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질문하는 신앙 낯선 예수님

본문

Celeb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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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오셨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질 수록 지치기도 하고, 인내하는 일이 고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 안에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설렘과 기쁨이 우리 가운데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대림절 셋째주 ‘기쁨’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 4주간 매주일마다 주제가 있습니다. 
첫주에는 소망
둘째주에는 평화
셋째주에는 기쁨
마지막으로 넷째주에는 사랑이라는 각각의 주제를 가지고 대림절을 기다립니다.

대림절 성서일과의 말씀을 한번 돌아볼까요?

대림절 첫째주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통해 어둠을 벗고 빛을 입는 소망을 이야기했습니다.

대림절 둘째주 나 개인의 평화를 깨뜨려 참된 평화를 추구하자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번주 대림절 셋째주의 주제는 기쁨입니다.

성경의 첫장을 열면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좋다’라고 말씀하시며 기뻐하시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사렛에 예수님이 나셨을 때, “큰 기쁨을 가져다주는 좋은 소식”을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성경에는 구약에는 히브리어로 기쁨을 뜻하는 심차, 사손, 길과 같은 단어들이 있고, 신약에는 헬라어로 카라, 에우르로수네, 아갈리아시스와 같은 단어들이 있습니다. 신구약에서 기쁨과 관련된 단어로 약 500회 이상 등장하고 있고 이는 성경이 우리에게 기쁨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다양한 상황 가운데에서 기쁨을 이야기해주고 있고, 특별히 어둠고 암울한 시대 가운데에서도, 개인의 고난과 고통 가운데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원적인 기쁨을 주시는 분으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포로로 끌려간 어둡고 암울한 시기에 하나님께서 포로에서 돌아와 새로운 일을 하실 것이라는 약속으로 인해 기뻐하였고, 마리아는 동정녀의 몸으로 예수님을 잉태하고 위태롭고 수치스러울 수 있는 상황 가운데에서 기뻐하였고, 바울은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도 기쁨으로 믿음의 형제자매들에게 편지를 보내었습니다.

대림절 셋째주 주제 기쁨은 상황이 좋고, 내가 원하는 것이 성취됨으로 인해 기뻐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도/ 때로는 암울하고 어둡고, 괴롭고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자리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 안에 새일을 이루실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으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음을 우리에게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와 기쁨이 우리 안에 솟아나길 바랍니다. 이 기쁨이 긴 기다림의 시간을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는 힘을 주고, 때론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에도 견딜 힘과 현실을 마주하고 살아낼 원동력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쁨을 잃어버린 세례요한

여기 기쁨을 잃어버린 한 사람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과 아주 가까웠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친척이었고,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바로 찾아간 사람이 임신할 수 없었는데 임신을 한 나이든 엘리사벳이었습니다.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었을 때에, 아이가 그의 뱃속에서 뛰놀았다.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충만해서,

42   큰 소리로 외쳐 말하였다. "그대는 여자들 가운데서 복을 받았고, 그대의 태중의 아이도 복을 받았습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내게 오시다니,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그대의 인사말이 내 귀에 들어왔을 때에, 내 태중의 아이가 기뻐서 뛰놀았습니다.

45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줄 믿은 여자는 행복합니다.

세례요한은 태중에서부터 예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이후 세례요한의 삶은 예수님이 메시아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할 것을 온 몸과 삶으로 기대하고 기다리며 기뻐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더이상 기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염려스럽고, 의심이 찾아오고 회의가 밀려왔습니다.

당시 유대 분봉왕 헤롯이 이복동생의 아내와 간통하고 자신의 아내와 이혼하고 이복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재혼한 사실을 책망한 세례요한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어 이렇게 묻습니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마태복음 11:3

이것이 세례요한의 질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메시야의 오심을 확신에 차서 외치고 준비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직접 세례를 베풀고 함께 하나님나라를 꿈꾸고 기다리며 기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보라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그는 타작마당에서 손에 키를 들고 알곡과 죽정이를 가르는 심판자이시다.”

이렇게 강력한 메시지와 확고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을 준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예수님이 오실 그분이라는 것, 메시야이심을 믿고 따르고 전 삶을 드려서 헌신했던 그가 예수님께 제자들을 조용히 보내어 묻습니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의 질문이 아닙니다. 그의 신앙의 근본이 흔들리는 질문이고, 전 삶을 드려 살아왔던 삶이 무너지는 것 같은 의심과 불안함 속에서 제기된 질문이었습니다.

레이첼 에반스는 ‘헤아려본 믿음’이라는 책에서 신앙의 근본이 흔들리고, 의심과 회의가 찾아오는 가운데 질문을 던지고, 질문에 또 질문을 던지며 신앙의 길을 찾아간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녀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의 위기를 아주 무시무시하게 만드는 것이 있으니, 일단 스스로에게 한두 가지 질문을 허용하면 필연적으로 더 많은 질문이 따라온다. 순식간에 모든 것이 의심스러워 보인다. 여러해 동안 마음 한구석으로 제쳐 두었던 의심이 쏟아지면서 눈사태처럼 질문이 밀려들었다.”

만약 내가 틀린 거라면? 지금껏 내가 믿어 온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라는 세례요한의 질문은 단순히 하나의 질문도 아니고, 호기심의 질문도 아니고, 잠간 스쳐지나가는 질문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지금까지의 삶을 흔들고, 신앙의 근본을 흔들고, 의심과 회의로 요동치게 했습니다.

여기서 세례요한은 이 질문을 가지고 혼자서 가슴앓이 하며 질문에 매몰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내가 기대했던 것과 다르다며 원망하고 분노하지 않았고, 조용히 예수님과 손절하며 다른 새로운 메시아를 찾아서 나서지도 않았습니다. 세례요한은 있는 그대로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것을 누군가는 ‘절망적 신뢰’라고도 부릅니다.

대학2학년 시절 저도 나름 질문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내가 믿는 것이 사실일까? 내가 기독교 환경에서 자라오고, 그래서 내가 믿는 것이 그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세뇌된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을 했고, IVF활동과 책들을 읽고 선배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신앙을 배워왔던 것 같습니다. 완벽한 답을 알고 있고, 그것을 확신하는 신앙이 아니라, 질문을 하고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신뢰가 깊어졌던 것 같습니다. 

질문하는 신앙

레이첼 에반스의 책 ‘헤아려본 믿음’을 소개하면서 어떤 이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녀가 어떻게 ‘확신하는 신앙’에서 뛰쳐나와 ‘질문하는 신앙’이라는 모험을 시작했는지, 그 모험이 얼마나 신앙을 풍요롭게 했는지 용감하고 지혜롭게 기록한다. 의심하고 회의하는 신앙의 길로 한 걸음 내딛으며 ‘이런 질문을 해도 되는’ 공동체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에게 레이첼 에반스는 재미있고 사려 깊은 친구이며, 그녀가 지은 글들은 질문하며 진화하는 공동체를 위해 꼭 필요하다.”

그러고보면 신앙은 질문을 전제로하고 있고(세상이 왜 이런지? 이런 세상에서 선하고 아름답고 진실된 것은 무엇인지? 사람은 어떻게 구원을 얻는지?등), 그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신앙일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질문을 하나님은 거절하지 않으시고 그 질문을 환영하고 답하시는 분으로 나타나며(아브라함과 모세만 보아도), 역으로 사람에게 질문하시는 하나님으로도 등장합니다.

성경은 주름이 많은 책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성경이 오랜 역사, 수많은 해석, 다양한 삶의 경험과 고뇌, 통찰이 겹겹이 쌓여 깊고 풍부한 의미를 지닌 책이라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그래서 단순한 경전이 아닌 '살아있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스테디셀러이자 지혜의 보고임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성경이 단순히 법전이나 교훈집이 아니라, 인생의 수많은 질문과 문제에 대해 깊은 질문과 성찰과 해석을 필요로하며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깊이 읽히고 연구되어야하는 책이라는 의미입니다. 주름이 많은 책이라는 것은 질문이 많은 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대화의 책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은 순수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신앙이 아니라 계속 질문하고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자라고 성장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 질문하는 것을 주저하거나 두려워하지 맙시다. 신앙의 회의가 찾아오고 의심이 드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맙시다. 신앙의 자연스러운 일부분이고 질문하는 신앙으로 나아가는 한 걸음입니다. 세례요한은 질문을 예수님에게로 가져왔고, 레이첼 에반스는 확신의 신앙에서 질문하는 신앙으로 신앙여정을 책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회의가 찾아오고, 의심이 들고, 질문이 생겨날 때 억누르지 말고, 그 질문을 가지고 정직하게 하나님과 대화하며 질문과 의심의 여정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신앙이 자라나는 경험이 있길 바랍니다.

질문하는 이를 향해서도 그냥 믿으라느니, 믿음이 부족하니 기도와 말씀을 더 열심히 하라는 일차원적인 대답을 넘어 곁에서 함께 질문하며 답을 찾아가는 여정에 길동무가 되어줍시다. 우리 맑은물 공동체가 각 가정교회가 어떤 질문도 나누고 이야기할 수 있는 안전한 공동체가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함께 그 질문의 답을 찾아 여정을 떠날 수 있는 모험의 공동체, 위험한 공동체가 되길 바랍니다.

자라나는 우리의 아이들이 신앙과 삶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해올 때, 곁에서 같은 눈높이에서 정직한 답변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신앙의 길동무가 되어주길 바랍니다. 너무 정답과 자기 경험담만을 풀어놓지 않고, 아이 스스로 신앙의 길을 찾아 갈 수 있도록 가이드가 되어주는 맑은물 가족이 되길 바랍니다. 걸음마를 떼는 아이들이 수많은 넘어짐을 통해 걸음마를 배우듯 우리와 우리 아이들 또한 신앙의 질문 걸음마를 통해 신앙의 걸음을 배우고 성정하는 맑은물이길 바랍니다. 

정직한 질문, 정직한 대답.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라는 세례요한의 질문에 예수님은 책망하지도, 섭섭해하지도, 거부하시지도 않습니다. 세례요한의 질문이 가진 어려움과 혼돈과 불안을 이해하십니다.

마치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의 시를 감상하는 듯 합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주름많은 책 성경은 우리의 질문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주름많은 신,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질문을 이해하시고 그 질문 가운데 함께 하시며 그 질문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나타내십니다.

"가서, 여러분이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리십시오.

시각장애인들이 다시 보게 되고, 지체장애인들이 걸어 다닙니다.

심한 피부병을 앓던 사람들이 깨끗해지고, 청각장애인들이 듣습니다.

죽은 사람들이 일으킴을 받아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이 좋은 소식을 듣습니다.”

예수님은 이번주 성서일과로 함께 묵상한 이사야 35장의 말씀을 통해 자신이 그 메시야 이심을 알리십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노래와 예언이 당신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낯설고 불편한 예수님

예수님을 향한 기쁨으로 가득했던 세례요한이 기쁨이 사라지고 의심이 들고 회의가 찾아왔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례요한의 성정과 삶, 그리고 그가 전한 메시지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는 지점은 그가 기대했던 메시야 상과 지금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메시야 상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심판자로 오셔서, 강력한 심판을 드러내시고 악을 심판하고 정의와 공의를 나타내는 것을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런 심판자 예수님이 악한 헤롯왕을 심판하고 옥에 갇히 세례요한을 갇힌 가운데서 풀려남을 기대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소수의 사람들을 고치고 말씀을 전하고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 나타나고 있을 뿐입니다. 중앙에서 강력한 메시아의 통치와 심판을 기대했던 세례요한과 그 제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변두리에서 보잘 것없는 이들과 함께 선한 이들과 악한 이들에게 차별없이 해를 비추고 비를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은 세례요한과 그의 제자들에게 실망과 의심을 갖기에 충분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기대와 예상에 벗어나는 예수님으로 인해 실망하고 낙담하고 회의합니다. 가장 용기 있고 충성스럽게 헌신하며 메시야의 길을 닦았던 세례요한을 낙담하게 하고 실망하게 하고 회의에 빠지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었습니다. 아니 자신이 그려온, 자신이 한계지은 메시야의 모습으로 인해 세례요한은 실망하고 회의에 빠진 것입니다.

강력한 심판자로 오셔서 악을 뿌리뽑고 정의와 공의를 세우는 것도 메시야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메시야의 모습의 전부는 아닙니다. 메시야는 심판자이면서도 구원자이십니다. 악을 뿌리 뽑고 정의와 공의를 세우는 강력한 통치자이면서도, 상한 갈대를 꺽지않고 통회하는 자들에 대해 한없는 기다림과 용서의 팔을 벌리는 분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기회와 문이 열리고, 소외되고 버림받고 차별받고 외면당했던 이들을 환대하고 문을 활짝 여는 분이 메시야입니다.

세례요한은 잃어버린 기쁨을 회복하고, 자신 안에 찾아든 실망과 의심에서 벗어나려면 예수님을 새롭게 발견해야 합니다. 자신이 기대하고 알아왔던 예수님을 넘어서 예수님 자체를 보고, 듣고, 만나고, 경험해야 합니다. 강력한 심판자의 메시야를 넘어서서, 한없는 은혜를 베푸는 구원의 메시야를 만나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기대했던 것이, 우리가 만들어 놓은 기준이, 우리 안에 제한해둔 지식이, 이만하면 되었다고 안주하며 다 안다는 교만이 예수님을 온전히 바라보는데 방해가 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제한된 지식과 경험이 마치 시각장애인이 코끼리 만지듯 예수님을 그 이미지로 제한하며 예수님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신앙이 제자리를 찾으려면 우리는 우리의 기대와 예상을 넘어서 찾아오시는 낯설고 불편한 예수님을 만나야합니다. 낯설고 불편하지만 그분과 함께 한걸음 내디디는 모험이 우리를 온전한 믿음과 신앙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레이첼 에반스는 ‘헤아려본 믿음’의 책 말미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가끔 내 작은 세계-나의 신학, 나의 전제, 나의 믿음, 심지어 나의 원칙까지도-가 거룩하고 초월적이신 하나님의 부서진 빛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화내고 원망하는 기도로 밤을 지새우는 날이 적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이 아니라 내 작은 세계에 의문을 가졌더라면 좋았을 텐데 싶다.

우리 세대는 신앙은 정복된 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영역을 발견하는 것임을 어렵게 배우고 있다. 믿음은 옳은 사람이 되거나 안주하거나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여정이며, 모든 세대는 각자 자신의 밑그림을 지도에 제공한다. 나는 이 여정에서 가야 할 길이 멀지만, 앞서가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때로는 나의 기대를 내려 놓아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고통스럽게 누군가를 용서해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가진 전제와 세계관이 뒤흔들리는 경험을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안전한 나의 바운더리를 넘어서야 하는 모험을 해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붙들고 있는 것을 놓고 손을 펼쳐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낯설고 불편한 모습으로 찾아오시는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하지 않고, 신앙의 모험의 여정을 떠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의 작은 세계를 넘어 하나님의 온전한 세계로 여행하는 기쁨과 즐거움이 대림절 셋째주를 지나는 맑은물 가족에게 넘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