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본문

Celeb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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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평화를…

한주간 많은 뉴스가 있었습니다.

미국은 점점 깡패국가로 변해가는 것 같습니다. 베네수엘라를 침공해 그 나라의 대통령을 잡아와서 법정에 세웁니다. 다음으로 그린란드를 노리고 있고 멕시코를 침공할 것이라는 뉴스도 나옵니다. 과도한 이민자 추방정책은 끝내 자국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국가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국민을 테러리스트로 몰고 있습니다. 힘에 의한 지배, 폭력에 의한 지배를 점점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미국이 무서워집니다. 국제정세가 심하게 요동치고 있습니다. 깨어서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드러나고 베네수엘라와 그린란드와 미국과 이해관계 있는 국가들에 그리고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에 평화가 임하길 기도합니다. 

목사 Vs. 형제

또 한가지 교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뉴스는 남포교회 원로목사인 박영선목사에 대한 기사입니다.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열심”, “구원 그 이후”라는 책으로 잘 알려지신 분입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들 속에 자신과 아들목사가 나가서 개척할테니 교회에 40억을 요구했다는 이야기가 돌고 기사화되면서 SNS에서는 연일 실망과 충격의 글들이 많이 실렸습니다.

저는 박영선목사의 이러한 결말은 한 개인의 영성이나 인격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구조적이고 시스템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여러가지 문제가 있지만 한사람의 영성과 인격의 문제로만 치부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의 영성과 인격의 문제라면 욕하고 실망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구조와 시스템의 문제라면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할 것입니다. 크게 뉴스화되지 않았을 뿐이지 비슷한 사례는 많습니다. 저는 가장 큰 이유중에 하나가 바로 담임목사 제도의 문제와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목사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고 리더십을 맡고 역할을 담당하는 것보다 더 우선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됨과 자매됨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뉴스를 가져와서 저의 관심사?를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관심사로만 치부하기에는 저는 아주 중요한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맑은물에서 목사라는 자격증?을 가지고 대표리더십을 맡고 있습니다. 담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담임제도는 교회를 담임목사에게 위임했다는 전제가 깔려있습니다. 저는 맑은물 가족중에서 말씀을 맡아서 더 많이 나누고 강조하는 사람으로, 시간을 더 들여서 공동체를 살피는 사람으로 있는 것이지 맑은물을 이끌거나 대신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맑은물에서 사랑하고 사랑받는 한 형제로서 목사의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걸 어떻게 구분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목사이기 이전에 맑은물의 한 형제가 더 우선입니다. 저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더 소중합니다. 그 일의 일환으로 목사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을뿐입니다. 그러니 부탁합니다. 목사로 여겨주시되 주현이라는 한 존재로도 받아주시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형님, 오빠, 동생, 삼촌으로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이 정체성을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리지 않도록, 목사라는 어떤 의식에 잠식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맡은 일을 충실하게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함께 동무가 되어주시고 때로는 차갑고 날카로운 비평도 해주십시오. 제가 맑은물가족이 맡아야 할 역할을 대신하거나 과도하게 이끌지 않도록 맑은물 반장의 역할을 잘 할 수 있도록 함께 해주십시오. 

회개의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일부러 요단으로 내려오셔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죄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이 받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십니다.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받지 않아도 될 세례를 받으셨다고요. 그러나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려는 자신을 말리는 세례요한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다고… 
예수님은 받지 않아도될 세례를 받으신 것이 아니라 받아야 할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신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인간이 되신 하나님은 고매하고 분리된 상태로 궁권이나 성전에 머물지 않고 죄인들과 함께 뒹굴고 죄인과 같은 모습이 되시기 위해 요한의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신 분이 이제 진흙탕에 함께 뒹구셨습니다. 우리가 우러러보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길가는 동무가 되셨습니다. 나의 실패와, 좌절과, 죄책감과 수치와 두려움과 외로움을 아시고 함께 겪으시는 분으로 같은 자리에서 함께 한 걸음 내디디시는 분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다리를 내미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낮은 자리에 함께 머무시며 이 낮은 자리를 당신의 거룩과 영광과 아름다움과 사랑으로 함께 가꾸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구원자가 되시기 전에 인간이 되셨고, 인간이 되시면서 동시에 죄인과 같이 되셨습니다. 

하늘에서 들리는 음성

그런 예수님에게 하늘의 음성이 들립니다.

세례를 받고 올라오시는데

하늘이 열립니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지고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됩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 인간이 되시고 죄인과 같이 되신 예수님 안에서 하늘이 열리고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고 하늘의 음성이 울려퍼집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이는 내가 기뻐하는 자다.”

성서일과의 시편본문은 야훼의 목소리를 묘사하면서 그 목소리가 압도적이라고 묘사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이는 내가 기뻐하는 자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어떻게 들려졌는지 모르겠지만 성서일과의 병행본문인 시편의 상상력을 동원하면 그 음성이 예수님의 전 존재를 휘감고 저항할 수 없고 압도적으로 예수님을 진동시켰을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습니다.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본격적인 사역이 시작되면서 죄인들이 받는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죄인과 같이 되셨고, 진흙탕 속을 함께 뒹구십니다.

사람 예수님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는 구원자라는 자의식보다도 성부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 그분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라는 자의식이 더 소중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삼위일체의 그 신비의 연합이 깨어진 것은 아니지만 제한되고 제한되고 또 제한된 인간의 몸으로 삼위일체의 신비도 제한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죄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생명의 근원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사랑의 근원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죄인들이 받는 요한의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은 죄인과 같이 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단절, 분리가 극명하게 나타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진흙탕 속으로 기꺼이 들어오시는 그 순간 하늘이 열리고 하늘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 음성이 예수님의 전 존재를 둘러쌉니다. 예수님의 전인격에 아로새겨집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이는 내가 기뻐하는 자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 이 음성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머문다는 그 신비를 붙들고 사셨습니다. 사랑하시고 사랑받으시며 사랑 그 자체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그 신비의 연합을 이 음성을 통해 확인하고 붙들고 사셨습니다. 구원자 대속자 메시야라는 정체성보다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라는 정체성이 예수님의 가장 근원적인 정체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예수님은 구원자로, 대속자로, 메시야로 사셨습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 없다고 하시며 이곳 저곳 떠다니실 때도, 
종교지도자들과 권력자들의 시기의 대상이 되고 살해위협을 받을 때에도,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도 못하고 저마다의 욕망에 사로잡힐 때에도,

제자 유다의 배신과 가장 가까운 제자들의 외면에도,

십자가 상에서 끝내 하나님을 향해 울부짖을 때에도,

예수님은 사랑받는 자로, 사랑하는 자로, 사랑으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사실 수 있었던 한 가지 비밀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세례시에 들려진 그 음성이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이는 내 기뻐하는 자다.”

우리의 정체성.

우리 그리스도인의 가장 근원적인 정체성은 ‘사랑받는 자’입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셨을 때 들렸던 그 음성이,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 깊은 곳에서 우렁우렁 울려퍼집니다.

로마서 5:5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임을 보증하시고 우리 안에서 말씀해주십니다.

그리고 로마서 8:38-39절은 외칩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받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입니다. 그분의 기쁨을 입은 자녀입니다.

스바냐 3:17는 말합니다.

“주 너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 구원을 베푸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너를 보고서 기뻐하고 반기시고, 너를 사랑으로 새롭게 해주시고 너를 보고서 노래하며 기뻐하실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를 아끼고 사랑하듯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갓난 아이를 보며 환한 웃음을 지으며 기뻐하듯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고 반기고 노래하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서, 가져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사랑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좋아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음성이 우리 마음 깊은 곳, 우리 존재의 근원에서 울려퍼지길 바랍니다.

가족들에게 화를 참지 못하고 쏟아 냈을 때, 죄책감이 밀려옵니다.

자녀에게 부모님에게 필요한 것을 해주지 못했을 때 오는 자괴감이 있습니다.

실수하고 실패하고 넘어졌을 때, 무가치하고 무능력하다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 세상에 나 혼자 밖에 없다고 느껴지고 외로움이 사무칠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벽을 만난 것 같고 더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이 있습니다.

정말 죽을 것 같은 죽어야 끝이 날 것 같은 두려움과 불안함이 엄습해오기도 합니다.

이 모든 순간 우리와 같이 진흙탕 속으로 뛰어드셔서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고 하시는 우리 주님의 음성이 우리 안에 울려퍼지길 바랍니다.

내가 너를 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기뻐하고 좋아한다는 그 음성이 우리 안에 방울방울, 울렁울렁, 온 존재를 뒤덮는 압도적인 음성으로 우리에게 들려지길 바랍니다.

세상이 숫자로 우리를 줄세웁니다. 학교 다닐 때부터 등급을 나눕니다. 1등급, 2등급,… 그리고는 연봉으로, 아파트 평수와 가격으로, 굴리는 자동차의 브랜드와 배기량으로, 가지고 있는 연금과 노후의 통장 금액으로 우리를 줄세우고 우리의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정체성이 아닙니다. 우리의 존재를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라는 것, 우리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라는 근원적인 정체성이 숫자로 줄세우는 세상에서 당당하고 떳떳하고 고귀한 존재감으로 드러나고 나타나길 소망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사람이라면

지금 나와 함께 이 말씀을 듣고 함께 예배하고 있는 곁에 있는 사람도 동일하게 귀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요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입니다.

때로는 보기싫고, 나와 다르고, 심지어 나에게 상처입힌 그도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입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하고, 서로의 삶을 나눌 때 우리 서로가 이 사실을 확인하고 서로에게 증거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 하나님의 음성이 되어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고 말해주는 관계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때로는 지치고 힘들고 낙담되고 수치심과 죄책감에 빠져드는 우리 맑은물 가족에게

괜찮다고.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라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라고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어깨를 펴라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너무 다른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시켜주고 하나님의 음성이 되어 존재를 지탱해주는 맑은물 가족이길 바랍니다. 

떨어져 진흙탕에 몸을 담그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되신 하나님은 죄인들이 받는 회개의 세례에 자신의 몸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죄인들과 연대하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고 함께 길을 걸으시며 하늘과 땅을 연결하셨습니다. 하늘의 성전이 사람이 되어 죄인들 속에 함께 머무시고 거하셨습니다.

경계를 넘고 한계를 넘어서 낮고 천한 자리에 머무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세례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예수와 함께 길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분의 길을 그분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낮은 곳으로 위험한 경계로 그리고 아래로 아래로 길을 잡고 향하십니다.

우리의 시선과 우리의 걸음과 마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요?

나 개인의 안전과 안락한 삶과 더 편안함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나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우리가 향하고 걸어야 할 걸음은 어디일까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로 그분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로

내가 향해야 할 낮음의 깊은 자리는 어디일까요?

우리의 삶에서 나의 의와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고 나타나는 삶이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우리에게 하늘의 음성이 우리 존재 가득히 울려퍼지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