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23일 사순절 세번째 주일/ 회개-너와 나를 살리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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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ration

기다림의 연속
언제즘 헌재의 탄핵 선고가 있을까요? 헌재의 탄핵선고가 길어지고 있습니다. 이번주에는 나오겠지!하지만 어김없이 주말을 긴장 가운데 보내고 새로운 한주를 맞습니다. 주님의 오시는 날과 같이 그 날과 그 시는 그분들만이 알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의 기도가 간절해지는 시기입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기를… 다만 악에서 구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러는 시기에 한국교회가 보여주는 자화상은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시국선언문에 함께 동참하며 기도했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다시 새롭게 하시기를 간구합니다.
매일을 긴장 가운데 보내지만 긴장 가운데에도 우리의 일상을 살아내고 기도하며 기다립니다.
반갑지 않은 주제 회개! 그러나…
회개는 우리에게 쉽게 다가오지 않는, 오히려 피하고 싶은 주제입니다. 누군가 "회개하라"고 말하면 마음이 무거워지고, 방어적인 태도가 먼저 튀어나옵니다. 왜일까요? 회개라는 단어는 우리의 잘못을 직면하게 하고, 숨기고 싶은 내면의 어두운 부분을 드러내라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라는 반발심이 들거나,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게 사는데 왜 나만?"이라는 비교 의식이 고개를 듭니다. 회개는 편안한 위로의 말이 아니라,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거울과 같기때문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반갑지 않은 주제로 느껴질 수 있지만, 하나님나라 복음의 핵심적인 요소로 빠질 수 없는 주제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가장 먼저 선포하신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였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도덕적 권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복음의 서막입니다. 회개는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와 은혜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며, 복음의 기초를 이루는 필수적인 첫걸음입니다. 회개없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회개없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회개는 불편하지만, 우리를 살리고 회복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고린도후서 7:10은 이것을 분명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은, 회개를 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불편하고 피하고싶고 아픈 주제이지만 생명을 주고, 회복케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반드시 통과해야할 과정입니다. 회개하라는 불편한 도전은 우리를 망함에서 살림으로, 구원으로 이끄는 생명의 외침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이 불편한 여정은 우리를 죄의 굴레에서 해방시키고, 새 생명을 약속합니다. 회개는 단순히 죄책감을 느끼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는 방향으로 삶을 재정비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은 회개의 연속입니다. 회개는 단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신앙 여정의 끊임없는 흐름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우리의 죄와 약점을 마주하고, 매일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과정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으라(엡 4:20-22)고 권면하고 있고,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고 권면합니다. 이 연속적인 회개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특징짓는 핵심이며,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와 더 깊이 연결하는 동력이다. 회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성숙한 사람으로 자라게 하며 흠없는 자녀로 서게합니다.
회개하라!!! 어떻게 지내니? 잘살고 있니?
오늘 성서일과 말씀의 흐름은 ‘회개하라’입니다. 부담스럽고 피하고싶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말씀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회개하라’라는 말씀이 저에게는 이렇게 들렸습니다. 나를 많이 아끼고 사랑해주는 분이 애정어린 말로 “어떻게 지내?, 잘 지내고 있니?”라고 묻는 것 같았습니다. 죄로 깨어지고 폭력적이고 팍팍한 세상을 아둥바둥 살아가면서 나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서 입었던 옛사람의 모습이 있습니다. 배를 신으로 삼고 욕망을 극대화하는 자본주의 소비주의 사회를 살면서 허기진 배를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떡으로 채우려했던 삶이 있습니다. 경쟁적인 사회에서 ‘잘 버틸 수 있을까?’고민하며 나도 모르게 이웃을 외면하고 배제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눈감과 귀막고 살아갑니다.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멋지게 살고 싶은데 내 삶은 늘 부족한 것같고 ‘이게 아닌데…’하는 마음의 소리가 들립니다. 그런 삶의 자리에서 “회개하라”는 외침은 “너 이거 잘못했어 안했어! 잘못했다고 해! 다시는 잘못안하겠다고 맹새해!”하며 다그치고 채찍질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는 분이 애정어린 말로 “괜찮니? 어떻게 지내니?”라고 물으며 나를 도와주려는 소리로 들립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동산에 숨었다가 아브라함아 네가 어디있느냐?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습니다. 너의 선자리가 어디냐?고 묻는 하나님의 물음입니다.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가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아버지 집의 풍요로움을 기억하고 떠올리는 것처럼, 그리고 아버지집에 도착했을 때 벗은 발로 뛰쳐나오시는 아버지의 이야기처럼 “회개하라”라는 외침은 질책의 소리가 아니라 돌이키고 회복하라는 회복의 목소리입니다.
사랑하는 맑은물 가족 여러분!
안부를 묻고싶습니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여러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잘 지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에는 어떤 열매가 맺히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지금 나의 존재와 삶을 돌아봅시다.
나를 많이 아끼고 사랑해주는 분이 애정어린 목소리로 물어온다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과 같이 망할 것이다
누가복음 13장에서 예수님 당시 비극적인 사건이 두가지 등장합니다. 오늘날로 치면 참사겠지요. 한가지는 정치적인 이유로 학살을 당한 사건이 등장합니다.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을 예루살렘 성전에서 학살하고 그때문에 성전 제단에서 흘린 피와 학살당한 이의 피가 섞여버리는 끔찍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로마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저항군의 상당수가 갈릴리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빌라도는 이들을 제거하려고 군대를 동원했고 밀려서 밀려서 예루살렘 성전까지 도망쳤으나 군대가 성전까지 들어와 저항군들을 학살하는 일이 일어났다고 학자들은 이야기를 합니다.
다른 한가지는 알수없는 재난입니다. 예루살렘에 물을 공급하는 실로암이 있었는데 이곳을 지키기 위해 세워놓았던 높은 망대가 무너져서 열 여덟 명이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도 저항군이 망대로 올라가 고공농성을 벌인 것으로 보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알수없는 재난과 사건사고로 보는 것이 두가지 다 정치적인 문제보다는 정치적인 문제와 재난의 문제로 보는 것이 더 나을 듯 합니다.
문제는 이 사건의 이야기 뒤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두 사건을 언급하며 예수님의 물음이 이어집니다.
“이런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큰) 죄를 지어서라고 생각하느냐?” 예수님의 이 물음은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알려줍니다. 고난이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재난이 죄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욥기에서도 찾아 볼 수 있듯이 욥의 고난이 죄 때문이라고 친구들은 생각하고 회개하라며 고난 가운데 있는 욥을 더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모든 고난과 죽음의 배후에는 반드시 죄라는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논리 뒤에 숨어서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끊임없이 정죄하고 상대적으로 부유하고 평탄한 자기들은 죄가 없기 때문이라고 자만하고 있었습니다. 과거 아이티 지진이나 서남아시아 쓰나미로 수많은 사람이 죽은 참사를 보고 당시 감리교 대형교회 목사님이 “우상숭배하던 저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다”라고 설교해서 예수님 당시 유대인과 나을바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22년 10월 29일 이태원참사 때에도 서양귀신 파티에 놀러갔다가 죽은거라고 거기간 그들의 잘못이라고 이런데 가면되냐고 안되냐고 가르치는 교회학교의 이야기도 많이 있었습니다. 국가폭력에 의해서 재난이나 참사에 의해서 희생당한이들에 대한 어떠한 슬픔이나 연민없이 그저 그들의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며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고 기계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은연중에 상대적으로 평탄한 삶을 살고 있는 자신들은 경건하고 죄없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 그들의 잘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간파하시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무슨 이런 끔찍한 말씀을 하십니까? 회개하지 않으면 학살당하고 재난과 참사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니요!!! 무슨 이런 저주의 말을 합니까? 뼈때리는 이야기입니다. 회개하면 참사와 재난과 전쟁과 학살을 피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저들이 죄가 더 많아서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죄의 대가가 아니라는 겁니다. 죽은 것이 죄의 대가라며 정죄하며 상대적으로 나를 의롭게 여기는 것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깨어진 세상에 살면서 재난과 참사, 전쟁과 학살의 당사자가 누구나 될 수 있습니다. 나와 상관없는 일이 아니라 나와 깊은 연관이 있는 일입니다. 모두가 죄인입니다. 죄로 인해 깨어진 세상에 살기에 재난과 고통이 찾아옵니다. 죄로 인해 깨어진 세상에서 자기중심적인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며 혐오하고 배제하고 욕심을 부리며 살아가면 더 큰 고통이 찾아옵니다. 회개하고 돌이키고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회개는 너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내 눈속에 들보는 보지 못하고 곁의 형제 자매의 티가 더 잘 보입니다. 내 눈 속의 들보는 티로보고 형제 자매의 티를 들보로 봅니다.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 속에서 나는 피해자고 상대방은 늘 가해자가됩니다. 서로 미숙해서 일어나는 갈등속에서 나는 늘 정당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저 사람이 더 죄가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저 사람이 가해자라서 그런게 아니다. 모두가 죄인이다. 죄로 인해 깨어진 세상과 깨어진 삶의 방식이 재난과 참사와 전쟁과 갈등을 만든다. 회개하지 않으면, 돌이키지 않으면, 지금 여기서 평화를 가꾸지 않으면 다 망한다. 저들의 문제가 아니라, 너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이다.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는…
회개는 단순히 "미안합니다"로 끝나는 사과가 아닙니다. 감정적인 뉘우침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55:7은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길과 생각을 바꾸라는 건 삶 전체를 뒤흔드는 요구입니다. 삶의 태도, 방향, 목표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렸음에도 불평과 우상숭배로 멸망한 것을 경고하며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경고합니다. 회개는 우리의 습관, 태도, 관계를 돌아보고 뿌리부터 바꾸라는 초대입니다. 익숙한 삶을 버리고 삶의 체질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긍정의 힘"과 "자존감"을 강조하며 스스로를 다독이는 데 익숙합니다. 회개는 그 흐름에 역행합니다. 나를 낮추고, 잘못을 인정하고, 타인과 세상을 살리는 방향으로 돌이키라는 요구는 오늘날의 자기중심적인 문화와 충돌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회개는 "나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개인주의적 신앙과 부딪히며 외면당하기 쉽습니다. 공동체적 회개, 즉 이웃과 창조 세계를 살리는 책임을 함께 감당하라는 메시지는 우리 삶을 총체적으로 변화할 것을 요구합니다.
회개는 "나와 하나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회개를 너무 개인화된 것으로 축소시켜 버렸습니다. "내 죄를 용서받으면 끝"이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회개는 나와 너,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함께 하나님께 돌아가는 여정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엿새 동안 인간뿐 아니라 온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우리는 서로 얽히고설켜 있습니다. 내가 회개한다는 것은 나만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살 수 있는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2025년의 한국 사회를 돌아봅시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일자리를 찾고, 결혼과 출산을 고민하며, 자녀 교육비, 주거비, 부모님 부양이라는 삼중고 속에서 "내가 이 삶을 버틸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빈부 격차가 심화되고, 기후 위기로 폭염과 한파가 반복되며, SNS와 미디어는 소비와 배고픔을 부추기는 메시지로 가득합니다.
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때로 세상과 다를 바 없이 "나만의 구원"을 추구하며, 공동체의 아픔을 외면해 왔습니다. 이주민, 성소수자, 가난한 이웃, 장애인, 우리의 일부인 이들을 "나와 상관없다"고 치부하며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의 길은 분리와 배제가 아니라, 모두를 품고 살리는 길입니다.
지난주 빌립보서 말씀처럼, 우리는 "배"를 신으로 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 맛있는 음식, 더 빠른 배달, 더 살찐 고기를 위해 농업과 축산업이 공장화되고, 자연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맛있다"고 느끼는 그 순간, 누군가는 구조화된 폭력 속에서 고통받고 있습니다. 이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회개란 무엇일까요? 회개는 관계를 회복하겠다는 결단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 세상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내가 죽이고 있는 것이 내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고, 폭력을 멈추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구름 아래, 바다 가운데를 걸을 때, 그들은 어린이, 노인, 장애인, 여자, 남자, 모든 이들과 함께 걸었습니다. 누구 하나 버려지지 않았습니다. 레위기 법은 공동체가 서로를 살리기 위해 세워졌고, 시대에 따라 갱신되었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외로움과 불안은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사회가 우리를 경쟁 속에 내몰고, 공동체의 품을 잃게 만든 결과입니다. 우리가 짊어진 삶의 무거운 짐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이 사회가 가족을 지탱할 구조를 무너뜨린 결과입니다. 회개는 이 모든 얽힘을 인정하고, "당신이 살아야 나도 산다"고 고백하며 서로를 살리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내가 뿌린 제초제가 흙을 죽이고, 그 흙이 나를 죽입니다. 내가 버린 플라스틱이 바다를 죽이고, 그 바다가 나를 죽입니다. 반대로 내가 살린 이웃이 나를 살리고, 내가 돌본 자연이 나를 살립니다.
회개는 "나와 너"를 살리는 실천입니다. 내가 관심가지고 돌보아야 할 이웃은 누구입니까? 우리 공동체에 혹 소외되거나 홀로 아파하는 가족은 없습니까? 내가 생활하는 가정과 지역과 직장에서 존재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를 사랑해야할 대상은 누구입니까? 미력하게 나마 우리의 기도와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이웃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 비유에서 한해만 더 지켜보자고 간구하는 포도원지기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저와 맑은물 교회 가족에게 하나님이 바라시는 열매는 무엇일까요? 올해, 내년이 지나면서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맑은물 가족이길 바랍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풍성함이 넘쳐서 그 풍성함이 이웃과 세상에 열매로 나타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