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본문

Celeb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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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인 이야기

아주 오래전 집에 아마도 고등학생 시절이었을 것 같습니다. 고 정채봉님의 생각하는 동화 그림책이 집에 있어서 읽었던?(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너무 오래 되어 내용이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데 내용은 이랬습니다.

한 마을에 신부님이 있었는데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술집에서 일하던 여성이 있었는데 그 여성은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어린마음에 적잖히 충격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럴수가!!! 신부님이 구원못받으면 누가 구원을 받나? 어떻게 술집여자가 구원을 받을 수 있지? 이런저런 복잡한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도 고 정채봉님이 오늘의 본문을 당시 상황에 맞게 각색해서 그림책을 썼을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바리새인=위선자, 나쁜사람(예수님께 늘 욕먹는 집단)으로 인식되어 있어서 본문의 이야기가 충격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지만 예수님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청중들은 예수님의 전복적인 이야기와 뜻밖의 결말에서 큰 충격을 받았을 것 같습니다.

당연히 종교적으로 열심이 있고 도덕적인 바리새인이 하나님께 의롭다하심을 받았을 것이고, 민족의 반역자와 죄인으로 취급받던 세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세리가 의롭다하심을 받을 수 있지? 어떻게 세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아니!!! 바리새인이 의롭다하심을 받지 못한다면 도대체 누가 의롭다하심을 받을 수 있는거지?

사람들은 예수님의 전복적인 이야기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이야기의 당사자인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내면을 폭로한 이야기에 상당히 분노하고 예수님께 반기를 들었을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 정말 나쁜 사람일까?

바리새인은 당시에 존경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헬레니즘 문화가 잠식해들어올 때 신앙의 순수성을 지킨 수호자들이었습니다. 세속화에 대항해서 유대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고 신앙의 순수함을 유지한 이들이었습니다. 오늘로치면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자를 외친 사람들입니다.

거기다가 바리새인들은 혁신적이고 진보적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거부했던 부활 신앙을 수용했고, 율법을 현대적 삶에 적용하는데 열심을 내었습니다.

회당중심의 신앙을 강조하며 성전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신앙을 이어가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거기다가 특별한 사람(제사장 계열)만 바리새인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바리새인이 될 수 있다. 모든 유대인들이 제사장처럼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만하면 혁신적이고 진보적이죠?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회당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율법에 대한 질문에 답변을 하고 분쟁을 조절하며 자라는 청년들의 롤모델이 되었습니다.

이정도면 당시 종교적 사회적으로 꽤 괜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율법과 신앙을 지키고, 도덕적으로 훌륭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떻게보면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 나도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삶의 모범이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진지했습니다. 게으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주2회 금식하는거 쉽지 않습니다. 주1회도 못하는데요??
모든 소득의 십일조. 보통은 세금떼고 십일조인데 세금포함으로… 돈이 아깝지 않았을까요?

정결법을 빠짐없이 지켰습니다.-정말 불편했을 겁니다. 정결법 등 손씻기, 안식일 지키기,

이들은 진짜 열심히 지켰습니다.

이들은 신실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타협을 몰랐습니다.

로마 사회를 살며 로마의 문화를 거부했습니다.

헬레니즘 문화가 주류를 이루는 사회에서 문화 컨텐츠를 거부했습니다(대중매체).

안일한 신앙을 거부하며 정말로 신앙의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누구보다 애썼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존경받았습니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고, 따르는 제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니 사회종교적으로 권위를 가졌습니다. 이들은 당시 사회의 주류였고 유대사회를 이끌어가는 리더였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무엇이 바리새인들을 위선자로 예수님께 지속적으로 욕먹는 사람들로 만들었을까요?

이들의 진지함, 신실함, 열심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예수님은 왜 이리도 이들 바리새인들에게 비판적이고 바리새인들을 경계하셨을까요?

이 비유를 시작하며 붙은 부제에 어쩌면 그 답이 있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고 남을 멸시하는 몇몇 사람에게”

이들은 그릇된 확신에 사로잡혔습니다.

은혜로 얻는 의를 경건한 삶을 통해 얻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경건의 삶에 너무 열심이다보니 그 경건하게 살아가는 자신의 삶에 도취됩니다.

‘나는, 나는, 나는… 합니다.’

이들의 기도는 입으로 하나님을 부르지만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11절에 혼자말로 기도했다고 번역하고 있는데 원문을 직역하면 자기를 향하여 기도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었는데, 손가락을 계속 강조하다보니 달을 가리는 손가락이 되어버렸습니다.

진지함, 신실함, 열심, 헌신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더이상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열심을 내는 나만이 존재할 뿐이었습니다.

그들의 기도의 청자는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의 중심은 자신이었고, 더이상 하나님이 필요없는 구원이 필요없는 자신들의 경건의 열심이 자신들의 의가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세리와 비교하며 ‘나는, 나는, 나는… 다릅니다.’다를 외칩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이들은 타인들과 비교하며 나는 다르다는 자의식을 갖고 삽니다.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늘 비교합니다. 거기서 우월의식을 느낍니다. 그리고 비교하는 타자를 은근히 경멸하고 배제하고 차별합니다.

자신들이 만든 의가 빈약하니 다른 사람들과 비교를 통해 자신의 의를 주장할 뿐입니다.

바리새인이라는 이름의 뜻은 분리된 자들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룩함이 분리된 구별됨을 뜻하듯 이들은 자신들의 거룩을 지키기위해 스스로 분리를 통해 우월과 차별을 정당화 해왔습니다. 자기 안으로 굽어진 거룩을 향한 열심히 결국 자신들만의 성을 쌓으며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우월의식과 차별의 삶을 낳는 비극을 낳았습니다.

성전 한 가운데 당당히 서서 스스로 의롭다 생각하고, 타자를 차별하며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려했던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움을 인정받지 못하고 성전을 내려가고 맙니다. 

뜻 밖의 인물.

성전에 또 다른 인물이 기도합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갔다. 하나는 바리새파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세리이다.

이야기 초반에 등장하는 두 인물의 설명이 나왔을때 청중은 여기서 게임이 끝나다고 생각했을겁니다.

아니!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한다고?

유대인들이 혐오하고 차별했던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죄인 취급받았던 세리는 성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이방인의 뜰에서 성전을 향해 바라보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사람들은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도 양심은 있네!!! 지 주제 파악은 하고 있구나.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의 기도 소리가 들립니다. 그러나 청중들은 하나님! 니가 그럴 자격이라도 있냐? 너에게 줄 하나님의 자비는 없다! 자격이 없어 하나님의 자비에 기대고 있는 그를 향해 자격이 없는 자가 성전 가까이 와서 기도하는 것이 내심 더 불편해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뜻 밖의 결말을 들려주십니다.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받은 사람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였다고….

전복적이고 충격적입니다.

이제까지 의로움은 바리새인의 전유물이고, 세리에게는 늘 죄인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리가 의로움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당시 청중이 가진 기존 가치체계와 인식을 완전히 뒤집어 놓으셨습니다.

어떻게 세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움을 입었을까요?

세리는 하나님을 향해 기도합니다.

그의 기도의 자세와 태도는 자신이 지금 누구 앞에 와 있는지,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감히 가까이 갈 수 없는, 머리를 들어 눈을 마주할 수 없는 분 앞에 자신이 서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가슴을 치며…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합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베드로가 자신의 배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마주했을 때 고백했던 그 고백이 입에서 터져나옵니다.

그리고 구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뿐임을 알고 제발 하나님의 자비를 입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성전에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가슴치며 자비를 구하던 세리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입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무엇이 사람을 의롭게 하는가?

당연히 의롭다 생각했던 바리새인은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고 내려갑니다.

당연히 죄인이다 생각했던 세리는 의롭다 함을 얻고 내려갑니다.

의로움은 성경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성경에서 ‘의’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과 언약백성으로서의 신실한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언약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은혜로, 오직 은혜로 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3:27-28
27   그렇다면 사람이 자랑할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무슨 법으로 의롭게 됩니까? 행위의 법으로 됩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법으로 됩니다.

28   사람이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에베소서 2:8-9

8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의로움은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의로움은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를 통해 가져올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의롭게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면하지 않으면 안으로 굽어진 우리는 쉽게 의를 내 안에서, 그리고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서 얻으려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면하면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은혜를 알고, 은혜를 경험한 은혜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향해 점수판을 내밀거나, 차별하거나 우월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기에 나와 다른 이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주는 넉넉함이 자라납니다.

사랑하시고, 사랑받으시며, 사랑그 자체이신 삼위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에 존재와 삶에서 그 사랑이 흘러나옵니다. 자기 안으로 굽어진 것을 펼쳐 타자를 향해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삽니다. 

예배와 일상의 자리에서

맑은물이라는 이름으로 한 자리에 모이고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는 과정은 어쩌면 오늘 이야기에서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고 성전에서 내려오는 과정과 같을 것입니다.

직관적으로 오늘의 이야기를 우리의 모임과 만남의 자리로 가져와 봅시다.

맑은물 전체예배의 자리와 가정교회 예배의 자리에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을까요? 우리의 만나과 모임에 하나님을 대면하고 경험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함께 하나님을 구하고 서로의 모습 속에, 삶의 이야기들 속에 하나님의 일을 발견하고 있나요?

아니면 종교적인 순서와 행위는 갖추었으나 온통 내 이야기와 불편한 타자 이야기와 자기 정당화와 나이스한 뒷담화가 나타나고 있는건 아닌가요?

우리의 만남과 모임 속에 다양한 이야기들이 펼쳐질 때 우리 안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향하고, 서로 안에 임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경험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혹여 우리의 모임에 바리새인의 기도와 같이 자기 안으로 굽어진 모습이 있다면 세리와 같이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새롭게 해주시기를 구합시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이끌어서 우리 안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서로의 존재와 삶에 하나님의 일을 일깨우고 일상의 삶을 위해 축복하고 기도하는 자리와 모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삶의 자리는 바리새인의 기도가 당연시되는 사회입니다. 자기 PR의 시대입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하고 타자와 비교해서 우위를 점하고 자신의 우월함을 비록 차별과 혐오를 통해서라도 나타내어야 하는 사회를 살아갑니다.

어쩌면 사회 전체가 바리새인의 기도를 당연시 하는 사회를 살아간다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이 기도를 듣고, 따라하고, 이 기도가 당연하다고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자기 자랑과 차별과 혐오가 점점 더 강해질 수 밖에 없는 무한 경쟁의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는 중에 세리의 기도는 게으르고 나이브하며 무책임하게 여겨집니다. 자격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혜택과 호의가 공정하지 않고 불합리해 보입니다.

무한경쟁의 사회에서 은혜는 어쩌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은혜가 간절히 필요한 세상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경험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붙들지 않으면

자기 자랑에 도취되고, 자기 의가 빈약하니 타자와 비교하고 차별과 혐오를 당연시 여기며 결국 홀로 고립되는 바리새인과 같은 삶을 살 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바리새인의 기도가 가득한 세상에서 세리의 기도를 올리는 맑은물이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맑은물이길 바랍니다.

자기 자랑과 차별과 혐오가 당연시 되는 세상에서 겸손하게 은혜를 구하고 타자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원수를 향해서라도 손을 내밀 수 있는 삶의 능력이 우리에게 나타나게 해달라고 함께 구하는 맑은물이길 바랍니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하나님! 우리 맑은물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