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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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ration

애벌레와 나비
쌀알 보다도 작은 알을 깨고 에벌레가 나옵니다. 에벌레는 이리저리 배를 밀고 기어다니며 풀잎을 뜯어먹고 삽니다. 그리고는 긴시간 번데기로 죽은듯이 살다가 마침내 껍질을 벗고 나비로 날아오릅니다. 나비의 이런 변화의 과정을 살펴보면 참 신비롭습니다. 알에서 에벌레로, 에벌레에서 번데기로, 번데기에서 나비로의 변화는 차원이 다른 삶을 보여줍니다. 풀잎을 겨우 기어다니던 에벌레는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날며 이 꽃 저 꽃을 찾아 이동합니다. 느리고 눈 앞에 아주 작은 세계만을 살던 에벌레가 넓고 빠르며 높은 차원의 세계를 삽니다. 에벌레는 이런 나비의 삶을 알았을까요?
바이블프로젝트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는 영상이 있습니다. 이차원의 평면이 있고 삼차원의 물체가 관통합니다. 물체가 평면 위 아래 보입니다. 이걸 이차원에서 이걸 본다면 어떻게 보일까요? 물체의 움직임에 따라 하나가 두개도 됐다가 세개도 됐다가 크기도 제각각으로 보여집니다. 이차원에서는 각각 다르게 보여지지만 삼차원에서는 물체는 하나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다 설명할 수 없지만 인간의 지식과 경험의 한계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분이시면서 한분이시고, 한분이시면서 세분이신 신비를 그래도 적절하게 나타내었다고 봅니다. 어떻게 보면 이차원의 경험을 사는 인간이 삼차원의 하나님의 세계를 다 이해하기는 어렵겠지요. 그리고 시간의 제약을 받고 사는 인간이 영원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존재와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일겁니다. 아무튼 차원이 우리의 세계와 하나님의 세계는 차원이 다른 세계입니다. 이차원, 삼차원, 사차원과 멀티버스의 세계를 어떻게 다 이해하고 살 수 있을까요?
오늘 주제로 나온 부활이라는 주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 이후의 삶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분명하게 알 수 있을까요? 부활의 때에라야 그 삶이 이해가 되고 경험이 되어질 것입니다. 전혀 다른 형태의 몸을 입고,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이 열릴 것입니다. 몸을 밀어 땅을 기어다니던 에벌레의 몸에서 하늘을 나는 나비의 몸으로 전혀 다른 차원의 몸과 삶이 열리듯, 지금 입은 육체와 다른 몸을 입고, 지금 사는 삶과 비교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삶을 사는 것이 부활의 삶일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성경의 이야기를 통해 어렴풋이 그 그림자를 더듬어 보고 기대하고 소망하며 지금의 삶을 사는 것이겠죠.
예수님의 부활의 몸을 보면 우리의 몸도 부활의 때에 어떠할지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부활 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바로 알아보지 못한 것은 어쩌면 예수님의 얼굴이 바뀌었을 수 있다는 이야기 일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의 흔적을 가지고 계셨는데 손에 못자국과 허리의 창자국을 통해 제자들은 예수님을 확실히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이 세상과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드시면서도 벽을 통과하는 예수님의 몸은 부활의 몸이 물성을 가지고 있으나 물성에 제한되지 않는 어떤 신비한 차원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부활의 몸은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몸의 경험과 차원이 다른 형태의 몸일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과 같이 우리의 몸도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나라가 온전히 성취되는 그날 우리도 불현듯 다른 차원의 존재로 영광스럽게 변화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 여기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끝이 아니라, 그날 거기에서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와 몸으로 말할 수 없는 신비의 삶이 펼쳐질 것을 바라봅니다.
사두개인의 부활논쟁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두개인의 부활에 대한 질문은 어쩌면 이런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해서 오는 질문일 것입니다. 자신들의 지식과 경험의 한계 안에서 질문을 한 것이지요.
원래 모세오경만을 믿었던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모세오경에는 부활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고 죽음 이후의 삶을 바라보지 않으니 지금 현재의 삶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대제사장 가문을 중심으로 한 제사장 계층과 예루살렘의 부유한 귀족들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유대인의 최고 의결기관이자 사법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에서 대제사장직을 포함한 주요 직책을 독점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당시 지배국이었던 로마 제국이나 헤롯 궁과 협력하는 현실주의적/친세속적 태도를 취했습니다. 모세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하며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했습니다.
당시 유대역사가 요세푸스는 이런 사두개인들을 향해 현실 권력과 부에 집착하며 내세나 영적 세계를 부정하는 세속적 종교 지도층으로 묘사하며, 이들이 사회적으로 오만하고 배타적인 성향을 가졌음을 비판적으로 기록했습니다.
이런 사두개인들 중 몇 사람이 예수께 와서 질문을 합니다. 이들의 질문은 자신들이 가진 신념과 경험의 한계 안에서 예수님을 난처하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의 이런 질문은 부활을 주장하던 사람들을 난처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자신들이 이런 질문을 하면 예수님이 난처해 하며 쩔쩔맬껄 상상하며 자신만만하고 거칠게 질문을 던집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한 질문은 궁금한 것이 있어 한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부활이 없다는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고 예수님을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서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에 도전한 것입니다. '일곱 형제와 결혼한 한 여인'이라는 가상의 상황을 가지고 와서 도대체 부활한 때에 여인의 남편은 누가 되어야 하느냐고 질문을 합니다. 이들에게 일곱형제의 죽음과, 일곱형제의 아내가 되어야 하는 여인의 기구한 운명은 그저 이야기거리에 불과합니다.
이는 형사취수(兄死娶嫂)로 형이 죽은 뒤에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함께 사는 혼인 제도입니다. 성경시대에 자식이 없어 죽은 형제의 가문과 이름을 형제들이 이어주어서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핵심이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제도로 하나님의 구원과 복을 이어가는 기업무르는 제도입니다. 룻기에서 보아스가 형제를 넘어 친척관계에서 이 제도를 실행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이들의 치밀한? 계획은 예수님의 한 마디에 무너집니다. “니들이 잘 모르는가본데… 부활의 때에는 장가도 시집도 안간다.” “그리고 죽지도 않고, 마치 천사와 같은 존재로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히 산다.”
마치 애벌레가 “배를 어떻게 밀어야 더 빨리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느냐?”는 질문에 나비가 “그럴 필요 있냐고? 날개짓 한번이면 여기서 저기로 옮겨가는데…”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은 거겠지요.
예수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예수님을 난처하게 만들려고 했던 이들의 치밀하고 오만한 도전은 예수님의 한 마디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자신들의 지혜와 경험만 믿고 그 한계 안에 살던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지혜와 경험과 신념 넘어 존재하는 예수님의 지혜와 경험과 이야기에 무너지고 맙니다. 자신들의 가진 신념의 한계에 갇힌 아주 바보같은 질문이었습니다.
이후 역사에서 사두개인들은 자취를 감춥니다. 자신들의 사회적/종교적 기반이었던 성전이 AD70년에 파괴된 이후 이들은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사두개인들이 가진 신념과 지향이 위기를 맞으면서 송두리째 흔들렸고, 뿌리가 뽑히면서 멸망의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신앙한다고 하고 성전을 중심으로 제사를 행하고 종교적 사회적 권력과 부를 누렸지만, 현실에 안주하고 로마와 결탁하고, 오만하고 배타적인 삶은 하나님 없는 삶의 실체였습니다. 종교적인 문화와 언어는 넘쳐났지만 삶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사두개인의 모습은 어찌보면 한국교회의 어두운 모습과 같은 것 같습니다. 종교적인 문화와 말들은 넘쳐나지만 참된 영성과 구도자적인 삶의 추구가 사라진 모습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추구한다고 하면서, 정작 돈과 명예와 권력을 욕망하고 이기적인 삶의 태도를 보이는 한국교회의 모습은 사두개인의 모습과 다를바 없는 것 같습니다. 교회 예배당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신앙이 코로나19라는 위기를 맞아 참된 신앙의 도전을 받았습니다. 교회가 소외되고 고난받는 자들의 이웃이 되기 보다는 오히려 기득권을 옹호하고 배타적이고 무례한 태도는 사회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이 현재의 삶에 충실하고(돈과 권력을 추구하고),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성경의 이야기를 배척하고(예언서와 성문서, 그리고 부활을 배척하고), 기득권의 배타적이고 오만한 삶의 양식이 성전 파괴 이후 역사에서 사라졌듯이 한국교회도 참된 신앙을 추구하기보다 현재의 삶에 안주하고 돈과 권력을 추구하고, 자신들의 신념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의 제자도와 하나님나라의 신앙에 눈감고, 계속해서 기득권의 문화를 답습하고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삶의 양식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사두개인들의 종말과 같은 종말을 맞을 것입니다.
이는 비단 한국교회 뿐 아니라, 한국교회의 일부인 나와 우리의 문제입니다. 주일과 예배당 중심의 신앙을 벗어나서 일상생활과 삶의 전영역에서 주되심과 하나님나라를 살아가지 않으면… 성경의 이야기에 나를 형성해야하는데 나의 이야기를 위해 성경을 인용하는, 종교적인 언어와 문화는 넘쳐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참된 제자도의 삶이 나타나지 않으면… 자기중심성을 벗어나 타자지향적인 관대함과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과 신앙과 삶도 사두개인의 종말을 맞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
‘일곱형제와 결혼한 여인’이라는 우매하고 무례한 질문에 예수님은 그들의 이해와 상상력의 한계를 벗겨주십니다. 부활의 때, 하늘 나라의 일을 이 세상의 상식으로 이해하려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부활의 때에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변하고 지금과는 다른 이해와 관계와 삶이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애벌레와 나비의 존재의 차원이 다르고 보는 세계와 이해와 관계와 삶의 양태가 다르듯이 부활 이후의 이해와 관계와 삶의 차원이 전혀 다르게 펼쳐진다고 말씀하십니다. 부활의 때에는 장가도 시집도 안간다. 천사들과 같아서 죽는 일도 없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이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부부관계도 사라지고, 형제자매관계도, 부모자식 관계도 다 사라지는 것일까요? 관계와 사랑이 새롭게 정의되고 이해되고 경험되는 세계일 것입니다. 사랑하시고, 사랑받으시며, 사랑 그 자체이신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그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길이와 너비를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더 깊이, 더 높이, 더 넓게, 더 풍성하게, 더 충만하게 이해하고 경험하고 누리는 세계일 것입니다.
올해 IVF의 선배간사님의 사모님의 사별 소식을 접했습니다. 참 안타깝고 슬픈 일이었습니다. 선배간사님은 사별 이후 찾아오는 그리움과 주체할 수없고 정의할 수 없는 상실감을 안고 그 마음을 종종 페이스북에 표현하고 계십니다. 참 아리고 어찌할 수 없는 부재의 경험과 아픔입니다.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마음일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생의 사랑했던 아내와의 이별로 인해 받는 고통과 아픔이 이렇게 아리고 슬프고 힘겨운 것은 어쩌면 부활 때에 하나님 안에서 다시 재회해서 만나 경험하게 될 기쁨과 사랑과 연합의 충만함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상상해 봅니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겪는 아픔과 고통과 외로움보다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사랑과 영광스러움이 있지 않을까요?
지금 불완전한 몸과 마음이 겪는 사랑의 아픔과, 외로움과 고통은 온전한 사랑이 임하는 부활의 때에 말할 수 없고, 주체할 수 없고, 저항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함의 그림자이고 삼위일체 신비의 사랑을 우리도 알고 경험케 되지 않을까요? 부활의 때에 우리는 완전한 사랑이신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랑을 나누고 누리고 경험할 것입니다.
모세오경만을 인정하는 사두개인들에게 예수님은 출애굽기의 말씀을 통해 그들의 오해를 깨뜨립니다. 사두개인들은 당황했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 부활 이야기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는데 예수님은 이 말씀에서 부활의 의미를 찾아내시고 사두개인들의 잘못된 신념을 뒤집어 엎으십니다.
출애굽기 3:1-6절이 이야기입니다.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으로 소개하십니다. 이들은 이미 죽은지 오래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소개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을 모세게에 이렇게 소개하신 것은 이들은 하나님 안에서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죽은지 오래된 사라진 존재이지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하나님 안에 살아있고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 부활을 기다리면서 하나님 안에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의 삶이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이를 부정했습니다. 예수님의 산자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에 이들은 큰 혼란에 빠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곤란하게 하려던 그들의 의도는 역으로 자신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죽어서도 끝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향해 삶이 이어집니다. 부활의 때 전까지 죽은 자들도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이들을 잊지 않으십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기억과 마음에 하나님의 눈에 이들은 살아 있습니다. 모세에게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소개하셨던 하나님은 지금 모세를 보고 계시면서도 하나님을 향해 서 있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보고 계십니다. 어쩌면 우리도 하나님을 향해 설 때, 구름같이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죽은 자나, 산 자나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삽니다. 먼저 떠난 사람들은 부활의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삽니다. 그리고 지금 이자리를 사는 우리는 부활의 때를 소망하며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삽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삽니다.
우리의 고백
우리는 예배 때에 사도신경을 고백하며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우리는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이 세상이 끝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도 삶이 이어지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을 믿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며, 죽음 이후에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며, 부활의 때에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요구와 기준과 이야기에 맞추어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은혜와 사랑의 이야기에 맞추어 살아갑니다. 비록 우리 삶이 작고 초라하고 평범해도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며 오늘도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향해 살아갑니다. 우리의 삶과 사랑은 쉽게 깨지고 상처받고 부서지지만 온전한 사랑이신 하나님 안에서 아름답게 변화할 것을 바라보며 오늘도 사랑을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들만의 예배공간이 없어 불편하고 불안정하고 가정교회로 모여 무언가 아쉬운 예배인 듯 하지만 우리가 교회이며 서로를 소중히 여기며 함께 하나님을 향해 살아가기를 격려하며 오늘도 맑은물로 살아갑니다.
내 삶이 초라하고 보잘 것 없다고 여겨질 때, 우리의 사랑이 약하고 쉽게 깨어질 것 같은 순간에, 사랑 때문에 힘들고 아프고 외로워지는 순간에,
비교할 수 없고, 주체할 수 없고, 거절할 수 없고, 저항 할 수 없는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으로 기쁨이 충만한 존재로 영광스럽게 나타날 부활의 때를 소망하며 함께 믿음의 길을 가는 맑은물이길 바랍니다.
바울은 유명한 부활장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썩을 것으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심는데,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심는데, 강한 것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적인 몸으로 심는데, 신령한 몸으로 살아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