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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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ration

빛
아주 오래된 찬양곡이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어둠이었었는데 밝고 환한 빛이 되었네 나는 눈물이었었는데 맑고 고운 웃음 되었네 그것은 주님의 음성을 내가 들었기 때문이요 아름다운 나의 주님이 나와 항상 함께하시니 내가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길이 살겠네”
빛이신 예수님으로 인해 어둠이었던 삶에서 밝은 빛의 삶을 살게 되었음을 표현한 노래입니다. 어릴적 불렀던 찬양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함께 읽은 성서일과의 구약본문의 이야기가 바로 이 가사의 내용인 것 같습니다. 어두움 가운데 거하던 백성에게 빛이 비추입니다. 고통받고 멸시받던 땅의 백성이 영화롭게 되고 기쁨을 얻고 행복한 웃음을 짓습니다. 그들을 압제하고 짓누르고 억압하던 모든 세력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자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이야기는 바로 이 빛의 이야기입니다. 어두움과 고통과 눈물과 멸시를 받는 삶이었는데 어두움에 빛이 비추고 고통과 눈물이 웃음으로 바뀌고 멸시와 압제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삶으로의 변화입니다.
베드로전서 2:9은 이 빛을 만난 사람들을 향해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5:8은 “전에는 너희가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고 선언합니다.
복음의 이야기는 우리가 어두움 가운데에서 빛으로 옮겨졌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 이제는 어두움이 아니라 빛이라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이 빛 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평화를 노래하고, 생명을 나누는 삶을 삽니다.
찬양의 가사처럼 밝고 환한 빛의 삶 그리고 우리 맑고 고운 웃음이 가득한 일상이길 소망합니다.
예수는 빛이다.
그런데 이 빛은 무엇입니까? 이 빛이 누구입니까? 우리가 다 알다시피 이 빛은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참 빛으로 묘사하고 있고,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태는 세례요한이 옥에 투옥되고 예수님께서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에 가서 사셨다는 서술을 하고 난 뒤에 이것이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성서일과 구약본문인 이사야 9장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스불론과 납달리 땅, 요단 강 건너편, 바다로 가는 길목,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었다." 바로 예수님이 그 빛이라고 선언합니다.
예수님은 그가 자라왔던 익숙한 마을 나사렛을 떠나 소외된 땅 가버나움에 터를 잡으시고 사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본격적으로 무대에 등장하는 장면을 마태는 이사야의 본문을 가져와서 예수님이라는 빛이 변두리, 소외된 땅에 비추었다고 묘사하고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마태의 이야기는 어둠의 땅에 빛이 비추었는데 그 빛이 바로 예수님이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네! 예수님이 빛이십니다. 예수님만이 빛이십니다. 다른 어떤 것도 이 빛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어두움을 물리치고 환한 빛으로 비춰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이 세상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하나님 나라의 밝은 빛을 비춰주시는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삶에 참된 기쁨과 자유와 평화를 가져오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이 땅에 평화와 정의와 기쁨을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상상해 봅시다. 그 예수님이 나의 존재와 삶에 빛으로 비추십니다. 이 빛 가운데 나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이 참된 빛 안에서 나는 생명과, 평화와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까? 예수님으로 인해 위로를 얻고 힘을 얻고 용기를 얻고 있습니까? 그분이 주시는 은혜를 날마다 맛보고 있습니까?
하나님나라의 삶은 빛 가운데 거하는 삶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그분과 함께 걷고 그분과 함께 사는 삶입니다.
잠간 1-2분 가량 멈추어 상상하며 묵상해봅시다. 빛이신 예수님이 나의 존재와 삶을 비추신다는… 그 빛으로 인해 느껴지는 느낌이 무엇인지? 그 빛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상상해봅시다. 나는 이 빛에 함께 머물고 있는지? 이 빛을 가까이 하고 있는지? 멀어져 있지는 않은지? 그 빛이 나를 어디로 이끄는지? 묵상해봅시다.
빛되신 예수님이 우리 각자와, 가정과 가정교회와 우리 맑은물을 비추시기를 기도하고 소망합니다.
빛이 오심
예수님은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에 이사를 가십니다. 익숙하고 편한 나사렛을 떠나십니다.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으로의 이동은 이제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됨을 알리는 것이고 나사렛을 완전히 뒤로하고 가버나움에 정착해서 거기서 머물리고 작정하셨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가버나움이 예수님의 본거지, 본동네가 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하늘영광 버리고 이 땅위에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이 되신 것 처럼 나사렛을 뒤로하고 가버나움이라는 마을에 정착해 사셨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가버나움이 참… 살기에 좋은 곳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고 본거지, 본부로 삼은 곳이 이스라엘의 중심부가 아니라 변두리, 변두리에다가 위험하고 천대받고 소외된 동네였습니다. 우리가 이사를 한다면 교통이나 삶의 환경이나 교육환경을 고려해서 중심부로 가겠지요. 장사를 한다면 상권이 좋거나 인프라가 갖춰진 곳에서 시작을 할텐데… 예수님은 정반대로 전혀 뜻밖의 동네로 이사하고 사업을 시작하신 겁니다.
스불론, 납달리, 가버나움이라는 동네는 변방지역이었습니다. 외세의 침략이 있을 때마다 가장먼저 짓밟히고 약탈당했던 땅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엘리트와 있는 것들에게는 율법도 모르는 무식한 자들 촌놈이라고 지방이라고 멸시받는 땅이었습니다. 이방사람들의 갈릴리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변방의 수탈지역이라 피가 섞인 혼혈의 땅이었습니다. 단일민족을 이루었던 이스라엘에게 갈릴리는 피가 섞인 정결하지 못한 땅이었습니다.
빛이 향한 곳, 빛이 비추인 곳은 변두리였습니다. 위험한 땅, 어두운 땅, 천대받고 멸시 받는 땅, 더러운 땅, 소외 된 땅에 참 빛이 비추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곳에서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이 척박한 땅에서 먼저 시작되었습니다. 세상은 늘 중심을 향해 위를 향해 달려갑니다. 더 높은 곳, 더 밝은 곳, 더 힘이 있는 곳, 더 안전한 곳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변두리 가장자리로, 어두운 곳으로, 약하고 멸시받는 자리로, 위험하고 불안한 자리로 내려가십니다. 그곳에 참된 빛을 비추십니다.
주현절을 지나며 만나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신이신 그분이 죄인의 몸을 입고 그것도 철저하게 피조물에게 의존해야하는 나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죄없으신 분이 죄인이 받는 회개의 세례의 줄을 서고 죄인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는 희생양으로 죽임당하는 어린양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비춰집니다. 예수님은 변두리로 밀려난 이들, 여전히 소외되고 멸시받고, 위험에 노출된 이들과 함께 머무시고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이런 예수님 이시기에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잘보이지 않아도, 똑똑하고, 힘있고,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어도… 보잘것없고, 가진 것 없고, 볼품없고, 약하고, 부끄러운 모습이지만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으시고, 그 자리에서 밝은 빛으로 우리를 이끄시고 회복시키시는 예수님이시기에 그 빛 앞에 부끄러움 없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변화와 역사의 출발은 언제나 변두리에서 작은 운동에서 출발한 것 같습니다. 중앙에서 높은 곳에서, 힘으로, 돈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변두리에서 약하고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통해 하나님나라는 힘있게 펼쳐졌습니다.
우리가 가끔 부르는 ‘그의 나라 온 땅에’ 가사가 이것을 말해줍니다. 아주 작은 어린양 한 마리를 애태우며 찾으시는 하나님 보잘것없는 과부의 헌금을 넉넉히 받으시는 하나님 강을 따라 버려진 한 아이를 지도자를 세우시는 하나님 일꾼들이 쓰다남은 버린 돌로 머릿돌을 삼으시는 하나님 가장 낮은 이들을 하늘 높이 올려서 하늘 아래 모든 권세 부끄럽게 하시네 이토록 놀라운 그의 나라 온 땅에 이토록 아름다운 그의 나라 온 땅에….
지난 월화수 하나복 동역자 수련회라는 곳을 다녀왔습니다. 하나복은 하나님나라 복음 네트웍이라는 단체이고, 하나님나라 복음의 정신과 가치를 가지고 교회를 세우고,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제자훈련을 중요시하고, 그것이 풍삶초첫기와 가정교회로 나타나는 곳입니다. 이 하나복 운동이 형성되는 데 우리맑은물교회가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개별적으로^^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하나복에 소속된 교회들이 대부분이 지방의 소규모 교회들입니다. 그리고 많은 교회가 재정적으로 자립되어있지 못하고 목사님 사모님이 일을 하면서 교회를 살리고 세워보겠다고 애쓰고 노력하고 헌신하고 있는 모습이 많이 보였습니다. 기독교가 점점 쇠락하고 사회에서 욕먹고 걱정거리가 되어가고 있는 요즈음에 대형교회와 유명한 목사님들의 일탈의 이야기가 주된 화제거리가 된 시점에 지방 곳곳에서 눈에 띄지 않지만 복음의 빛을 살아내고 전수하고 비추는 작은 교회들의 몸부림을 보면서 도전이되고 위로를 얻었습니다. 주님은 여전히 변방에서 작고, 약하고, 가난하고, 별볼일 없는 이들과 교회들과 함께 하시며 일하고 계시구나. 우리 맑은물도 주님의 빛이 향하고 주님이 거하시는 곳에 함께 거하는 교회로 계속 잘 흘러가면 좋겠다는 기도와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름있는 목사님들의 일탈의 이야기에 너무 화내거나 낙심할 필요도 없고, 큰 교회들의 힘자랑, 돈자랑에 너무 부러워 할 필요도 없고, 우리가 눈에 두지 못한 작고, 약하고, 가난하고, 보잘 것 없고, 변두리의 경계에 있는 곳에서 주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눈과 귀와 손과 발과 존재와 삶이 주님이 비추이시는 자리에, 주님이 머무시는 곳에 늘 함께 있기를 소망합니다.
빛의 소리.
예수님은 변방 가버나움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선포는 단순했습니다. 단순했으나 힘있고 능력있었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태는 하나님나라를 하늘나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흔히 이야기하는 천국입니다. 이 천국은 죽어서 가는 어떤 영적이고 영역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나라를 통해 잘 알고 있듯이 하늘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임하는 구체적인 현실입니다. 하나님으리 통치가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 뚫고 들어와 실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는 하늘 나라가 임하였기에 이땅의 통치와 삶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통치와 삶의 방식으로 살아라. 이 땅의 가치와 삶의 질서가 아니라 하늘의 가치와 삶의 질서로 전환하라는 강력한 선포입니다.
알다시피 당시에 하늘나라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단순히 감정적이고 믿음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로마황제를 주로 숭배하던 시대에 다른 주가 있음을 참된 왕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따르겠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때로는 생존이 걸린 문제였고, 가족과 사회에서 배척받는 존재와 삶의 문제였습니다. 로마 땅에 거주하고 살지만 로마의 문화와 통치와 삶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통치와 삶의 방식과 태도를 가지고 살겠다는 결단이고 실천이고 삶이었습니다. 하늘 나라에 속하여 살겠다는 것은 구체적인 정치적인 결단과 실천과 삶이었습니다. 그러하기에 회개는 감정의 문제를 넘어서 소속의 문제, 삶의 문제, 존재의 문제였습니다. 삶의 방향을 전면적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던 삶에서 하나님을 향해 살아가는 삶의 돌아섬입니다. 회개는 자기를 세상의 중심에 두고 다른 이들을 주변화시키던 삶에서 돌아서서 타자를 중심에 두고 사는 것입니다. 회개는 나의 능력과 힘과 가능성에 의지하여 사는 것에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의지하여 살기로 다짐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힘의 통치, 돈의 지배, 쾌락의 향유가 기본 질서인 세상에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우는 자가 복이 있다는, 온유하고 고난받는 이들이 복이 있다는 하나님나라의 가치와 질서를 살아내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신의 욕망을 끝없이 부추기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에 자신의 욕망을 맞추는 것입니다. 회개는 니가 변해야 되가 아니라 내가 변하고 용서하고 용납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회개는 니가 내 말을 들어야 되가 아니라 나의 입을 다물고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회개는 나를 위해 돈을 쌓아두는 삶에서 너를 위해 지갑을 여는 것입니다. 회개는 지금까지 걸어왔던 삶에서 돌아서서 구체적으로 하나님나라의 가치와 정신과 뜻에 맞추어 살아가는 결단과 실천입니다.
이미 임한 하나님나라의 통치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나라를 살아가는데 내가 회개해야할 영역과 내용은 무엇입니까? 하나님나라가 나와 가정과 가정교회와 맑은물에 드러나고 나타나기 위해 결단하고 실천해야 할 영역과 내용은 무엇입니까?
빛의 부름.
변방에 터를 잡으시고 하나님나라를 본격적으로 선포하신 예수님은 변방의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하나님나라를 증거할 동역자를 부르시고 초대하십니다. 그들은 바로 어부들이었습니다. 당시의 어부들은 물고기를 잡으면 잡을 수록 더 가난해질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헤롯안티파스의 정책이 이들을 더욱 가난뱅이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시대의 모순을 가장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이들이었습니다. 열심히 일할 수록 더 많은 세금을 걷어가는 부조리한 사회를 온몸으로 겪고 있던 이들이었습니다.
시몬,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이들은 “나를 따라오너라.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는 예수님의 부름을 듣고 그물과 배와 가족을 놓아두고 예수님을 따라 갑니다. 어부들의 마음에 하나님나라의 소망과 꿈이 가슴을 뛰게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끄시고 주도하시고 돌보시는 정의와 평화와 사랑이 가득한 세상이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예수님을 따르고 좇아가도록 이끌었을 것입니다.
이번 성서일과를 묵상하면서 마태복음에서 눈에 들어오는 것은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웠다는 예수님의 선포와 나를 따라오너라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는 예수님의 부름의 간격이 멀지 않다는 것입니다. 회개와 부름과 따름이 연결되어 있고 이어져있는 듯한 인상을 강하게 받습니다. 회개의 변화는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하고 따르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을 향해 예배하고 경배는 많지만 예수님을 따르고 닮아가는 삶이 없는 것이 오늘 그리스도인의 문제라고 했던 몇몇 책들이 생각납니다. 제자됨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닮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모두가 “나를 따라오너라”는 예수님의 부르심 앞에 있습니다. 각자의 부름의 자리, 삶의 자리는 다르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살고 닮아가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길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 길 위에서 함께 걷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들은 시몬과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이 보여준 행동은 무엇입니까? ‘버려두고 떠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을 떠나 땅으로 오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에 거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본토친적 아비 집을 떠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부름에 밭을 갈던 일에서 떠나 스승을 따라갑니다. 어쩌면 성경의 이야기는 떠남과 따름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걷는 제자의 삶에는 익숙한 것을 떠나고, 안락한 것을 떠나고, 편안한 것을 떠나고, 가진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은 것을 포함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불편함으로 낯섬으로 통제되지 않은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일상의 삶의 자리도 소중하고 중요합니다. 하지만 때로 일상의 삶의 자리보다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부름이 분명하고 확고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주님이 부르시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주님이 부르시는 자리에 기꺼이 발을 내딛고 따를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가정교회와 서로의 관계가 그 주님의 부르심을 서로가 더 잘 들을 수 있도록, 그것을 격려하고 응원하고 함께 걷는 길동무가 되기를 바랍니다.
빛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비취이셨습니다. 그 빛 가운데 거하는 우리의 삶이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빛은 변방으로, 위험한 곳으로, 소외되고 고통받고 멸시받는 곳을 향해 비춥니다. 우리의 마음과 삶 또한 그 빛을 따라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웃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길 바랍니다.
빛 가운데 거하는 삶은 어둠을 싫어하고 물리칩니다. 우리 안에 어둠이 무엇인지, 시대의 어두운 정신과 가치를 분별하고 참된 빛을 따라살아가는 회개의 삶과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맑은물이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