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희망의 역사
본문
Celebration

오래전에 읽었던 그래도 희망의 역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오늘 강사로 오신 정한신박사님이 일상학교라는 이름으로 시민공동체과정 책 집담회를 할 때였습니다. 그때 기억으로 이 책은 제목대로 역사가 좋은 쪽으로 진보해왔고, 그래서 희망을 말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진보와 희망의 역사 이면에는 진보와 희망을 위해 끈질기게 싸우고 노래하고 기도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이야기해주었던걸로 기억합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삶은 누군가의 끈질긴 기도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와 평화는 절망적이고 비통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끈질기게 투쟁하고 부르짖은 사람들의 헌신으로 가능한 것이겠지요. 이런 투쟁과 헌신을 정의로운 사회와 인간다운 삶을 위한 기도로 본다면 이들의 끈질긴 기도 덕분에 가능한 것이겠지요. 여성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은 시대에 여성들의 투표권을 위해 싸워온 사람들의 끈질긴 기도 덕분에 오늘 남녀차별이 없는 평등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노동자들의 인권이 무시되고 기본권마저 짓밟히는 시대에 인권과 노동자들의 기본권을 위해 끈질기게 싸워온 이들의 기도가 법으로 보장을 받는 사회를 만들어 왔습니다.
엄혹한 군사정권시절에 민주주의를 부르짖고 피눈물 흘리며 싸워왔던 끈질긴 기도가 있었기에 오늘 이만큼의 민주주의를 만들어 올 수 있었습니다.
떼쓰면 들어주신다?
오늘 본문은 낙심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로 읽히기 쉽습니다. 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낙심하지 말고, 끈질기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야기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아이가 떼쓰듯 끈질기게 구하라는 의미만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취약해진 여인의 삶으로 들어가봅시다.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이 여인의 상황으로 들어가봅시다.
당시 사회의 남편 잃은 여인의 삶은 취약해질대로 취약해진 아무런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취약계층의 삶은 깊은 좌절과 모멸감으로 내면이 얼마나 부서져 있을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가끔씩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왕따당하는 아이가 학급 친구들에게서도 외면받고 이를 바로잡아달라고 호소하는 선생님으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하는 그래서 결국 죽음으로 내몰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마주합니다.
삶과 존재가 부서진 여인이 억울한 일을 풀어달라고, 빼앗긴 권리를 찾아달라고 재판관을 찾아갑니다. 반복되는 거절과 무시하는 그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끈질기게 재판관을 찾아가 호소합니다. 어디서 이런 용기와 믿음이 나왔을까요? 반복되는 좌절에도 불구하고 재판관을 찾아가 호소합니다.
끝내 그 재판관은 이 여인의 끈질긴 요청에 귀차니즘으로 응답합니다.
이 여인의 호소와 기도는 자신의 욕망과 욕심을 위한 끈질긴 기도가 아니라 빼앗긴 권리와 원통함을 풀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귀차니즘을 이기지 못해 여인의 권리를 찾아주거늘 하물며 밤낮 부르짖는 자기 백성의 권리를 찾아주지 않겠느냐? 오래도록 모른체 하시겠느냐? 그런데 말이다… 인자가 올 때 이런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비통하고 좌절되는 현실과 상황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기도하며 호소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바라는 믿음을 보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인자가 올 때 이런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예수님은 이런 믿음을 보고싶어 하는것 같습니다. 살만한 세상이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의 삶의 자리엔, 그리고 우리 이웃의 삶의 자리엔 정당한 권리를 빼앗긴채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아직 하나님나라의 샬롬, 편만한 정의와 공의는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 끈질기게 기도하며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는 맑은물이길 바랍니다. 이런 기도의 삶은 참 고생스럽고 지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나라의 온전한 통치를 바라보며 이 믿음을 붙들고 살아가는 맑은물이길 소망합니다. 함께 같이 손을 붙잡고 끈질기게 기도하는 맑은물이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