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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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요셉
아버지 요셉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에 그리 많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어머니 마리아에 비하면 아주 짧게 나타날뿐입니다. 아버지 요셉은 헤롯의 광기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했다가 나사렛으로 돌아온 이후로는 성경의 이야기에서 사라집니다. 성경학자들은 예수님의 어린시절에 아버지 요셉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으로 해석합니다.
성경에 아주 짧게 등장하지만 아버지 요셉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김기석목사님은 요셉의 이야기를 풀면서 창세기 요셉의 이야기를 가져와서 옛세계와 새로운 세계를 잇는 인물로 소개합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이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잇는 인물이었다면 예수의 아버지 요셉은 주님이 오시기 전과 후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로 아버지 요셉의 중요성을 말해줍니다.
짧은 본문이지만 이 짧은 이야기 속에 보여지는 아버지 요셉의 마음과 신앙을 묵상해보고 그의 선택과 결단과 삶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발견하길 바랍니다.
밴드 덧글로도 공유해드렸는데요. 이런 아버지 요셉의 마음을 잘 표현한 노래가 있습니다. 꿈이있는 자유4집에 실렸던 한웅재님의 아버지 요셉이라는 곡입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유투브를 검색하시거나 밴드의 덧글을 찾아서 링크를 따라가면 들으실 수 있습니다.
잠시 곡의 가사를 읊어드리겠습니다.
아버지 요셉
갈릴리의 나사렛 마을/ 요셉이란 성실한 목수
굵고 깊은 손마디 처럼/ 친절했던 그 웃음 처럼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믿음으로 품었던 사랑
그 온기로 하나님 아들 지켜준 사랑
그의 사랑 그의 행복/ 주님위해 내에 주던 그의 모습
또 그의 이름 소리없이 잊혀졌지만/ 그를 통해
하나님 사랑 나에게 온것/ 감사해
그 온기로 하나님 아들 지켜준 사랑. 그의 사랑 그의 행복 주님위해 내어 주던 그의 모습
또 그의 이름 소리없이 잊혀졌지만…
무대의 짧은 조연으로 사라졌지만 그가 보여준 인내와 의로움과 사랑을 노랫말에서 잘 담아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요셉이라고 했지만
청년 요셉이. 청소년 요셉이 느꼈을 당혹감과 두려움, 그리고 그가 감내하고 품어야 했던 삶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대림절 오셨고, 우리와 함께 하시고, 또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지 함께 살펴봅시다.
잠 못드는 요셉
어렵고 힘든일을 겪거나 무언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고 뒤죽박죽이 될 때,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배신감일 수 있고, 억울함일 수 있고, 무엇이 어디에서 잘 못되었는지 의문일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오랜만에 선배님 한분을 만났습니다. 커피를 참 좋아하셨던 분인데 이제 커피를 안드신답니다. 수년전에 가정적으로 그리고 대외적으로 힘든 일을 겪으면서 잠을 제대로 못자게 되었고, 그 이후로 커피를 마시면 힘든 밤을 보내게 되어서 그 좋아하던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요셉은 마리아의 일로 잠못드는 밤을 며칠을 보낸것 같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족보 이야기로 시작을 합니다. 족보이야기가 마치자 말자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나오는데 참! 그게!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성탄의 분위기와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아주 충격적인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은 이러하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나서,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약혼을 하고 결혼식을 치루지 않은 상황에서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상세히 성경이 말하지 않지만, 이 사실을 요셉이 알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너무 황당하고 어이가 없고, 어찌할바를 몰라 며칠을 전전긍긍하며 잠못이루는 밤이 계속되었을 것 같습니다.
천사가 나타나 요셉에게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하는 것을 보면 요셉의 고민이 상당히 깊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의 고민이 얼마나 깊었는지는 당시의 결혼문화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결혼문화는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었고, 출산이 가능한 여성을 통해 남성 집안의 후계를 잇기 위한 법적계약에 가까웠습니다. 그렇기에 남자쪽에서 여성의 출산능력과 노동력을 얻는 대가로 상당한 액수의 지참금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이과정에서 약혼은 필수적인 것이었고, 약혼을 통해 두 집안이 사회적으로 합의하는 공식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약혼을 통해 여자는 남자쪽 가문에 종속되고 통제되는 장치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자쪽에서 임신을 했다는 사실은 엄청난 스캔들이었습니다. 가문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일이고, 계약을 어기고, 손해를 끼치고, 사회적으로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율법은 약혼한 여자가 정혼한 남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관계를 가진 것이 드러날 경우, 당사자 둘을 모두 돌려 쳐서 죽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약혼자가 잠자리를 하지도 않았는데 아이를 가졌을 경우, 남자쪽에서 결혼을 파기하고 상대여성을 법정에 고소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할 권리를 가졌습니다.
여성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임신이라면 상황은 더욱 복잡했습니다. 율법은 여성을 범한 남성을 처벌하도록 규정하지만, 여성에게는 자신이 강제로 임신하게 되었음을 스스로 입증해야만 했습니다. 참 어려운 일이지요. 오늘날과 같이 의술이 발달하지 않은 고대사회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는 구조적으로 취약한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혼 밖에서 태어난 사생아의 경우는 공동체 어디에도 뿌리내릴 수 없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상태로 살아야 하고, 거기다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모든 유산 상속에서 배제되어야 했고, 공동체에서 지속적인 모욕과 배재와 혐오를 감내해야 했습니다. 특히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지못하는 아이는 유대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없었습니다.
다시 잠못 이루는 요셉의 이야기로 돌아와봅시다.
제목을 아버지 요셉이라고 했지만 그의 나이 불과 15-18세 정도의 고등학생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임신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같이 밥먹다가 입덧을 했든, 마리아가 찾아와 요셉에게 이야기를 했든. 요셉은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아이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는 두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간통이거나 강간을 당했거나. 어느쪽이든 요셉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런경우 대부분의 남자들은 자기만의 상상의 나라에서 소설을 쓰면서 “니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느냐?”고 분노하고, “더럽다”고 모욕하고,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고 드러내기 위해 법정에 고소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자신의 정당함만이 중요하지 상대방의 입장과 마음과 상황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요셉은 자초지정을 물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리아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듣습니다. 간통도 강단도 아니라고,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잉태케 하셨다고… 자신의 친척 엘리사벳도 나이 늙어 임신할 수 없는데 아이를 가졌다고 믿기 어렵겠지만 믿어달라고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18절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는 구절은 아마도 이런 상황을 묘사해주는 것 같습니다.
의로운 사람 요셉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요셉의 고민은 더 깊어집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마리아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도대체 지금 자신에게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고민의 밤은 깊어지고 길어졌습니다.
20절에 “요셉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라는 구절은 요셉이 감당해야 했던 사건의 무게를 담담하게 그려줍니다.
요셉은 자기 감정에 취해 쉽게 상대방에게 분노를 쏟아내고,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기 보다 자초지정을 묻고, 상대를 살피고,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요셉을 성경은 19절에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서” 마리아의 남편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그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잠못드는 밤이 이어지던 요셉은, 의로운 청년 요셉은 이 일을 공개적으로 문제삼지 않고, 조용히 정리하기로 결심합니다. 어쩌면 자신의 정당함을 드러내기보다 조용히 정리하는 것을 통해 마리아에게 최소한의 존엄과 새로운 출발의 가능성을 남겨주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고민하는 요셉, 망설이는 요셉, 상대의 입장에서 조용히 물러서려는 요셉을 향해 성경은 그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요셉의 의로움은 율법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이거나 자신의 정당함을 내세우는 것이 아닌, 타자의 생명과 존엄을 지키기 위해 고심하고 고뇌하는 의로움, 타자의 생명과 존엄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정당함과 자신의 의로움을 포기하는 선택으로 나타났습니다. 김기석목사님은 이런 요셉을 향해 “그는 철저히 타자 중심적 사고를 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그의 의로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마음이 새로운 역사의 초석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관계에서 갈등을 겪습니다. 모든 관계는 갈등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갈등 관계에서는 서로서로 일정부분 상처를 주고 받습니다. 서로가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입니다. 그러나 갈등 관계 안에 있다보면 상대가 겪었을 어려움과 상처보다 내가 겪는 부당함과 상처가 더 크게 여겨집니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질문하고 묻기 보다는 내가 느끼는 감정에 휘둘려서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나는 정당하고 상대방이 변화되고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상처받았고 상대방은 가해자가 됩니다. 이런상황에서 자신의 정당함을 서로 주장하면 갈등은 더 깊어지고 관계는 깨어집니다. 그러나 자신을 살필뿐 아니라 상대방을 살피고 상대방의 말과 행동의 이유를 살펴 가다보면 갈등관계가 조금씩 풀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쪽이 먼저 화해의 메시지를 보내고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고, 알아준다면 관계는 다시 회복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 갈등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조금 억지스럽긴 합니다.
하지만 요셉이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고 마리아의 상황을 살피지 않았다면…
요셉이 배신과, 불편함과, 섭섭함과, 피해의식이라는 감정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마리아와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예수님의 생명은 어떤 위험속에 빠져들지, 어떤 파국을 맞을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리아와 태중의 예수님을 지킨 것은 이런 요셉의 의로움.
자신의 정당함보다 상대를 살필 줄 아는 마음,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지만 그것을 가지고 고민하고 씨름하고 갈등하는 마음,
상대의 존엄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정당함을 내려놓을 수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우리 맑은물 가족에게 요셉이 가졌던 의로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상대가 가장 가까운 남편과 아내가 될 수 있고,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가정교회의 멤버일 수 있고, 오래마음에 묵혀둔 누군가 일 수도 있습니다.
갈등 관계에서 먼저 상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마음의 넉넉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상대방이 겪는 어려움과 한계를 이해하고 나의 정당함을 내려놓고 상대방의 존엄을 지켜줄 수있는 너그러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버지가 되라는 부름
조용히 정리하려는 요셉에게 천사가 찾아옵니다. 하나님을 꿈을 통해 요셉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두려움과 마음의 갈등을 이해한다고…, 너는 충분히 의로운 사람이라고…, 그런데 요셉! 거기 머물지 말고 한걸음 더 나아가자고 더 깊은 믿음과 순종으로 나아오라고 하나님은 요셉을 초대하십니다. 바로 아버지가 되라는 부름입니다.
20절 22절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 들여라. 그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이 부름을 듣고 요셉의 고민은 더 깊어지고, 마음은 더 어려워졌을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참 벅차고 힘겨운데, 하나님은 한 걸음 더 들어가라고 초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가 마지노선, 한계선이라고 선을 그었는데, 하나님은 그 선을 지우시고 경계를 허물어 버리십니다. 아마도 며칠 밤을 더 고민하고 기도하며 보냈을 것 같습니다.
말도 안되는 마리아의 이야기를 사실로 믿어야 하는 것이고,
계획에 없던, 원치 않았던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 일이고,
평생 자신을 따라다닐 수근거림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속도위반보다 더한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 예상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불명예를 뒤집어 쓰는 일이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가 되라는 부름에 응답합니다. 더 깊은 자리로 나아오라는 하나님의 초대에 응하기로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는 조용히 혼인관계를 정리하려는 마음을 뒤집어서 마리아의 스캔들에 함께 휘말리기로 선택하고 행동합니다. 마리아의 남편이 되기로,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기로 결단하고 그렇게 행동에 옮깁니다.
요셉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서, 주님의 천사가 말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아들을 낳을 때까지는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 아들이 태어나니, 요셉은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이런 요셉의 하나님의 부름에 대한 결정과 순종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가족을 탄생시켰습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피를 통해 가족으로 맺어지는 가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름과 믿음과 순종을 통해 맺어지는 새로운 가족의 원형을 요셉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족이 예수님을 찾으러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나의 어머니며 누이며 형제이냐, 하나님의 뜻대로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보시고, 나의 어머니, 형제 자매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마12:46-50).
이런 가족의 모델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혈통, 인종, 같은 성격, 결혼의 유무, 자녀의 유무, 취향을 넘어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함으로 모두가 형제요 자매가 되는 급진적인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의 가족이 되는 것은 핏줄이나, 학벌이나, 연고가 아닌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서로를 책임지고 함께 하겠다는 선택과 결단입니다.
서로의 삶에 책임을 지고, 서로의 약점과 상처와 스캔들에 기꺼이 함께 하겠다는 선택과 삶이 아버지 요셉이 보여준 모습입니다.
요셉의 마리아의 스캔들에 함께 하겠다는 용기있는 선택과 삶은 예수님의 삶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요셉이 마리아의 스캔들에 기꺼이 동참하고, 평생 자신을 따라다녔을 수근거림을 감수하기로 한 것이 예수님의 삶에도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 창녀들의 삶에 함께 합니다. 기꺼이 ‘죄인들의 친구’라는 손가락질을 받아들이십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이른 삶의 모습은 먼저 이런 삶을 온몸으로 보여준 아버지 요셉으로부터 배우고 닮은 것이 아니었을까요?
오늘 우리도 아버지 요셉과 동일한 부름에 있습니다.
요셉에게 마리아의 스캔들에 함께 하라는 부르심.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라는 부르심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서로의 가족이되라는 부름이 있습니다.
가족과 공동체는 점점 해체되고 그 어디에도 안전한 공동체를 만나기 어려운 사회가 되어갑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안에서 한 가족으로 부르시고 서로가 서로의 삶에 참여하고 서로 돌보고 책임지는 가족이 되라고 하십니다.
여전히 우리 안에 차이가 존재하고,
각 개인마다 여기까지라는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차이마저도, 보이지 않는 그 선마저도 넘어서서
서로에게 아버지가, 어머니가, 형제가, 자매가 되라고 부르십니다.
나의 정당함을 넘어서 상대의 아픔과 상처를 보듬을 수 있는 환대와 너그러움, 관대함으로 나아오라고 하십니다.
피로맺어진 내 가족을 넘어 상호돌봄과 서로를 책임지는 관계로 그렇게 예수님의 장성한 분랑의 충만한데까지 자라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 부르심 앞에, 이 초대 앞에 함께 나아가는 맑은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맑은물은 그렇게 가족이 되어가는 공동체입니다. 아직 온전하지 않지만 함께 만들어가는, 함께 지어져가는 공동체입니다. 함께 서로를 스캔들에 참여하고, 서로를 돌보고 책임지는 맑은물가족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사야의 예언은
마리아의 스캔들에 참여하고, 예수의 아버지가 되는 부름에 응답한 청년 요셉의 우직한 순종을 통해 성취됩니다.
오늘 우리 삶에 함께 하시는 예수님! 그리고 다시 오실 예수님은
요셉의 뒤를 따라 서로의 스캔들에 참여하고 서로의 가족이 되는 삶을 사는 맑은물 가족을 통해 지금 여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