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자기숭배의 길에서 내려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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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ration

모세와 겹쳐 보이는 예수님
마태복음을 계속 묵상하고 있습니다. 가정교회에서 나눴던 것들에 이어서, 묵상했던 것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지난 말씀을 돌이켜보면, 마태는 예수님과 모세의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겹쳐 놓아서 예수님을 제2의 모세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바로의 명령으로 히브리 남자아이들이 학살되던 때 모세가 살아남았듯이, 예수님 또한 헤롯의 학살 속에서도 이집트로 피신해 생명을 보존하셨습니다. 모세가 출애굽 한것 처럼, 예수님 역시 이집트를 떠나 돌아오시는데, 이 평행 구조를 통해 마태는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시 살아내며 공동체의 운명을 짊어지는 새로운 지도자, 곧 모세와 같은 예언자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백성들을 이끌고 홍해를 갈라 물을 통과 한것 같이, 예수님도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며 물에 잠겼다가 올라오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역시 예수님은 모세처럼 물을 통과하는 길을 여시는 분임을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이때 예수님이 물에서 올라오시는 순간,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는데, 이 장면은 노아의 방주에서 심판의 물이 지나간 뒤, 땅이 다시 드러나고 비둘기가 날아와 새로운 시작을 알렸던 것처럼, 예수님의 세례 역시 심판 이후의 새로운 삶, 죽음 이후의 새로운 생명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표지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이 장면에서 하늘에서 선포되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이 말씀은, 원래 시편에서 왕에게 선포되던 왕위를 선언하는 언어였습니다. 그런데 이 선언이 예수님께 임한 순간은, 어떤 특별한 업적을 이루신 뒤가 아니라 자기를 비워 물에 잠겼다 올라오신 직후였습니다. 왕좌가 아니라 물속에서, 높임이 아니라 내려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것입니다. 마태는 여전히 예수님을 제2의 모세로 그리고 있지만, 모세처럼 물을 가르는 지도자가 아니라, 물에 잠겨 자기를 내어놓음으로 새로운 길을 여시는 새로운 모세로 우리 앞에 서 계시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우상-나를 숭배하기
이제 오늘 말씀에서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아 말씀을 선포한것처럼 , 예수님께서도 산에 오르셔서 말씀을 선포하시는 모습을 함께 보려고 합니다. 겉으로 보면 둘 다 “하나님의 말씀”이고, 둘 다 “공동체를 향한 선언” 이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방향이 조금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십계명의 서두에서는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이 있는데, 저는 이 경고를 너 자신을, 우리 스스로를 신으로 만들지 말라는 경고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신을 만든다고 할 때, 사실은 자기가 통제할 수 있는 신을 만들고, 그 신을 통해 자기 욕망과 불안을 정당화하려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상 숭배는 겉으로는 종교 행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숭배하는 또 다른 방식이 됩니다.
그리고 인간이 자기 자신을 숭배하는 순간, 하나님은 더 이상 예배의 대상이 아니라 이용의 대상이 되고, 이웃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됩니다. 그래서 십계명은 하나님을 향한 계명으로 시작해서, 곧바로 이웃을 해치지 말라는 계명으로 이어집니다. 이는 자신을 숭배하는 사람은 끝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고, 이웃을 사랑할 수도 없다, 라고 정리할 수 있으며. 십계명은 바로 이 사실을 단호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말씀을 받는 순간에도 백성들은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황금 송아지 상을 만들어 숭배했다는 사실입니다. 겉으로는 우상을 만든 사건이지만, 그건 결국 자기 자신을 예배하기 시작한 사건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보다, 불안을 당장 달래 줄 뭔가를 붙잡고 싶었기에. 그렇게 인간은 늘 신을 만듦으로써, 사실은 자기 자신을 신의 자리에 앉혀 놓는 것 입니다.
그리고 우상숭배는.. 나를 숭배하는 것은.. 지금도 여전히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솔직히 말하면 자신을 숭배하기에 너무 좋은 시대이고, 좋은 정도가 아니라 그렇게 살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시대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번씩 소비하라는 말을 듣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자발적으로 알리는 것이 권장되고, 성과를 내라는 압박을 받고, 더 생산적이 되라고, 더 자신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라고는 요구를 받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멈추면 뒤쳐질것 같고, 조금만 쉬면 불안해집니다. 클릭 몇번이면 원하는 걸 바로 얻을수 있기에, 조금만 기다리면 불편해지고, 만족이 늦어지면 불안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만족을 누리는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만족을 추구해야만 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삶의 중심이 자연스럽게 바뀌어, 무엇이 나를 채워주는지가 가장 중요한 질문이 되고, 결국 나는 점점 나 자신을 돌보고, 보호하고, 만족시키는 존재, 나 자신을 관리하고 광고하는 경영자이자, 나를 예배하는 성직자 ,제사장같은 존재가 됩니다. 이게 바로 자기 숭배의 가장 일상적인 모습으로, 우리 손으로 황금송아지를 세우지 않았을 뿐, 훨씬 더 정교하고 알아차리기 어려운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예배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팔복-존재에 대한 선언
그런 세상 한가운데서,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셔서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십계명처럼 “이렇게 살지 마라”라고 경고하시기보다는, 오히려 “이런 사람이 복이 있다”라고 선언하십니다. 팔복은 금기의 나열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선언입니다.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깨끗한 자, 화평케 하는 자, 박해받는 자… 이 사람들의 목록을 하나씩 바라보다 보면 공통점이 하나 보이는데. 이들은 모두,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마음껏 예배하기 어려운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자기자신에게 몰입하지 않거나 그럴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점 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을 보면 이 점이 더 분명해집니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병들고, 고통받고, 사회에서 밀려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갖은 질병과 고통을 앓는 환자들, 귀신들린 사람, 간질병, 중풍 환자들.. 각종 질병과 결핍 때문에, 성공적인 자기 관리나 자기 증명의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세상이 요구하는 ‘자기 숭배의 이상형’에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무언가를 만들어내기도 어렵고, 자신을 증명하기도 어렵고, 자기 자신을 부풀릴 여력조차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결핍의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은 “복이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팔복은 강한 사람들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신처럼 만들 수 없는 사람들,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공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선언입니다.
팔복은…
가난하다는 건 의지할 것이 없는 상태, 자기를 확장할 여력도, 더 발전시킬 여지가 없다고 느끼는 상태입니다. 경제적 가난이든, 사회적/관계적 고립이든, 존재적으로 더는 버틸 힘이 없다고 느끼는 상태, 즉 의존할 대상이 없는 상태입니다.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이 너무 당연한 세상에서, “나는 나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로 예수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하늘나라가 열려 있다고 하십니다.
온유함은 힘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힘이 있지만 그 힘을 내려놓는 힘을 정의합니다. 굳이 이기지 않아도 되는 자유, 앞서지 않아도 되는 여유입니다. 마땅히 가져도 될 이익을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끝까지 자기 이익을 붙들고 자본을 축적하는 세상과는 정반대에 서 있는 존재들로, 예수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거라고 하십니다. 온유함을 설명하기 위해.. 한 가지 사례를 들어 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한 집에 살게 되는데, 한 사람이 전세금 4천만 원을 전부 냈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엔 다른 한 사람이 매달 월세에 해당하는 40만원을 주거나, 관리비를 혼자 감당하겠죠. 그런데 전세를 낸 사람이 그 돈을 받지 않기로 합니다. 그리고 월세를 내지 않게 된 사람도, 그 40만 원을 자기 돈처럼 쓰지 않기로 합니다. 그렇게 둘 앞에 매달 40만 원이라는 빈자리가 생깁니다. 이들은 그 돈을 모아, 또 다른 집을 구하고, 그 집에 형편이 어려운 사람을 들입니다. 저는 이게 바로 온유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질 수 있지만 굳이 움켜쥐지 않는 힘. 이들은 이익을 포기한 만큼의 빈 자리에서 이웃을 환대하는 공간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은 더 많이 소유한다는 뜻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머물 수 있는 자리를 얻게 된다는 뜻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이중적이지 않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늘 계산하며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라, 무엇이 자기 삶의 중심인지 분명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안전과 미래를 책임지는 마지막 자리를 하나님 말고 다른 것에 맡기지 않는 삶을 말합니다.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을 보게 될 거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붙잡지 않으려는 그 단순한 방향성 때문에 말입니다.
화평케 하는 사람이란, 단순히 갈등을 중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화평은 흔히 갈등이 없는 상태로 생각되지만, 화평은 갈등이 생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닫지 않은 상태입니다. 위험이 제거된 평화가 아니라, 위험을 안고서도 관계를 계속 여는 용기가 화평입니다. 그런데 그 용기의 실질적인 이름이 바로 타인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타인을 신뢰한다는 건, 그 사람이 나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언젠가 실망시킬 수 있어도, 혹은 배신할 수 있어도, 그 가능성 앞에서 미리 문을 닫지 않는 선택입니다. 이 선택이 없으면 우리는 늘 이렇게 됩니다.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리자.” “저 사람이 괜찮은지 먼저 보자.” “상처받지 않을 거리만 유지하자.”
이런 태도는 겉보기엔 평화로워 보여도, 사실은 관계 없는 공존일 뿐입니다. 우리가 타인을 신뢰하지 못하는 가장 깊은 이유는, 사실 위험 때문이기보다 자기중심성 때문입니다. 관계에서 늘 먼저 계산하는 거죠. “이게 나에게 이익이 될까?” “내가 손해 보지는 않을까?” “내가 먼저 열었다가 바보 되는 건 아닐까?” 이 상태에서는 평화가 나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화평은 통제에서 생기는 게 아니라, 취약함을 감수할 때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하신 화평케 하는 사람은 갈등을 잘 정리하는 사람이기보다, 자기중심성에서 한 발 물러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불안 속에서도 관계를 끊지 않는 사람, 안전이 보장되지 않아도 이웃에게 마음을 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을 때 공동체는 싸우지 않는 집단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가 됩니다.
애통하는 자, 긍휼히 여기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박해받는 자들 또한 자기 자신을 예배하지 않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가리킵니다.
애통하는 자들은 세상이 이대로 괜찮지 않다는 감각을 잃지 않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미 세상이 요구하는 거짓된 자기숭배를 간파했기 때문입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라, 더 강해져라, 더 잘 관리해라, 더 성공해라, 할 수 있다다”라는 말이 사실은 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고통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방식이라는 걸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슬픔을 성급히 덮지 않고, 세상이 만들어낸 상처를 그대로 바라봅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이들은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지 않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을 남의 일로 밀어낼 수 없습니다. 자기를 부풀리기 위해 세상의 폐해를 외면하지 않고,오히려 그 고통이 어디서 왔는지를 묻는 사람들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이 세상의 질서가 아직 하나님 나라와 어긋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성공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하지 않고 지금의 평안이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져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 결국 겪게 되는 것이 박해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다수가 편안해지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길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신처럼 떠받드는 세상에서, 자기숭배를 내려놓은 사람은 언제나 불편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팔복은 “이렇게 살면 복을 받는다”는 조건이 아니라, 어쩌면 이미 이런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인정과 선언입니다. 그리고 이 길은 새로운 길이 아닙니다. 모든 예언자들이 걸어왔던 길이며, 이제는 예수님께서 몸으로 살아내고 계신 길입니다. 팔복은 단순한 윤리 강령이 아니라, 예수라는 존재의 방식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 외에 다른것에 의존할 것이 없었고, 다른 안전장치를 마련하지 않으셨으며, 내려오실 힘이 있으셨으나 사용하지 않으셨고, 자기를 부인할 제자들을 끝까지 신뢰하셨습니다. 세상의 불의와 죄에 마지막까지지 아파하고,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이들마저 긍휼히 여기고, 의를 갈망하다가 마침내 박해까지 감수하는 이 삶.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걸으신 길이며, 자기 자신을 예배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드러나는 방식입니다.
십계명은 결국 “너 자신을 신으로 만들지 마라”는 하나님의 경고였고, 황금송아지는 그 경고를 견디지 못한 인간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오늘의 세상은, 그 선택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만들어 놓은 시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팔복은 바로 그 시스템 밖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가장 급진적인 선언이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예배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 바로 그 자리가 복이라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도 이 문제를 전혀 다른 시대, 전혀 다른 자리에서 다시 겪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통과했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자기 숭배의 길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요단강에서 스스로를 비워 물에 잠기신 예수님과 함께 세례를 통과한다는 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신으로 만들려는 삶이 아니라, 그 삶이 끝났다는 것을 몸으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길에 들어섰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세례는, 우리가 누구를 예배하며 살 것인지를 다시 묻는 자리이고, 팔복은 그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가장 분명한 대답처럼 들립니다.
자기숭배를 멈추는 길-안식(멈춤. 비움. 바라봄. 귀기울임)
그렇다면 도대체 “나를 예배하는 죄”의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다들 아시겠지만 그 시작이 이미 에덴동산의 이야야기 안에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그저 바라보고 지나가지 못했습니다. 그저 바라봐야할 대상을 끝까지 바라보지 못했고, 결국 움켜쥐면 안 될 것을 붙잡았고, 취하면 안 될 것을 취했고, 결국 먹었습니다. 그때부터 인간은 “먹는 존재”, 더 정확히 말하면 끊임없이 먹어야만 안심하는 존재가 된 것 같습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즉각적으로 욕망을 채워야 하고, 당장 만족해야만 불안을 견딜 수 있는 존재가 되었죠. 그래서 즉각적인 만족이 곧 자기 생산이 되고, 자기 관리가 되고, 결국은 자기 숭배가 됩니다. 내가 나를 책임지고, 내가 나를 구원하고, 내가 나를 채우는 삶 말입니다.
금식, 단식을 생각하면 흥미로운 지점이 있는데, 우리의 몸은 먹는 걸 멈추고 충분한 시간을 굶을 때, 우리 몸은 불필요한 세포를 스스로 정리한다고 합니다. 영성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나를 채우는 걸 멈추면, 영혼 안에 쌓여 있던 것들, 굳이 붙잡지 않아도 됐을 욕망과 불안이 조금씩 비워지고, 그 빈자리에서 오히려 다른 충만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늘 더 채워야 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멈출 때 비로소 살아나는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멈춤을 너무 힘들어한다는 겁니다. 하와도 그랬고, 출애굽한 백성들도 그랬습니다. 시내산에서 모세를 기다리지 못하고, 가만히 있지 못해서 결국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안식일 규정도 사실 같은 맥락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간을 향하여 “나처럼 쉬어라”고 하셨습니다. 여섯 날 일하신 하나님을 닮으라고 하기보다, 하루를 멈추신 하나님을 닮으라고 하신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는 안식일에 나무하러 나갔다가 죽임을 당한 사람이 나옵니다. 너무 가혹해 보이지만, 멈추지 못하는 삶, 끊임없이 뭔가를 해서 내 생존을 책임져야하는 삶, 계속 채워야만 하는 삶이야말로 이미 죽은 삶이 아니냐라는 시선으로 읽힙니다.
그래서 안식, 하루를 쉬어가신 하나님을 닮아가는, 이 안식이 우리 삶에 너무나도 필요한게 아닐까 생각합니다다. 안식은 자기 숭배를 멈추는 가장 구체적이며 적극적인 영적 행위입니다. 멈춤의 자리에서만 우리는 비로소 나로 가득 찬 내 삶을 비워내고 하나님을 예배할수 있는 자리, 이웃을 사랑할수 있는 자리를 마련할수 있는것 같습니다. 이것이 곧 계명이 지향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올바른 방향설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리아의 예
여기에 도움이 될만한 상징을 하나 소환해보고자 합니다. 바로 나사로의 자매들인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인데.. 마르다는 분주합니다. 뭔가 해야 하고, 움직여야 하고, 채워야 하고, 잘해내야 합니다. 한마디로 분주하고 여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한가운데서 마리아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예수님 발치에 앉아 조용히, 주의 깊게, 그분을 바라보고 귀 기울입니다. 이 장면이 중요한 이유는, 마리아가 더 경건해서가 아니라 전혀 다른 삶의 리듬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르다는 ‘무언가를 해야만 의미 있는 사람’의 리듬이고, 마리아는 ‘그분을 바라보고 듣는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사람’의 리듬입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하신말씀.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했다.” 이는 마르다가 틀렸다는 말이 아니라, 순서가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섬김보다 앞서는 건 침묵이고, 행동보다 앞서는 건 바라봄이고, 채움보다 앞서는 건 비움이라는 뜻입니다. 신앙은 무엇을 더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를 먼저 바라보느냐의 문제라는 거죠.
왜냐하면 사실 모든 선한 것들조차도,얼마든지 자기 숭배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봉사도, 헌신도, 사명도 어느 순간부터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십니다. 안식은 단순히 쉬는 시간이 아니라, 신성을 회복하는 시간 ,다시 주님을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마리아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그저 예수님 곁에 머무는 그 시간이 먼저입니다. 그 머무름이 있을 때에만 섬김도, 헌신도, 순종도 다시 자기 숭배가 아니라 하나님 예배가 됩니다.
이 흐름은 부활 후 마리아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 “나를 만지지 마라”에서도 이어집니다. 붙잡으려 하지 말라는 말, 소유하려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주님조차도 내 안정, 내 만족, 내 확신을 위한 대상으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붙잡히는 분이 아니라 바라보고 따르는 분이십니다. 즉각적인 만족, 움켜쥐는 신앙이 아니라, 기다리고 머무르고 침묵하는 신앙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래서 결국 신앙의 중심에는 늘 이 질문이 놓입니다.
나는 오늘도 뭔가를 움켜쥐려고 하는가, 아니면 가만히 멈춰 예수를 바라보고 있는가.
마리아처럼 예수님 앞에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 자기 자신을 채우려는 손을 내려놓고, 주님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팔복이 말하는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처럼, 의지할 것을 내려놓고 주님 앞에 앉아 있고, 온유한 사람처럼, 자기 힘을 내려놓고 조용히 머물고 있고, 마음이 청결한 사람처럼, 다른 계산 없이 한 분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팔복-자기숭배의 길에서 내려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
그러니 팔복이 말하는 사람은 특별한 성품을 타고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을 바라보는 자리로 들어온 사람입니다. 바로 자기 숭배에서 내려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된 사람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신앙은 더 바쁘게 사는 방향이 아니라, 더 깊이 멈추는 방향이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많이 말하기보다 더 오래 침묵하고, 더 많이 붙잡기보다 더 오래 바라보고, 더 많이 채우기보다 더 많이 비우는 삶 말입니다.
그리고 이 길이 복이라고 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했다. 저는 이렇게 읽고 싶습니다. 마리아는 좋은 삶을 택했다.” 내가 비워낸 그 자리에 하나님이 머무시고, 그 빈자리에 또 다른 이들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덜 채울수록, 더 충만해지는 기쁨을, 그것이 좋은 삶임을 계속 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와 여러분이 마리아의 고요함을 배우는 공동체가 되면 좋겠습니다. 또한 팔복이라는 이 상징을 깊이 공유하는 공동체이길 소망합니다. 조용히, 그러나 가장 진지하게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 그래서 팔복과 같이 예수님의 존재를 지금 이곳에서 살아내는 존재들,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