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산 위에, 산 아래에

본문

Celeb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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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변모주일은…

산상변모주일을 보냅니다.

산상변모 주일은 교회력의 흐름 속에서 주현절(Epiphany)의 찬란한 대미를 장식하는 동시에, 십자가의 고난이 기다리는 사순절(Lent)의 장엄한 서막을 여는 ‘신학적 교차로’입니다. 이 절기는 예수님이 산에서 변화되셨다는 단순한 신비 체험의 회상이 아니라, 구약의 오랜 약속들이 나사렛 예수라는 한 인격 안에서 어떻게 수렴되고 완성되는지를 선포하는 구속사적 정점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 여정이 지닌 이중적 역동성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산 위의 영광’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사건인 동시에, 그 영광의 무게를 견디며 다시 ‘산 아래의 고난과 일상’으로 내려가는 제자도의 훈련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주일의 예배의 경험과 일상의 영성의 방향성이라는 이중적인 역동성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10,7,200Km/h의 속도로 돈다고 합니다. 우리가 잘 느끼지 못하지만 엄청난 속도로 지구는 질주하고 있습니다. 이 속도는 음속의 87배나 빠른 속도입니다. 지구가 이렇게 엄청난 속도로 질주함에도 불구하고 태양계 밖으로 튕겨나가지 않는 것은 원심력과 구심력의 균형 때문입니다. 태양이 당기는 중력-구심력과 지구가 질주하는 관성-원심력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균형이 깨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태양이 당기는 중력이 더 강하다면 지구는 태양으로 빨려 들어가 타서 없어져 버릴 것입니다. 반면에 지구의 관성이 더 크다면 광활한 우주 속에 떠도는 미아가 되어 영원히 길을 잃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주일의 신앙과 일상의 신앙의 균형과 조화가 필요합니다. 예배를 통한 하나님 경험이 없이 일상의 삶을 강조하다보면 영혼은 메마르고 탈진합니다. 의미를 잃어버리고 자기 중심성이라는 죄의 본질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반면에 예배와 주일의 영성을 강조하고 일상의 영성을 무시하다보면 세상의 고통을 외면한 채 교회의 틀 속에 갇힙니다. 신앙은 이원론적이되고 삶과 신앙이 분리되어 삶에 영향력이 없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주일을 축으로 하는 하나님을 깊이 경험 하는 영성의 중심과 일상에서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아가는 일상영성의 방향성을 함께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 삶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루거나 균형을 이루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시계 추 처럼 양쪽을 오가면서 주일의 신앙와 일상의 영성을 함께 붙들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산이 의미하는 것은…

성경에서 산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가 강하게 드러나고 나타나는 장소입니다.

성경에는 ‘산’은 자주 등장하고 중요한 장소로 보여집니다.

에덴 동산은 산이었고,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와서 살았던 곳은 산간지방이었고, 여호와 이레로 알려진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장소 또한 모리아 산이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시내산으로 인도받았고,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시고, 오늘 성서일과의 병행본문인 출애굽기 본문에서 모세는 산 깊숙히 올라가 하나님을 대면합니다.

다윗성이 있던 그리고 성전이 지어진 곳 예루살렘은 높은 산이었고,

엘리야가 이세벨을 피해 도망하며 하나님을 대면한 장소도 호렙산으로 알려진 시내산이었습니다.

시편과 이사야서에서 보면 종종 여호와의 산에 오르자라는 싯구를 만납니다. 바로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가 가장 강력하게 드러나고 나타나는 장소가 ‘산’이라는 장소입니다. 

산 위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르십니다. 바로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의 상징인 산에 오르신거죠. 거기서 제자들은 일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합니다.

예수님이 갑자기 그들의 앞에서 눈부시게 변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다고 성경은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산을 가득 메운 것입니다.

이 사건이 얼마나 황홀하고 압도적이었는지 베드로는 예수님께 여기에다가 초막을 짓고 여기에 삽시다라고 제안을 합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가 너무도 감격스러워서 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릴 때에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서 몸디 두려워하였다고 묘사합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의 상징의 산에서 하나님으로, 신으로, 현현하시고(주현절이죠!) 영광스럽게 거룩하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베드로는 훗날 자신의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늘 성서일과의 베드로후서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의 위엄을 눈으로 본 사람들입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변화산 변모사건은 그냥 “우와 신기하다.”정도로 하나의 신기한 구경거리가 아닙니다. 앞에서 구심력, 중력을 예로 든 것처럼 하나님의 임재라는 강력한 중력이 제자들을 압도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에 머물도록 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산에 올라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경험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단 1회의 변화산의 사건을 매주일 반복되는 주일과 바로 연결시키는 것은 조금 억지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이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와 그 임재와 통치가 우리의 존재와 삶을 재구성하는 것이라면 매주일 반복되는 주일의 흐름은 우리에게 이런 시간이어야 합니다. 맑은물이 전체로 모여 예배하고, 가정교회로 모여 예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가 우리 존재와 삶을 재구성하도록 내어드리는 공간입니다. 함께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의 상징인 산에 오르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라는 강력하고 온전한 중력이 우리의 잘못된 중력인 자기중심성과 세속적인 가치들을 재조정하고 하나님의 통치와 임재 아래로 우리의 존재와 삶을 세워줄 것입니다.

피조물이며 자기중심적인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을 우상화하든, 세속적인 욕망과 가치를 우상화하든 무언가를 예배하는 존재입니다. 자기 스스로 결정하고 살아가는 자율적인 존재라고 하지만 우리는 무언가를 예배하며 예배하는 대상에 의해 종속되어 살아갑니다.

성경은 이런 인간의 상태를

“허물과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라고 진단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인간은 가짜 중력에 이끌려 살아갑니다. 돈, 외모, 성적, 명예, 쾌락, 자존심이라는 중력이 우리를 바닦으로 끌어내리고 진정한 중력에서 벗어나 궤도를 이탈하게 만들고 우리를 망가지게 합니다.

주일의 흐름은 이런 가짜중력에서 우리를 재조정하는 시간과 공간입니다. 참된 하나님을 예배할 때, 자기중심성과 세속적인 욕망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를 경험합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우리를 온전하게 빚으십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 우리는 자유롭게 되고, 우리는 우리다워집니다. 나다워집니다. 우리 존재와 삶의 진짜 주인이신 하나님의 거대한 통치와 임재를 바라볼 때,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와 삶을 재조정하시고 우리를 새롭게 빚으십니다.

우리에게는 잘 짜여진 전통의 예배흐름도, 화려한 세션이 인도하는 찬양도, 웅장한 성가대도, 카리스마있는 설교자도 없습니다. 가정교회로 가면 이런 것은 더더욱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이는 자리마다 성령으로 임재하십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들 속에 하나님은 일하시고 자신을 나타내보이십니다.

맑은물이 개척초기부터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겨왔던 정신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시간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이들 가운데 하나님은 함께 임재하시고 하나님의 통치를 나타내십니다.

그러니 함께 산에 오릅시다. 함께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함께 하나님을 예배합시다. 함께 하나님 앞에 엎드립시다. 자기중심성과 세속적인 욕망과 가치를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나아갑시다. 하나님께 우리의 존재와 삶을 내어드립시다. 예배는 자신을 드리는 행위이며 고백입니다.

우리가 예배시작 때 부르는 찬양을 마음으로 고백해봅시다.

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하리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리라

지금 내 맘에 지금 이곳에 주님 임하소서.  

산 아래로…

예수님의 변화산 변모사건 이후 산 아래로 내려오십니다. 마태복음에는 산 아래로 내려왔다는 표현은 없지만 병행본문인 누가복음을 보면 다음날 산 아래로 내려왔다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 초막 셋을 짓고 함께 삽시다.”라는 베드로의 제안에 그래 여기서 계속 머물자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끼리, 우리 안에만 가두어 둘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온 세계와 열방과 온 우주에 드러나고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산 아래로 내려오셨고, 자신의 길을 계속 걸어가셨습니다.

산 위의 영광과 임재와 통치는 산 아래로 내려와 전해지고, 퍼지고, 흘러보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의 충만함은 세상의 창조와 사람의 창조로 드러나고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세상을 새롭게하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출애굽시에 시내산에 머물렀던 하나님의 영광은 산 아래로 내려와 이스라엘 백성의 회막 가운데 머물렀고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는 끊임없이 내려오고 내려오고 내려와서 사람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산 아래로 내려와 맞딱뜨리는 현실과 현장은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받고 울부짖는 귀신들린 아이였습니다. 깨어지고 부서진 삶의 현장이고, 뒤엉키고 뒤죽박죽인 일상의 삶의 자리였습니다. 예수님은 귀신들린 아이를 고쳐주시며 존재와 삶을 회복하고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가 정작 드러나고 나타나야 할 장소는 산 위의 동네 일뿐 아니라, 깨어지고 부서지고 뒤엉키고 희노애락이 있는 삶의 현장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가 나타나야할 장소는 예배의 자리일 뿐 아니라,

우리의 본성과 한계와 여실히 드러나는 삶의 자리인 가정입니다.

우리의 치열한 생존과 갈등과 고민과 선택이 있는 일터와 삶터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을 반영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보냄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런 보냄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 때문에 주일 흐름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경험하는 일은 참으로 중요하고, 보냄받은 삶의 자리에서 나의 본성과 세속의 요구와 욕망 사이에서 하나님을 반영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사는 것이 우리의 부름받고 보냄받은 이유입니다.

산 위의 영광을 경험한 사람들이 산 아래의 고통과 절망을 치유하고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능력과 돈과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가능해집니다. 예수님은 귀신들린 아이를 고쳐주시고서 제자들이 우리는 왜 못했는지라고 묻는 물음에 기도 외에는 답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으로,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지혜와 힘과 능력으로 가능한 일임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함께 부른 찬양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빛이신 주님 너도 빛이라 하시네 하나님의 빛을 비추는 빛

빛이신 주님 너도 빛이라 하시네 이세상 가운데 보내셨네

너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의 마을 밝히는

너는 세상의 빛이라 주님의 빛을 비추는 빛.

네 우리는 빛입니다. 우리 서로는 서로에게 하나님을 비추는 빛입니다.

네 우리는 빛입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가족에게 하나님의 반영하는 빛입니다.

네 우리는 빛입니다. 우리는 이웃에게 직장의 동료에게 친구에게 하나님을 비추는 빛입니다.

네 우리는 빛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창조세계와 온 우주에 하나님의 통치를 나타내는 빛입니다.

저의 일상의 삶은 주일을 준비하는 것으로 채워집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주일에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가 저의 관심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하지만 저의 진정한 관심과 일은 주일 이후의 삶이 되어야 함을 다시 되새깁니다. 여러분과 저가 주일 예배 후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반영하는 삶을 살아내도록 격려하고 응원하고 지원하는 것이 저의 관심과 일이 되어야 함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지만 주일 우리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인 모임은 다시 흩어져 일상의 삶을 사는 삶에 방향을 맞추어야 합니다.

축도의 내용은 하나님 앞에 모였던 성도들이 흩어져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위에 하나님이 함께 동행하시기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기를, 하나님을 반영하는 삶을 살기를 기원하고 축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성도들이 문을 향해 돌아서고 그 뒤에서 축도를 하는 교회도 있다고 합니다. 상징적인 것이죠. 삶의 자리를 향해 축도를 하는 것입니다.

다시유에 있을 때 상훈형님의 제안으로 마치는 시간이면 청파교회의 디아스포라 기도문을 나누었습니다. 기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도자/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평안히 돌아가십시오. 복음의 말씀을 들었으니 참 자유인답게 사십시오.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기다리며 사십시오. 응답하실 주님을 믿으며 밝고 기쁘게 사십시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는 이 땅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응답이 되어 사십시오.

다같이/ 아멘, 주님의 응답을 확신하지 못하고 의심하고 불안해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주님을 신뢰하겠습니다. 약속을 이루실 주님을 믿으며 기쁘게 살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많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응답이 되어 살겠습니다. 주님 우리의 동행이 되어 주십시오. 아멘

우리의 삶의 자리, 보냄받은 삶, 산 아래의 삶을 두고 기도하는 것이지요.

예배의 구심력과 삶의 원심력을 살아내는 맑은물이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함께 모이고, 삶을 향해 나아가는 맑은물이길 바랍니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삶의 현장, 가정과, 일터와, 삶터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반영하고 드러내는 우리의 삶이길 바랍니다.

산 위로 함께 오르고, 산 아래로 흩어지는 맑은물이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