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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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ration

2025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한 해 매듭을 잘 짓고 새 해 소망 가운데 맞이하길 바랍니다. 미리 해피뉴이어.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난민 예수
지난 성탄절 누가복음 2장의 말씀을 통해 최초의 성탄절은 분주하고, 혼란스럽고, 당혹스러웠다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청년 요셉과 마리아 부부가 정신없는 가운데 첫째 아이 예수를 낳고 구유에 뉘였을 때 느꼈을 마음들이 어떠했을지 상상하기도 어려울 듯 합니다.
오늘 마주하는 마태복음 2장의 말씀도 성탄이후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이 마주하는 현실은 첫 성탄절에 맞았던 상황보다 더 암울합니다. 경황없는 아기 예수는 태어났습니다. 이 갓난 아이를 품에 안은 마리아와 요셉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갑자기 목자들이 들이닥칩니다. 자신들이 들판에서 만나고 들었던 천사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그리고는 며칠 사이에 동방박사들이 찾아옵니다. 아기예수께 경배하고 당시 신이나 왕에게 바치는 물건들을 예물로 전해줍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이 모든 만남과 광경들을 요셉과 마리아는 마음에 담아둡니다.
예수님이 태어나고 며칠이 지났을까요? 그래도 아이를 낳고 몸을 풀수있는 며칠의 여유는 있지 않았을까요? 갑자기 천사가 찾아와 요셉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헤롯이 아기를 찾아서 죽이려고 하니, 일어나서,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 그리고 내가 너에게 말해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만삭의 몸을 이끌고 150KM를 이동한 상황에서 아기를 낳은 것도 며칠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갓난 아기와 아이를 낳은지 며칠되지 않은 아내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라니요!!! 베들레헴에서 이집트 국경까지 직선거리로 150KM된다고 합니다. 이동거리로 따지면 적어도 200KM는 넘는 거리였을 것이고, 이제는 갓난 아이와 몸푼지 얼마되지 않은 아내를 데리고 이동해야 했기에 적어도 1달 이상 걸리는 고되고 위험한 여정이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갑작스럽게 이집트로 내려가야했습니다. 묻고 따질 수도,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없이 이집트로 급하게 피신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자 말자 머리에 현상금이 걸렸습니다. 세상의 강력한 독재자의 눈에 가시였고, 사람들의 축복과 사랑의 돌봄보다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혼란과 긴장, 폭력과 공포가 가득한 가운데 정신없이 이집트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평화의 왕 예수님은 걸음마를 떼고 말을 배우기도 전에 그 목에 현상금이 걸린, 집 없는 난민이었습니다(톰 라이트-모든 사람을 위한 마태복음 주석)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생명의 위협을 당해야했고, 결국에는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는 평생을 고난과 위협과 폭력에 노출된 삶을 사셨습니다.
주름이 많은 성경은 요셉과 마리아가 느꼈을 공포와 두려움, 앞일을 알지못하는 염려와 당혹감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습니다.
요셉이 일어나서, 밤 사이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마치 하룻밤새 뿅하고 이집트로 이동한 것 같지만, 그 한 달여 사이에 겪었을 요셉과 마리아의 상황은 우리의 상상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작년 12월 3일 내란의 밤을 뜬눈으로 보냈습니다. 너무 끔찍하고 불안해서 잠을 잘 수 없었고, 유투브와 sns그리고 실시간 뉴스를 번갈아보며 계엄이 해재되기까지 뜬눈으로 밤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4월 4일 헌법재판소에서 파면 선고가 나기까지 불안속에서 일상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런것과 견줄 수 없겠지만 청년 요셉과 마리아는 공포와 두려움 속에 이집트로 피난했고 어디 누구 하나 기댈 곳 없는 난민의 삶이 시작됩니다.
평화의 왕 예수님이 오신 시간과 장소는
전쟁과 폭력위에 세워진 거짓평화의 왕 아우구스투스 시대였고,
자신의 권력을 지키고자 영아살해도 서슴치 않는 유대왕 헤롯의 시대였습니다.
이들 때문에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베들레헴에서 이집트로 이집트에서 나사렛으로 불편함과 공포와 불안의 연속인 고난의 삶, 난민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성서일과의 문맥에서 이사야서는
주님께서는, 그들이 고난을 받을 때에 주님께서도 친히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라고 전하고 있고,
히브리서는
그는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고난 받으셨기에, 주님이 우리가 겪는 모든 아픔과 두려움과 염려와 수치와 외로움과 괴로움을 겪으셨기에, 우리의 마음과 상황을 아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기꺼이 그 우리의 고난에 함께 하시며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고이 안으시고 지켜주시는 분입니다.
지난 한 해, 그리고 내 인생을 살아오며 가장 어둡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을 떠올려봅시다. 그자리 그시간 우리 주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상상해봅시다. 나 홀로인 것 같고, 아무도 내 맘 몰라주는 것 같고, 어찌할바 몰랐던 그 자리, 그 시간 우리 주님이 함께하시고, 우리의 아픈마음, 어려웠던 상황,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일들 속에서 우리를 고이 안으시고 지키시고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셨습니다. 드라마처럼 우리의 상황과 마음이 바뀌지 않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와 삶 안으로 들어오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가십니다. 이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과 함께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소망중에 맞이하는 맑은물 가족이길 바랍니다.
아! 헤롯!!
헤롯은 베들레헴과 근처 마을에 사는 영아 두살 아래 남자아이를 다 죽였습니다. 권력에 집착한 편집증 환자는 자신의 권력에 조금이라도 위협이 되는 이들을 제거했습니다. 별을 따라왔던 동방의 박사들은 공교롭게도 헤롯 왕에게 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었고 베들레헴에 가서 그 아이를 찾거든 자신에게 알려달라고 했지만 동방의 박사들은 헤롯의 눈길을 피해 다른 길로 자기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이에 극도로 격분한 헤롯은 어느 아이가 그 아이인지 알 수 없었기에 베들레헴과 그 주변의 두살 이하의 남자아이를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당시 베들레헴 인구를 1,000여명 이하로 보고 있고 아마도 20-30명의 아이들이 죽임을 당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헤롯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권력에 집착한 나머지 자신의 권력에 조금이라도 위협이 되는 존재를 살려두지 않았습니다. 그가 가족이라도 아내라도 모두 죽였습니다. 실제로 그의 아내 마리암네, 자신의 세아들, 장모와 삼촌까지 모두 죽였습니다. 자신의 장례식때 곡소리가 울려퍼지도록 여리고의 지도자들을 학살하라고 임종 자리에서 명령을 내렸던 미치광이였습니다. 그러니 한 아기를 유대의 왕으로 추대하는 일을 막기위해 수 많은 아기를 죽이는 일쯤은 눈 깜빡하지 않고 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이 헤롯을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헤롯은 원래 유대출신이 아니라 에돔출신이었습니다. 로마의 권력에 줄을 대고 거기에 기생하여 유대인의 왕이라는 타이틀은 얻었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늘 유대인들이 자신을 몰아내고 유대의 왕을 세울지 모른다는 강박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니 동방박사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질문은 헤롯의 가장 두렵고 아픈 곳을 후벼파는 말이었습니다. 헤롯에게는 이 말이 반역의 신호로 들렸겠지요.
헤롯은 두려웠습니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잃을 때 비참한 결과를 맞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에 그는 조금이라도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이들을 가만두지 않았고, 가족까지도 서슴지않고 죽였습니다. 두려움이 의처증과 편집증으로 나타나고 권력을 움켜진 그는 폭력적이고 잔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을 지키기위해 타인의 생명을 무참히 짓밟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에게는 누구에게나 ‘헤롯’이 있습니다. 과도한 두려움과 자신을 보호하고 지키려는 자기중심성은 쉽게 타인을 수단화하고 상처입히고 혐오하고 폭력을 가하고 심지어는 생명을 앗아가기까지 합니다. 그가 가진 권력과 힘이 크고 강하면 강할 수록 그 피해는 더 커집니다.
윤석열과 김건희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위해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수거명단을 만들었고, 계엄의 성공을 위해 국지적인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습니다. 자신을 반대하거나 정당한 요구를 하는 사람들이 입을 틀어막고, 참사와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향한 애도나 안타까운 마음은 찾아 볼 수 없고 오히려 자신의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고, 마침내는 자신들의 영원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는 미친짓을 벌이고도 반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은 파렴치한 모습을 보여줄 뿐입니다.
사회 안에도 ‘헤롯’은 존재합니다. 포비아는 특정한 대상, 상황, 활동에 대해 비합리적이고 과도한 두려움을 느끼고, 그로 인한 강한 불안이나 공포를 경험하고 피하려는 불안 장애의 한 형태입니다. 이것이 사회적으로 나타나는 경우 이슬람포비아나 동성애 혐오, 여성혐오, 중국인혐오로도 나타납니다. 상대를 위협적인 존재로 고정관념화하고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차별이나 폭력을 유발합니다. 기독교의 경우 기독교를 위협하고 기독교를 몰락시키는 존재가 이슬람이고 동성애라고 간주하고 그들을 향한 차별, 혐오, 심지어 폭력으로도 나타납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일어나는 혐오는 과도한 피해의식과 두려움에서 나타나며 이것으로부터 차별과 혐오와 폭력을 정당화합니다. 어찌보면 여러가지 포비아와 혐오는 개인이든 집단이든 과도한 두려움에서 오며 자신을 보호하고 지키려는 자기중심성에서 나타난다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관계 안에서 ‘헤롯’을 만납니다. 두려움에서 기인하든 자신을 보호하기 지키기 위해서 나타나든 우리 안에 헤롯이 존재합니다. 때로는 부정적인 피드백을 견디지 못하고 분노를 폭발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무시했다고 화를 냅니다. 자신의 정당성이 침해 당했다고 격분합니다. 자신의 이야기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열이 차오릅니다. 오래 묵혀두고 감추어두었던 상처와 어떤 말들이 어느 순간 트리거가 되어 누군가에의해 행동이나 말로 전해지면 우리를 부르르 몸을 떱니다. 이 순간 우리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상대방을 수단화하고 상대방을 향해 모진말과 어투와 표정과 감정을 쏟아내며 상대를 짓밟습니다. 그 상대가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이든, 아끼는 자녀이든 우리는 그들에게 한 순간 헤롯이 됩니다. 우리 안의 작은 왕국들, 우리가 지키려는 안전지대들이 새로운 것을 거부할 때, 우리도 헤롯이 됩니다.
헤롯은 저 멀리 있지 않고 우리 안에 바로 내 안에 존재합니다.
내 안에, 우리 안에 헤롯을 만날 때 너무 놀라지 맙시다. 숨기려하거나 억누르지 않아도 됩니다. 인류의 첫 아들은 살인자였고, 인류의 역사는 차별과 혐오와 폭력의 역사였습니다. 정직하게 내 안에 헤롯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합시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 내가 지키려는 것, 내가 잃지 않으려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봅시다. 정직하게 나를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 그리고 형제자매들에게 자신의 연약함과 두려움을 오픈하고 나눌 수있는 관계로 나아갑시다. 건강한 자에게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자를 위해 오셨다는 예수님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계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과 그 어느 것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감싸고 있으며 나의 정당성, 나의 생명, 나의 자존감,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보호받고 있음을 믿으며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우리이길 바랍니다.
우리는 작는 내란의 밤으로부터 지금까지 헤롯의 어둠의 광기가 춤출 때, 온갖 응원봉을 가지고 길거리로 나와 빛의 혁명으로 평화의 노래와 춤으로 막아 섰습니다. 헤롯의 광기를 만날 때 같은 광기로 대응하지 않고 평화로 정의로 맞서서 지금의 평화의 시기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일상에서 누군가가 헤롯이 되어 나타날 때, 똑 같이 헤롯이 되어 대응하면 서로가 서로를 파멸로 이끌뿐입니다. 누군가는 평화로, 누군가는 화해로, 누군가는 그 두려움의 분노와 화를 따뜻한 사랑의 말로 덮는 은혜의 힘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관계에서 이런 상황을 만날 때, 내가,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그런 용기와 넉넉함과 굳건한 사랑이 나타나길 바랍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용기와 지혜와 사랑을 허락해주시길 바랍니다.
헤롯과 난민 예수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세상은 차별과 혐오와 폭력과 광기가 가득합니다. 폭력적인 세상에서 난민은 지금도 계속해서 나옵니다. 지금도 전세계 곳곳에 난민이 존재합니다. 조금만 눈을 들어보면 분쟁과 전쟁과 권력 싸움으로 난민이 가득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세계 유일한 분단국인 우리나라는 비전향장기수로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을 포기하지 않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에서 복역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톰라이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난민을 거부하는 것은 신학적 모순이다. 우리가 경배하는 이가 난민이었다.”
자본주의라는 괴물은 과도한 경쟁을 낳고, 빈부의 격차를 만듭니다. 경쟁과 격차로 인해 차별이 나타나고 변두리로 삶의 가장자리로 내몰리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우리나라 자살율은 OECD국가들의 평균보다 두배가량 높습니다. 자본주의라는 헤롯이 낳은 난민의 모습의 하나이지 않을까요?
아동보호시설에서 18세 이상이되면 자립청년이 됩니다. 정부에서 어느정도 지원을 받지만 이들이 설자리는 참 좁디좁습니다. 싼방을 찾아 다니다 전세사기를 당하고, 면접을 보러가기 위해 정장을 살 돈이 없어 빌려입은 정장은 작거나 커서 몸에 맞지 않고, 취업과 자기 개발을 위해 교육을 받으려하지만 삶도 빠듯한데 턱없이 비싼 교육비는 저임금 노동으로 계속 머물 수 밖에 없는 악순환에 그칩니다.
이동권을 보장하라며 장애인의 출퇴근시간 투쟁의 장면을 보노라면 대한민국 사회에서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의 난민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헤롯의 세상 난민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친히 난민이 되셨습니다. 난민과 함께 하시고 난민의 편에 서시고 난민을 도우시는 아니 난민이셨고 난민의 구원자이십니다.
오늘의 말씀은 헤롯이 광기를 부리는 중에 불안과 공포에 정신없이 피난길에 올라야했지만 그과정이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되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헤롯이 광기를 부리고 예수님은 난민이 되셨고 그리고 그 과정이 구원의 과정이라고 마태복음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폭력이 가득한 세상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폭력이 가득한 세상에서 연약한 아기로, 난민으로, 멸시받는 동네(나사렛) 출신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가십니다.
예수님의 몸으로 존재하는 우리는 오늘 이 헤롯의 세상에 난민이 된 이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까요? 우리의 이집트, 우리의 나사렛은 어디일까요?
우리가 이 헤롯의 시대에 난민이 된 이들의 친구와 가족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두 팔을 벌려서 이시대의 난민을 환대하고 곁이 되어주고 디딜 땅이 되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난민에 되신 예수를 따라 난민과 함께 하는 맑은물이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