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 시험. 예수님.
본문
Celebration

설날
설날 가족들과 함께 정겨운 시간을 보내셨나요? 상대적으로 짧은 연휴라 아쉽지만 가족의 사랑과 정이 우리 삶에 힘과 용기를 주는 시간이었기를 바랍니다.
사순절
설날을 마무리하며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수요일 설날 연휴를 마무리하는 날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주일을 뺀 40일을 사순절로 지키고 보냅니다. 사순절. 사순절 했지만 정작 큰 의미와 방향이 없이 흘려보낸것 같습니다. 이번 사순절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진지하게 묵상하며, 예수님이 우리의 존재와 삶에 새겨지는 시간이길 바랍니다. 또한 우리의 영성이 깊어지고 투명해지고 활기차지는 시간으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순절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밴드 성서일과 묵상글에 함께 실어 놓았습니다. 참고해서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사순절 기간동안 하나복에서 잘 준비한 탄소금식에 함께 동참합니다. 매주 올라오는 영상과 매일 카드뉴스를 통해서 탐욕과 편리함을 좇아 살던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불편하지만 함께 더불어 공생하는 삶으로 전환하는 기회로 삼길 바랍니다. 내가 할 수 있는 탄소금식은 어떤 것이 있는지, 그리고 함께 참고하고 동참할만한 탄소금식 캠페인이 있다면 밴드 덧글을 통해 함께 참여를 유도하고 더불어 만들어가는 사순절 탄소금식 훈련이 되길 바랍니다.
잠간 나누어 봅시다.
내 삶에 광야와 같은 순간은 언제였는지? 광야의 자리에서 나는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그 광야 기간을 통해 배운 것은 무엇인지? 하나님은 나의 광야에서 어떻게 함께 하셨는지?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설화체 본문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방법이 있지요? 6하원칙에 따라서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언제?
언제?/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언제 일어났나요?
본문에는 특별한 단서가 없습니다. 1절에 “그 즈음에…”로 시작합니다. 그 즈음은 언제일까요? 마태복음 전체에서는 예수님이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려는 초반부로 보입니다. 그리고 전문맥을 살피면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난 뒤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이제막 요한의 세례를 받으시고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공생애를 시작하려는 전환기였습니다. 요한의 세례 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에게 임했습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기뻐한다.”는 음성이 들립니다.
마치 아주 공개적으로 이분이 메시야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분으로 공개적으로 선포됩니다. 성령께서는 아들 예수님에게 임하고, 하나님의 메시지와 사랑을 전하십니다.
이제막 메시야 예수님의 이야기가 펼쳐지려고하는 시작의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받고 기뻐하는 아들로서, 메시아로서 예수님의 존재와 사역은 어떻게 펼쳐질까요? 예수님은 정말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사랑받는 아들로서 메시아의 일을 감당하실까요?
예수님 사역의 초반의 이야기는 우리를 성경의 제일 처음 이야기로 데려갑니다. 성경을 펼치면 황량하고 공허한 가운데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람을 창조하시고 에덴 동산을 만드시고 그들을 에덴의 관리자로 온 우주의 청지기로 세우십니다. 무언가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될 것 같습니다. 인류의 대표자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사랑의 관계 안에서 에덴을 아름답고 평화롭고 진실되게 가꾸어 갈까요?
우리가 알다시피 첫 인류의 이야기는 비참한 실패로 마감을 합니다. 오늘 성서일과의 병행본문인 창세기의 이야기는 그 과정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기 보다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고 자기 스스로 독립적인 존재가 되려고 합니다. 이러한 시도는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이끌었고 에덴에서 쫓겨나 하나님과 자신과 이웃과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아가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시험을 어떻게 대면하실까요? 우리는 이미 결말을 알고 이 이야기를 만나고 있지만 처음 접하는 마음으로 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이 무엇이고 예수님이 이 시험을 어떻게 통과하고 계신지를 살펴봅시다.
로마서는 첫 인류와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을 연결짓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 아래 놓이게 되었지만,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으로, 은혜 아래 생명을 얻게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로마서는 예수님의 전생애를 걸친 순종이 우리의 생과 사, 우리의 운명을 좌우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시험받으신 이야기가 오늘 우리의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듯 여겨집니다. 하지만 로마서는 예수님의 시험에서의 승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가져다 주었고,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선언합니다.
예수님은 사십일을 금식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시장하셨다.”로 간략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단순히 배고픈 상태가 아니라 40일을 금식한 상황에서 생존이 걸린 배고픔, 굶주림을 느끼셨습니다. 어떻게 40일을 금식할 수 있을까요? 아니 40일을 금식하면 어떤 상태일까요? A.I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인간의 몸이 40일 동안 음식을 끊으면 급격한 생존 기제의 변화를 겪습니다.
1단계 (글리코겐 고갈): 간과 근육에 저장된 에너지를 먼저 사용합니다. (약 1~2일)
2단계 (케토시스, Ketosis): 지방을 태워 에너지를 만듭니다. 이때 뇌는 비상사태를 선포하며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집니다.
3단계 (단백질 이화작용): 지방마저 고갈되면 몸은 근육과 장기 조직(단백질)을 태우기 시작합니다.
4단계 (한계점): 40일쯤 되면 체내 모든 저장분이 바닥나고, 생명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기능만 남습니다. **"시장하셨다"**는 표현은 바로 이 죽음의 문턱에 서 계셨음을 의미합니다.
몸의 육체의 한계의 끝까지 간 상태입니다. 정신은 온전할까요? 육체가 쇠약해지면 정신과 정서 또한 아주 극한 상황에서 제대로 기능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겪는 허기와 결핍과 고통의 한계치를 직접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치트키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니깐 당연한 것이 아니라 사람 예수님은 스스로 배고픈자가 되심으로 빵 한 조각에 생존이 걸린 우리 인간의 고통을 당신의 몸에 새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겪는 모든 시험을 이해하시고 함께 하시고 우리가 겪는 시험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40일 금식은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40년 동안 먹을 것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극단적인 ‘배고픔’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함으로 이스라엘 광야 40년의 실패를 되돌리십니다.
예수님이 시험받으신 이야기가 일어난 때는… 언제가 의미하는 것은… 인류의 실패와 인간의 결핍의 한계가 만나는 때입니다. 첫 인류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이스라엘은 실패를 거듭했지만 예수님은 그 실패를 승리로 바꾸시고 우리에게 죄로부터 해방과 생명과 의를 선물해주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시험을 통과하고 승리하는 길을 배우고 나아갑니다.
어디서?
어디서/ 어디에서 이 사건이 일어났나요?
언제를 살피는데만도 시간이 많이 흘렀네요. 아직 5가지나 남았는데… 아무튼 가봅시다.
이사건은 광야에서 일어납니다. 그런데 광야로 이끄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광야에 대해서도 할말이 참 많습니다. 다 설명하면 길어지기에 요점만 이야기하자면 광야는 결핍의 장소이지만 또한 하나님이 일하시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이 안계신 것 같은 자리이지만 하나님이 분명히 역사하는 자리입니다.
성경은 텅빈 광야같은 공간에 창조의 생명을 불어넣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실패한 모세가 살았던 곳이 광야이고, 사라의 핍박을 받아 하갈이 도망친 장소도 광야입니다. 사울의 모진 학대를 받아 다윗이 도망쳐 살았던 장소도 광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광야에서 모세를 만나시고, 하갈을 돌보셨습니다. 다윗 또한 광야의 도망자 생활중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와 걸었던 길이 광야의 길이고 그 광야의 길에서 하나님은 이들과 함께 하시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과 함께 걷는 법을 훈련하셨습니다.
성경에서 광야는 지리적으로 결핍의 장소입니다. 모든 것이 단절되고 하나님 마저도 단절된 것 같은 장소입니다. 그러나 광야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장소이고, 하나님이 먹이시고, 돌보시고, 훈련하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이 장소는 진실이 드러나고 신앙을 연단하는 영적 시험의 장소입니다. 결핍의 순간에 내가 정말로 의지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나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인지? 내 삶의 방향과 뜻이 무엇인지 드러나고 나타나는 장소입니다.
빵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는 진리를 시험받고 훈련하는 자리입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증명해야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진리를 붙드는 자리입니다. 자기배를 섬기고, 돈과 명예와 권력을 숭배하라는 세상에서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충성을 맹세하는 자리입니다.
우리 인생에 광야와 같은 순간이 있습니다. 그런 자리가 있습니다. 뜻대로 되는 일이 없고, 내가 의지하고 기댈 곳, 사람이 없고, 하나님 마저 나를 버린 것 같은 자리가 있습니다. 정말 고독하게 세상에 덩그러니 혼자 인 것 같은 자리가 있습니다. 혼란스럽고, 무얼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고, 아무것도, 어느 누구도 의지할 수 없는 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우리의 본질이 드러나고 나타나는 자리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내가 의지하고 신뢰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무엇을 추구하고 누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하는지가 드러나고 나타나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돌보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안계신 것 같은데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광야 같은 자리에 우리를 찾아와 만나시고, 일으켜세우시고, 돌보시고, 훈련시키십니다.
광야는 고독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광야는 결핍 가운데 돌보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자리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이 나를 빚으시는 자리입니다.
누가?
누가…/ 등장인물은 누구인가요?
예수님과 악마와 성령이 등장합니다. 세례시에 임하셨던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이끄십니다. 광야의 시간도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습니다. 광야의 시간, 시험의 자리는 우연히 아무 이유없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 알 수 없지만 고통스러운 시간들 순간들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음을 신뢰할 때, 광야의 시간들을 버티고 지나갈 힘과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무엇을,어떻게,왜?
무엇을… 어떻게… 왜…?/ 무슨 일이 어떻게 왜 일어났나요?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돌이 떡이 되게 하라는 먹는 것의 시험. 높은 곳에서도 떨어져도 하나님이 받아주실거야라는 안전의 시험. 내게 절하면 천하를 주겠다는 권력과 명예의 시험.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려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시험을 받으셔야 했을까요? 앞서 살펴본 로마서의 문맥과, 마태복음이 예수님에 대해 제시하는 이미지를 통해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의 문맥에서 보면 첫 아담의 실패를 되돌리는 두번째 아담의 승리입니다. 첫 아담이 실패한 자리에서 다시 시작함으로써, 인류의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는 새인류의 시작이 되셨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 묘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40일 금식 후 시험받으시는 이야기는 광야 40년의 실패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되돌리는 참 이스라엘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내용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메시야 통치는 악마가 제시하는 힘과 경제적 풍요와 기적적인 쇼를 통한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하고 사랑받는 아들의 방식인 고난과 순종과 자기희생의 십자가를 통한 방식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겪는 허기짐, 결핍, 고통을 고스란히 감당하고 겪으심으로 우리의 시험을 이해하시고 공감하시며 우리의 시험의 현장에 함께 하셔서 승리로 이끄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험받으심의 이유는 우리가 실패한 그 자리에서 승리하기 위함이며, 우리가 겪는 시험의 자리에서 우리의 손을 잡아주기 위함입니다.
악마의 첫번째 시험은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떡을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악마는 40일 동안 굶주린 배고픔의 한계에 다달은 예수님을 향해 묻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왜 그렇게 굶주리고 있느냐?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라면서 왜 도대체 이런 곳에서 쪽팔리게 굶고 있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배고픈거 하나 해결하지 못하느냐? 왜 니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느냐? 돌로 빵을 만들 수 있지 않느냐?”
악마는 예수님의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뢰를 흔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신뢰하고 바라보는 예수님에게 스스로 니 문제를 해결하라고 부추기고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맡길 수 있느냐는 시험입니다.
예수님은 대답합니다. 사람이 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빵으로 살지 않고 말씀으로 산다가 아니라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 사람은 빵을 넘어서는 더큰 이야기 말씀이 필요하다. 빵보다 말씀이 먼저다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생존보다 더 큰 목적이 필요합니다. 풍요의 시대를 삽니다. 그러나 먹을 것이 넘쳐나는 풍요의 시대이지만 인간의 존재 이유와 삶의 이유가 빈약해졌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사람은 빵으로 생존하지만, 진정으로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이야기, 무엇보다 말씀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무엇인지? 사람은 어디에서와서 어디로 가는지? 사람의 삶의 이유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하나님의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삶의 이유와 의미와 목적과 방향을 발견합니다. 빵이 우리 육체의 생명을 보존해줄지는 몰라도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생존보다 말씀이 먼저입니다. 저에게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생존이 걸린 문제 앞에서 빵보다 말씀을 먼저 선택하는 것은 생명을 걸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40일을 굶은 극한의 상황에서 빵보다는 말씀을 붙들기로,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돌보심을 신뢰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말씀이 육신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말씀이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십니다.
그러니 말씀을 붙잡읍시다. 그 말씀 앞에 섭시다. 지금 당장의 생존보다 말씀이 더 소중하다는 우리의 고백이 매일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 말씀으로 살아내는 우리의 삶이되길 바랍니다. 반복해서 이야기하잖아요! 주중 반복되는 성서일과 묵상/ 성경을 통으로 읽기/ 말씀을 내가 읽지만 말씀이 나를 읽고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삶을 살아가는 맑은물이길 바랍니다.
악마의 두번째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니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번에는 교묘하게 하나님의 돌보심과 지켜주심의 시편 말씀을 인용하며 봐라… 하나님이 정말로 너를 사랑하신다면 니가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게 보호해주실 것이다. 그것을 증명해보여라고 시험합니다. 예수님이 악마의 시험에 말씀으로 물리치니 교묘하게 말씀을 자기중심으로 읽고 해석하도록 비꼬아서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듯 하지만 교묘하게 하나님을 조정하려는 유혹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안전과 보호와 요구를 위해 움직이게 하려는 기만행위입니다. 상대방을 조작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가스라이팅과 같은 것이죠.
하나님을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는 요술램프 지니나 자신의 안전만을 책임지는 보디가드 정도로 만드는 행위입니다. 예수 믿으면 복받고, 예수 믿으면 성공하고, 예수 믿으면 건강하고 잘된다는 신화입니다.
예수님은 악마의 교묘한 뒤틀기를 간파하시고 말씀하십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나님은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분은 맞지만 그렇다고해서 내가 하나님을 부리거나 하나님을 조정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들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고 그분의 때를 기다리는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천상이 군대를 동원해 자신을 비웃고 십자가에 못박은 무리들을 쓸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고 인내하며 아버지의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삼일 밤이 지나자 아버지의 때에 예수님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부활의 몸을 입고 승리의 왕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악마는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온 천하는 보여주며 나에게 절하면 이 모든 세상을 주겠다고 제시합니다. 왕이 되는 길. 권력과 권위를 보여주며 힘을 숭배하고, 명예를 추구하고, 지배를 통한 통치의 길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은 왕이요 통치자로 오셨습니다. 즉 이 시험은 어떤 왕이 될 것인가?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에 대한 시험입니다. 힘과 효율과 지배의 왕이 될 것인지? 자기희생과 고난과 죽음을 통한 사랑의 왕이 될 것인지?의 시험입니다.
누구나 어렵고 고달픈 길을 피하고 싶습니다. 편하고 쉬운 꽃길을 걷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통치는 고난과 죽음을 통해 오는 부활과 생명의 역설적인 통치입니다.
예수님의 악마의 시험에 단호하게 대처하십니다. 이제까지 말씀을 통해 악마의 시험을 이겨오신 주님은 악마에게 “사탄아 떠나가라” 우리말로 번역하면… 꺼지라!!!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분만을 섬겨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악마의 제안이 달콤하지만 그것이 완전히 악마적인 것임을 아십니다. 예수님이 오신 본질적인 이유와 목적을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베드로가 완강히 거부하고 막아섰을 때에도 ‘사단에 내 뒤로 물러나라’고 단호하게 거절하셨고, 십자가를 눈 앞에 둔 겟세마네에서 땀방울이 핏발울이 되도록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이기기 힘들었던 달콤하고 유혹적이었기에 예수님은 단호하게 거절하고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권력과 생명을 포기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제자들을 뒤집힌 하나님나라의 통치로 초대하셨습니다. 원수를 이기는 방법이 원수를 짓밟고 올라서는 것이 아니라 원수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오히려 용서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자신을 철절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림으로 자신을 내어놓고 십자가를 향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나라의 통치를 드러내시고 메시아로 왕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우리의 광야와 시험
오늘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혼자서 겪은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들려주시고 제자들은 이를 기억하고 복음서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이 이 이야기를 들려주셨을까요? 바로 제자들도 동일한 시험에 직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매일의 삶은,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내가 누구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고 어떤 이야기에 의해 살아가는지?를 시험하는 시험대입니다. 매일 나는 빵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존재임을… 하나님을 이용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대로 사는 존재임을… 힘에 의한 지배와 효율을 추구하는 편하고 자기중심적인 세속의 가치가 아니라 자기 희생과 자기 내어줌의 용서와 십자가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존재임을… 말하고 드러내고 살아내고 증거하는 삶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랑받는 자녀임을 깍아 내리는 이야기들 목소리들은 어떤것이 있을까요? 끊임없이 생존이 먼저라고 빵이 먼저라고 빵을 위해 살라고 이야기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그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하는 나의 삶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히 뒤틀어서 아전인수겪으로 해석하고, 나의 욕망과 안전욕구를 위해 하나님과 거래하고 이용하려는 숨은 동기는 어떤 것일까요? 나의 욕망과 하나님의 뜻이 부딪히는 삶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 그 경계의 자리에서 우리는 누구의 이야기, 어떤 삶의 방향을 잡고 살아가고 있을까요?
내 삶의 가장 달콤한 유혹은 무엇일까요? 힘의 지배, 돈의 힘, 자존심, 효율과 편리와 합리성이 십자가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십자가 없이 부활이 없고, 자기 내어줌과 희생의 길을 거부하고 있는 삶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다시 예수님 앞에 나아갑시다. 예수님이 이기신 시험을 묵상하고 바라봅시다. 예수님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