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겉모습을 넘어 중심으로

본문

Celebration

이미지1

우리의 눈은 우리를 자주 속입니다. 사실 눈이 속이는 것이 아니라 망막을 통해 비춰진 상을 해석하는 뇌의 정보처리 과정에서 왜곡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눈이 속인다기보다 뇌가 우리를 속인다는 말이 더 맞을 것입니다.

착시 현장이라고 하지요. 분명히 길이가 다른 것 같은데 알고보면 길이가 같습니다. 착시현상의 정의는 시각 정보를 뇌가 처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착각으로 사물의 실제 크기, 형태, 색깔 등을 다르게 인지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본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필터와 경험으로 재구성된 ‘해석’일 뿐입니다. 우리가 보는 가시적인 현상과 사물의 실체 사이에는 피할 수 없는 간극이 생깁니다.

그래서 내가 본 것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겸손함이 필요하고 내가 모를 수 있고 틀릴 수 있다는 성찰하는 마음과 의심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조금 더 확대하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사실과 다르게 나의 해석의 틀에서 타인을 평가하고 규정하거나 상대방의 의도와 마음과는 상관없이 나의 편견과 내 안의 잘못된 필터링으로 인해 생긴 오해와 착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방의 표정과 말 이면에 있는 생각과 의중을 물어야 하고, 대화를 통해 우리가 가진 해석의 틀들을 수정해 가야 합니다.

적절한 비유일지는 모르나. 시각장애인 코키리 만지기 처럼. 각자가 코끼리를 만지고 이해한 것을 바탕으로 이야기하고 종합적으로 코끼리를 알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 성서일과의 말씀은 우리가 정말로 제대로 보고 있는지? 우리가 본 것이 정확한 것인지?를 살펴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제대로 보고 있습니까?” 

외모가 아니라 중심

사무엘은 새로운 왕을 준비해놓았다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듣고 이새의 집으로 향합니다.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왕이 건재한데 다른 왕을 세우기 위해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역모에 해당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희생제물을 위함이라고 둘러대더라도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이새의 아들들 중에 아마도 다음 왕으로 세울 사람이 있었나 봅니다. 
첫째 엘리압을 보고 사무엘은 생각했습니다. 
‘주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시는 사람이 저 사람이구나’
사무엘이 이렇게 생각했던 이유가 그 뒤에 나오는 하나님의 음성에서 나타납니다. 
준수한 겉모습, 큰 키.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인 지도자 사무엘의 눈에도 그가 다음 왕이 될 상으로 보였습니다. 
엘리압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내 아버지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엘리압의 신앙적인 이름과 훌륭한 외모 덕분에 사무엘의 눈에는 엘리압이 왕이될 상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엘리압은 아니다. 사람들은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지만 나는 중심을 본다.’
사무엘이 두렵고 급한 마음에 엘리압의 겉모습을 보고 주님이 기름부으시는 사람으로 판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중심을 보신다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듣고는 사무엘의 시각도 바뀝니다. 
이새의 아들들이 지날 때마다 하나님께서 바로 말씀하셨는지는 잘 모르지만 이새의 아들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지날 때마다 사무엘은 그들의 중심을 보려고 애를 씁니다. 섣불리 이 사람이다라고 판단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을 가지고서 보려고 애를 쓰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니다. 
이새의 아들 7명이 다 지나도록 하나님의 응답이 없자 사무엘은 이새에게 묻습니다. 그러자 막내가 있다고 합니다. 막내 다윗이 등장하고
성경은 눈이 아름다고 외모도 준수하고 홍안의 소년이었다고 표현합니다. 
뭐야? 외모를 보네?라고도 읽을 수 있겠지만…
보통 성경에서 눈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지는 지혜와 성품, 영혼의 상태를 비추는 창을 의미했습니다. 어쩌면 다윗은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홍안은 얼굴빛이 붉다는 것인데, 발그레한 얼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기있고 건강한 혈색을 의미하고, 들판에서 양을 치며 햇빛에 그을린 강한 청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영혼의 맑음과 아름다움, 그리고 들에서 양을 지키는 신실한 중심을 보고 사무엘에게 “바로 이 사람이다. 어서 그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새의 집에서 막내로 형들 다 집에 있는데 들판에 나가 양을 치는 무시당하던 소년이 맑은 영혼을 가지고 생기넘치고 준비된 사람이었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두렵고 분주한 마음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당대 영적인 거장 사무엘의 시선도 하나님의 시각과 차이가 났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스펙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판단의 근거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스펙을 중요시하는 사회에 삽니다. 겉으로 보이는 성적과 능력과 소유와 출신과 연봉이 그 사람을 보여주는 시대에 삽니다. 스펙이라든 단어도 사물이나 물건에 붙이는 단어인데 사람에게 붙여서 사람을 상품처럼 대하기도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평가하는 사회에서 우리도 모르게 보이는 것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마음의 중심과 의향과 지향보다는 단편적인 행동과 말투와 겉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사람을 대하기도 합니다. 
신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의 가치와 중심을 무게있게 다루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외형으로 사람을 가볍게만 대하는게 우리의 모습은 아닐지 돌아봅니다.

중심을 보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겉으로 드러나는 스펙을 쌓으려 애쓰는 사회에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마음 중심이 아름답고 신실한 사람으로 나타나는 맑은물 가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회생활을 하고 이 사회에서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능력을 갖추고 외적인 조건을 갖추더라도 그것이 내 영혼의 무게를/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삶을/ 나의 생명을 좌지우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나의 중심을 살피는 삶을 사는 맑은물이길 바랍니다.

겉으로 드러나는게 다가 아닙니다. 사람마다 말못하는 사정과 이유가 다 있습니다. 사람마다 하나님을 향한 중심과 의향과 지향이 있습니다. 맑은물로 모이는 우리가 서로를 향해 겉모습으로 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서로를 중심으로 대하고 만나는 관계로 성장하고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을 봅니다.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었던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병이 고침을 받고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어 갑니다. 
‘본다’는 것을 하나의 은유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시각 장애인은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예수님을 통해 보게 되고, 그 뒤로 예수님을 진정으로 보게되는 변화의 과정을 겪습니다. 
반면에 시각장애인이었던 이를 심문하는 바리새인들은 보고 있었으나 그들의 봄이 오히려 방해가 되어 예수를 진정으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누가 참으로 보는 자일까요?
누가 진정으로 눈먼 자일까요?

요한은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시각장애인과 바리새인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보지 못합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본다고 자부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태도는 시각장애인은 조금씩 예수님에 대해 열린마음을 보입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어긴것으로 인해 예수님에 대해 죄인으로 낙인찍으며 다 아는 양 예수님을 배격합니다. 
시각장애인이 보게 된 기적에 대한 반응으로 시각장애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을 반응하는 반면, 바리새인들은 거부하고 정죄하고 비난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눈을 뜨게 된 시각장애인에게 이제 진정으로 보게 되었다고 선언하시고 바리새인들에 대해 보지못하고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있다”고 선언하십니다.

날 때부터 장애를 안고 살아갔던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점점 더 예수님을 알아가고 예수님을 빛으로 인자로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제일 처음 사람들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냐고 물었을 때 그는
“예수라는 사람이 진흙으로 개어 내 눈에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해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소.”라고 대답합니다. 처음에는 어떤 예수라는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을 들먹이며 당신 눈을 고쳐준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는 “예언자”라고 대답합니다. 
바리새인이 두번째로 예수는 듣보잡에다가 죄인이다며 강압적으로 그에게 심문하자 그는 예수를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는 회당에서 쫓겨나서 예수님을 다시 만난 자리에서 예수님을 인자로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날때부터 장애와 결핍을 안고 살았던 시각장애인은 예수님을 만나고 점점 예수님을 알아가며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자리까지 나아갑니다. 그의 장애와 결핍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보게되는 자리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은 제대로 알고 있고 제대로 보고 있고 온전하다고 생각했던 바리새인들은 그것때문에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들은 율법을 깨뜨리고 안식일에 병을 고친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낙인찍고 겉으로 드러나는 신분과 학파와 전통에 매여 예수님을 듣보잡 취급하며 예수를 제대로 보려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로 보고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도 바리새인들과 같이 이미 예수님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 각자의 지식과 판단, 전통과 교리에 갇혀서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내안에서 우리 사이에서 세상 가운데에서 일하시고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보지못하고 나의 경험과 지식과 전통과 교리에 예수님을 제한해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지난 번 설교 때에 여행사고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경계사고에 갇혀 있으면 그 경계 안에 나를 가두고 예수님을 가두어서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계속해서 여행하시는 예수님의 길을 방해하게 됩니다. 나의 알량한 경험과 지식으로 예수님을 다 아는 것처럼 여기며 더이상 예수님을 알려고도 만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신대원 시절 무한하신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 대해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내가 주먹만큼 하나님을 알게 되었을 때 하나님을 주먹만큼 모르게 됩니다. 내가 머리만큼 하나님을 알게 되었을 때, 머리크기만큼 하나님을 모르게 됩니다. 내가 큰 원을 그릴만큼 하나님을 알게 되었을 때, 그 큰 원 만큼 하나님을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무지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알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신앙이 규격화되고 단단한 반석 같이 세워지기도 하지만 신앙이 신비이고 그 신비 앞에 겸허하게 서게 됩니다. 
신앙이 단계를 밟아 어느 정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무한하신 하나님의 신비 앞에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과 길을 묻는 무지의 자리로 나아가고 은혜 안에 머물게 됩니다.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었던 이 사람은 예수님에 대한 고백과 확신이 점점 분명해지고 그의 고백에서도 점점 담대해지고 용기가 서려있습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예수라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다가 바리새인들에게 “여러분도 그의 제자가 되려는 것입니까?”라고 되묻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예수님 앞에서 엎드려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겸허하고 겸손한 모습도 보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삶에서도 이런 모습이 나타나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을 점점 더 분명하게 알아가는 맑은물이길 바랍니다. 사람들 앞에서 내가 만난 예수님에 대해 분명하고 용기있는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점점 더 예수님에 대한 이해와 고백이 깊어지고 분명해지길 바랍니다. 예수님 앞에서 겸손하게 엎드려 예수님을 더 깊이 더 온전히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알아가는 맑은물 가족이길 바랍니다. 

빛 가운데 살아갑시다.

성적, 출신학교, 다니는 직장, 사는 아파트, 타고다는 차, 연봉, 입는 옷과 핸드백, 인스타에 포스팅된 맛집, 여행, 경험들… 보이는 것,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전부이고 그것이 중요하고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시대에 삽니다.

우리도 이런 사회에 살면서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어느정도 충족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보이는 것에 의해 좌우되지 않습니다. 우리 영혼의 가치는 그보다 훨씬 깊고 넓고 높고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은 겉모습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사는 삶은 빛 가운데 사는 삶이며 선과 의와 진실을 지향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열고 그분을 알아가는 사람은 겉모습이 아니라 중심을 향하며 선과 의와 진실을 살아감으로 겉모습을 치중하며 살아가는 세상의 열매없음을 드러냅니다. 사람이 떡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며, 사람을 이용의 가치가 아니라 사람으로서의 가치로 대하며, 사람의 시선보다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삶을 삽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맑은물이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