망과 불평과 걱정이 흘러나옵니다.
지금 내 마음에는 무엇이 가득 차 있을까요?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태도와 반응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요?
사마리아 출신 한 사람.
나병을 치유받고 돌아와 하나님을 찬양한 사마리아 출신 한 사람.
작은 소제목을 정하는데 긴 부연설명이 붙었습니다. 열명의 나병환자로 적으려다가 저자 누가가 강조하고 있는 인물은 열명의 나병환자가 아니라 돌아온 사마리아 출신의 사람이기에 그를 강조하기 위해 긴 부연설명이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에 있습니다. 누가복음 17장까지 이르렀으니 예수님의 공생애 여정의 끝이 보이는 지점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에 갈릴리와 사마리아를 관통하는 길을 선택해서 가십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갈릴리에서 요단강 줄기를 따라 여리고를 통과해서 가는 길이고, 이 길은 빙 둘러가는 길입니다. 다른 하나는 갈릴리와 사마리아를 관통해서 가는 길이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혐오해서 그 길을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애써 둘러가더라도 요단강 줄기를 따라 빙~ 둘러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의 경계가 없으셨습니다. 본문에는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시게 되었다고 경계가 있지만 예수님에게는 그 경계가 아무런 제약을 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경계를 허물고 그 길을 지나십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을 때 처럼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어놓은 경계가 없습니다.
한 마을의 입구에서 열명의 나병환자가 길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고 멀직이서 자신들을 고쳐달라고 요청합니다. 나병환자는 오늘날 한센병과 함께 다양한 피부병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장면을 상상해 봅시다. 유대율법에 나병환자는 격리됩니다. 마을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입구에서 이들을 만나게 됩니다. 피부병이 부정하고 옮을 수 있어 겪리 조치하고 사람들과 가까이 할 수 없었습니다. 가족과도 분리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까이 하지 못하고 멀직이서 예수님을 부르며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칩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다른 본문들에는 가까이 다가가서 어루만지며 등등 이런 표현들로 그들을 가까이 하시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 무심하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고만 말씀하십니다. 성경이 굉장히 축약된 이야기라 자세한 설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가까이 다가 가셨을 수도 있지만 본문의 상황상 그들과 거리를 둔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동일하게 멀직이서 대답하셨을 것 같습니다.
어떠한 치유적 퍼포먼스 없이 예수님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고만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듣고 열명의 나병환자들은 제사장에게로 가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이 가는 길에 나병이 다 나았습니다. 피부가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놀랍지요!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들은 가는 도중에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누가는 여기서 한 사람에게 포커스를 맞춥니다. 15절 1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자기의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되돌아와서,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런데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열명중에 한 사람이 길 가다가 자신의 병이 나은 것을 보고 놀라워합니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우와~ 우와~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연신 큰 소리로 말하며 뛰어 왔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바로 찾아온 것을 보면 그리 큰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때 였을 것 같습니다. 그의 소리지르며 뛰쳐오는 장면을 멀직이서 예수님을 보았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금새 뒤 쫓아와서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립니다. 그리고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를 고백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자 누가는 그런데!!!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고 밝힙니다. 여기서 이 이야기를 읽는 독자나 당시 유대 사회의 사람들은 또한번 충격을 받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처럼 사마리아를 입에 올리기 싫어서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답했던 율법교사처럼 사마리아인이라는 이유로 마음이 힘들어집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이 돌아와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를 전합니다.
발 아래 엎드린다는 것은 단순히 감사의 표현을 넘어서 경외와 복종과 예배를 나타냅니다. 어쩌면 사마리아인이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린 것은 베드로가 고기를 많이 잡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주님 나를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고 고백했던 것과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자신에게 치유를 베푼 예수님이 단순히 기적을 베푸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임을 그는 몸으로 고백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사마리아 사람 한명을 강조합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되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 사람 한 명밖에 없느냐?”
유대인의 원래의 의미가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의미임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 사람 한명만 돌아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나머지 아홉이 다 유대 사람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전체적인 뉘앙스에서 사마리아 사람 이방인 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예수님께 감사를 표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일어나서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시며 그를 일으켜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치유를 받아도 감사하지 않은 아홉과는 달리 사마리아 사람, 이방인만이 찬양과 감사를 말합니다. 같은 상황, 같은 변화, 같은 치유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 사람, 이방인만이 감사와 찬양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구원이 선포됩니다.
앞서 누가는 예수님 사역초기에 고향마을 나사렛에서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읽으시고 배척하던 고향마을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심한 기근 중에 선지자 엘리야가 많은 이스라엘 과부가 아니라 이방인 과부에게 갔다는 것, 엘리사시대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지만 수리아 장군 나아만만이 나음을 입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만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 반응하는 사람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본문에도 믿음으로 반응하고 감사과 찬양을 돌리는 것은 유대인이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이었다고 이야기를 전하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허울만 가진 유대인들의 믿음을 무색하게 합니다.
같은 치유, 같은 변화, 같은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어떤이는 그 안에 하나님의 역사와 일을 보고, 경탄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찬양하며 감사합니다. 그러나 어떤이는(대부분은) 무감각하거나, 우연으로 여기거나,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신앙의 연수가 얼마나 되었나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맑은물에 얼마나 오래되었냐가 우리의 믿음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과거의 신앙의 경험이 오늘의 나의 신앙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오늘 지금 내가 사마리아인 처럼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있는가? 매일의 똑같은 일상을 보내며 그 안에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과 은혜를 보는 눈과 고백하고 반응하는 삶이 있는가? 우리 일상 구석구석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감사와 찬양이 있는가? 지금 여기! 오늘 이자리에서 나의 신앙의 고백과 실천은 어떠한가가 나의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와 믿음이 있다면 버겁고 힘겨운 하루를 살면서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와 찬양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 마음에 세속적인 가치와 불평과 원망과 미움과 시기가 있다면 더 나은 환경에서도 감사치 못하고 여전한 불평과 원망과 시기가 나타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 우리의 고백이 사마리아 사람 같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예배가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감사를 고백하고, 내 삶에 나타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를 훈련합시다.
성서일과를 묵상하며… 예레미야의 말씀은 포로로 잡혀간 비통하고 절망스러운 자리에서 일상의 삶을 가꾸라고 합니다. 왜요? 하나님 여전히 살아계시고 때가 이르면 기적처럼 포로에서 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안계신 것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여전히 통치하신다는 믿음을 붙들고 살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시편의 말씀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노래할 이유가 분명하다고 극한 어려움과 환경에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셨다는 믿음의 고백을 올리라고 노래합니다.
디모데후서에서 바울은 자신은 매여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매여있지 않다고 고백합니다.
매일 버거운 일상을 삽니다. 전쟁같은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어떤 날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 같이 느껴지고 내 삶에 은혜가 없는 것 같습니다. 성서일과의 말씀은 그런 순간에도 그런 일상에도 여전히 하나님 살아계시고 하나님 일하고 계시며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고 이야기하는듯 합니다. 비바람이 불고 폭풍우가 몰아쳐도 구름이 걷히면 태양이 비추는 것이 변함없듯이 일상이 버겁고 삶이 팍팍하고 마음이 메말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우리를 통해 일하고 계심을 믿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맑은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같은 상황, 같은 변화, 같은 경험에도 다른 반응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사마리아인처럼 우리의 삶에도 감사와 찬양을 놓치지 않을까요?
매일의 일상의 감사를 고백하는 훈련이 우리의 믿음과 삶을 바꾸어 놓습니다. 때론 감사거리가 넘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미건조하거나 팍팍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날이든 매일 매일 감사제목을 찾고 감사를 고백하고 표현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습니다. 내 삶에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고 계시지는 관찰하고, 구석구석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합니다. 과도한 불안과 염려에서 벗어나게 해줍니다.
하루에 한두가지 하루를 정리하며 감사를 고백해봅시다.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한주동안 감사한 것을 찾고 나누어봅시다. 가정교회로 모였을 때, 내 삶에서 발견한 감사를 표현하고 나누어봅시다.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시간 봉헌시간을 통해 감사의 헌금과 함께 마음과 믿음을 고백해봅시다. 추수감사절이 다가옵니다. 11월 첫주부터 2주간 월드비전 감사챌린지와 함께 합니다. 묵상글과 간증 그리고 감사를 표현하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2주간의 챌린지를 통해 우리 안에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감사하며 우리의 시각과 삶이 변화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책 30권 가량 준비되어 있습니다. 온라인으로 참여가능합니다. 밴드를 통해 공유해 드리겠습니다.
추수감사절과 21주년을 맞습니다. 이 시간이 맑은물이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감사와 서로를 향한 감사가 풍성하게 표현되고 우리 안에 은혜가 넘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