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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무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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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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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우리

한동안 유행했고 지금도 유행하고 있는 단어 ‘나다움’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참 좋은 단어이지요. 나다움을 찾고 나다움을 살아가는 것은 참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다움’이 이렇게 유행한 반대 이유는 우리가 삶에서 ‘나다움’을 잃어버리고 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다움’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기에 ‘나다움’에 관한 책과 강좌와 이야기들이 유행하고 흘러넘치는 이유일 것입니다.

우리는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삽니다. 자본주의 삶의 방식은 자신을 갈아 넣어서 이 세상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며 살라라고 강요합니다. 돈이 될 수도 있고, 지위와 명예가 될 수도 있겠지요. 결국 자기를 잃고, 소중한 가족을 잃고, 친구와 이웃과 자연을 잃어버린 삶을 삽니다. 무자비한 자본주의의 구조와 가치는 때론 생명까지 잃어버리게 합니다. 어쩌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의 삶이 이런 소외를 불러 일으키는 이유 일것입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의 이야기는 이방인 독자들을 대상으로 쓰여졌고,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방인 독자들에게 희망과 울림을 주었을 것입니다. 누가는 15장에서 잃은 양 비유, 잃어버린 동전 비유,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오신 이유를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고, 오늘 삭개오의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이 정말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삭개오의 이야기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삭개오의 이야기는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우리를 찾아오셔서 구원하시는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삭개오의 이야기 안에서 잃어버린 나와 우리를 발견하는 시간이길 바랍니다. 

잃어버린 이름 ‘삭개오’

삭개오의 이름은 정결하다, 순결하다, 의롭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이름을 지을 때, 아이를 향한 바램과 소망을 가지고 이름을 짓습니다. 정결하게, 순결하게, 의롭게 사는 사람을 기대하며 이름을 지었지만 삭개오는 삭개오로 불려지지 않습니다. 
그는 삭개오라는 이름 대신, 죄인, 세리, 배반자, 반역자라는 호칭으로 불려집니다. 
당시 사회에서 세리는 로마를 대신해서 동족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걷었기 때문에 그들을 향한 원망과 배제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어느 순간 이름을 잃어버리고 죄인, 세리, 반역자로 불려집니다. 그것이 그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당시 세리는 유대사회 기초 커뮤니티였던 회당에 출입을 제한되었고, 법정에서 세리의 증언은 무시되었으며 사회적으로 무시와 배제와 차별을 당했습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이 있었지만 그는 이름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름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나다움을 잃어버리는 것이고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린 것을 상징합니다.

누가는 삭개오에 대해 아주 간략한 정보를 우리에게 줍니다. 
2절과 3절에 세관장이고 부자이고 하나더… 키가 작았다고 소개합니다. 
아주 간략한 소개에서 그의 삶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잃어버린 삭개오는 동족의 비난과 차별을 견디며 부에 집착했을 것 같습니다. 세리중에 세리 장이었으니 그가 얼마나 부에 집착했을지는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거기다가 누가는 그가 키가 작았다고 소개합니다. 뽕나무에 오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지만 그의 작은 체구가 그에게 주었을 어려움과 한계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름을 잃어버린 삭개오는 부를 추구하고 부를 통해 자신을 증명하고 자신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기 위해 더 열심히? 살았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함께 공부한 풍삶기는 네가지 관계의 회복을 통해 하나님나라의 풍성한 삶을 살아가자고 도전하는 내용입니다. 역으로 이야기하자면 네가지 관계의 단절과 파괴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존임을 이야기 해줍니다. 
하나님과 단절, 나 자신과의 단절, 이웃(공동체)와의 단절, 세상과의 단절이 자신을 잃어버린고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름을 잃어버린 삭개오는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으로부터, 이웃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단절과 소외를 부의 추구를 통해 보상받으려 살아왔을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도 어쩌면 삭개오처럼 살고 있지는 않을까요? 다른 사람의 기준과 세상의 기준에 맞추어 살려다가 자신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지는 않을까요? 잃어버린 것을 채우기 위해 다른 것에 몰두하느라 함께 하는 공동체와 이웃과 함께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사랑하기보다 벽을 만들거나 거리두기를 통해 온전한 관계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자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지는 않을까요? 무언가 부족한 듯하고 마음에 죄책감이 남고 뭔가 채워지지 않는 삶의 갈증이 있지는 않을까요?

부는 움켜쥐었지만 삶의 채워지지 않는 갈증 속에 이름을 잃어버린 삭개오에게 들려온 이름이 있습니다. ‘예수’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이름대로 잃어버린 자신을 구원해줄 구원자의 이름을 삭개오는 듣습니다. 그가 죄인과 세리들의 친구라하며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신다는 이야기, 질병이 치유되고 귀신이 떠나간다는 이야기,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일지 모른다는 이야기 
삭개오는 예수이름과 함께 그 이야기에 기대와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이 사는 도시 여리고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향하신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를 보고싶어 합니다. 삭개오는 예수를 찾고 싶어합니다. 삭개오는 예수를 만나고 싶어 합니다. 

그 나무 아래에서

예수를 보기 위해 길거리로 나갑니다. 이미 사람들이 많이 있어 예수를 볼 수 없습니다. 그의 작은 키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동선을 살피고 지나가는 길목에 있는 돌무화과나무를 선택해 그 위로 오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 간절히 원합니다. 
3절에 삭개오가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 보기 위해 애썼다는 표현을 조금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며 삭개오가 예수를 찾았다, 애써 찾았다. 열심히 찾았다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열심히 찾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열심히 달려 돌무화과 나무 위로 오릅니다. 혹여 사람들이 눈치 챌까 조심히 소리없이 나무위로 오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점점 자신의 예상 경로대로 자신의 앞으로 지나갑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자신의 아래로 지나칠까 싶었는데… 그 순간 예수님이 걸음을 멈추십니다. 그리고는 나무위에 있는 삭개오를 찾으십니다. 
순간 예수님의 눈과 삭개오의 눈이 마추치고 무언의 깊은 대화를 나눕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장면이 오늘 본문의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영상으로 만든다면 이 장면을 아주 길게 롱테이크로 가져가서 두사람의 감정선을 살리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얼마전 유퀴즈 김영선 배우가 나와서 조세호랑 눈을 마추지며 감정을 전달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짧은 시간 마음이 전해지면서 시간이 더 주어졌다면 조세호씨가 오열할 뻔 했다고도 합니다. 
짧은 순간 예수님과 삭개오가 서로 눈이 마주치고 그 짧은 찰라에 온갖 이야기가 오고 갔을 겁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 하고 싶었던 이야기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봅니다. 
영화 아바타에 유명한 대사가 있습니다. “I SEE YOU” 단순히 시각적으로 당신을 본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존재로 깨달음으로 당신을 보고 안다 그리고 당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쓰여졌습니다.

이 순간 삭개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시간도 멎고 숨도 멎는 것 같았을 겁니다. 
예수님을 찾았던 삭개오는 예수님에 의해 찾아졌습니다. 
잃어버린 내 존재와 삶에 예수님이 무언가 해결책과 답이 될 것 같은 기대와 소망을 품고 몰래 나무에 올랐지만 그런 그를 예수님은 보고 계셨고 알고 계셨고 그를 찾으셨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만 비난하거나 따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시고 받으시는 따뜻한 예수님의 시선에서 그의 마음은 눈처럼 녹아 내립니다.

예수님은 나무 아래에서 삭개오를 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라! 오늘 내가 너의 집에 머물겠다.

예수님은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삭개오. 의로운 자, 정결한 자, 순결한 자. 
잃어버렸던 그의 이름이 불립니다. 삭개오. 
사람들은 죄인, 세리. 반역자로 불렀지만 예수님의 그 나무 아래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를 존재로, 있는 그대로 받으시며 이름을 부르십니다. 
뿐만 아니라 삭개오의 집에 함께 머물겠다고 합니다. 함께 밥먹겠다고 합니다. 
이제까지 돈과 부가 그의 마음의 집을 채웠는데 예수님이 그의 마음의 집을 채우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찾으시고, 그의 존재(삭개오 이름)을 찾으시고, 그와 함께 하십니다. 관계를 나누고 누리고 존재와 삶을 나눕니다.

삭개오의 인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을 것 같습니다.

잠시 삭개오와 눈을 마주친 주님의 시선을 상상해봅시다. 그리고 그 시선이 나의 눈과 마주쳐 서로 바라보고 있다고 상상해봅시다. 주님이 나에 대해, 나에게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무언의 대화에서 어떤 나눔이 일어날까요?
예수님이 나의 이름을 아시고 나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오늘 내가 너와 함께 하시겠다고 합니다. 그 초청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할까요? 오늘 함께 한 성찬의 부름이 이 부름이 아닐까요?
주현아 내가 너의 집에 머물겠다. 은아야 내가 너의 마음에 머물겠다. 
한솔아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힘겹게 버티고 외롭고 죄책감으로 가득한 마음 속으로 예수님이 오시겠다고 하십니다.

로버트 멍어의 내마음 그리스도의 집이라는 작은 책자가 있습니다. 
한두번 소개했던 책인데요.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해서 거실, 부엌, 방, 집 안 구석구석으로 모셔들이는 이야기입니다. 끝내 예수님께 보여주기 싫었던 옷장안 상자까지 내어 드리며 예수님과 함께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내 삶에, 내 존재에, 내 마음에 예수님이 함께 하시겠다고 오시는 자리는 어디일까요? 예수님께 내어 드리지 못한 마음의 자리, 삶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오늘 내가 너의 집에 머물겠다. 너와 함게 하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우리이길 바랍니다. 

찾은 바 된 삭개오!

삭개오의 집에서 즐거운 식사를 하던 중 삭개오가 일어나서 고백합니다. 
“주님 재산의 절반을 나누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부정한 방식으로 부를 축적한 것이 있다면 4배로 갚겠습니다.”
삭개오는 이제껏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를 내려놓습니다. 
자기를 잃어버리고 대신 움켜쥐었던 부를 내려놓습니다. 그가 집착하던 돈에서 삭개오도 놓임을 받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혹시 앞선 문맥을 보셨습니까?

유명한 낙타 바늘귀 이야기가 등장하는 본문입니다. 
돈 많은 관리가 예수님께 와서 묻습니다.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그리고 그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충실하게 지켜왔다고 말합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그의 반응은 매우 근심하여 돌아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 부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앞문맥에 등장합니다. 


누가는 삭개오의 이야기를 통해 낙타 바늘 귀를 통과한 부자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삭개오는 어떻게 자신이 움켜쥔 부를 놓을 수 있었을까요?


그는 예수님 안에서 발견되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잃어버린 존재가 아니라 찾은 바된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존재가 집착하던 부를 찾은 바 된 존재에겐 이젠 더 소중한 것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더이상 부를 통해 자신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기에 그는 움켜쥐었던 손을 풀어 놓습니다. 


이 고백을 들은 예수님은 오늘 이집에 구원이 이르렀다. 이제 삭개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서이다.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자신을 발견한 사람들은 이전에 움켜 쥐었던 삶에서 자유합니다. 이전에 가치 있다고 여겼던 것, 이것이 나를 지탱하고 보호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에서 자유합니다. 나를 더 증명하거나 남의 시선의 의식하거나 세상의 요구에 휘둘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에게 삶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와의 관계에서 이웃과 공동체와의 관계에서 세상과의 관계에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집착하거나, 눈치보거나, 선을 긋거나,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아도 됩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며 우리 삶에 참된 평안과 기쁨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나무 아래로

그 나무 아래 머뭅시다. 
자꾸만 나를 잃어가는 세상에서 나를 있는 그대로 보시며 부르시며 세우시는 그 나무 아래로 나아갑시다. 주님과 눈을 마주하고, 주님이 내 이름을 부르시는 것을 들으며,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신 예수님과 함께 동행합시다.

나를 찾아오시고, 나의 이름을 부르시며, 나의 마음의 집에 머무시는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삽시다.

삭개오가 누린 기쁨이 우리 안에 넘치길 바랍니다. 
그 기쁨이 오래 집착했던 부로부터 그를 자유롭게 했습니다. 
세상이 줄수도 알수도 없는 기쁨이 우리 안에 샘솟길 바랍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기쁨이 우리 안에 넘쳐서 우리가 집착하고 우리를 괴롭혔던 죄와 허물로부터 자유케하는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변화된 삶을 삽시다. 
이전에 집착하던 것을 놓읍시다. 사람의 인정, 부, 물건, 쿠팡, 당근, 쇼츠, 방어기제 등등. 내가 움켜쥐었던 것은 무엇인지? 내려 놓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돌아보며 이웃을 위해 내어 놓는 삶이길 바랍니다.

삭개오의 변화의 방향은 이웃과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돌보고 살피고 사랑해야할 가족과 공동체와 이웃을 향해 올바른 변화의 삶이 나타나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따라갑시다. 
누가복음을 죽 묵상해오면서 복음을 거부하는 유대인, 바리새인, 종교지도자들을 봅니다. 그러나 거부하는 그들과는 달리 복음이 계속해서 확장되고 열리는 것을 봅니다. 이방인을 향해, 소외되고 배제되었던 죄인들과 세리들을 향해 복음이 열리고 이 복음 앞으로 나아오는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고, 잃어버린 자들이 돌아오는 것을 봅니다. 
여전히 복음은 잃어버린 자에게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잃어버린 자를 찾고 계십니다. 우리 존재와 삶과 말과 행실을 통해 복음이 전해지고 잃어버린 사람들이 예수님께 발견되고 찾아지는 일이 일어나갈 소망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