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무덤을 마주하고 갈릴리로

본문

Celeb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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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기쁨이 함께하길 바랍니다.

죽음을 이긴 부활의 생명이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하는 맑은물 가족에게 넘치길 바랍니다. 
부활절의 그 찬란한 빛이 내면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도 가득히 차 올라 빛 앞에 선 기쁨을 우리가 한껏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무덤 같은 세상

이시간 우리들이 우리들이 기쁨과 설렘으로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우리의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가시지 않는 어둠이 남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자리에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어려움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세상은 여전히 혼란스럽습니다. 이스라엘과 미국이 시작한 전쟁은 한달이 지나도록 그칠줄 모릅니다. 수많은 폭격속에서 시민들과 아이들이 희생당합니다. 온세계 경제가 뒤흔들리고 이런 위기 상황에 취약계층의 사람들은 더 큰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오늘 부활의 기쁨을 우리가 찬양하고 예배하지만 우리의 삶의 자리는 여전히 혼란스럽고 절망적입니다. 전쟁은 계속되고 세상은 여전히 시끄럽고, 경제적인 불확실성은 우리의 목을 조여오며, 사랑하는 가족을 향한 염려와 우리 각자의 삶에 주어진 무거운 짐들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늘 마태복음 28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안식일이 지나고, 이레의 첫 날 동틀 무렵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 갔다.”
두 마리아는 어떤 마음으로 무덤을 향해 갔을까요? 
이틀전 금요일 예수님의 죽음을 목도하고, 안식일을 지나 삼일째 되는 아침 두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마음은 어떠했을가요?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 
예수님을 통해 가졌던 꿈과 소망이 세상의 권력 앞에 철절하게 짓밟히고 무너져버린 절망…
무덤으로 향하던 이들의 마음 속 절망과 슬픔이 어떠했을지 상상해봅시다.

어쩌면 두 마리아가 무덤을 향해 걷는 걸음이 오늘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의 한 면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해결되지 않는 슬픔과 절망과 무력함을 안고 살아가는 삶, 그것을 감내하고 견뎌내는 삶, 세상의 혼란스러움 앞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삶!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있고, 거대한 바위로 무덤을 꽉 막힌 것처럼 안간힘을 써도 움쩍달싹도하지 않는… 이른 아침 슬픔과 절망의 마음으로 무덤을 향해 가던 두 마리아의 마음과 우리 삶의 현실이 어쩌면 맞닿아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이 슬픔과 절망의 현실이 역전되기 시작합니다. 
무덤을 향해 터벅터벅 걷던 걸음이 기쁨의 혼돈의 발걸음으로 반전됩니다. 
동틀무렵… 가장 어두웠던 그 시간.
죽음만이 머물던 무덤.
굳게 닫힌 무덤.
그 시간, 그 자리에서 상상도 못할, 꿈에도 보지 못할, 부활의 영광과 신비가 틈입해 들어왔습니다. 

지진과 두려움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고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무덤을 막았던 거대한 돌을 굴려 냈습니다. 
성경에서 지진은 하나님의 임재와 심판의 상징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실 때도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터지는 지진이 일어났다고 기록합니다. 십자가의 지진이 옛 창조 세계의 균열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심판이 드러나고 죽음이 예수님을 삼킨 것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부활의 새벽에 일어난 지진은 예수님을 삼켰던 죽음의 권세를 심판하고 사망권세가 깨어지고 새로운 창조,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우주적 진동과 같습니다.

이 거대한 부활의 진동 앞에서 두 부류의 사람들이 전혀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먼저, 무덤을 지키던 로마 군인들입니다. 그들은 당시 세계를 제패하던 가장 강력한 제국의 군대였습니다. 폭력으로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죽음의 권력을 상징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땅이 진동하고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돌을 굴려내자, 지키던 로마의 군사들은 두려워서 떨었고 죽은 사람처럼 되었다고 묘사합니다. 성경의 묘사가 참 독특합니다. 
“죽은 자처럼 되었다.”
죽은 예수를 지키던 로마의 병사들은 오히려 죽은 것 같이되고
죽은지 삼일이 지난 예수님은 오히려 부활의 몸으로 일어나셨습니다. 
아주 역설적인 장면입니다. 
힘으로 폭력으로 세상을 지배하고, 예수님을 조롱하고 예수님의 생명을 앗아갔던 이들이
스스로를 세상의 지배자라고 자부하던 그 세상의 권력이 영광스러운 부활의 진동 앞에서는 오히려 '죽은 자'처럼 마비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의 힘과 능력과 권력을 해체하고 무력화시킵니다. 
세상의 힘은 부활의 참된 생명 앞에서 이토록 무력합니다.

다른 한 부류 두 마리아는 어떠했을까요?
두 여인도 두려워 떨었습니다. 
천사는 무서워 떠는 여인들에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찾는 줄 안다."
“예수님은 그가 말씀하신대로 살아나셨다.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기다리신다고 전해라.”천사들의 말을 전해들은 두 여인은 돌이켜 제자들의 공동체를 향해 달음질합니다. 
마태복음 28장 8절은 그들의 상태를 이렇게 이렇게 묘사합니다. 
"여자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이 엇갈려서…”
여인들은 이 믿기지 않는 소식 앞에서 무서움과 큰 기쁨이 엇갈리는 묘한 감정을 안고 제자들에게 달려갔습니다. 
정신없이 뛰어가던 그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나 "평안하냐?"라고 물으십니다. 우리말로 “평안하냐”라고 번역을 했지만, 헬라어 원문상으로는 ‘카이레테(χαίρετε)’로 직역하면 “기뻐하라!”입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메시지 번역에서 이부분을 Good Morning으로 번역했습니다. 아주 재미난 번역입니다. 예수님은 어쩌면 두 여인에게 “Suprise~ 하시며 Rejoice”라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죽음의 권세가 깨진 아침, 주님이 주시는 첫 명령은 억눌림과 슬픔을 벗어던지고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세상의 폭력적인 권세 아래 굴복해야하는 절망…
으로 무덤을 향했던 여인들의 발걸음을 예수님의 부활은 경외감과 신비와 기쁨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폭력적인 세상의 질서와 어두움의 통치가 끝이 났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죽음의 권세와 어두움의 질서가 완전히 정복되고 해체되었음을 선언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승리하셨고 예수님이 왕이되어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십니다. 
자신의 힘을 믿고 죽음의 전쟁놀이하는 이들이 참된 왕이신 예수님 앞에 설날이 올 것입니다. 그들의 권세가 영원하지 않고 땅이 진동하고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는 순간 그들도 죽은자처럼 엎드러질 것입니다. 
거짓으로 사람을 옭아매고, 돈으로 갑질하고, 자신이 가진 지위와 힘으로 타자위에 군림하려는 이들이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흩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절망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슬픔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큰 기쁨과 신비를 경험하고 소망의 노래, 기쁨의 춤을 추게 할 것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며 떠오르는 찬양이 있습니다. 
“예수 이름 높이세”라는 곡입니다. 
부활절이니깐요… 시간이 좀 가더라도 함께 불러 봅시다.

수 많은 무리들 줄지어 그분을 보기 위해 따르네
평범한 목수이신 그 분 앞에 모든 무릎이 꿇어 경배하네
모든 문제들 하나하나 죽음까지도 힘을 잃고
생명의 근원되신 예수 이름 앞에 모든 권세들 굴복하네

나의 계획이 실패하고 나의 소망이 끊어질 때
삶의 주관자되신 그 분 앞에 나의 무릎을 꿇어 경배하네
나의 삶을 그분께 맡길 때 비로소 나의 마음 평안해
구원의 반석되신 예수의 이름을 소리 높여 찬송하네
예수 이름 높이세 능력의 그이름 예수 이름 높이세 구원의 그이름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 예수 이름을 믿는 자
예수 이름 앞에 나오는 자 복이 있도다

부활의 영광과 기쁨이 우리 맑은물 가족의 존재와 삶에 가득하길 바랍니다. 
삶에 부딪히는 슬픔, 절망, 어려움, 무력함들이
예수 이름을 부르고 예수 이름 앞에 나아옴으로
부활의 생명과 영광으로 상대화하며 이겨나가길 바랍니다.

버려진 돌이 모퉁이돌이 되다

부활의 사건은 단순히 한 위대한 스승이 소생한 사건이 아닙니다.

시편 118편은 고난과 비방을 뚫고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노래하는 제의적 찬양으로, 부활의 역절적 승리를 가장 극적으로 묘사합니다. 
"집 짓는 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고백은 부활의 진리를 드러냅니다. 세상의 권력과 가치관에 의해 쓰레기처럼 '버려진 돌'(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의 구원 경륜 안에서 가장 중요한 ‘머릿돌'(부활)이 되었습니다. 이는 인간의 실패가 하나님의 승리로 역전되는 신적 반전의 신비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버려진 돌이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에게 이단아로 버림받았고, 
로마 제국에 의해 정치범으로 버림받았으며, 
심지어 제자들에게마저 버림받았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가 증언하듯, 사람들은 그를 나무에 달아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셨습니다.
“나는 원수들의 모욕거리, 이웃들의 혐오거리, 벗들의 구역질감, 거리에서 만나는 이마다 피해 갑니다. 죽은 사람처럼 기억에서 사라지고 쓰레기처럼 버려졌사옵니다.”라고 시편기자는 호소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실패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버린 그 돌을, 하나님께서 사흗날에 살리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를 떠받치는 가장 영광스러운 모퉁이돌로 삼으셨습니다. 스캇 맥나이트(Scot McKnight)와 톰 라이트(N.T. Wright)는 이 부활 사건을 '왕의 즉위식'이라고 말합니다. 부활은 단순히 사후 세계의 보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이 온 우주의 진정한 왕이시다!"라는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시편의 시인은 "나는 죽지 않고 살아서 야훼께서 하신 일을 널리 선포하리라"고 노래하며, 조롱과 멸시 그리고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생명력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고난의 풀무에 두시기도 하지만, 결코 죽음의 권세에 방치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고백합니다. 시인은 계속해서 자신을 '쓰레기처럼 버려진 존재'이자 '이웃의 혐오거리’로도 묘사합니다.

이런 시인의 묘사는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어지럽고 혼탁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소외된 마음과 슬픔과 좌절의 감정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사회 생활을 하며 받는 온갖 어려움과 정서적인 괴로움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고 노래합니다. 
“이 날은 야훼께서 내신 날, 다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하자.”
기뻐할만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과 슬픔과 수치의 자리일지라도 하나님의 반전과 역전을 믿고 바라며 기뻐하자라고 노래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쓰레기처럼 버린 돌을 건축자들의 머릿돌로 삼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눈감고 없다라고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비방과 슬픔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반전의 역사, 역전의 역사를 믿고 고통과 비통의 자리에서도 역설적이게도 기쁨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신서에서 종종 고난 중에, 고통 중에 오히려 기뻐하라고 요청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두 여인에게 나타나 ‘카이레테(χαίρετε)’ 기뻐하라라고 하신 그 음성이 오늘 우리 귀에도 들려지길 바랍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기뻐할 일이 하나 없더라도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우리 존재 깊은 곳에서 솟아나길 바랍니다. 그래서 이 혼탁하고 어렵고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도 소망의 이유와 삶의 이유를 말하고 살아내는 맑은물이길 바랍니다. 


갈릴리로

마태복음 본문에 지명이 두번 나옵니다. 어디인지 찾으셨습니까?
천사가 여인들에게 제자들에게 전하라면서 나오는 지명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만날 장소라며 나오는 지명입니다. 
네 갈릴리입니다.

온 우주의 왕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으셨습니다. 
무죄인 자신을 십자가형을 내린 빌라도의 관저로 찾아가 그를 놀라게 하고, 
성전 중심에 나타나 대제사장들의 거짓과 종교권력을 꺾어 놓으셔야 통쾌한 복수극이 완성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향하신 곳은 갈릴리입니다. 
"가서, 나의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러면, 거기에서 그들이 나를 만날 것이다."

왜 하필 갈릴리일까요? 갈릴리는 어떤 곳입니까? 
갈릴리는 세상의 중심인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입니다. 
삶의 밑바닥을 살아가는 어부들이 그물질을 하던 곳이고, 가난과 땀방울, 팍팍한 삶의 피로가 녹아있는 철저히 '평범한 일상'의 공간입니다. 
그리고 갈릴리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소명의 자리입니다.
또한 갈릴리는 십자가 앞에서 주님을 버리고 도망쳤던 그들의 뼈아픈 '실패의 자리’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예루살렘의 영광스러운 보좌가 아닌, 그들의 일상과 부르심과 실패가 묻어있는 갈릴리로 부르십니다.
그와중에 “가서 나의 형제들에게…”라는 예수님의 표현이 참 따뜻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만나는 자리는 그들의 희노애락이 가득한 일상의 자리였습니다. 그 갈릴리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세번의 물음을 듣게 됩니다. 실패의 자리, 무너졌던 자리…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실패가 공존하는 그 자리로 예수님은 나의 형제들을 초대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자리는 이런 예배의 자리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자리, 일상의 자리에 먼저 찾아오셔서 기다리십니다. 
일상의 고단하고 상처와 갈등과 어려움이 있는 자리에서 우리를 만나십니다. 
우리가 넘어졌던 자리, 우리가 실패했던 그 곳, 우리가 웃고, 울고, 아파하고 갈등하는 그 자리 부활의 주님의 찾아오십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자리는 바로 우리의 일상의 자리입니다. 일상의 자리에서 마음의 눈을 들어 그 공간 그 자리에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해봅시다. 분주하고 마음의 에너지가 없을 때에라도 호흡을 가다듬고 마음의 눈을 뜨고 귀를 기울여 지금 여기에 함께 하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납시다. 

무덤을 마주하고 갈릴리로

말씀을 마무리하며 제목을 떠올려봅시다. 
우리는 혼란스러운 무덤과 같은 세상을 마주합니다. 
그러나 그 무덤 안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대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영광과 기쁨이 무덤 같은 세상을 생명으로 살아내는 힘과 소망이 되길 바랍니다. 
갈릴리라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우리의 일상의 자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주님의 통치가 드러나고 나타나는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

생명의 주님,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을 찬양합니다. 세상의 위협과 삶의 무게 앞에서 두려워 떠는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기뻐하라" 말씀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가 머무는 변방의 갈릴리, 실패와 눈물이 있는 우리의 일상으로 찾아와 주십시오. 버려진 돌 같던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귀한 산 돌로 빚어주심을 믿고, 매일의 삶 속에서 하늘의 가치를 구하며 담대히 살아내는 부활의 백성들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