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한 밤의 대화

본문

Celeb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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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교회가 진행하는 예배가 각 가정교회의 특색이 잘 드러나서 참 좋습니다. 다음 4월에 하루가정교회가 진행하는 예배가 기대됩니다.

신앙은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며 신앙하는 것이고, 정주하고 머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길을 따라 나서는 여정입니다. 질문은 불신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찾고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은 어느 곳에 다다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새로운 길을 나서는 것입니다. 

경계사고 여행사고

예전에 하창완목사님께서 제자훈련할 때 필독서로 읽은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온다’라는 책의 저자 브라이언 맥라렌이 제시한 그림이 있습니다. 하나는 경계사고고 다른 하나는 여행사고있습니다. 경계사고는 신앙을 벽이나 울타리로 이해를 합니다. 이 패러다임의 핵심은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소속되었는가? 어떤교단인가? 잘 출석하고 있는가? 교리의 정확성, 구원의 확신등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여행사고는 신앙을 벽이나 울타리가 아니라 길로 이해를 하고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이 패러다임의 핵심은 방향입니다. 나의 삶의 중심과 방향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예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말씀을 따라 사는가?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걸아가는가?가 중요한 이슈입니다.

경계사고는 교리등을 강조하며 출신과 소속을 중요시하고 우리편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고 정죄하고 배제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반면 여행사고는 삶과 열매를 강조하고 삶에서의 변화를 중요시하며 서로를 향한 동료의식과 타자를 향한 환대의 태도를 보입니다.

두사고의 장단점이 있겠으나 오늘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오늘 한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는 경계사고의 세상에서 여행사고의 세계로 옮겨오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일어나는 일들에서 무언가 다른 것을 느낀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와 묻습니다. 질문을 던지는 것이지요. 여기서부터 어쩌면 그의 여행은 시작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을 서술해가면서 이 니고데모의 여행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3장에서 경계사고 안에 갇혀 있던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 진지한 신앙의 질문을 던집니다. 
7장으로 가면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변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절차적 정당성을 이야기하며 동료들로부터 “당신도 갈릴리 사람이오?”, “당신도 한패요?”라는 말을 듣습니다. 
요한복음의 마지막부분인 19장으로 가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장사하는 니고데모가 등장합니다. 7장도 그렇고 19장도 그렇고 니고데모를 소개하면서 “전에 예수를 밤중에 찾아갔던”인물로 소개합니다.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백근 쯤 가져가서 예수님의 죽음을 정성스럽게 장례합니다. 이런 니고데모의 여정을 살펴보면 그가 경계 안에 갇힌 사람에서 경계를 허물고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서는 순례자로 변화하는 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어쩌면 우리에게 니고데모를 질문하며 답을 찾아가는 신앙으로, 예수님과 함께 길을 떠나는 순례자로 소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순절을 보내는 오늘 우리에게 니고데모와 성서일과의 말씀은 경계 안에 머물며 안주하지말고 질문하고 답을 찾아 나서며 예수님의 길을 따라 나서라고 우리를 등떠미는 것 같습니다. 

니고데모

요한은 니고데모를 1절에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바리새파 사람 가운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대 사람의 한 지도자였다. 
이름은 니고데모입니다. 니고데모의 이름의 뜻은 백성의 정복자. 백성 중에 승리자라는 의미를 가졌습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니고데모는 인생에서 정점에 오른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가 속한 바리새파는 엄격한 율법의 준수를 강조하고 실천하는 사람이었었습니다. 
유대 사람의 한 지도자는 ‘산헤드린 공회원’으로 많이들 해석합니다. 당시 유대사회의 입법, 사법, 행정을 관장하는 최고 의결기관이었고 71명으로 구성이 되었습니다. 그 71명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경계 안에 최고의 정점에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율법의 가치와 체계를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정통과 율법의 수고하고 지키는 파수꾼이었습니다. 누가 정통인지, 출신이 어떤지, 율법을 잘 따르고 지키는지가 중요했고, 그 경계의 ‘선’을 구분짓고 지키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습니다. 누가 선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누가 선을 넘는지?… 그에게 신앙은 선을 긋는 것이었습니다. 죄인과 의인을 구분짓고 정죄하고 배제하는 것이 당연한 삶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경계 안에서 그는 성공한 인물이었고,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존경받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스스로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하고,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경게 안의 니고데모는 안전하고 부족함이 없고 자부심이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니고데모에게 경계 밖 위험인물인 예수님이 보여지고 들려옵니다. 그는 경계를 넘나들고 세리와 죄인들과 친구가 되고, 그를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 같고,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쌓아둔 경계를 무시하고 선을 넘나드는 무례하고 위험한 인물인 것 같은데…, 율법을 깨뜨리는데 거기에 언약의 성취가 있고, 경계를 허무는데 거기에 사랑이 있고, 선을 넘나다는데 거기에 생명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 안에서 무언가 다른 것을 느끼고 경험한 것 같습니다. 그의 표현대로 하자면 경계 밖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 같은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니고데모와의 대화

그래서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몰래 찾아옵니다. 낮에는 사람들의 이목이 있기 때문에 밤 중에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서 예수님에게 나아옵니다. 니고데모의 입장에서는 그가 이제껏 중요시했던 경계를 벗어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을 빛으로 소개하고 있는 요한복음의 맥락에서보면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이야기는 어둠에 속했던 니고데모가 빛이신 예수님 앞에 나아온 사건입니다. 그는 어둠에서 빛으로, 경계 안에서 경계 밖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교양있고 사회의 명망있는 지도층의 사람인지라 예수님에게 예의를 갖추어 다가갑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삶과 하시는 일을 보니 하나님이 보내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 인사말에 예수님은 이야기의 본질로 바로 직행하십니다. 니고데모의 고민과 질문의 중심으로 바로 들어가십니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어쩌면 지금 니고데모의 상황을 이야기 해주는 것 같습니다. 니고데모님! 당신이 나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보고 있군요! 그런데 정말로 하나님나라를 보고 만나고 경험하려면 다시 나야합니다!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위로부터 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를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여기서 다시 태어난다는 것, 거듭남이란 무엇일까요?
니고데모도 이 단어에서 오해를 일으켜서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느냐?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나가 나올 수 없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 
여기 ‘다시’로 사용된 헬라어 Anothen(아노덴)은 두 가지 의미가 중첩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시간적인 의미로 again 다시. 두번째로 태어나다라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충분히 오해할만한 지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공간적인 의미로 From abobe로 하늘로부터, 위로부터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의도하신 부분입니다. 하늘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이후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영에서 난 것은 영이다.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고 이야기하는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위로부터, 하늘로부터 태어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의 주체, 거듭남의 실체, 거듭남의 기원은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고, 육이 아니라 영에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성취하고 쌓아둔 경계 안에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구원이 있습니다. 거듭나는 것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길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가는 것으로 착각했던 니고데모는 거듭남을 사람의 행위, 땅의 것, 육의 실천으로 오해 합니다. 교리를 얼마나 잘 이해하는지? 어떤 교회에 출석하고, 신앙의 년수가 얼마나 되었는지? 나는 저들보나 낫지 않은가?라는 경계 안에 머뭅니다.

경계 안에 머무는 신앙은 하나님의 일을, 하늘의 일을 상상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놋뱀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광야에서 놋뱀이 들렸듯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경계 안에 머무는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경계 안에 하나님을 가두어버립니다.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어다는 반대자로 서게 만듭니다.

다시라는 아노덴의 의미를 시간의 개념으로 오해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공간의 의미를 설명해주십니다. again이 아니라 from abobe의 의미를 말씀해주십니다. 어머니의 뱃속이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나야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물은 세례를 의미하고 성령은 하나님의 영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요한이 베푸는 회개의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셨을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는 것을 보았듯이 우리는 물의 세례를 통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과거, 육적인, 세속적인 삶의 가치에 대해 죽음을 선포하고, 예수님과 함께 일으켜져 새로운 생명, 영적인 생명, 하늘로부터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께서 이 모든 과정에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새로운 생명과 삶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사람의 결핍된 자원이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초월자이신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일어나는 역사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통치의 개념입니다.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삶의 방향과 삶의 태도와 삶의 이유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나라의 통치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나라의 삶을 삽니다. 단순히 규칙을 지키고, 율법의 이해를 넘어서서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따라 자신의 경계를 넘어서서 예수님 처럼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삼위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삽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니고데모는 한순간에 다 깨달아 알았을까요? 아마도 큰 혼란과 더 큰 질문을 안고 돌아갔을 것 같습니다. 그 후로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더 자세히, 더 유심히 지켜보고 예수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서 예수님이 하신 이야기를 곱씹어 보지 않았을까요?

구약의 놋뱀이 예수님을 의미하고, 메시야가 십자가에 비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하고, 그를 통해 온 우주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점차점차 이해하고 알아가지 않았을까요?

그러면서 점차 자신의 경계를 벗어나 예수님과 함께 길을 떠나는 순례자로 나아가지 않았을까요?

순례로의 초대

교회력과 사순절은 우리를 예수님이 가신 길 위로 초대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예수님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예수님의 길이 어떠한지? 우리에게 묻고 찾고 발견하라고 초대합니다.

자기한계를 가진 피조물인 우리는 언제나 경계 안에 머물려합니다. 안정과 보호와 자기만족이라는 경계 안에 머물려고 합니다. 이 경계가 직업이 될 수 있고, 가족이 될 수 있고, 자기 중심성이 될 수 있고, 자신이 성취해온 신앙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기를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거듭나야한다. 근원적으로 중심이 삶의 방향이 존재의 이유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니고데모처럼 예수님 앞에 나아갑시다. 그 분 앞에 나아가 내가가진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봅시다.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예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시다. 내 삶에 그분의 말씀이 그분의 인격과 삶이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내어 맡겨봅시다. 니고데모의 신앙의 여정처럼 고민하고 갈등하며 경계 안에 머뭇거리던 우리의 신앙과 삶이 예수님을 향해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나아가는 순례자의 신앙과 삶으로 나타나길 소망합니다.

들은 말씀을 가지고 기도합시다. 
니고데모처럼 예수님 앞에 머물러봅시다.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분의 눈을 바라봅시다. 내가 쌓아올린 경계는 무엇이고 그 경계를 넘어 나아오라는 주님의 말씀은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삶, 하나님나라의 삶을 향해 내가 예수님을 따라 나아가야할 길은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 길을 따라나서는 삶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