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소금이다.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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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ration

입춘이 지났지만 매서운 한파가 찾아와 다시 추워진 주현절 다섯째 주일을 보냅니다. 자연스럽게 몸이 움추러드는 계절이지만 우리 존재에 따뜻한 빛을 비추시는 주님의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서로의 따뜻한 온기를 나누는 가정교회 모임이 되기를 바랍니다.
문제는 예배가 아니라 삶이야!
이번주 성서일과 내용을 공유하면서 느꼈던 단상입니다.
이번주 성서일과의 말씀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예배를 중요시하며 예배에만 몰입하려는 우리의 자세와 태도와는 달리 참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야하는 참된 하나님을 반영하는 삶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예배를 중요시하면서 예배당은 크고 화려하게 짓지만 정작 우리의 삶은 작고 초라합니다. 예배의 순서와 전통을 강조하지만 삶은 예배하는 하나님을 닮기는 커녕, 세상을 더 닮고 자기 욕망을 추구하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고보면 우리가 예배 시간에 누구를 예배하는지 의문이 듭니다. 형식과 순서는 종교적인 언어로 가득차 있지만 정작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대변해주는 신을 예배하고 있는건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배란 무엇일까요? 예배는 단순히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행위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사람과 구별되는 존재 절대 타자이신 하나님을 대면하여 만나는 일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자인 신 앞에 서는 행위이고, 거룩함과 사랑으로 충만한 존재 안에서 신의 형상을 입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하셨고, 지금도 하고 계시고, 앞으로 하실 일의 거대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나를 인식하고 너와 서로와 이웃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대한 이야기 안에서 나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삶을 바라봅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자신을 섬기고 우상으로 만들려는 우리의 자아중심성은 깨어집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예배 안에서 우리를 만나고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빚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하는 하나님을 닮습니다.
많은 예배와 수많은 예배당이 존재하지만 정작 하나님을 반영하는 삶이 빠진 기독교는 개독교라는 오명과 사회에서 점점 자기 이익에만 집착하는 집단으로 낙인찍혀가는 것 같습니다. 비기독교인이 어느 목사님에게 “목사님 예수님 믿으셔요!”라는 이야기도 듣습니다. 기독교인에게서 예수님을 볼 수 없고, 교회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삶이 빠진 예배의 문제는 다시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는 예배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모이는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 경험이 일어나고 있는지? 함께 모이는 자리에서 나 개인이, 그리고 공동체의 가족이 하나님 앞에 서고, 하나님의 그 큰 이야기 안에서 우리를 발견하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맑은물이 전체로 모이고, 또 가정교회로 모일 때 우리 안에 이미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서로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온 세상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큰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함께 걸어가는 공동체이길 바랍니다.
시간과 공간만을 허비하고 가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나를 발견하고, 우리 안에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고, 하나님의 거대한 이야기 안에서 살아가는 맑은물이길 바랍니다.
8복에 이어지는 이야기
지난주 우리는 상호형제를 통해 팔복은 존재에 대한 선언이다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상호형제의 팔복 나눔을 잠시 인용하자면
“팔복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신처럼 만들 수 없는 사람들,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공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선언입니다.”
8복의 사람들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의존할 대상이 없는 이들, 마땅히 가져도 될 이익을 내려 놓을 줄 아는 사람, 이중적이지 않은 사람, 위험을 안고서도 관계를 계속 열기 위해 취약함을 감수하는 이들, 이대로 괜찮지 않다고 애통하고, 고통의 근원을 찾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고대하기에 세상에서 불편한 존재가 된 사람들입니다.
팔복은 바로 이 시스템 자기 자신을 숭배하는 시스템 밖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가장 급진적인 선언이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예배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 바로 그 자리가 복이라는 선언입니다.
앞서 언급한 내용을 상호형제가 나눈 팔복의 이야기로 풀어가면 자기 자신을 예배하지 않고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이들의 존재방식이 팔복의 사람들이겠지요.
예수님은 팔복의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팔복의 존재방식에 이어지는 존재에 대한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소금이 되어라 빛이 되어라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짠맛을 내어라 빛을 비추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소금이 당연히 짠맛을 내고 빛이 당연히 빛을 비추듯이 자기 중심성을 벗고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이들이 원래 가지는 정체성인 소금과 빛으로 이들을 정의하십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누구입니까? 종교지도자들이나 당시 유행했던 바리새파나 사두개파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들, 어디 하나 의지할 곳 없는 이들, 로마와 헤롯의 폭정에 상처받고 삶의 자리를 빼앗긴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들을 향해 너희가 소금이요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작고, 약하고, 보잘 것 없고, 가난한 이들이 예수님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맛보고 경험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보여주시고 걸어가셨던 팔복의 길을 따라 걷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 너희가 소금이다. 너희가 빛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말로 너희가 희망이다. 너희가 하나님을 반영하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이들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보잘 것 없어보이는 이들에게 소망을 두시고 이들을 향해 너희가 소망이다. 너희가 희망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한국교회의 암울한 이야기들을 듣습니다. 이름 있는 교회와 유명한 목사님들의 일탈과 비난의 이야기들이 등장할 때마다 실망하고 낙담합니다. 교회에 대한 전망이 어둡고 암울합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맛을 잃은 소금의 모습입니다. 땅에 떨어져 밟히는 비참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소금으로 살아가는 이들, 빛으로 사는 이들에게 소망과 희망을 두십니다. 큰 건물은 없지만, 영향력은 미미하지만, 유명하지 않고 별볼일 없어 보이지만 예수님을 따라 살며 팔복의 복된 삶을 사는 이들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 안에서 소금과 빛입니다. 무언가 대단한 일과 업적을 이루지 않아도 예수님 안에서 나를 발견하고,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을 통해 예수님은 일하시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실 것입니다.
소금과 빛
너희는 소금이다라는 말을 할 때 우리는 대부분 소금처럼 세상에서 더 살맛나게 하는 조미료가 되라는 뜻으로 이해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너희는 소금이다라고 하는 의미는 좀 더 근원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소금의 여러가지 의미가 있겟지만 냉장고가 없던 고대 사회에서 소금은 음식이 부패하지 않도록 생명력을 유지하도록 하는 보존재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소금언약’이라고(민수기 18:19) 부름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변치 않을 것임을 소금언약이라는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는 소금이다라고 하신 것은 너희가 하나님의 변치 않는 언약의 담지자이다. 이 땅에서 언약을 드러내고 나타내는 언약의 보존자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언약을 살아내는 사람이 없다면 언약을 알수도 경험할 수 도 없습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몸으로 살아내고 증명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약속은 세상 가운데 드러나고 나타납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화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비정상적인 일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언약을 저버리고 살아가는 것은 모순적이고 비정상적인 일이다라는 역설적인 비판입니다. 삶이 빠진 예배가 있을 수 없고(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한 이들이 자신을 숭배하는 자기 중심적으로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그리스도인이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빛 또한 언약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시편에서 주의 말씀이 빛이다라고 묘사하는 싯구를 자주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사야서에는 빛이라는 오르라는 단어와 토라(율법)라는 단어를 활용한 언어유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 삶의 방식이 되어 드러날 때 이것이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산위의 동네와 연결되고 산위의 동네는 에덴의 원형,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의미하고, 에덴과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하는 것으로 연결됩니다.
소금과 빛은 언약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결국 너희가 소금이다 너희가 빛이다라는 말씀은 너희가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내고 나타내는 존재이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나타내셨으니 이는 다시 너희가 바로 하나님을 반영하는 존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너희가 소금이다, 빛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가 바로 하나님을 반영하고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라는 선언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선언입니까? 우리가 뭐라고 우리 존재가 하나님을 반영하는 존재라고 말씀하십니까? 나 조차도 내가 싫거나 감당이 안되는 부분들이 있는데, 그런 나라는 존재 안에 하나님이 거하십니다.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나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을 반영하는 존재로 빚으시고 살게 하십니다. 이것보다 더 영광스러운게 어디 있을까요? 이것보다 더 아름다운 이야기가 어디 있을까요?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진리도 감당치 못하겠는데, 나를 통해 하나님을 반영하시겠다는 말씀은 또 얼마나 놀라운 진리일까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은 창조세계에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통치를 반영하는 존재로 지음받았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에게 하나님은 사람을 그렇게 영광스러운 지위를 부여하셨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하여 나온 노예들에게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이 노예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열방에 복을 베푸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산에 모인 변두리의 보잘 것없는 이들이 소망이다. 희망이다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걸음을 따라 걷는 이들이 소금이요 빛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고 하나님이 드러나고 나타나고 반영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방 변두리에 사는 맑은물.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크게 성공한 부자가 없는 그저 평범한 이들이 모인 맑은물. 하루하루 겨우 버티고 살아가고 이런 저런 갈등으로 흔들리는 사람들이 모인 맑은물. 자녀를 키우며 한계를 경험하고 노후가 여전히 불안한 이들이 모인 맑은물. 그러나 맑은물은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맑은물은 삼위하나님이 이미 하셨고, 지금도 하고 계시고, 앞으로 하실 이야기 위에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맑은물은 예수님의 길을 따라 걷고, 서로에게, 이웃에게, 세상에게 하나님을 반영하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가 세상의 빛이다. 우리는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소금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입니다. 우리 맑은물 가족이 언약 안에서 신실한 존재로 서로에게, 그리고 이웃에게, 세상 가운데 하나님을 반영하는 존재로 드러나고 나타나고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소금으로 빛으로 살기.
소금과 빛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소금으로 빛으로 살아야 할까요? 앞서 살펴본 대로 소금과 빛은 언약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언약을 보존하고 언약을 드러내고 살아내는 것입니다.
언약을 단순하게 대입하면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시고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대화를 걸어오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결국 소금과 빛의 삶은 이 말씀과 관련된 삶일 것입니다.
말씀 앞에 머물러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평생의 과정입니다. 말씀을 읽지 않고, 묵상하지 않는 다면 결국 하나님과의 만남도, 하나님과의 대화도, 하나님의 말씀도 없는 존재가 됩니다. 말씀 앞에 머물러야 합니다. 반복해서 이야기합니다. 맑은물은 주간으로 성서일과의 말씀을 반복해서 묵상합니다. 주중에 스스로 묵상하고, 주일에 설교를 듣고, 공동체로 묵상한 말씀을 나눕니다. 그리고 일상으로 다시 그 말씀을 묵상하고 살아냅니다. 스스로 묵상하지 않으면 그 말씀은 효력이 없습니다. 힘이 없습니다. 내가 고민하고, 내가 말씀과 씨름한 것이 삶으로 녹아지고 삶에서 말씀을 힘을 얻습니다. 남이 들려주는 이야기 다른 이들의 해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나 스스로 묵상해야 합니다. 내가 말씀 가운데 나에게 말을 걸어오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 말씀을 살아낼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본문도 4개나 되고 구약, 시편, 서신서, 복음서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져서 어려움도 있습니다. 하지만 절기에 따라 맞춰진 말씀을 묵상하는 훈련을 하다보면 묘하게 연결되는 지점이 매직아이처럼 맞춰지고 각각의 다른 본문들 속에서 하나로 들려지는 말씀이 있습니다. 익숙하지 않지만 반복해서 훈련하다보면 아하!하는 순간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러니 성서일과 말씀을 꾸준히 묵상합니다.
성경을 전체로 읽어가기.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당위성은 모두가 동의할 것입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입니다. 고대의 문헌을 평생을 거쳐 반복해서 읽는 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반복적인 훈련이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말씀 앞에 부지런히 서는 훈련은 우리를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인도할 것이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경험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혼자서, 그리고 가정교회에서 말씀묵상과 읽기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 안에 머무는 맑은물이 되길 바랍니다. 언약 안에 머뭄으로 그 언약이 우리를 형성하고 변화시키고 삶으로 이끌도록 내어드리는 맑은물이길 바랍니다.
사는 것은 행동이고 실천입니다. 예수님은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착한 행실은 하나님과 이웃의 바른관계에서 나오는 삶입니다.
성서일과의 병행본문인 이사야와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면 착한 행실은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는 어질고 자비롭고 올바른 사람이라 어둠 속의 빛처럼 정직한 사람을 비춘다.
인정이 많고 동정어려 남에게 꾸어주며, 모든 일을 양심으로 처리한다.
그 사람은 흔들리지 않겠고 영원히 의로운 사람으로 기억되리라.
야훼를 믿으므로 그 마음이 든든하여 불행이 온다 해도 겁내지 아니한다.
확신이 섰으니 두려울 것 없고 마침내 원수들이 망하는 것을 보게 되리라.
그는 너그러워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니, 그 의로운 행실은 영원히 기억되고, 사람들이 그 영광스런 모습을 우러르리라.
이런 삶의 모습이 우리 맑은물 가족안에 나타나고 착한 행실의 이야기가 가득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