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의 자리에서 만나는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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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ration

평화와 평등
이란 땅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속히 종결되고 평화가 찾아오길 기도합니다. 뉴스와 언론에서는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전쟁용 무기와 AI, 그리고 주가가 강조됩니다. 초등학교가 폭격당하고 여자 어린이 165명을 포함해 최소 175명이 희생당했습니다. 아랍지역을 여행하다 극적으로 귀국한 사람들은 공포 그 자체였다고 합니다. 이 땅에 전쟁과 폭력이 그치고 참된 평화가 찾아오길 기도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평화의 행동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세계 여성의 날입니다. 서로가 억압하지 않고 평등한 관계 속에 평화의 길을 걷는 사회와 공동체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애쓰는 우리이길 바랍니다.
결핍
우리는 모두 결핍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내면의 채워지지 않은 갈증과 외부적으로 부족한 삶의 자원의 결핍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습니다. 결핍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과 태도는 우리 삶을 바라보는 태도와 삶 자체에 깊은 영향을 미칩니다.
결핍의 종류와 원인들은 다양합니다. 정서적 결핍으로 인한 외로움과 인정욕구와 관계의 갈망이 있습니다. 삶에 필요한 재화의 결핍으로 인해 경제적인 어려움과 그로부터 기인하는 두려움과 염려와 조급함이 따라옵니다. 성과중심의 사회와 경쟁이 과도한 사회에 살면서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하며 우리는 늘 부족한 존재로 여겨집니다.
결핍을 겪으며 우리에게 나타나는 양상도 다양합니다. 내면의 빈 공간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 합니다. 소비주의와 만나면서 끊임없는 소비로 내면의 공허함을 채우려 합니다. 정보화 사회 SNS가 발달하면서 소셜네트웍 관계망 안에 좋아요와 하트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이 과하게 나타나면 삶의 중독현상으로 나타나기도합니다. 소비와 성취는 어느정도 만족을 가져다 주지만 근원적인 만족이 아니라 일시적일 뿐입니다. 그래서 더큰 자극과 만족을 추구하다보니 끝내 중독에 이르고 맙니다.
내면의 결핍은 타인의 인정과 사랑과 관계에 의존하게 합니다. 사랑받지 못한 내면의 자아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칭찬과 인정에 목말라하고 나의 행동의 이유가 됩니다. 때로는 주변 사람과 상황을 통제함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감추려 합니다. 상대방의 나의 결핍을 채워주길 기대하며 의존관계에 빠지기도 하고, 상처받을 것이 두려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관계를 회비합니다.
이런 결핍이 채워지지 않으면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지 않는 누군가를 향해 비난하고 공격하고 희생양을 삼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보호하고 결핍의 정당성을 찾으려 합니다.
묵상하기
내가 가진 결핍은 어떤 것이 있는지? 정서적으로 물질적으로 어떤 결핍이 있는지 살펴봅시다. 이런 결핍에 대해서 나는 어떻게 반응해왔는지, 지금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회피, 중독, 공격(비난과 냉소), 대체, 의존
결핍의 근원적인 원인
성경은 사람을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피조물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스스로 하나님을 떠났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참된 만족과 안식과 자유와 평화와 기쁨이 있는데 그 근원적인 사랑으로부터 떠난 존재가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결핍된 존재입니다. 존재의 근원을 떠난 인간은 결핍을 겪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발견하기 까지 내 안에 안식이 없다”고 어거스틴이 고백록에서 고백하듯이 결핍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존을 보여주는 무엇입니다.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보여주는 것이 결핍이고 그래서 존재의 근원을 갈망하고 찾는 인간이 결핍을 다른 무언가로 채우려하는 모습은 인간의 실존을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결핍된 인간은 밑이 깨어진 항아리와 같습니다. 그 항아리에 아무리 물을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않습니다. 깨어진 항아리는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이라는 호수에 잠길때 온전히 채워집니다.
예레미야 2장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참으로 나의 백성이 두 가지 악을 저질렀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린 것이고, 또 하나는, 전혀 물이 고이지 않는, 물이 새는 웅덩이를 파서, 그것을 샘으로 삼은 것이다.”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 근원이신 하나님을 찾지 않고 물이 전혀 고이지 않는, 물이 새는 웅덩이를 파서 샘으로 삼은 것이 어떻게 보면 결핍은 겪는 인간이 보여주는 모습을 잘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결핍은 한편으로 보면 고통입니다. 늘 부족한 무언가를 채워야하는 그러나 계속해서 결핍을 겪어야 하는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찾아오는 통로입니다. 결핍은 근원적 존재인 하나님을 인식하는 자리이고, 결핍된 인간을 향해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는 자리입니다.
묵상하기
내가 겪는 결핍의 자리에 하나님은 어떻게 자리하실까요? 하나님은 나에게 무어라 말씀하시고 어떻게 다가오실까요? 상상해봅시다.
결핍에 대한 반응
오늘 성서일과의 말씀에서 목마름이라는 결핍에 대해 두가지 반응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출애굽기 말씀은 광야에서 물이 없어 목말라했던 이스라엘 백성이 지도자 모세를 향한 원망과 비난이 결국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나타난 사건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 수가성 여인의 이야기는 사람의 눈을 피해 목마름을 채우려던 여인이 참된 생수이신 예수님을 발견하고 변화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원망과 비난 시험으로 반응했던 이스라엘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의 명령대로 광야를 이동중이었습니다. 르비딤이라는 곳에서 진을 쳤는데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단순히 마실물이 떨어진 상황을 넘어 생존을 위협하는 지경까지 이른 것 같습니다. 물의 결핍, 목마름의 결핍을 느낀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도자 모세를 향해 대들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대들었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리브(ריב)인데 법정에서 소송을 제기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단순히 투덜대고 원망했다는 표현을 넘어, 모세를 피고인석에 세워놓고 원인제공자로 범죄자로 삼고 희생자로 삼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갈증을 겪는 백성들이 보여주는 반응은 모세를 거의 죽일지경까지 몰아부쳤던 것 같습니다. 이후에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모세는 “이 백성을 제가 어떻게 해야합니까? 이들이 지금이라도 당장 저를 돌로 쳐 죽이려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결핍을 겪는 사람들의 거친 반응은 다른 사람을 탓하고, 타자를 향해 비난과 원망을 쏟아놓습니다. 결핍의 원인으로 삼고 그들을 희생양삼아서 분풀이를 하려고합니다. 그런다고 결핍이 해결되지 않는데 그렇게 함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세우고 결핍으로 인한 정서적 고통을 해소하려 합니다.
그런데 이런 백성들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단어가 있습니다. ‘시험’이라는 단어입니다. 모세는 자신을 향해 대들었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을 시험하십니까?”라고 반문하고 있고, 이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화자의 서술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가? 안 계시는가?”를 시험했다고 해서 그 이름을 맛사라고 불렀습니다.
르비딤이라는 지명이 다툼, 분쟁, 소송을 뜻하는 ‘므리바’와 시험, 유혹, 시련을 뜻하는 ‘맛사’라고 불린다고 하는 화자의 이야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물이 없는 결핍의 순간 하나님을 향해 원망과 비난을 쏟아냄으로 하나님을 의심하고 시험했습니다. 목마름의 결핍이 얼마나 컷으면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데려와서 광야에서 목말라 죽게 만드느냐며 그동안의 하나님의 돌보심과 은혜를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므리바 사건을 통해 이제껏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해방하시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함께 하시며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할 분으로 만들었습니다. 눈앞의 결핍 때문에 과거와 지금도 이어져 오는 하나님의 은혜와 돌보심을 부정하고 하나님과의 신뢰관계를 깨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의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겪는 결핍과 결핍으로 인한 고통이 커서 지금 내 결핍과 고통 속에 하나님이 안계신 것 같다고 여깁니다. 아무도 나의 결핍과 고통을 모른다고 생각하고 누군가를 향한 비난과 원망으로 결핍의 희생양을 삼습니다.
누군가를 탓하고 원망하고 비난하는 것은 흔히 우리가 하는 행동입니다. 주로 가까운 사람에게 나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리더와 윗사람을 향해 쏟아냅니다. 희생양 삼은 사람이 원인을 제공하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결핍으로 인한 고통의 분풀이를 상대방을 향해 쏟아냅니다. 비난과 원망을 통해 희생양을 삼으면 마음의 위안이 조금 될지는 모르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문제의 원인과 결핍은 그대로 입니다.
나의 방식과 나의 시간대에 채워지지 않은 결핍은 모든 상황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은혜에도 눈을 감게 만듭니다. 삶과 신앙에 대한 태도가 냉소적으로 변하기도 하고, 내 결핍이 크게 보여서 일상에 소소하게 찾아오는 기쁨과 은혜 조차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결핍에 대한 원망과 비난과 냉소적인 태도는 우리의 결핍을 바꿔놓치 못하고 결국 하나님의 은혜에 문을 닫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결핍의 밑바닥을 살아가던 여인
갈증으로 목마름을 느꼈던 수가성 여인은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는 한 낮에 우물을 찾습니다. 곁가지 이지만 지난 주 살펴보았던 니고데모와 유사점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움직였다는 것 외에는 정반대의 인물입니다. 이스라엘의 정점에 오른 남자, 이방인이면서 취약계층, 남편이 6명이나 있었던 여자, 밤과 낮이라는 시간대,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았지만 여인을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보면 요한복음의 구성이 참 재미있게 구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여인에 대해 남편이 5명째 남편을 둔, 그래서 결핍과 갈증으로 남편을 4번이나 갈아치운 자유분방한 이미지로 많이 비춰집니다. 하지만 당시 여자가 가지는 사회적 위치를 생각하면 5번이나 남편을 갈아치운 사람이 아니라, 5번이나 파혼을 당한 남자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여성은 사회적으로 취약계층에 속했고, 남자들에게 소유물의 일부였습니다. 이혼은 남자들에게만 있는 권리였고, 여자들에게는 이혼의 권리가 없었습니다. 여성은 스스로 재산권을 행사할 수 없었기에 생존을 위해 남자에게 속해 있어야 했습니다.
바닥 밑에 지하실이 있고 지하실 아래에 지옥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여인은 어쩌면 결핍의 밑바닥보다 더 아래의 삶을 살았을 것 같습니다. 결핍의 바닥을 살아가는 그녀는 누군가의 눈에 띌까 부끄러워하며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인적이 드문 한 낮에 물을 길러 나오는 삶을 살았습니다. 결핍으로 인한 상처를 더이상 드러내고 싶지 않아 잔뜩 웅크리고 사람들을 피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자신의 결핍의 근원을 알아주고 그 근원을 채워줄 무언가를 갈망했던 것 같습니다. 누구도 목마르지 않는 생수에 대한 이야기에 그 물을 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하고 있는 그녀의 요청과, 예배에 대한 이야기에서 참으로 예배하기를 갈망하고 있는 그녀의 이야기 속에서 가난하고 주린 한 영혼을 마주합니다.
반복된 결핍은 희망을 포기하게 하고,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를 피하고 회피하는 삶으로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공동체에 대한 기대와 사람에 대한 소망으로 시작했던 삶은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고 공동체는 허상에 불과하다고 여겨집니다. 애써봐야 소용없고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와 정서만 고갈될 뿐이라고 생각하며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자신만의 경계 안에 머물고 맙니다. 반복된 결핍은 자기 안에 구덩이를 만들고 그 안에 스스로 고립되게 합니다.
묵상하기 성서에 나오는 두 가지 이야기 속에서 나의 모습은 없는지 돌아봅시다.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모습/ 누군가를 원망하고 비난하고 희생양 삼으려 하지는 않았는지? 수가성 여인과 같은 모습/ 회피하고 숨고 웅크리고 고립을 자초하지 않았는지?
결핍의 자리에 찾아오시는 하나님
결핍은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참 고통스럽고 아리고 피하고 싶은 자리이지만 반대로 결핍은 우리에게 근원적 존재인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반증이며, 그래서 결핍은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일하시는 자리입니다.
로마서의 말씀은 우리가 약할 때에(6절), 경건하지 않을 때에(6절), 죄인이었을 때에(8절), 원수일 때에(10절) 그런 존재들을 위하여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선언합니다. 자격이 있어서, 실력이 있어서, 그럴만한 의로움이 있어서가 아니라 결핍된 존재이기 때문에 그 결핍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결핍된 존재 안에 그의 사랑이 우리 마음 속에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결핍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바 된 충만한 존재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나를 발견하고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는 결핍을 바라보는 결핍의 자리에서 삶을 살아가는 태도와 자세를 변화시킵니다.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은, 결핍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환난을 인내를 낳고 인내는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습니다. 결핍을 견디는 인내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단단한 인격과 결핍의 자리에서도 소망을 붙드는 삶으로 이끕니다. 결핍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비방하고 원망하기 보다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고 바라보며 소망 가운데 거합니다.
여전히 비난하고 원망하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하나님을 반석을 열어 물을 내십니다. 온유함의 최고봉이라고 했던 모세마저도 어쩔 수 없이 하나님께 어떻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두손 두발 다 들게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에게 목마름의 결핍을 채울 물을 내어주십니다. 연약할 때, 경건하지 않을 때, 죄인되었을 때, 원수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여전히 원망하고 비난하고 시험하는 이들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을 내어주시고 결핍을 채우시는 원망과 비난을 사랑으로 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결핍의 자리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에서 죽이려 하신다며 하나님을 시험하고 하나님보다 결핍을 더 크게 여겼던 이들에게 도리어 결핍의 자리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자리라고 반석에서 물어내어 목마름의 결핍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결핍의 자리 회피하고 웅크러들고 자기만의 경계로 숨어들어간 한 여인을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사마리아 땅을 통과하고 계시며 정오의 우물가를 찾는 여인을 기다리셨습니다. 목마름이라는 표면적 필요 이면에 근원적 갈증을 채워주실 생수의 근원으로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수가성 여인의 수치와 고립과 회피를 꾸짖거나 문제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이면에 숨은 근원적인 갈망과 갈증, 결핍을 찾아내시고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 근원적 결핍을 예수 안에서, 생수의 강에서 찾으라고 초대하십니다. 결핍의 자리는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자리입니다. 결핍의 자리는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일하시고 함께 하시고 회복하시는 자리입니다.
결핍의 자리에서 우리는
시편의 시인은 결핍의 자리에서 출애굽기의 사건을 인용하며 이스라엘 백성처럼 마음을 완고하게 굳히지 말자라고 요청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렇게 우리를 목마름에 내버려둘리가 없어!”하며 하나님의 음성도, 모세의 목소리도 듣지않고 마음이 굳어서 원망하고 비난하고 시험했습니다. 어쩌면 이들의 이런 태도는 불안과 두려움이 아니었을까요? 이대로 목마름이 이어진다면 죽을 것 같다는 두려움,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과 불안이 이스라엘 백성을 완고하고 굳어진 마음을 갖게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비난하고 시험하게 했습니다.
결핍의 자리는 고통스럽지만 우리에게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반증과 하나님이 일하시는 자리입니다. 결핍의 자리에서 우리는 표면적인 결핍의 내용이 아니라 결핍의 근원적 실체를 살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목마름은 하나님 부재에 대한 두려움이었고, 수가성 여인의 갈증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줄 존재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결핍을 만날 때 우리는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을 찾고 기다려야 합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단단한 인격을 단단한 인격은 소망을 낳는다고 했던 로마서의 말씀과 같이 결핍은 우리에게 그 결핍의 자리를 찾아와 우리의 근원적 필요를 채우시며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발견하고 경험하는 자리입니다.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이 이 결핍 가운데 어떻게 일하시고, 지금의 상황을 변화시켜 가시는지를 나를 어떻게 다듬고 형성해 가시는지를 발견하고 경험하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근원적 결핍을 채우시는 솟아나는 샘물이십니다. 반석을 쳐서 물을 내었다고 하는 출애굽기의 이야기에서 반석은 예수님의 깨어진 몸을 상징합니다. 야곱이 우물에서 잠간의 갈증을 해소하려 했던 수가성 여인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솟아나는 샘물이신 자신을 주셨습니다. 결핍된 존재, 약하고 경건치 못하고 죄인이며 원수인 존재를 충만하고 의롭고 정결하고 화목케된 존재로 변화시키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 안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바 되어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성령의 샘물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오늘 함께 부른 찬양은 이렇게 우리를 초대합니다. 괴로울 때, 힘이 없고 마음 약할 때 세상에서 시달릴 때,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 바라보라… 평화의 주, 능력의 주, 위로의 주, 사랑의 주님이 안식을 주시리라. 그러니 결핍의 자리에서 주님을 바라봅시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갑시다.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말고, 굳게 닫지 말고 마음을 열어 연약함 그대로, 결핍의 자리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갑시다.
사순절을 지납니다. 주님이 걸으신 결핍의 자리를 따라가봅시다. 결핍된 이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하시고 일하시는 주님을 만나봅시다. 우리의 결핍의 자리로 걸어들어오신 주님을 만나고 결핍의 길을 걷는 예수와 동행하고 십자가라는 무한한 결핍의 자리에 오르신 그 길을 마음에 새겨봅시다. 물동이를 들고 잔뜩 웅크린채 우물을 찾았던 수가성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뛰쳐 들어가 기쁨으로 예수님을 소개하고 증거했던 그 충만함과 평화와 기쁨이 우리 존재 깊은 곳에서 우렁우렁 일어나길 기대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