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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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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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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대림절을 시작으로 교회력은 새로운 한 해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세상의 달력이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교회력은 한 해의 문을 엽니다. 교회력의 이런 다른 흐름과 여정이 세상 가운데 사는 우리에게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추며, 예수님의 걸음을 따라서 걷는 여정으로 이끌어주길 소망합니다.

대림절은 성탄절로부터 4주 전 주일에 시작되어 성탄절 전까지 이어집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기독교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립니다.

대림절에 우리는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광중에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대하고 기다립니다.

과거에 오셨고, 미래에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억하고 기다리는 대림절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의 의미를 발견하고 힘을 얻습니다. 

내일 지구가…

기다림의 절기인 대림절을 우리는 어떻게 보내야 할까요?

수동적이거나 무기력하게 흘려보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주체적이고 창조적으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는 유명한 격언이 있습니다. 스피노자로 알려졌는데 아리라는 말도 있고, 마틴 루터라고도 하는데 또 아니라고 합니다. 출처불명의 격언이 되었습니다. 아무튼.

저는 이 격언이 이렇게 들립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다는 것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아주 극단의 상황입니다. 내 맘대로 해결되지 않는 무엇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이렇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어떤 상황들입니다.

그러면 사과나무를 심는 것은 무엇일까요? 내일 지구가 멸망하는데 사과나무를 심는 것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 같지만 지구종말이라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도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살겠다는 것, 나는 나의 삶을 이어가겠다는 선언이 아닐까요?

상황을 탓하지 않고, 남 탓하지 않고, 오늘 주어진 나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삶의 자세입니다.

저는 이 격언에서 오늘 성서 일과의 말씀인 깨어 기다린다는 삶의 자세를 봅니다. 어쩌면 깨어 기다린 다는 것은 수동적으로 시간을 때우거나, 무기력하게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삶의 자세가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성서 일과 전체 말씀을 통해서 ‘기다림’이라는 이름을 가진 대림절에 오셨고, 오고 계시고,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삶의 자세와 태도를 함께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기다림은 일상에서 깨어 있음을 요구합니다.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기다리는 주제를 의식하고 생각을 계속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물건을 주문하고 택배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주문한 물건을 계속 생각하는 것이고, 음식을 주문하고 언제 도착하는지 살피는 것도 주문한 음식을 계속 의식하고 있는 것이지요.

기다림은 기다리는 주제 대한 의식의 깨어있음을 말합니다. 무엇이 언제 도착하고 이루어질지를 마음을 쏟고 때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서일과의 말씀은 기다림의 시간 우리에게 깨어 있을 것을 말합니다.

로마서의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압니다.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깨어 있으라 권면합니다.

깨어 있는 삶의 자세로 단정하고 절제하며 예수님으로 옷입으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날과 그 시간을 알 수 없으니 깨어 있으라 말씀하십니다.

노아 홍수 이야기. 밭을 갈고 맺돌을 가는 사람들 이야기. 밤중에 찾아오는 도둑 이야기들을 통해 깨어 있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너희 주님께서 어느 날에 오실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깨어 있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본문에서 깨어 있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라고 명확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깨어 있지 않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라고 넌지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깨어있지 않은 것은 로마서에서는 호사한 연회와 술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말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일상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것으로 설명하십니다.

노아의 때도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며 지냈다. 같은 일을 하다가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둘 것이다.

깨어 있지 않은 삶은 일상에 매몰되어 살아가거나 육신에 일에 치우쳐서 무절제하고 방탕하게 살아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깨어 있다는 것은 일상의 삶을 살되 삶의 기다리는 것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다시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기에 일상의 삶에서 예수님을 닮아가고, 완성될 하나님나라를 기다리기에 일상에서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려는 삶의 자세와 태도가 깨어 기다리는 삶의 자세와 태도일 것입니다.

우리는 똑같은 일상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되 깨어 있는 일상을 살자라고 대림절 첫주의 말씀은 우리를 일깨웁니다. 일상에 매몰되어 살아가면 우리는 사는대로 생각하며 삽니다. 세속의 가치와 이야기에 우리의 몸과 마음을 맡긴채, 상황에 휘둘리며 이리저리 흔들리는 삶을 삽니다. 상황을 탓하고 남을 탓하며 살게 됩니다.

하지만 일상에서 깨어 있는 기다림의 삶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는대로 살도록 이끕니다. 세속의 가치와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나라의 이야기가 우리 삶을 주장하고 이끌도록 우리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상황이 어떻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든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오늘 나의 보냄 받은 삶을 충실하게 살아갑니다. 다른 삶의 이유와 지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림절 깨어 있으라는 말씀 앞에 함께 서봅시다.

내가 정말로 기다리고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은 무엇인지? 나의 삶의 자리에서 깨어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인지 돌아봅시다. 내가 잠들어 있거나, 멈추어 있거나, 상황을 탓하거나, 남 타을 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어느 순간 신앙의 삶이 수동적이거나 이끌려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 앞에서 깨어 단독자로 서서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할 자리는 어디인지 살펴봅시다. 기도가 멈추어 있다면 다시 기도를 시작합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읽는 것이 멈추어 있다면 다시 말씀 앞에 나를 세워봅시다.

함께 깨어서 기다리는 대림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다림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것이다.

기다린다는 것은 수동적인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기다림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기력한 상태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준비와 행동의 시간입니다.

로마서는 우리에게 어둠의 행실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 촉구합니다.

기다림의 시간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고 초대합니다.

어둠이 짙을 수록 빛이 가깝습니다. 새벽이 가까워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어둠이 짙을 수록 어쩔 수 없다며 호사한 연회와, 음행과 방탕과, 싸움과 시기로 자기 욕망으로 어둠에 이끌리는 삶을 삽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둠이 짙을 수록 빛을 소망하고 빛이 가까웠음을 알고 빛을 바라고 빛을 따라 삶을 삽니다. 어둠에 속한 삶의 습관을 거부하고 빛에 속한 삶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옷입으라’고 명령합니다. 옷을 입는다는 것은 그 옷이 상징하는 인물의 정체성과 성품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군인과 경찰의 제복과 왕의 곤룡포가 상징하는 인물의 정체성과 성품과 역할이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둠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는 것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가치, 삶의 방식과 성품이 온전히 우리 삶에 내면화하고 우리 삶의 인격과 삶 전체가 그리스도를 반영하게 하는 변화를 의미합니다.

기다림의 시간은 소극적으로 어둠의 일을 벗어버리는 것이고, 적극적으로 그리스도로 옷입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력을 한 해를 시작하는 대림절 첫 주, 어떤 삶의 목표가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가 평생에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우리 존재의 평생의 목표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 이것이 나의 소원, 우리의 소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찬송가 505장의 찬양이 우리의 고백이고 소망이길 바랍니다.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예수를 닮기 원함이라

예수의 형상 나 입기 위해 세상의 보화 아끼잖네

무한한 사랑 풍성한 긍휼 슬픈자 위로 하시는 주

길 잃은 죄인 부르는 예수 그 형상 닮게 하옵소서

겸손하시고 거룩한 예수 원수의 멸시 참으시사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은 구주를 닮게 하옵소서

예수를 닮기 내가 원하네 날 구속하신 예수님을

내 마음 속에 지금 곧 오사 주님의 형상 인치소서.

기다림의 시간 예수로 옷입기를 원하는 우리 삶의 고백이길 바랍니다. 

우리는 샬롬의 세상을 기다립니다.

'마지막 때'라는 말은 흔히 무서운 심판이나 파괴의 이미지를 동반합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가 보여주는 기다림의 목적지는 그런 두려움의 그림이 아닙니다. 그가 그리는 미래는 모든 민족이 주님의 율법이 나오는 시온으로 모여들고,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않으며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완전한 평화의 시대입니다. 이 통찰은 우리로 하여금 기다림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이는 단순히 전쟁의 부재(不在)가 아니라, 파괴의 도구를 생명을 일구는 도구로 적극적으로 전환시키는 창조적이고 희망적인 비전입니다. 갈등과 분쟁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기다림의 끝이 파국이 아닌 화해와 공존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깊은 위로와 방향성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파멸이 아닌, 온전한 샬롬(평화)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미움과 갈등과 분열과 파괴와 폭력과 전쟁이 가득한 세상에서 사랑을, 평화를, 용서를, 화해를 환대를, 베품을, 생명을, 회복을 노래하고 이야기하고 살아내여야 하겠습니다.

부부와 가족 안에서, 공동체와 이웃과 직장 안에서 먼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용서와 사랑과 평화를 심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다림은 함께 떠나는 순례의 길입니다.

시편 기자는 "야훼 집에 가자 할 때, 나는 몹시도 기뻤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기쁨이 결코 개인적인 감상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편은 "그 지파들이", "내 겨레, 내 벗들"과 함께 예루살렘의 평화를 기원하는 공동체의 노래입니다.

고독과 불안이 만연한 시대에, 이는 우리의 기다림이 홀로 견디는 고행이 아니라 함께 떠나는 기쁨의 순례길임을 상기시킵니다. 핵개인화되고 모든 것을 각자도생해야 하는 시대에 우리에게 함께 이 순례의 길을 가는 길동무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지요. 때론 지치고 곤한 순간에 함께 가자고 손내미는 맑은물 가족이 있다는 것이 정말로 감사한 일입니다. 서로서로 함께 손 잡고 주님이 다시 오실 날까지 함께 순례의 길을 걸어가는 맑은물이길 바랍니다.

갑자기 오래된 곡 변진섭의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거죠라는 곡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저마다 힘에 겨운

인생의 무게로 넘어질 때

그 순간이 바로 우리들의

사랑이 필요한거죠

앞서가는 사람들과

뒤에서 오는 사람들

모두 다 우리들의

사랑이 필요한거죠

혼자서는 깨어 기다리기 힘든 시대를 살아갑니다.

혼자서는 이 기다림의 순례의 길을 다 걸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함께 기다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함께 가자라고 초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함께 길가는 순례의 길동무가 있습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주님의 다시 오심을 깨어 기다립니다.

우리의 가정교회가 우리의 맑은물이 그렇게 주님의 다시오심을 깨어 기다리는 함께 길가는 공동체이길 소망합니다. 

대림절 첫번째 주

주님의 다시 오심을 

일상에서 깨어 기다리며 

그리스도로 옷입고 

평화를 심으며 

함께 순례의 길을 가는 

맑은물이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