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왕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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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ration

사순절의 마지막주일입니다. 그러면서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전통적으로 오늘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종려나무가지를 흔들고 ‘호산나’를 외쳤던 날을 기념해서 종려주일로 함께 지킵니다.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전쟁과 폭력, 혐오와 차별, 억압과 지배가 가득한 이 땅에 참된 평화가 임하길 함께 기도하고 애쓰는 맑은물이길 바랍니다. 또한 고난 주간을 보내며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하고 우리가 감내하고 져야할 십자가를 예수님처럼 감당할 수 있는 인내과 믿음과 용기를 달라고 함께 기도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수난의 현장으로의 초대
오늘은 사순절의 절정이자 주님의 고난을 깊이 새기는 고난주일입니다. 고난 주간 성서일과의 말씀은 우리를 빌라도의 법정과 골고다로 이끕니다. 죄없는 한 존재를 정치와 종교 권력이 죽음으로 몰아넣고, 사람들의 삐뚤어진 욕망과 휘어진 마음이 그 죽음에 동참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중심에 자리한 예수님의 의연함과 당당함, 길이 참고 인내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 분노와 증오와 폭력이 한 존재에게 쏟아지던 그 모습을 이사야 선지자는 “매를 맞으면서도 등을 맡기고 수염을 뽑는 치욕 속에서도 얼굴을 가리지 않는” ‘고난받는 종’의 모습으로 그려줍니다. 시편의 시인은 원수들에게 쓰레기처럼 버려지고 깨진 그릇과 같이 취급받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나의 앞날을 주의 손에 맡깁니다.”라고 절규하며 고백하는 음성을 들려줍니다. 사도바울은 이 모든 수치와 폭력의 과정을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입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의 자기비움의 순종으로 선포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이 오히려 예수님의 의로움과 참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진정한 왕이 되심을 드러내는 역설적인 자리였음을 마태복음은 우리에게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이야기는 우리를 빌라도의 법정과 골고다의 십자가의 현장으로 이끕니다. 빌라도의 법정의 무거운 침묵이 온 인류를 향한 구원의 선포가 되었고, 군인들과 세상의 조롱이 우주적인 왕의 대관식이 되었고, 십자가의 죽음이 온인류과 창조세계에 생명이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침묵
예수님은 총독 빌라도 앞에 서십니다. 빌라도는 당시 유대 지역을 관활하던 로마의 행정관으로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사법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라고 물으며 로마제국의 반역죄에 해당하는지 추궁하며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셨는데 긍정도 부정도 아닌 독특한 대답이었습니다. 빌라도가 사용했던 ‘왕’이라는 의미와 예수님의 ‘메시아적 왕’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고발 속에서 예수님은 ‘침묵’을 지키십니다. 이들의 고소와 비난과 참소 앞에서 침묵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빌라도는 “매우 이상히”(마27:14)여깁니다. 이것은 단순한 놀람이 아니라 경외감과 당혹감을 의미합니다. 처형을 앞둔 죄수가 자신을 변호하지 않는 초연한 모습은 정치로 오랫동안 살아왔던 빌라도에게는 아주 낯설고 생경한 충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할 말이 없어 피하는 무능한 침묵이 아니었습니다. 이사야 50:7,8에서 말하듯이 “그들이 나를 모욕하여도 마음이 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각오하고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 냈다. … 나를 의롭다 하신 분이 가까이에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침묵은 무력한 피해자로서의 침묵이 아니라,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의 원형을 성취하는 의도적인 순종으로 신비로운 침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우리에게 사람들의 오해와 비난과 참소 앞에서 때로는 하나님 앞에 의탁하고 침묵하며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함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말로 설명하고 이해시키려해도 되지 않을 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하나님 앞에서 나의 삶을 돌아보고 그분 안에 머무는 법을 배워야 함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빌라도의 법정에 선 예수님이 긴 침묵으로 대답하시는 모습을 묵상하고 그 모습이 나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빌라도의 손씻기
예수님은 로마 법정과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무리들의 압도적인 비난과 고소 앞에서 오히려 당당하셨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사법권을 쥐고 있었고 예수님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던 빌라도의 모습은 오히려 초조하고 비겁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명절 특사로 바라바를 놓아줄지 예수를 놓아줄지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있었습니다. 바라바의 죄는 명확했고, 예수님의 죄는 혐의 없음으로 놓아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군중을 의식하고 무리들에게 묻습니다. “바라바 예수냐? 그리스도 예수냐?”
이과정에서 마태복음에만 등장하는 독특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빌라도의 아내가 지난 밤 꿈 이야기를 하며 “당신은 그 옳은 사람에게 아무 관여도 하지 마세요.”라고 사람을 통해 빌라도에게 전합니다. 마태는 빌라도의 아내의 입을 통해 예수님의 의로움을 드러냅니다. 이런 이야기적 장치를 통해 예수님의 무죄와 의로움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이런 아내의 이야기, 어쩌면 정의롭게 공의롭게 판결해야한다는 메시지를 거부하고 맙니다. 빌라도의 갈등이 본문에 등장합니다. 빌라도는 대제사장과 바리새파무리들이 시기하여 예수님을 넘겨주었음을 압니다(18절). “누구를 놓아주길 바라오?”라는 물음에는 자신이 가진 권한의 힘과 양심에 당당하기 보다 군중의 눈치를 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군중들이 보이는 광기에 자신의 사법적인 양심의 영혼을 팔아넘깁니다. 자신의 안위와 이득을 위해 불의를 선택합니다. 그는 물을 가져다가 손을 씻는 행위를 통해 책임 회피를 시도합니다. “나는 이 피에 책임이 없다.”라며 시스템 뒤에 숨고 군중의 탓으로 돌립니다. 빌라도는 통치자로서의 정의를 포기한 비겁한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빌라도의 모습은 사도신경을 통해 두고두고 기억되는 역사의 죄인으로 남아있습니다.
로마법정에 사법권을 쥔 빌라도의 양심은 흔들리고 비겁했습니다. 그러나 그 법정의 죄인으로 서 있던 예수님은 침묵으로 자신의 의로움과 당당함을 드러내시고 의연하셨습니다. 자신의 안위를 살피고 사람의 눈치를 보았던 빌라도는 로마의 총독으로 사법권을 쥐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비겁하고 흔들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죄인의 모습으로 법정에 섰던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자신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었기에 당당하고 의연했습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지 돌아봅시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신앙의 양심을 따라 당당하고 의연한 삶을 살아가는지? 아니면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거나 나의 이미지와 안정을 좇아 타협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예할 때 예하고, 아니오 할 때 아니오 할 수 있는 책임을 져야하는 자리에서 뒤로 숨지 않고 짐을 질 수 있는 용기와 의연함이 우리 삶에 나타나길 바랍니다.
바라바 Vs. 예수
빌라도의 법정은 비극적인 선택의 장소였습니다. 군중은 명절 특사로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외쳤습니다. 여기 이름에도 어떤 의미가 있습니다. ’바라바'(Bar-Abba)라는 이름은 아람어로 '아버지(Abba)의 아들(Bar)'이라는 뜻입니다. ‘아버지의 아들’ 무언가 느낌이 오는것 같습니다. 군중은 지금 참된 '하늘 아버지의 아들'이신 예수를 십자가로 보내고, 폭력과 증오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가짜 '아버지의 아들' 바라바를 선택한 것입니다.
군중들은 왜 그리스도 예수를 거부하고 바라바 예수를 선택했을까요? 20절에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구슬러서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하도록 만들었다고 기록합니다. 때로는 군중들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휩쓸립니다. 전후관계를 파악하고 스스로 결정하기 보다 누군가의 이야기에 선동됩니다. 한국교회의 극우화되는 이유중에 하나는 어쩌면 스스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해석하고 판단해야하는 자질을 목사들에게 일임한 이유도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 말씀이 그러한가?하며 살펴야 하는데 무조건 믿고 따르기에 이런 극우화의 일들이 나타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스스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해석하고 판단하는 말씀을 먹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거기서 주체성과 자발성이 나옵니다. 누군가의 해석과 이야기에 의존하기보다 공동체 안에서 각자가 묵상한 말씀을 나누고 이야기하고 그렇게 해석하는 공동체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군중들은(심지어 제자들도) 기대했던 메시야가 있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줄 힘있고 능력있는 메시야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주는 메시야는 자신을 희생하는 메시야였습니다. 자신들의 기대를 저버린 메시야를 군중은 거부했습니다. 힘과 능력과 부를 숭배하는 사람들의 탐욕과 이기심은 폭력적인 힘과 화려한 성공과 안락한 부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자기희생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겠다는 예수님은 군중들의 멸시와 거부를 받고 끝내 희생의 자리로 죽음의 자리로 던져집니다. 인간의 굽어진 마음, 삐뚤어진 욕망은 생명의 근원, 참된 진리, 온전한 사랑을 거부합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선택의 순간에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요? 그럴싸해보이는 가짜 만족과 평화와 사랑을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 안에 참된 만족과 기쁨이 있지만 우리는 적당한 그럴싸한 만족과 기쁨을 주는 것에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자기를 내려놓고 자기희생의 길을 따르는 십자가 안에서 진정한 자유와 평화와 사랑을 경험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장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과 허기진 욕망을 달래는 대체품과 잠간의 마음의 위로를 주는 것을 선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날 빌라도의 법정 마당에서 바라바를 내어달라고 했던 군중과 우리가 다를게 무엇이 있을까요?
사순절을 지나고 이번주 고난주간을 지납니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하며 무엇을 추구하며 사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집시다. 삶에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안목과 의연함과 용기를 달라고 기도합시다.
역설적인 왕의 대관식
로마시대 십자가형은 단순한 사형의 한 방법이 아니라 반란군이나 노예에게 가해지는 가장 잔인하고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형벌이었습니다. 로마는 십자가형을 통해 피정복민에게 공포를 심어주고 제국의 질서에 저항하는 자의 끝이 어떠한지 시각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적 맥락에서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신 21:23)로 여겨졌기에 메시야가 십자가에 달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고대근동에는 ‘모의 왕’이라는 의례가 있었습니다. 축제기간에 비천한 자를 왕처럼 꾸며서 온갖 대접을 해주다가 결국 죽이는 의례였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군병들이 예수님을 총독 관저로 끌고 가서 그 잔혹한 ‘모의 왕’ 유희를 즐깁니다. 27절부터31절이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그 의례를 보여줍니다.
주홍색 옷은 황제의 복장을 상징합니다. 왕이 쓰는 황금 월계관 대신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씌웁니다. 왕의 권위의 상징인 홀 대신 갈대를 손에 쥐어줍니다. 그리고는 군인들은 예수님을 희롱하며 무릎을 꿇고 만세를 외칩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온갖 수모와 조롱과 모욕과 비난을 받고 채찍질과 매맞음과 침밷음의 폭력 속에서 십자가로 향하십니다.
로마의 군병들은 예수를 조롱하고 그들의 놀잇감으로 이 모든 일을 행했으나, 하나님은 오히려 이것들을 진정한 왕의 상징으로 전복시키셨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권력의 정점인 왕의
로마 군병들은 예수를 총독 관저로 끌고 가 잔혹한 유희를 즐깁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대 근동과 로마에서 행해지던 '모의 왕'(Mock King) 의례를 발견합니다. 비천한 자를 왕처럼 꾸며 조롱하다가 결국 처형하는 이 잔인한 놀이는, 로마 군병들의 손에서 역설적인 대관식으로 변모합니다. 그들은 조롱하기 위해 도구들을 준비했으나, 하나님은 그것들을 진정한 왕의 상징으로 전복시키셨습니다. 군병들이 희롱하며 무릎을 꿇은 행위는 당시에는 잔인한 조롱이었으나, 사실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만유의 주재 앞에 경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군병들은 거짓을 의도했으나 입으로는 진리를 말했습니다. "유대인의 왕 만세!" 이 조롱의 끝에서 주님은 십자가라는 가장 수치스러운 보좌에 오르심으로써 진정한 통치를 시작하셨습니다.
로마의 폭력에 의해 희생당하는 이가 진정한 왕이 되셨습니다. 나무에 달려 저주를 받은 이가 온 세상의 구주요 메시야가 되셨습니다. 인간은 장난으로 예수님을 왕이라 칭했으나, 하나님은 그 십자가를 보좌로 삼아 예수님을 온 세상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왕이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국의 폭력에 의해 희생당하고 사라지는 것 같지만, 예수님은 나무 위에 저주 받은 자로 쓰레기취급받지만, 예수님은 군중들에 의해 조롱의 대상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지극히 높힘을 받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주어지고, 하늘과 땅 위에와 땅 아래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 꿇고 주라 고백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게 하셨습니다.
사순절, 고난 주간은 고행의 기간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아프고 괴로우셨을까?하며 예수님의 아픔에 동참하는 시간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어떻게 왕이되셨는지? 예수님이 어떻게 온 세상의 주가 되셨는지를 기억하고 참된 왕되심을 마음에 새기고 찬양하며 선포하는 기간입니다. 정치범이, 반란자가 저주받은 이가, 멸시받고 조롱받는 이가 온 세상의 주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불의 한 세상에 삽니다. 강대국의 이익에 따라 남의 나라를 폭력으로 짓밟는 현장을 매일 뉴스로 접하며 삽니다. 힘있는 사람이, 가진 자가, 이익에 밝고 약삭빠른 사람이 잘 사는 것 같은 세상에 삽니다. 힘의 통치가, 자본의 지배가, 거짓과 탐욕의 논리가 당연한 것 같은 세상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신 왕 예수를 믿고 따릅니다. 그분이 왕이 되시고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나라에 우리는 삽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고, 예수의 길을 따르는 이들을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높이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갑시다. 때로는 억울하고, 때로는 비통하고, 때로는 무력하게 여겨지는 자리들 순간들 십자가에서 역설적으로 왕이되신 예수를 기억하며 그분과 함께 그분의 길을 걷는 맑은물이길 기도합니다.
찢어진 휘장
골고다의 정오에 어둠이 온 땅을 덮었습니다. 예수님은 비통하게 부르짖으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이 외침은 단순한 절망의 비명이 아닙니다. 이는 시편 31편의 고백처럼, 철저한 유기(Abandonment)/ 버려짐의 고통 속에서도 끝내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극한의 신뢰의 외침입니다.
주님께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 거대한 지각 변동이 일어났습니다.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Schizo). 이는 단순한 파손이 아니라 구시대의 종말과 새로운 창조의 시작을 알리는 장엄한 선언입니다. 인간이 쌓아 올린 종교적 장벽,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던 죄의 벽이 예수의 육체가 찢기심과 함께 그 장벽이 무너진 것입니다. 이제는 누구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지성소로 나아가는 '화해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누구나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제가, 종교인이, 목사가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된 것을 소멸하시고 남자나, 여자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어른이나 아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모두가 평등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무덤이 열리고 성도들이 일어난 사건은 십자가가 죽음의 자리가 아니라 생명의 발원지임을 증언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사망의 권세를 깨뜨린 승리의 사건이 되었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죽어 있던 자들이 생명을 얻게 된 ‘새 창조’의 서막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광경을 목격한 이방인 백부장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이방인의 입을 통한 이 선포는 이방인 선교의 신학적 근원이 됩니다.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예수를 거부하고 배척했지만 그와는 대조적으로 이방인 백부장의 고백을 통해 예수님이 온 인류의 구원자이심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새로운 길을 여셨습니다. 더이상 인류와 하나님이 원수가 아닙니다. 성막 휘장이 찢어짐으로 하나님이 세계 가운데로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온 인류간의 화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죽음이 생명의 시작이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죽음이 있는 이 땅에 생명을 일으키는 시작이되었습니다.
고난주간은 단순히 과거의 십자가의 비극을 추모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십자가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의 삶을 재구성하는 시간입니다.
오늘 말씀의 각각의 장면들을 떠올려봅시다.
법정에서 침묵하셨던 예수님///
손을 씻는 빌라도///
바라바냐 예수냐///
모의 왕 역설적인 왕 예수///
찢어진 휘장///
이 장면들 앞에 머물러 있으면서 나의 존재와 삶에 이야기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여봅시다. 그리고 그 음성을 따라 나의 존재와 삶을 맡기며 예수의 길을 가는 맑은물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