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나무에서 시냇가에 심은 나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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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ration

가시나무
시인과 촌장이라는 그룹의 ‘가시나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하덕규씨의 자서전적인 노래인데요 가사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가시나무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숲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하덕규씨는 대중가수로서 정점에 이르렀지만 그의 내면은 극심한 허무와 외로움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약물에 의존하고 자살충동에 이르는 등 끝없는 절망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과거 허무와 절망에 빠져살았던 시절을 떠올리며 썼던 곡이 가시나무라는 곡입니다.
가시나무라는 곡이 그의 자서전적인 곡이어서 그런지 어쩌면 내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 같고, 우리의 심정을 잘 표현해주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친밀하게 지내고 싶은데 친밀함에 이르지 못하고 오히려 상처를 입히고, 상처를 받는 상황의 연속이 우리의 실존의 모습과 같습니다. 마치 고슴도치와 같이 서로 가까이하면 할 수록 서로의 가시가 서로를 찌르는 그래서 더이상 가까이 할 수 없어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하는 우리의 모습과 같습니다. 가장 사랑을 충만히 경험해야할 부부 사이에서, 부모와 자녀사이에서, 형제자매사이에서 우리는 서로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오해와 갈등과 상처로 사랑하지만 가까이 할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합니다. 예수님 몸인 교회의 비전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머리로 그리스도의 충만으로 세상 가운데 드러나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상처받을까봐, 손해입을까봐, 나만고생할까봐 한걸음 더 내디디기보다 서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주저주저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실존
주님 앞에 우리의 실존의 고백이고, 가장 사랑하는 이들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우리의 실존의 모습입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존재로 살아가고 싶으나 정작 사랑 앞에서 두려워하고 머뭇거리고 움추러드는 것이 우리의 실존의 모습입니다.
서로를 구속하지 않고 자유롭게 자기내어줌의 사랑의 극치가 삼위일체하나님의 신비로운 존재양식입니다. 사람은 그런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아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고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에덴에서 쫓겨난 사람은 이 사랑을 자기 안으로 굽어지게 하고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사랑의 감각은 있으나 온전한 사랑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사람의 실존이되었습니다.
우리는 진짜 나를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참된 나로 살아갈 수 있는데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사회가 부여한 나, 부모가 투영한 나, 남들처럼 되고 싶어하는 나로 인해 진짜 나로 살아가는 길을 잃었습니다.
생명의 근원, 사랑의 근원으로부터 끊어진 인간은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참된 삶이고 사랑인지를 잃어버렸습니다. 세상에 툭 던져진 것 같은 우리의 실존은 근원적인 불안을 안고 살아갑니다.
사람은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정작 그 자유가 주어졌을 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무한한 자유가 무한한 책임과 선택의 무게로 다가오기에 절망에 빠집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겉으로는 아무런 일 없는 듯 살아가지만 그 한 꺼풀을 벗기고 내면으로 들어가면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아픔과 외로움과 상처와 두려움과 절망을 안고 살아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나 아픕니다. 아픔의 차이가 있지만 누구나 아픔과 절망을 떠 안고 살아갑니다.
정부가 바뀌면서 조금씩 희망이 비춰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토대는 변함이 없습니다. 핵개인 시대가 주는 명암이 존재합니다.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해야하는 사회로 각자도생과 무한경쟁의 세상에 뒤쳐지면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노오려억! 할 수 있다!를 외치며 스스로를 끊임없이 채찍질하다가 ‘번아웃’하며 스스로 내일을 위해 오늘의 나를 착취하며 살아갑니다. 기술발전은 점점 가속화되고 2030년이 되면 90%의 일자리를 A.I와 로봇이 대체할 것이라는 전망은 점점 사람의 쓸모에 대한 질문을 남기고 노동과 사회로부터 ‘소외’를 부르고 오늘의 양식을 얻을 수 없다는 두려움을 남깁니다.
오늘 살만한가를 보여주는 지표가 자살율이고 앞으로 살만한가를 보여주는 지표가 출산율이라는 말이있습니다. 여전히 대한민국은 자살율 1위 국가이고 출산율도 전세계가 걱정하는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발디디며 살아가는 사회가 여전히 척박하고 절망적인 사회인 것은 눈을 열고 귀를 열어 뉴스를 조금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거대한 무덤 곁에서 사순절을 지납니다.
뉴스 앤조이에 연재되는 세속성자 주일예배의 내용을 이번주에는 박현철 청어람 대표가 글을 적었습니다. 성서일과 묵상을 하고 있는데 그 첫머리의 글을 가져왔습니다.
여섯 주간의 사순절 여정이 어느덧 다섯 번째 주일에 다다랐습니다. 점점 십자가의 수난이 다가오는 탓일까요? 오늘 성서일과 본문은 다소 어두운 곳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에스겔이 본 마른 뼈의 골짜기와, 나흘째 부패한 나사로의 무덤 -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는 이 두 현장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민낯이 포개집니다. 중동에서 들려오는 포화 소리, 무고한 아이들의 울음 섞인 비명, 극단적인 양극화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외침, 붕괴되고 있는 기후와 생태계, 그 아래서 신음하는 뭇 생명들의 절규를 들을 수 있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지금 거대한 마른 뼈의 골짜기라는 말이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거대한 무덤 곁에서, 우리는 사순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출처 : 뉴스앤조이-세속성자 주일예배-[사순절 제5주] 풀어주어서, 가게 하여라(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400365)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거대한 무덤 곁에서, 우리는 사순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하덕규씨의 가시나무라는 노래로 우리 각자의 내면 안에 있는 절망의 이야기를 시작해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근원 생명의 근원을 떠난 인간 실존의 절망을 그리고 우리가 발디디고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절망과 전지구적 절망을 이야기했습니다.
너무 어두운 이야기만 했지요! 네 맞습니다. 반대편에 밝은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세상은 어둡고 절망적인 세상도 분명 존재합니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라고 한강작가가 이야기하듯 이 세계는 빛과 어두움이 존재합니다. 절망을 마주하는 일, 어두움을 대면하는 일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실존이고 사람의 또 하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빛과 어두움, 희망과 절망 그 긴장과 그 사이 간극이 너무커서 그 앞에서 우리는 너무 무기력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내 작은 몸부림이, 내 작은 외침과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나? 절망적인 물음도 생깁니다.
사순절 다섯째주의 말씀은 우리를 절망의 자리를 직시하라고 초대하는 것 같습니다. 사순절 다섯째주의 말씀은 에스겔의 마른뼈가 가득한 으스스한 골짜기로, 깊은 구렁에서 부르짖는 애원의 자리로, 육신에 매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죽음의 실존의 자리로, 그리고 죽은지 나흘이나 지나 썩은 악취가 진동하는 무덤 앞에 우리를 세웁니다. 박현철님의 표현대로 거대한 무덤 곁에서, 우리는 사순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나의 내면의 절망과, 인간 실존의 절망과, 사회와 전지구적인 절망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기다려야 할까요?
에스겔의 죽음의 골짜기
에스겔 골짜기가 보여주는 것은 절망과 소망의 상실입니다. 에스겔은 주님의 영의 이끌림을 받아 어느 골짜기로 갑니다. 그곳에는 뼈들이 가득히 있었고, 그 뼈들은 대단히 말라 있었습니다. 이러한 마른뼈의 모습은 11절에 나오듯 이스라엘 백성의 철저한 절망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뼈가 말랐고, 우리의 희망도 사라졌으니, 우리는 망했다.”
이스라엘백성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언약을 져버린 결과 B.C 586년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당하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전은 파괴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서 쫓겨나 포로로 끌려가고 낯선 땅에 버려진 이스라엘의 절망을 보여줍니다. 더이상 희망을 찾아볼 수 없고, 노오력과 애씀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절망의 한 가운데로 에스겔 선지자를 데려가시고 물으십니다.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고! 대답하기가 애매할 때는 어떻게요? “주님께서 아십니다!” 베드로도 비슷한 대답을 예수님께 했습니다. 나는 잘 모르지만 주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대언하게 하시고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대언하자 마른뼈들이 일어나 조각이 맞춰지고 뼈들 위에 힘줄이 붙고, 살이 오르고, 피부가 덮힙니다. 여기까지 육체의 모습은 갖추었으나 생명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기에게 대언하니 사방에서 생기가 불어와 생기가 각 육체에 들어가고 제 발로 일어나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환상을 통해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에서 다시 돌리실 것을 포로들이 풀려나 다시 언약의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을 보여주십니다.
이런 모습은 마치 창세기에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신 첫 창조의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 같습니다. 마른뼈의 절망적인 상황을 역전시킨 것은 사람의 노력과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기, 숨결, 영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포로에서 돌리시는 것, 언약의 죽음의 상황에서 생명으로 재창조하고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키는 일은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일, 사람의 절망에서 희망으로 변화하는 일,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하나님과 연합하고 새롭게 되는 일은 하나님의 역사와 루아흐 성령의 숨결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절망적인 우리의 실존을 변화시키고 바꾸는 것은 우리의 노력과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긍정적인 생각으로, 노오력을 더하는 것으로, 삶을 재정비하는 것으로 우리 인간 실존의 절망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시편의 시인은 깊은 구렁 속에서 부르짖으며 애원합니다. 야훼께서 사람의 죄를 살피신다면 감당할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용서하심이 당신께 있사오니 당신을 기다립니다. 주님의 일하심과 용서하심을 기다림이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림보다 더 기다립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우리 안에 선한 것이 없기에… 우리가 생명을 만들거나 우리 안으로 굽어진 존재가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없기에… 전지구적인 폭력과 착취와 파괴를 멈추고 끊을 수 없기에 주님의 일하심을 주님의 숨결이 우리 존재를 변화시키시기를, 죽이는 질서를 생명과 평화와 사랑의 질서로 바꾸어주시기를 구하고 기다립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생각은 죽음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법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숨결, 루아흐,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생명을 평화를 지향하고 일굽니다. 하나님과 연합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절망적인 인간의 죽음의 실존을 바꾸는 것은 사람의 노력과 의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숨결, 루아흐, 성령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성령이 우리 안에 일하시고, 성령이 우리를 변화시켜 생명과 사랑과 평화로 나아가게 합니다.
나사로의 돌무덤
예수님은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죽음의 절망을 어떻게 대하실까요? 17절에 나사로가 무덤 속에 있은 지가 나흘이나 되었다고 서술합니다. 21절에 마르다는 예수님을 만나는 자리에서 예수님이 계셨다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것이라고… 이제는 더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원망석인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마르다는 23절에 부활의 때에 그럴 것이라고… 지금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32절에 마리아도 마르다와 같이 예수님을 만난 자리에서 예수님이 계셨다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37절에 사람들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분이 그의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는가?며 반문합니다. 그리고 무덤 앞에서 돌을 옮겨 놓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마르다는 39절에서 죽은지가 나흘이나 지나 벌써 악취가 난다며 깊은 절망을 드러냅니다.
사람들은 모두 죽음이라는 절망 앞에서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아있을 때, 병들었을 때 예수님을 만났다면 죽지 않았겠지만… 죽음 이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을 토로합니다. 마르다도 마리아도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반응합니다. 거기다가 죽은지 나흘이나 지나 벌써 부패가 시작되었고 악취가 나기 시작해 더이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깊은 절망을 드러냅니다.
죽음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존을 보여주는 절망입니다. 전능하지 않음을, 영원할 수 없음을 한계를 지닌 인간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죽음입니다. 죽음을 정직하게 대면할 때 우리는 우리의 삶과 실존을 겸손하게 대면하고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게됩니다.
현대사회는 죽음을 가립니다. 과거에는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것이고 마주하고 가까이 있는 것이었는데, 죽음의 과정을 병원이라는 곳으로 옮겨 놓음으로 비일상적이고 마주할 수 있는 대면할 수 있는 없게되었습니다. 영상매체에서는 죽음을 가볍게 다루고, 영화나 게임 속에서는 죽음을 놀이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생명의 가치와 소중함, 죽음이 주는 인간실존의 절망과 무게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현대사회가 죽음을 아무리 가려놓은들 죽음은 인간 실존의 한계와 절망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한 없이 무력하고, 아무것도 그 어떤 것도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이 이 죽음을 마주하는 방식이 아주 다릅니다. 마르다, 마리아, 사람들이 갖는 절망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먼저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2일을 지체하십니다. 그러면서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라고 말씀하시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에게 죽음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예수님이 일하시는 무엇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죽음을 아셨던 주님은 나사로가 잔다. 내가 그를 깨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창조주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잠으로 표현하십니다. 예수님이 계셨더라면…하며 절망하던 마르다에게는 너의 오빠가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예수님 자신이 부활임을, 예수님 자신이 생명임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는 무덤의 돌을 굴리고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외치십니다. 죽은지 나흘이나 지났던 무덤에 천으로 둘러싸였던 나사로가 기적적으로 걸어나와 절망의 자리를 부활과 생명의 기쁨의 자리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리로 바꾸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이라는 절망의 자리를 뚫고 들어와 부활과 생명으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미래에 일어날 어떤 사건이 아니라 지금 현재 뚫고 들어오는 현재의 사건으로 드러내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시듯 예수 안에 부활이 있고, 예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마치 창조때에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고 빛이 생겨나고, 말씀으로 온 천지를 창조하셨던 것처럼 생명의 주께서 죽은 나사로에게 말씀으로 명하시니 그가 죽음에서 일어나 부활의 생명으로 걸어나왔습니다.
부활과 생명은 하나의 교리,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 계신 예수님 그 자체입니다. 부활은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과 절망이 결국 역전될 것이라는 보증일뿐 아니라, 그 역전의 힘이 지금 여기 이미 우리 안에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8:10-11을 함께 읽을까요? 또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의 몸은 죄 때문에 죽은 것이지만, 영은 의 때문에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 자기의 영으로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과 생명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어 예수님 안에 거합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 거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숨결, 루아흐, 성령이 살아 계십니다. 이 부활과 생명은 먼 미래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이미 내 안에서 시작되고 이루어진 일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절망의 자리에서 희망과 생명과 평화를 노래하고 꽃피우는 삶으로 나아갑니다. 절망과 죽음의 질서가 가득한 세상에서 굴복하지 않고 생명과 평화와 사랑의 질서를 따르는 삶을 삽니다.
가시나무에서 시냇가에 심은 나무로
가시나무 같은 내 마음의 실존을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그분이 가꾸어 가십니다. 의를 행할 힘이 없어 곤고한 자라고 한탄하는 자리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음을 믿고 고백합니다. 죄와 죽음과 절망의 자리에서도 우리는 이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 이기고도 남습니다. 그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깊은 절망의 구렁에서 주님을 부릅시다. 주님이 내 안에, 우리 안에, 한국 교회와 사회에, 온 세계와 열방에 절망의 죄를 속량하시고 구원하시기를 구하고 기다립시다. 절망하는 육신의 생각에 갇히지 말고 생명과 평화의 성령의 생각으로 나아갑시다. 우리 안에 이미 현존하고 계시는 성령의 음성과 일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일에 나를 맡겨드립시다. 나의 생각과 감정과 상처와 삶과 존재를 다듬고 변화시키도록 나의 모든 것을 성령하나님께 내어드립시다. 그분이 나를 이끄시도록 나를 열어드립시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 거합시다. 지금 여기 이미 내 안에 예수의 생명이 흘러넘치고 있음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선언하고 나를 통해, 우리를 통해 그 부활의 생명이 흘러넘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핵개인화된 개인, 경쟁과 자기 개발로 번아웃된 사람들, 비교하고 경쟁하고 따라하고 나를 잃어버린 사람들, 차별과 무시와 배재, 폭력과 전쟁으로 고통당하고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 마른뼈와 무덤 앞에 있는 것 같은 세상, 생명을 일으키는 주님의 숨결, 루아흐, 성령의 일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라는 부활의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이 유일한 소망입니다. 나를 통해, 우리를 통해, 그리고 맑은물을 통해 희망과 소망이 전해지길 소망합니다. 절망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 만이 유일한 소망이요, 성령님 만이 생명을 일으키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