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달린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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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ration

어느덧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을 맞습니다. 교회력으로는 오늘이 마지막 날이고 다음주부터 대림절을 시작으로 새로운 해가 시작됩니다. 한 해 교회력을 따라 성서일과의 말씀을 묵상하고 나누었습니다. 모쪼록 이리저리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갈팡질팡 헤메이는 우리의 마음이 교회력을 따라 삼위하나님의 이야기로 우리의 일상의 시간에 중심을 잡아가는 삶이길 바랍니다. 대림절을 통해 성육신 하신 하나님을, 사순절을 통해 십자가와 침묵과 부활을, 성령강림절을 통해 성령의 임재를 배우고 머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교회력은 매년 돌아오고 반복되지만,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의 말씀묵상을 통해 매번 우리의 삶의 자리가 삼위 하나님의 이야기로 새롭게 현재화되고 하나님과 함께 걷는 우리의 일상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스도 우리 왕 주일
오늘은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 그리스도 우리 왕 주일입니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라고도 합니다. 이 절기는 1925년, 1차세계대전 후 세계가 분쟁과 혼란에 휩싸였을 때 제정되었습니다. 당시 교황 비오 11세는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군사주의, 국가주의, 인종주의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상임을 경고하며, 이에 굴복하지 말고, 공의와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 저항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우리 왕 주일'의 배경입니다.
이번주 성서일과의 말씀은 왕이신 예수님의 이야기로 채워져있습니다. 예레미야서는 악한 목자들에 의해 흩어져버린 양떼를 다시 모으고 공의와 평화로 세상을 다스리며 안전한 거처를 마련하는 오실 구원의 메시야를 소망합니다. 시편에서는 산들과 바다가 뒤흔들리는 무섭고 두려운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은 시인의 노래를 마주합니다. 골로새서에서는 우리 예수님이 온 우주 만물의 통치자이시며 주권자이심을 말하고 온 우주의 왕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교회의 머리되심을 증거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역설적으로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 왕이라고 조롱받는 예수님이 죄의 형벌을 받는 반란범(흉악범)의 고백을 통해 낙원을 허락하시는 진정한 왕으로 묘사됩니다.
민주주의를 통해 대통령제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왕’이라는 의미가 문화적으로 피부로 와 닿지 않지만 성경은 예수님이 우리의, 온 세상의, 온 우주의 왕이심을 선포합니다. 우리의 인정과 결정에 상관없이 예수님은 온 우주의 통치자요 주권자이신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존재와 삶의 주권자 왕이십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며 살아갈 것이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거부하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갈 뿐입니다.
‘그리스도 우리 왕 주일’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의 왕은 누구냐? 우리 인생의 주인은 누구냐? 예수님이 정말 나의 ‘주’이신지를 묻습니다. 무엇이 나를 움직이게 하고 있는지? 나의 삶의 이유가 무엇인지 묻습니다. 누구의 눈치를 보며 살고 있는지? 돈이나 명예나 사람의 인정이나 성공이나 안정적인 삶이 어느덧 나의 삶의 ‘왕’이 되어 나를 이끌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묻습니다.
C.C.C 전도책자에 나오는 심플한 그림은 우리 삶의 왕이 누구인지 잘 보여줍니다. 지금 주님이 내 마음에 들어와 있는지? 없는지? 내 마음에 들어와 계시지만 내 마음의 왕좌에 내가 있는지 주님이 있는지? 지금 나의, 우리의 상황은 어떤가요? 그리스도 우리 왕 주일을 맞아 이 질문앞에 서서 정직하게 반응하고 예수님을 우리 삶의 ‘왕’으로 모셔들이고 그분의 통치에 따라 삶을 살아가는 우리이길 바랍니다.
일상의 작고 소소한 일들 속에서 우리를 돌보시는 왕 예수님으로 인해 평화를 누리고, 염려되고 걱정되는 상황 속에서 우리의 안전한 거처가 되시는 주님으로 인해 힘을 얻고, 외롭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 같은 상황에 나를 기억하시는 예수님으로 인해 위로를 얻는 삶이길 바랍니다.
주님의 통치 안에 살기에 세상이 흔들리고 두렵고 고통스러운 상황속에서도 피난처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평화를 누리는 삶이길 바랍니다.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인 줄 알아라. 세상 만민이 나를 높이 받들어 섬기리라.”는 시편의 노래가 우리의 고백이길 바랍니다.
앞서 찬양을 통해 고백하고 노래했듯이 때론 우리 삶이 실패하고 소망이 끊어진 것 같은 순간속에서도 삶의 주관자 되신 그분 앞에 엎드림으로 삶의 위로와 소망을 얻고 힘과 용기를 얻는 우리의 삶이 되길 바랍니다.
세상은 극우의 논리와 이야기가 점점 힘을 얻고, 힘의 논리로, 돈의 논리로, 지배하고 흘러가는 것 같지만 그 속에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리심을 바라보며 소박하고 작은 우리 삶의 자리에서 정의를 심고, 평화를 가꾸고, 사랑으로 서로를 돌봄으로 왕 되신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길 바랍니다.
예수 이름 높이세 능력의 그 이름 예수 이름 높이세 구원의 그 이름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 예수 이름을 믿는 자 예수 이름 앞에 나오는 자 복이 있도다 오늘도 예수 이름 앞에 나아와 엎드리는 우리 맑은물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복이 있길 축원합니다.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 왕, 메시야
여기 역설이 있습니다. 우리의 왕, 온 세상의 왕, 온 우주의 창조자 통치자가 정작 반란범, 흉악범의 사형도구로 쓰이는 십자가에서 온갖 조롱과 비난과 저주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들의 말속에 역설이 담겨 있습니다. 누가가 이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도 흥미롭습니다. 카메라 앵글로 비추자면… 해골이라는 언덕에 세개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리고는 군중을 비추다가 군중 가운데 있는 당시 지도자들이 비웃으며 말합니다. "이 자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그가 택하심을 받은 분이라면, 자기나 구원하라지." 다른 사람은 구원하면서 저 자신 하나 구원하지 못하는 자가 무슨 메시야란 말인가! 그 다음 카메라가 비추는 곳은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 있는 병정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 가까이에서 신포도주를 들이대면서 조롱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너나 구원하여 보아라." 왕이라며? 왕인데 꼬라지 좋다!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 나와봐라! 카메라는 이들의 대화에서 점점 위로 올라가더니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붙어 있는 죄패를 보여줍니다. “이는 유대인의 왕이다” 참으로 역설적인 장면입니다. 왕이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극심한 형벌을 받고 있고 온갖 비난과 조롱과 모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내 곧 예수님 옆에 있는 한 죄수에게 이동합니다. "너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여라." 하!! 같이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눈 앞에 둔 사형수에게까지 왕이신 예수님은 조롱을 듣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묘사는 점점더 부각되고 있고, 예수님을 향한 조롱과 비난은 멀리서 점점 가까워지고 있고, 신분이 높은 자로부터 사형수에게까지 낮아지고 있습니다.
왕이신 예수님의 성은 골고다 해골 언덕이었고, 왕의 보좌는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 힘없고, 나약하고, 별볼일 없고, 사형수에게까지 조롱당하고 멸시당하는 존재였습니다.
누가 이 역설적인 상황에서 예수님을 주로, 왕으로 고백할 수 있을까요? 자기 스스로도 구원할 수 없고, 사형수에게까지 조롱과 멸시를 받는 존재를 누가 왕으로 고백할 수 있을까요?
누가는 여기서 우리에게 예수님이 어떤 왕이신지를 더 선명하게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피조물에게 조롱당하는 왕! 피조물의 폭력에 희생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왕! 자신을 희생해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왕! 끝까지 참고 인내하며 용서하고 손을 내미시는 왕! 세상을 창조하고, 바다를 잠잠케 하고, 여리고 성을 소리로 무너뜨리고, 유황불로 도시를 심판하셨던 그 힘 있는 분이 자신을 향한 조롱과 멸시와 폭력과 죽음을 고스란히 감내하고 참으시고 힘을 쓰지 않으셨던 왕! 당신의 백성을 위해 당신 자신을 주시는 왕!의 모습을 누가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과 말로할 수 없는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 속에서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어떻게 이런 기도가 나올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용서라는 말이 나올 수 있을까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고 있을 수 없는 기도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니깐 당연하지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완벽한 인간이었습니다. 자기 백성을 위하는 왕/ 자기 백성을 위해 희생하는 왕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기도입니다. 거기다가 죄인들을 위하는 왕/ 죄인들을 위해 희생하는 왕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기도입니다. 왕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오히려 욕하고 때리고, 저주하고, 폭력을 가하고 생명을 끊어버리는 상황에서도 그들을 용서하고 팔을 벌리는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 당신 자신을 주시는 왕이심을 이 십자가에서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자신을 구원하는 것을 통해 자신이 왕임을 증명해 보이라고 조롱하고 비난했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끝까지 참으시고 용서하시며 팔을 벌리심으로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받아주시는 참된 왕이심을 십자가에서 나타내보이셨습니다.
십자가 앞으로 나아갑시다. 십자가에서 참으로 나를 위하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시는 참된 왕 예수님을 만납시다.
이사야서는 십자가의 이유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이사야 53:4-5 십자가의 조롱과 폭력은 나 때문이었고, 예수님의 받으신 조롱과 폭력으로 인해 내가 용서를 얻고 치유를 얻고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 십자가 상의 역설적인 왕의 이야기는 결국 나 때문에, 나를 위해 일어난 일입니다.
히브리서는 자신을 내어주시는 왕 앞에 나아가자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비를 받고 은혜를 입어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도록 합시다. 히브리서 4:15-16
나를 위해 전부를 내어주시는 그 주님 앞에 오늘도 나아갑시다.
때로는 말못할 부끄러운 일도, 반복적인 죄와 실수도, 아무리 괴팍한 성격과 나쁜 죄와 마음도 십자가를 보좌로 삼으시는 왕 예수님 앞에서는 다 용서되고 받아들여지고 회복되고 치유가 되는 것을 십자가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못할것 같은 우리의 마음과 사정을 아시며 공감하시고 이해하시는 주님 앞에 나아갑시다. 주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쏟아놓고 때를 따라 얻는 은혜고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얻는 우리이길 바랍니다. 오늘 이 예배의 자리가, 그리고 홀로 주님 앞에 엎드리는 기도의 시간이, 일상에서 잠간의 순간에 십자가를 바라보는 그 시간이 주님의 은혜와 도움을 구하는 시간이되길 바랍니다.
나를 기억해주소서.
누가는 조롱과 비난이 가득한 이야기와 장면속에서 반전을 만듭니다. 한편의 사형수에서 다른편의 사형수에게로 시선이 옮겨집니다. 그리고 그의 표정과 이야기 속에서 십자가의 역설을 믿는 사람!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 왕의 서사를 믿는 사람!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맞은 편의 죄수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똑같은 처형을 받고 있는 주제에,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우리가 저지른 일 때문에 그에 마땅한 벌을 받고 있으니 당연하지만, 이분은 아무것도 잘못한 일이 없다." 그리고 나서 그는 예수께 말하였다.
"예수님,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이 사형수는 어떻게 예수님을 참된 왕으로 바라보고 고백하며 나를 기억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었을까요? 똑같이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무엇이 그의 마음을 움직여 예수를 구주로 왕으로 고백하며 나를 기억해달라고 할 수 있었을까요?
이 죄수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성경에는 분명하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마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저들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그 예수님의 기도가 그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을까요? 그 기도와 예수님의 모습에서 한줄기 빛이 그의 마음을 뚫고 들어와 예수님을 다시 주목하게 되지 않았을까요?
모두가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 속에서 고통을 호소하고 자신에게 십자가 형을 집행하는 군인들이든 누군가를 비난하고 욕했을 텐데,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인내하고 자신을 비난하고 조롱하는 이들을 향해 용서의 기도를 올리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이분이 진정으로 자기 백성을 위하시는 왕이구나, 이분이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손을 내미시는 참된 왕이구나 이분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구나라고 깨닫지 않았을까요?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 왕의 십자가는 같은 사형수의 마음에 믿음을 불어넣고 구원하는 역설의 순간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역설적인 자리에서 그는 예수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님,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공동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톰라이트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번역합니다. “예수여! 마지막에 왕이 되실 때 나를 기억해 주소서.” 공동번역과 톰라이트의 번역이 오늘의 주제를 더 자세히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이 사형수는 예수를 왕으로 고백하고 있고, 자기백성을 위하시는 왕의 통치를 바라보고 소망하고 있습니다. 이런 왕이 다스리는 나라라면 그 나라에서 살고 싶은 소망이 그에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지금 당장이 아니라도, 나의 소망과 뜻과 시간에 따라 응답되지 않더라도 왕되신 예수님의 시간에, 그 때에, 그의 통치와 다스림 속에 기억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응답하십니다. 그를 하나님의 정원, 에덴으로 초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응답하십니다. 예수님이 그의 왕이 되시고 그가 예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형수마저도 용서하고 자기백성으로 맞으시는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가장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십니다. 예수 이름을 부는 자! 그가 누구이든, 어느 때이든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십니다.
우리에게 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나를 기억해주십시오.”라고 고백하는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가 어떠한 사람이라도 자기백성을 삼으시고 함께 하시는 왕 삶의 끝일 것 같은 순간에라도 자기 앞에 나아오는 이들을 구원하시는 왕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왕 무엇이든 용서하고 이해해주시는 왕 그 왕 되신 예수님 앞에 나아가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님 나를 기억해주십시오. 십자가 앞에 나아가 이렇게 읊조려 봅시다. 주님 나를 기억해주십시오. 주님 우리 아이를 기억해주십시오. 주님 우리 이웃을 기억해주십시오. 주님 우리나라를 기억해주십시오. 주님 북한을 기억해주십시오. 주님 팔레스타인을 기억해주십시오. 주님 지구를 기억해주십시오. 이 기도는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주님이 왕으로 오실 때, 하나님나라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나의 구주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왕이시며, 온 세상과 우주의 통치자이신 그분께 이 기도를 올려드립시다. 주님 나를, 우리 아이를, 우리 이웃을, 한국 교회를, 우리 나라를, 팔레스타인을 기억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