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하나님의 어린양!
본문
Celebration

주현절
주현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제 이름이 교회절기에 나오니 참 신기합니다. 더 잘살아야겠다 싶습니다.
주현절은 예수님의 신성이 세상에 드러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우리는 성탄절과 이어지는 주현절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 아기의 모습으로, 그리고 죄인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신의 현현(드러남 나타남)이 영광스럽고 힘있고 능력있는 압도적인 모습이 아니라, 가장 연약하고 가장 누추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참으로 신비롭고 역설적입니다. 사람의 기대와 생각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하나님은 나타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나타남이 지금 우리 존재와 삶에 어떻게 고백되어지고 나타나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으로 주현절을 보내길 바랍니다. 힘의 지배가 당연시 되어있는 세계질서와 세상의 이치 가운데에서 약함을 자랑하고 쓸모없음과 누추함과 가난함이 부끄럽지 않은 우리이길 바랍니다.
두가지 단어
오늘 본문에서 두드러지는 두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이 두 단어를 중심으로 오늘 말씀을 함께 나누길 바랍니다. 본문에서 두드러지는 단어는 ‘보다’라는 단어와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단어입니다.
‘보다’라는 단어는 대화와 이야기 속에서 10번 이상 등장합니다.
29절, 요한은 보고 말하였다, 보시오~~
32절, 성령이~ 이분 위에 머무는 것을 보았습니다.
33절, 머무는 것을 보거든…
34절, 나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36절, 예수께서 지나시는 것을 보고서, 보아라!
38절, 예수께서 …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물었다.
39절, 와서 보아라! 예수께서 묵고 계신 곳을 보고..
42절,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보다’라는 단어가 이렇게 많이 등장하는 줄 모르셨죠? 아주 많이 등장합니다.
저자 요한은 보는 것을 통해 우리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해주는 것 같습니다.
두번째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29절과 36절 두번 등장합니다. 저자 요한은 세례요한의 이 선언을 앞뒤로 배치함으로 봉투구조 수미쌍관으로 “강조”, 궁서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강조하고 있을까요?
우리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이야기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말을 예수님을 향해 처음 선언했던 세례요한에게, 그리고 그 당시 청중에게, 그리고 이 요한복음을 처음 읽는 독자들에게는 충격적이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이야기였습니다. 어떻게 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어린양이 될 수 있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오늘은 ‘보다’라는 단어와,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같은 경험, 다른 통찰
1991년 대학1학년 여름 IVF 여름 수련회를 마치는 금요일 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새웠습니다. 그리고 아침을 맞이하는데 모든 것이 새로워보였습니다. 아침 공기, 새소리, 햇살, 함께 있는 사람들… 무언가 제 삶에 변화가 일어난 것 같았습니다. 복음이 단순히 예수 믿고 천국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거대한 하나님나라의 이야기라는 것과 내가 그 이야기 속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저에게 아주 큰 울림으로 다가왔었습니다.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아마도 2003년 전국간사수련회 중이었을 겁니다. 옥천 좋은 동산이라는 수양관에서 이 찬양을 부르는데 제 마음을 깊이 어루만졌습니다. 가끔씩 이야기 했는데요, 저는 초등학교 5-6학년까지 이불에 지도를 그렸습니다. 한 날은 아버님이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그리고 저를 교육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알몸으로 쫓아내셨고, 울며불며 집으로 들어가려던 저를 막으시고 끝까지 내 쫓으셨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이 저의 정서와 삶에 아주 큰 영향을 미쳤고, 저는 인지하지 못했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거죠! 그런데 이 찬양의 후렴을 반복해서 부르는 중에 그 때의 사건이 떠오르면서 하나님께서 저를 안으시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가 가진 수치심과 부끄러움과 죄책과 낮은 자존감을 주님이 다 감싸 안으시고 보듬어주시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런 순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순간들, 같은 장소, 같은 일상의 연속이었지만 새롭게 시각이 열리고 전혀 뜻밖의 경험으로 다가왔던 순간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을 것입니다. 각각 그 경험의 강도와 느낌은 다르지만 비슷한 일들이 있습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고 느꼈던 순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전혀 다르게 내 존재와 삶에 찾아왔던 순간들이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는지! 그리고 그분이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주는 시간들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가정교회에서 서로 예수님 만난 이야기들을 나누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세례요한에게 이런 순간이 있었습니다. 세례요한도 처음부터 예수님이 메시야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보여지지 않았습니다. 세례요한은 두번이나 이야기합니다.
31절, 나도 이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33절, 나도 이분을 몰랐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몰랐다는 말은 무슨말일까요?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고 먼저 임신한 엘리사벳을 찾아가 만났을때 태중에 있던 세례요한이 기뻐 뛰었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친척사이라 비슷한 시기를 자라면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알았을 것입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특별한 경험(마리아는 성령으로 아이를 잉태하고, 엘리사벳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나이에 아기를 가진)은 서로 비밀 이야기를 나누고 의지하는 사이가 되었을 터이고, 세례요한의 어려서부터 예수님의 특별한 출생과 탄생과정의 이야기들을 전해들었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셨을 때, 자신이 오히려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로 예수님이 자신보다 크심을 알았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가 두번이나 몰랐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다시 알아보았던 순간을 이야기하는 내용을 통해 세례요한의 눈이 열리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통찰과 인식과 고백이 바뀌는 경험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33절// 나도 이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게 하신 분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어떤 사람 위에 내려와서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임을 알아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32절// 나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분 위에 머무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한은 세례시에 성령이 내리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신 걸 알았습니다. 이분이 메시야 이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향해 “보십시오!!!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세례요한은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나 당시 제사를 통해 어린양의 의미를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이야기를 잘알고, 광야에서의 묵상과 생활을 통해 죄인들이 받는 세례를 받으로 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속에서 성전에서 제물로 드려지는 어린양의 모습이 오버랩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신비를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보십시오!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자신에게도 충격적이고, 이 말을 듣는 청중과 당신의 독자들에게도 충격적인 증언을 했던 것입니다.
30년 넘게 예수님을 알아왔던 세례요한에게 성령이 임하는 이 순간이 예수님을 전혀 다른 고백으로 이끌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고백하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주현절.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고 나타내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그리고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시고 나타내십니다.
우리의 상상과, 가치관과, 경험의 경계와 한계를 넘어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나타내시는 분이십니다.
세례요한이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새로운 지평이 열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제사장 아들로 자란 것과, 성경의 이야기에 깊이 귀기우리는 삶과, 광야에서의 묵상의 삶이 성령의 깨달음으로 이어지게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새롭게 만나고 경험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어제의 신앙이 아니라 오늘의 신앙으로 지금도 자신을 드러내시고 나타내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은혜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성경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 이야기가 내 존재와 삶을 형성하도록 성서의 이야기에 나를 맡기는 것, 분주하고 피곤하고 바쁜 일상이지만 하루 중 시간을 내어서 삼위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자신을 드리는 것, 공동체가 함께 모여 말씀을 나누고 삶을 나누는 자리에서 눈과 귀를 열어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일들을 통해 일상의 자리에서 찾아오시는 주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숲속기도산책을 매달 가지만 매번 다른 모습과 묵상으로 나를 초대하는 것을 봅니다.
몸과 마음을 열어 오감과 육감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면 그때마다 주시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매주 성서일과를 통해 말씀을 묵상하고 나누고 있습니다. 수요일에 말씀이 올라오면 먼저 읽고 마음에 두고 묵상합니다. 그리고 주일의 말씀 나눔을 통해 말씀이 마음에 깊이 자리잡게 합니다. 월화 다시 그 말씀을 되새김으로 존재와 삶에 새기고 이어지게 합니다. 이것이 우리 일주일 삶의 리듬으로 자리잡길 바랍니다. 주일에 누군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로는 휘발성이 강하고 분주하고 피곤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어렵습니다. 내가 읽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묵상한 이야기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읽고 생각하고 묵상한 이야기들이 덧입혀지고 나눠질 때, 그렇게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물고 우리가 그 말씀 안에 머물때 우리 존재와 삶에 말씀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으로 인한 깨달음과 삶의 변화가 이어질 것입니다. 성서일과의 흐름이 우리 일주일의 리듬을 형성하는 주요한 도구로 자리잡길 바랍니다.
성경통독은 또다른 영역입니다. 평생동안 반복해서 성경읽기를 통해 성경 전체 이야기와 흐름이 눈에 들어오고 그 이야기가 우리의 삶과 존재를 형성하기를 바랍니다. 올해부터 반복적으로 나오는 성경읽기 책을 통해 성경 이야기 전체를 알아가는 기쁨을 누려가길 바랍니다. 매번 나오는 다양한 색의 표지의 책을 모으고, 사이 사이 메모하는 일들을 통해 성경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핸드폰으로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게 일상이되었습니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무리하는 습관을 길렀으면 좋겠습니다. 눈을 뜨고 5-10분간 오늘 하루를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하고, 잠들기 전 5-10분간 오늘 하루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보고 자신을 점검하는 습관이 우리의 일상을 거룩하고 힘있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볼려면 눈을 열고 마음을 열고 시간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의 존재를 열어야 합니다.
우리 일상에 예수님을 발견하고 볼 수 있는 시간들을 만들고 그 시간에 우리 자신을 헌신해야 합니다. 새해를 시작하고 1달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 일상에 예수님을 보는 시간과 공간을 만들고 예수님을 아이 씨 유(아바타) 할 수 있는 경험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일상의 경건의 훈련을 통해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새롭게 발견하는 하루하루, 2026년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린양 예수!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가 세례요한에게도 당시의 청중에게도 그리고 독자들에게 충격적이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왜 충격적이었을까요? 무엇이 사람들에게 그렇게 역설적이었을까요?
성경 이야기에서 어린양은 출애굽의 상징입니다. 이집트에 내려진 10가지 재앙중 마지막 재앙에서 문설주에 바른 어린양의 피가 하나님의 심판을 넘어가게 해줍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압제와 노예생활에서 해방됩니다. 출애굽의 상징은 죄와 죽음의 권세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고 예수님이 새로운 출애굽을 이끄시는 분을 상징합니다.
두번째는 희생제물로서의 상징입니다. 구약의 어린양 희생을 통해 백성의 죄를 대속하고 정결하게 되었습니다. 이사야서의 고난받는 종. 어린양의 상징을 통해 예수님이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나타날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어린양의 상징은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되는 희생제물이었고, 새로운 출애굽과 새로운 창조를 알리는 그림자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성전에서만 진행되던 희생의 제사가 예수님통해 대체된다는 기존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세워진다는 충격적인 선언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스스로 희생제물이 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이야기가 스캔달이 되고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되고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 됩니다.
강력하고 변덕이 심했던 로마의 신들을 믿는 사람들에게 나약하고 희생당하는 신의 이야기는 매력적이지 않고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다.”라는 선언과 고백은 모두에게 충격적이고 역설적이고 스캔들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주현절을 보내면서 신의 나타남이 모든 것을 의존해야하는 갓난 아기의 모습으로, 죄인들이 받는 회개의 세례에 줄서 있는 흠있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을 우리는 앞선 성서일과의 이야기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요한복음의 이야기를 통해 신의 현현이 나약함으로 희생제물로 나타났음을 보게됩니다.
십자가의 이야기를 믿고 따르는 우리들에게도 모든 것에 의존하는 갓난 아이와 같은 신의 이미지, 죄인들의 행렬에 함께 줄서서 흠있는 모습으로 불량품의 모습으로 나타난 이미지, 거기다가 나약하고 희생당하는 희생양의 이미지로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은 불편하고 거북하고 눈을 돌리고 싶어집니다.
힘과 돈과 능력을 추구하고 그것이 인정받는 시대에 삽니다. 경쟁에서 뒤쳐지면 루저로 낙인찍히고 게으르다는 도덕적인 비난까지 받습니다. 이런 시대에 살면서 우리도 자연스럽게 힘을 추구하고 돈을 쫓아가고 능력을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주로 고백하고 따르는 예수님은 철저하게 의존적인 모습으로 루저의 대열에 서있는 모습으로 돈있고 힘있는 자들의 손에 희생당하는 희생양의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오늘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외면받는 이유는
그리고 젊은 세대들이 교회를 등지는 이유는
어쩌면 교회도 힘의 논리로, 돈의 논리로, 능력의 논리로 나타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고백하지만 삶으로는 돈을 찬양하고 힘을 지배를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십자가와 죽음을 통해 드러나는 부활의 능력, 약함 속에 드러나는 강함, 가난함 속에 나타나는 부요함을 믿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고린도후서 12:9-10 9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10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3:8-9
8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9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십자가의 무력함과 나약함과 희생의 비밀을 발견한 바울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따릅니다.
세례요한이 고백했듯이
이전에는 몰랐습니다. 이전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의 비밀을, 하나님이 희생양이 되신 이야기를, 그것이 우리 삶에 가져오는 변혁적이고 역설적인 신비를 그러나 이제 압니다.
그 고백이 우리이길 바랍니다. 십자가의 이야기가 점점 우리의 존재와 삶을 형성하기를…, 하나님의 어린양의 이야기가 우리의 존재와 삶을 변화시키기를…
그래서 바울이 고백하듯이 약함을 자랑하고, 세상의 강함과 부요와 능력을 배설물로 여기기를…
조금이라도 어린양의 신비와 십자가의 비밀을 알아가고 경험하기를 기도합니다.
자기를 희생해 우리에게 생명과 평화를 주신 예수님을 따라
우리도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하고 바래봅니다.
주님의 뒤를 조금이라도 따르고 주님을 조금이라도 더 닮아갈 수 있길 소망합니다.
어린양을 경험한 사람들…
세례요한은 어린양을 발견하고 외칩니다.
“보십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그렇게 세례요한은 사람들에게 증언합니다. “이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세례요한의 이말을 들은 두 제자가 예수님을 찾아가 만나고 예수님과 함께 머뭅니다.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르던 한 제자는 그의 형을 찾아가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그의 형 시몬을 예수님께 소개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시각이 열린 사람들! 예수님을 향해 아이 씨 유(아바타)라고 고백한 사람들! 그들은 자신의 말과 삶을 통해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소개합니다.
예수님의 나타남을 본 사람들의 한결 같은 반응입니다. 이 반응이 이어지고 이어져서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이 증거되고 우리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따르고 이자리에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와 삶, 말을 통해 예수님을 소개하고 증언하는 삶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통해 예수님을 보고, 만나고, 고백하고, 변화하는 일들이 우리 맑은물을 통해 나타나길 바랍니다.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통해 우리의 이웃과 동료들에게도 나타내보이실 줄 믿습니다.
전도가 잘 안되는 시대에 삽니다. 그러나 지금도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이 여전히 필요하고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말과 증거가 없으면 누가 듣고 반응할 수 있을까요?
맑은물이 20년을 지나면서 세례받는 사람이 손에 꼽히는 것은 복음이 여전히 우리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은지 반성하게 됩니다. 바라기는 맑은물을 통해 각 가정교회를 통해 우리의 말과 행실을 통해 예수님을 보고, 만나고, 고백하고, 변화하는 사람들이 있기를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보고, 만나고, 고백하고, 경험한 예수님을 증거하고 소개하기를 부끄러워말고 항상 우리가 가진 소망의 이유를 말할 수 있는 마음과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올해 맑은물을 통해 세례를 받는 이들이 생겨나길 기도합니다.
기도
자신을 나타내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을 우리가 보고, 만나고, 경험하기를…
말씀을 가까이하고 경건의 훈련이 삶의 중심으로 자리잡도록…
나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이 생겨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