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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ration

부활절 둘째주일을 맞습니다.
여전히 고단하고 암울한 현실이지만/ 부활의 기쁨과 영광이 우리의 존재와 삶을 이끌어가길 소망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예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기쁨으로 하루하루 살아내는 맑은물 가족이길 바랍니다.
이번주는 4.16 세월호 참사 12주기를 보냈습니다. 기억은 멈추지 않습니다.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 그리고 생명이 존중받고, 안전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은 멈추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악뮤 4집 앨범 ‘개화’
“기쁨 뒤에 슬픔이 오는 건 / 아름다운 마음이야 / 쫓아내지 말고 품어주어라 / 아주 예쁜 돌이 된단다”
악뮤(AKMU·악동뮤지션)의 4집 앨범 개화에 수록된 ‘기쁨, 슬픔, 아름다운 마음’ 가사 일부입니다. 앨범이 발표되고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얻고 용기를 얻었다는 댓글과 후기들이 올라왔습니다.
어머니를 떠나 보낸 어떤이는 “이번 앨범은 오빠 이찬혁이 수현이를 위로하는걸 넘어 저마다 슬프고 우울함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위로하고 안아주는 거대한 프리허그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최근 여기저기 방송에 등장하는 악뮤의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수현이 슬럼프를 심하게 겪었고, 그래서 바깥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당시를 회상하며 수현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내가 햇빛을 안 보고 오래 살았다, 게임하고, 배달음식 먹는 거 밖에 없었다. 지금이 밤인지 낮인지 모르고 싶으니까 커튼을 닫고 살았다. 정말 매일매일 하루도 안 빠지고 폭식을 했다. 급격하게 살이 찌면 온 몸이 찢어졌다. 나에게는 더 나은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상황에서 오빠 찬혁은 “수현이가 내 눈 앞에 없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간다면 너무 후회할 것 같았다” 고 수현의 존재와 삶에 함께 하기로 합니다. 함께 합숙하기로 하고 함께 지내면서 같이 운동도 하고, 밥도 해먹고, 여행도하고 하면서 수현이가 수현이 다워질 수 있도록 그의 곁을 지켜냅니다. “수현이가 잘 피어날 수 있게 수현이 인생을 프로듀싱 해야겠다 생각했다.”며 오빠찬혁은 수현이로 개화할 수 있도록 이끌어 내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작사하고, 작곡하고 프로듀싱한 내용들이 앨범에 담기며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는 듯하는 사람들이 마음을 위로하고 어루만지게 된 것 같습니다.
긴 어둠을 뚫고 나온 수현은 “오빠는 저에게 구원자 같은 존재다. 포기하지 않는 가족이 있다는 게 축복”이라고 말했습니다.
슬럼프라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지만 문을 닫아 걸고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던 수현을 구해내어 다시 수현으로 꽃피우게 한 이야기가 오늘 두려움 때문에 문을 닫아걸고 있던 제자공동체를 찾아와 평화를 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많이 오버랩 됩니다.
문을 모두 닫아걸고…
19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날, 곧 주간의 첫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제자들은 무서웠습니다. 자신들도 공범으로 몰려 언제 잡혀갈지 모른다는 공포와 위협속에 있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을 걸었는데 모든 것이 사라진 허탈감과 실패감이 그들을 휘감았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수치심과 죄책감이 그들의 마음을 짓눌렀습니다. 좁은 방에 서로의 눈도 보지 못하고 아무말도 하지 못하는 긴 침묵만이 감돌았을 것입니다. 이른 아침 여인들이 전해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이야기는 도무지 믿기지 않고 혼란스러운 마음만 가중시켰습니다.
제자들은 스스로 문을 열 용기가 없었습니다.
고요한 침묵과 두려움이 방을 가득 메우고 있는 순간 부활하신 예수님이 들어서십니다.
이때 제자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아마도 처음에는 너무 놀랐을 것 같습니다. 누구지? 어떻게 들어왔지? 문이 다 잠겨 있을텐데… 물리적 한계를 뚫고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마주하며 처음 반응은 너무너무 놀랐을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의 엠마오로 가는 제자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얼굴과 목소리는 부활전의 예수님의 모습과는 달랐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저녁에 떡을 떼고 나누었을 때 예수님을 알아보았던 것을 보면 부활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의 모습은 이전 예수님의 모습과는 달랐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자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평화이기는 하지만… 제자들을 압도했던 두려움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힘들고 지친 이들에게 “힘내라!”는 말이 위로가 되지 않듯이…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라는 말이 두려움의 무게에 눌려 가라앉아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몸에 남아 있는 상처를 보여주십니다. 두 손의 못자국, 옆구리에 창자국을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이번엔 다릅니다. 예수님의 상처가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을 알아보는 결정적인 증거가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상처를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변화산에서처럼 빛나는 광채나 천군천사를 동원한 위엄이 아니라 가장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웠던 십자가의 상처를 신분증으로 제시하십니다. 예수님의 손의 못자국과 허리의 창자국이 예수님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지문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예수님의 상처를 통해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상처를 보고 만지며 기뻐합니다. 참 아이러니한 장면입니다. 상처는 본래 슬픔의 대상이고 위로의 대상인데 예수님의 상처가 제자들의 기쁨이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있는 상처는 더이상 실패와 아픔과 괴로움의 상처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상처는 제자들의 회복과 치유와 기쁨이 됩니다. 고통을 몸소 겪으시고 이겨내신 예수님의 상처는 사람들의 치유와 회복과 용서가 됩니다.
두려움과 절망으로 굳게 문을 걸어 잠근 제자들의 공동체에 예수님은 문을 뚫고 찾아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평화를 전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상처난 몸을 통해 제자들을 친히 품으시고 일으켜 세우십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악뮤의 수현양도 슬럼프 기간동안 스스로 문을 닫고 햇빛을 차단하고 외부와 겪리되어 살았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과 절망과 죄책감으로 다락방에 갇혀 있었습니다. 우리도 어쩌면 저마다의 다락방, 슬럼프가 있을 것 입니다. 외부와 차단하고 스스로를 격리시켜서 지내는 우리의 모습이나 그런 시간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지 못하고 가면을 쓰고 뒤에 숨는 모습이 있습니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마음을 열었다가 다칠까봐 마음을 더 열지 못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경제적인 생존의 공포 앞에 성적과 취업과 노후라는 보이지 않는 경제적인 공포 앞에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며 살아갑니다. 어느 순간 번아웃이 찾아오기도 하고 공황장애나 수면장애등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실패와 두려움과 죄책감과 수치심이 우리를 움추러들게 하고 숨게 만들고, 공동체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단절시키게 합니다.
그런 삶의 자리에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불쑥 나의 어둠의 자리에 나 스스로도 문을 어떻게 열어야 될지 모르는 자리에 주님은 찾아 오십니다. 벽을 뚫고서라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그 주님은 우리의 실패와, 아픔과, 수치와, 죄책감을 주님의 평화로 덮으십니다. 우리의 실패보다, 우리의 연약함보다, 우리의 수치와 죄책감보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과 평화가 더 큽니다. 내가 너를 잘 안다. 내가 너를 이해한다. 내가 함께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빗장을 걸어잠근 그 자리에 ‘닫힌 방’에 예수님은 찾아오시고 함께 하십니다. 주님의 우리의 실패와 수치와 죄책감을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평화를 빕니다. 괜찮다고 너의 실패와 수치와 두려움과 죄책감 때문에 내가 왔다고, 그것들보다 나의 사랑과 용서와 평화가 더 크고 깊고 넓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고 나타나실 때에 십자가의 상처를 보여주십니다. 너의 실패와 죄책과 수치심과 두려움을 십자가에서 다 해결했다고, 이제는 치유입은 상처임을 우리에게 보이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할 때, 스스로 걸어잠근 그 마음의 방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실패와 수치와 죄책과 두려움을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상처입은 몸을 통해 실패도, 수치도, 죄책도, 두려움도 회복되는 새롭게 된 나를 바라봅게 됩니다. 두려움과 슬픔과 괴로움으로 가득했던 마음에 주님으로 인해 기쁨이 새어들어오고 점점 차오르는 것을 느끼고 발견하게 됩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악뮤의 찬혁과 수현의 이야기가 어쩌면 오늘 굳게 닫힌 제자들의 공동체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의 이야기와 잘 오버랩됩니다. 수현의 다락방에 찬혁이 뚫고 들어가 함께 함으로 수현을 다시 꽃피우게 합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의 다락방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뚫고 들어가 그들을 일으켜 세우고 성령을 주시고 그들을 다시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우리들의 다락방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를 새롭게하시고 일으켜세우십니다. 긴 어둠을 뚫고 나온 악뮤의 노래가 세상에 상처입고 아픔을 가진 이들을 위로하고 다독이듯이 우리의 어두움과 실패가 예수님 안에서 새로워질 때 우리의 상처와 어두움을 통해 하나님이 새롭게 하시고 그것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통해 일하실 것을 기대합니다.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을 믿습니다.
도마의 고백
우리는 도마의 이야기를 전하고 들으며 ‘의심많은 도마’, ‘도마의 의심’이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그런데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나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은 도마의 의심과 고백 사이에서 그를 정죄하거나 비난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의 의심과 회의 과정에 함께 하시며 부활하신 주님을 드러내보이시고 그를 고백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와 만나셨을 때에 도마가 없었습니다. 그가 그 자리에 없었던 이유들을 이런저런 성경의 백그라운드를 살피며 이유를 말합니다만 성경은 그 이유를 밝히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다른 사람의 증언이나 이야기를 통해 믿기보다 자신의 경험과 자신의 의지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인 것으로보아 도마는 제자들이 함께 숨어 있던 자리를 피해 슬픔과 두려움과 절망을 홀로 감당했던 것 같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 전해주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이 상처를 보여주신 장면이 아주 인상적이었나봅니다. 예수님이 상처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나타내신 것이 도마의 이야기에서도 아주 중요하게 자리합니다. 제자들은 아마도 도마에게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그분이 우리에게 평화를 전하셨다. 그분이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그분의 상처, 손의 못자국과 허리의 창자국을 보여주셨다.”고 전했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도마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싶어서 자기 내면의 의심과 회의를 정직하게 드러냅니다. 확실함에 이르기 위해 정직하게 질문하고 알아가고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다른 제자들의 말에 휩쓸리기보다 내가 듣고 경험하고 확인해서 확실해지고 싶다라는 그의 신앙의 씨름이었습니다.
요한은 이 도마의 이야기를 통해 교회는 의심과 회의가 없는 곳이 아니라 의심과 회의와 함께 하며 믿음을 찾아가는 곳임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뒤에 예수님은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시지만 의심하는 도마를 꾸짖는 이야기라기보다 도마의 경험과 증언을 통해 주님을 만나고 믿게 되는 이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도마의 의심을 통한 고백의 과정을 이야기를 통해 경험함으로 믿음의 자리에 이릅니다. 그리고 요한은 이 책의 말미에 이 책의 기록목적이 바로 이 믿음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라고 기록합니다. 이후에 오는 세대들이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경험하지는 못하지만 이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믿음으로 나아오는 이들이 복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도마의 정직한 신앙의 씨름은 예수님을 만나고 경험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도마를 위해 친히 다시 찾아오십니다. 이때에도 여전히 예수님은 잠긴 문을 통과해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도마앞에 서십니다. 그리고는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 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도마의 의심? 회의? 질문? 어려움?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8일전 도마가 제자들에게 했던 말 그대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 도마를 이해하시고 그를 믿음의 자리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도마가 직접 만졌을까요? 기록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많은 성화에서 직접 만지는 그림들이 나타나곤 합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을 마무리 짓는 20장에서(21장은 에필로그에 해당합니다.) 도마의 고백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고요한복음 전체 이야기의 구조를 통해 선언합니다.
우리 각 사람은 믿음에 이르게 되는 과정이 각각 다릅니다. 어느 한 가지를 모델로 제시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가정교회에서 서로서로 어떻게 믿음에 이르게 되었는지? 신앙의 여정을 이야기하고 나누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가요? 그 과정에서 각자의 삶 속에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서로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요? 또한 우리 각 사람은 지금 신앙의 위치, 하나님과의 관계가 조금씩 다릅니다. 꼭 이래야 한다고 규정지을 수 없습니다. 사람마다 신앙의 업앤다운이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을 때도 나쁠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에게 서로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고 기다려주는 공동체가 소중한 이유일 것입니다. 도마는 자신의 신앙의 질문과 의심을 정직하게 나눌 수 있는 용기가 있었고, 제자 공동체는 그런 도마를 질책하거나 나무라지 않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너그러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과 도마를 찾아오시고 믿음의 자리로 나아오도록 자신을 열어보이시며 초대하십니다. 우리 각자는 신앙의 여정에서 어느 위치에 지금 있을까요? 지금 나는 이 신앙의 여정에서 어떤 생각, 의심, 회의, 갈등을 하고 있나요? 가정교회에서 각자가 가진 신앙의 자리를 함께 나누어봅시다.
자라나는 아이들… 부모를 보며, 함께 하는 교회 이모삼촌들을 보며 이런저런 신앙의 여정중에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입교와 세례를 받지 않은 민서, 재영, 서인, 진호, 서현, 서영, 유정, 진혁, 윤이 우리 아이들이 신앙의 여정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고 공동체와 이어져있고, 아이들의 생각과 고민과 질문의 자리에서 대화하고 이야기하고 들려주고 부활의 주님이 아이들을 찾아 만나주시도록 함께 기도하고 곁에 있어주는 맑은물 가족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이어지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