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회개하라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

본문

Celeb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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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둘째주

대림절 두번째 주일을 지납니다. 지난 주 대림절 말씀은 깨어 기다리라는 말씀을 통해 깨어 있어야 할 지점이 어디인지? 오늘 내 삶에서 그리스도로 옷입고 평화를 노래하고 서로를 챙기는 모습이 나타나길 소망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지난주에 이런저런 만남들을 통해서 한가지 깨우침이 있었습니다.

맑은물이 오랜동안 젊은이 선교를 방향잡아 왔잖아요. 그 결과가 지금 여러분인들인거고 부산대를 중심으로 장소를 제공하고 말씀을 전하고 강의를 해왔던 결과로 그리고 학사를 통해 머물자리를 마련해주었던 결과로 지금의 열매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공간도 없고 가정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다보니깐 점점 젊은이들이 자연스럽게 함께할 공간이 사라지는게 내심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접촉점으로 부산대 근처에 공간을 마련해서 맑은물 커뮤티니 공간으로 활용하면서 부산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공간을 대여하고 이런저런 접촉점을 마련하면 어떨까? 저만의 생각과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주에 이런저런 만남을 통해서 누구를 위한 공간이냐?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들었습니다. 정말 청년들 젊은이들을 향한 사랑과 애정이 있어서 마련하는 것이냐? 아니면 교회의 필요에 의해서 명분을 붙이는 것이냐?는 질문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반성이 되었습니다. 명분이 좋다한들 청년과 젊은이를 향한 진심이 아니라면 이또한 허울좋은 장사에 불과하겠구나. 애정어린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 시작도 안했고, 안건으로 나온 것도 아니었지만 그냥 제 마음 속에서 일어났던 하나의 에피소드였습니다.

우리 삶에서 깨어 있어야 할 지점은 어디인지 돌아보며 내 삶에서 신앙으로 살지 않고 세상의 가치로 살고 있는 지점을 돌아보고 다시 깨어 기다리는 삶으로 나타나길 소망합니다.

평화의 왕, 샬롬의 세상

대림절 둘째주 우리는 이사야의 말씀을 통해 평화의 왕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시편의 노래를 통해 그 왕을 기다리고 소망하며 부르는 기도를 만납니다.

이사야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

이사야는 하나의 그림언어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사야 시대는 이새이 뿌리인 다윗왕가가 몰락하고 희망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이새의 줄기와 뿌리에서 싹이 나고 열매맺는다는 그림은 마치 죽어서 베어진 나무 그루터기 같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새의 줄기에서 새로운 생명의 싹을 틔우고, 열매맺는 희망의 왕을 보내주실 것이라는 놀라운 약속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소망없는 그루터기 같은 자리에서 싹이 나고 가지가 자라서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소망의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새로운 왕이 올 것인데 그 왕은 주님의 영이 함께 하셔서 이 땅의 공의로 통치하고, 정의로 다스리며, 성실로 돌볼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 결과 나타나는 것이 평화입니다.

이사야 11:6-9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죽은 그루터기에서 싹이나고 가지가 자라 열매맺는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데,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오시는 왕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세상이 평화의 세상이라는 말은 더 믿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강력하고 잔혹한 앗수르제국이 생존을 위협해오는 상황이었습니다. 
북왕국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고 백성들은 비참하게 끌려가는 소식이 전해지는 시대였습니다.

부와 권력을 쥔 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자신들의 입맛에 따라 재판을 왜곡하고 정의와 공의는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향한 제사는 끊임없이 올려졌지만 하나님은 그 제사를 역겹다고 하시며 성전문을 누가 닫아줬으면 좋겠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정의와 공의를 원한다고 하셨지요.

다윗왕가는 몰락했고, 시대적으로는 암울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왕을 보내시겠다고, 그 왕을 통해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고 평화의 세상을 열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누가 이 말을 믿을 수 있을까요? 누가 절망적인 상황에서 소망을 믿으며 나아갈 수 있을까요?

다른 왕을 기다린다는 것은 반역을 꿈꾸는 것이고, 절망적이고 암울한 세상에서 평화와 소망을 꿈꾸며 산다는 것은 위험하고 손해보고 부질없는 짓 같은데 누가 그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이질문을 바꾸어 봅시다.

이런 소망과 이런 비전이 없이 산다면 우리의 삶의 의미와 가치와 살아야 할 이유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혼돈에서 질서를 부여하고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니면 누가 이런 소망을 부여잡고 살수있을까요?

창조의 완성이 안식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보시기에 좋았다고 하는 평화였습니다. 하나이며 셋이고 셋이며 하나인 신비한 삼위일체의 연합이 창조세계의 평화로 나타났습니다. 근원적 평화이신 하나님이 아니라면 어떻게 평화의 세상을 꿈꾸며 바라볼 수 있을까요?

온 세상 창조하시던 그 말씀이 여전히 힘이 있어 평화의 왕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근원적 평화이신 하나님이 깨지고 절망적인 창조세계에 다시 평화를 이루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우리로 하여금 절망적이고 암울한 세상에서 희망을 노래하고 소망으로 한걸음 내디디는 삶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이사야가 절망적인 상황에서 평화의 소망을 선포한 시대나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가 다르지 않습니다.

강대국은 여전히 약소국을 침탈하고 있고, 전쟁과 폭력이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습니다.

미국은 달러패권과 군사력을 배경으로 전세계를 향해 폭력적인 방식으로 관세전쟁을 벌입니다. 
전세계적으로 극우가 세력을 얻고 있고, 배제와 혐오를 정당화하고 폭력이 일상화되고 있습니다.

내란이 일어난지 1년이 지났지만 내란을 일으킨 세력들은 단죄받지 않았고, 사법부는 내란세력들을 옹호하는 듯한 모습도 보입니다.

800원 2,400원 횡령한 버스기사의 해고를 정당하다고 판결하지만, 수십억 횡령한 이들은 눈감아주는 재판결과 앞에서 마음이 한없이 무너지고 역으로 힘있고 빽있어야 한다는 반발감도 생깁니다.

아이들은 입시경쟁체제 안에서 친구가 아니라 경쟁상대로 서로를 만나고, 과열된 구조적문제가 아이들의 목숨도 앗아갑니다.

이런 세상에서 평화를 소망하고, 이웃을 챙기고, 자기를 희생하는 삶은 어리석고 바보같습니다. 자본주의 체제와 돈과 자신을 숭배하는 세상에서 평화의 왕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은 반역이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의 방식은 위태하고 위험해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죽은 것 같은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싹이나고 가지가나서 열매맺을 것이다.

평화의 왕이 오시면 그가 공의로 정의로 성실로 다스리고 통치할 것이다.

근원적 평화이신 삼위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세상에 가득하기에 온 땅에 평화가 가득할 것이다.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이꿈만 같고 거짓 같은 세상을 하나님은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하나님을 알기에, 이 말씀이 우리 속에서 꿈틀거리기에 오늘도 평화를 꿈꾸고

삶에서 평화를 선택하고 평화를 일구며 위태롭고 위험하며, 바보같고 어리석은 길을 함께 걸어가는 맑은물이기를 바랍니다. 말도 안되는 꿈을 정말 꿈같은 평화를 소망하며 온전히 실현된 세상을 바라보며 함께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평화의 노래와 기도

이런 소망을 가진 사람의 기도가 시편의 노래입니다. 
시편기도 시간에 함께 낭독했지만 다시 시편의 말씀을 같이 읽어 볼까요?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어보겠습니다. 

하느님, 임금에게 올바른 통치력을 주시고, 임금의 아들에게 정직한 마음을 주소서.

당신의 백성에게 공정한 판결을 내리고 약한 자의 권리를 세워주게 하소서.

높은 산들아, 너희 언덕들아, 백성에게 평화와 정의를 안겨주어라.

백성을 억압하는 자들을 쳐부수고 약한 자들의 권리를 세워주며 빈민들을 구하게 하소서.

해와 달이 다 닳도록 그의 왕조 오래오래 만세를 누리게 하소서.

풀밭에 내리는 단비처럼 땅에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그의 은덕 만인에게 내리리니

정의가 꽃피는 그의 날에 저 달이 다 닳도록 평화 넘치리라.
……

당신 홀로 놀라운 일 행하셨으니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는 찬미받으소서.

영광스런 그 이름, 길이길이 찬미받으소서. 그 영광 온 땅에 가득히. 아멘, 아멘.

이 기도와 노래가 우리의 기도와 노래가 되기를 바랍니다.

가정교회 예배때 기도문으로 인용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청어람에서 홀로 예배드리는 가나안 성도들을 위해서 예배 안내로 매주 연재하고 있습니다. 성서일과를 중심으로 홀로 예배드릴 수 있도록 연재하고 있습니다. 매주 금요일에 올라옵니다. 뉴스앤조이를 통해 매주 연재하고 있구요. 여러분의 필자를 섭외해서 다양한 관점으로 묵상하며 예배할 수 있습니다. 참조하실 분들은 참조하면 유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은 기도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 평화를 위해 다양한 계층과 다양한 삶의 터전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칫 우리의 기도가 편협해지거나 우리의 좁은 시야에 머물 수 있는 것이 이 기도문을 통해 넓어지고 다양해 질 수 있어서 좋습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과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부분의 기도문이 좀 생소할 수 있어도 이 땅에 평화가 임하길 원하는 마음으로 함께 기도하다보면 우리의 삶의 관심과 태도가 점점 달라지리라 믿습니다. 이 기도문을 잘 활용하고 우리의 기도가 넓어지고 깊어지고 다양해지길 바랍니다. 

공동체의 평화를 이루라

로마서의 말씀은 바울이 성경이 다양한 본문과 이사야 11장의 말씀을 당시 로마교회의 상황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적용하고 있습니다.

로마교회 안에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 사이에 미묘한 갈등과 어려움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갈등은 서로의 경계를 만들었고 적당한 거리두기와 선긋기를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구약의 시편과 신명기와 이사야의 말씀을 새롭게 재해석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차별없이 하나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요 약속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로마의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위해 기도합니다. 
5-6절

예수를 본받아 같은 생각을 품게 하시고,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 돌리게 해주시길 빕니다. 
이렇게 기도한 바울은 갈등관계에 있고 서로 경계를 짓고 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권면합니다. 아니 명령합니다.

7절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받아들이십시오.


서로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받으라고 부탁합니다.

달라서, 삶의 격차가 있어서, 사는 곳이 달라서, 사는 문화가 달라서, 세대가 달라서, 육아방식이 달라서, 아이의 유무가 달라서, 성격이 달라서, …

우리 안에 일어나는 갈등의 이유와 차이와 경계짓고 선을 긋는 이유를 찾자면 셀수없이 많을 것입니다. 서로를 받을 수 없는 이유가 때로는 나를 보호하고, 상대를 배려한 것일 수 있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받고 하나됨을 이루고 평화를 실천하는 공동체를 이루라고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이사야 11장이 보여주는 평화의 그림을 교회 공동체 안에서 먼저 나타내고 보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달라도 너무 다른, 아니 오히려 경계짓고 물어뜯고 싸우는 것이 당연한 관계가 친구처럼 가족처럼 어울려 평화를 일구는 이사야의 이상과 꿈을 주님의 몸으로 이룬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일구고 실천하라고 도전하고 있는게 아닐까요?

다르다고, 맞지 않다고, 맘에 안든다고 경계를 짓고 손절이 빠르고 당연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혐오하며 배제시키는 이땅의 문화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 가운데에서 삶의 배경과 경제와 교육의 격차와 성격과 사는 곳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이루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으며 때론 마음에 스크래치가 나는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받아들이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셨던 교회의 모습이라고 로마서는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가정교회의 나눔이 깊어 질수록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드러나고 나타납니다. 그러기에 다름이 더 뚜렷해지고 갈등과 경계짓는 이유와 상황은 더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지난 2025년 돌아보기 2026 내다보기를 하며 맑은물의 가정교회가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책임지며 돌보는 자리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는 개인적인 평가를 해봅니다. 하지만 그러면서 모든 공동체와 깊이를 추구하는 공동체로 나아갈 수록 갈등은 늘 존재하기에 이 갈등상황에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서 함께 성장의 길로 갈수도, 아니면 쇠퇴의 길로 갈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교회에 권면하고 명랑한 대로, 우리가 서로를 그리스도 안에서 있는 그대로 받으며 용납하고 용서하는 관계 안으로 들어간다면 맑은물은 평화가 없는 세상에서 평화를 일구며 살아가는 공동체로 자라나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갈등 관계를 회피하고 경계를 짓고, 적당한 거리두기에 안주한다면 우리는 껍데기만 가진 공동체로 나타나고 말 것입니다.

갈등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맑은물 안에 말못하는 미묘한 지점들이 있습니다.

구서동과 구서동 아닌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무엇이 있습니다.

누가 의도적으로 만든 것도 아니고 겉으로 확 드러난 것도 아닙니다.

그냥 함께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섭섭함이거나 소외의 마음입니다.

구서동에 모여 사는 사람들은 왠지 가해자가 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고,

구서동 밖에 사는 사람들은 드러내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어렵고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커뮤니티 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장소가 구서동 인근이 되면 불공정하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구서동에 사는 것과 살지 않음으로 인해 발생되는 미묘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서로가 인지하고 있는 그대로 서로가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이 필요한것 같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표현 이면에 있는 마음을 읽고 서로를 보듬어가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또다른 한가지는 맑은물이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양육하는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다보니 알게모르게 미혼이거나 자녀가 없거나 홀로 교회를 출석하는 이들이 소외를 느끼거나 설자리를 찾지 못하는 상황이 생깁니다. 성찬때에도 가족단위로 성찬에 참여하다보니 홀로 교회에 출석하는 이들이 어정쩡해지는 시간이 발생합니다. 가정교회 나눔에서도 자녀양육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다보면 자녀없이 참석하는 이들이 낄자리를 찾지 못하고 나눔에서 뒤로 물러나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바울이 빌립보교회에 권면한 이야기가 미묘한 어려운 지점에 적절한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메시지 번역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따름으로 무엇을 얻었거나, 그분의 사랑으로 여러분의 삶에 얼마간의 변화가 일어났거나, 성령의 공동체 안에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가 있거나, 여러분에게 따뜻한 마음이나 배려하는 마음이 있거든, 내 부탁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서로 뜻을 같이 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속 깊은 벗이 되십시오. 자신의 방식을 앞세우지 말고, 그럴듯한 말로 자신의 방식을 내세우지 마십시오. 자기를 제쳐 두고 다른 사람이 잘 되도록 도우십시오. 자기 이익을 꾀하는 일에 사로잡히지 마십시오. 자신을 잊을 정도로 도움의 손길을 내미십시오.

자기를 제쳐두고 다른 사람이 잘 되도록 도우십시오. 자신을 잊을 정도로 도움의 손길을 내미십시오.

이 말씀이 맑은물의 미묘한 지점을 풀어가는 말씀이지 않을까?요!

내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람이 있습니까? 서로 받으라는 바울의 권면을 깊이 받아들이고 서로를 받아들임으로 공동체 안에 차이를 극복하는 평화를 일구는 맑은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샬롬의 왕과 나라를 맞이하는 길 회개

복음서의 말씀으로 들어가볼까요?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칩니다.

“회개하라. 하나님나라가 가까웠다.”

평화의 왕이 다스리는 하나님나라,

평화가 가득한 나라 하나님나라.

그 왕을 맞이하고,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회개하라고 촉구합니다.

사실 우리는 평화를 갈망하고 기대하지만 정작 우리의 본성은 평화를 거부합니다.

누구나 수용되고 받아들여지는 평화의 공동체를 꿈꾸지만 정작 우리는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으라는 바울의 명령을 거북해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나 개인의 평화를 원할뿐이지 온 세상의 평화나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나 개인의 평화를 깨트리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정작 저 사람을 받아들이기 위해 씨름하는 것이 싫고, 감정을 소모하고 나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 불편하기에 우리는 서로 받으라는 말씀을 거북해하고 왜요? 어디까지요?라는 질문으로 외면하려 합니다.

경쟁과 폭력과 차별이 가득하고 힘에의 한 우위가 당연시 되는 세상에서 평화를 말하고 약자와 가난한 자 편에서고 이웃을 위해 시간과 마음을 쏟는 것이 바보처럼 여겨지고 위험하게 느껴지는 세상이기에 우리는 평화의 걸음 걷기를 주저하고 망설입니다. 이 또한 나의 일상의 안전과 평화를 깨뜨려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12.3 내란의 밤 국회로 달려갔단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안전과 평화를 깨뜨리고 달려갔음을 한 사람, 한 사람의 증언을 통해 듣습니다. 여러 다른 동기들 속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국회로 달려갔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때때로 사회의 평화, 공동체의 평화를 지키고 가꾸기 위해서는 나 개인의 내면의 평화와 일상의 평화를 깨뜨려야 가능한 것을 알게됩니다.

우리는 평화를 꿈꾸고 원하지만 나 개인의 평화를 깨뜨리는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합니다. 온전한 평화보다는 적당한 평화를 원합니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어느정도 경쟁과 폭력과 차별을 어쩔수없는 부분이라 생각하고 나만 희생당하지 않으면 괜찮다고 그 안에 안주하려 합니다.

제가 만약에 예수님 당시에 살았더라면 세리와 죄인들을 환대하고 친구삼으시고, 이방인을 향해 두 팔을 활짝 벌이신 예수님을 향해 이것은 불공정하다고, 그러면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을 것이고, 십자가를 향해 가는 예수님을 향해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의 멱살을 잡고 바보같고 위험한 짓이라고 막아섰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밖는 일에 앞장서고 있었을 수도 있었겠죠.

우리는 평화를 원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정작 참된 평화를 거부합니다.

우리는 평화의 왕의 통치를 기대하면서도 정작 그 통치를 싫어하고 반대합니다.

세례 요한은 그런 우리를 행해 외칩니다.

“회개하라. 하나님나라가 가까웠다.”

나 개인의 평화에 제한된 마음은 하나님나라의 평화에 어울리지 않는다.

나 개인의 일상의 평화만을 추구하며 적당한 평화에 안주하는 것은 평화의 왕의 통치를 오히려 거부하는 것이다.

결국 그 마음이 차별과 폭력과 배제와 혐오를 낳는다.

평화의 왕을 모실려면 그 마음이 그 삶이 바뀌어야 한다.

평화의 하나님나라를 맞이하고 살아내려면 개인의 평화를 깨뜨리고 더 크고 온전한 평화의 세상으로 나아와야 한다.

대림절 둘째주 깨어 있는 삶은 회개하는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느순간 우리는 죄에 대한 이야기, 회개에 대한 이야기를 잘 듣지 못합니다. 듣지 못할 뿐 아니라 듣기를 싫어하고 거부합니다. 심리학이 발달하고 개인의 선택과 취향을 존중하면서 우리는 죄와 회개를 외면해 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은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변화되고 바뀔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비추이는 것이고, 그 말씀에 앞에 자신을 내려놓고 회개하는 길만이 그리스도로 옷입고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는 나이스한 개인주의 그리스도인을 꿈꾸지 않습니다. 우리는 좀 투박하더라도 우리의 존재와 삶에서 그리스도가 드러나고 나타나길 원합니다.

평화는 나 개인의 평화를 깨뜨려 평화의 왕을 맞이하는 회개로 시작하고 일구어 갈 수 있습니다.

대림절 둘째주 우리는 평화의 왕이 다스리는 샬롬의 세상을 기다립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 나라에, 그분의 통치에 합당한 마음인지 돌아봅시다.

회개하라는 촉구가 우리의 귀에 계속 머물기를 바랍니다.

나 개인의 평화를 깨뜨릴 수 있는 용기가 있기를 바랍니다.

나 개인의 평화를 깨뜨려 더 크고 온전한 평화가 우리 가운데 머물기를 바랍니다.

평화의 왕이 오셨고, 우리 가운데 계시며, 오실 것입니다.

샬롬의 세상이 물이 바다 덮음 같이 가득하게 펼쳐질 것입니다.

그 왕과 그 왕이 다스리는 세상을 맞이하기에 합당한 우리의 마음과 삶이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