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너는 특별하단다-사순절 네번째 주일

본문

Celeb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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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의 절반을 넘어서는 네번째 주일입니다.

사순절 네번째 주일의 말씀은 회개에 이른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전통적으로 사순절 네번째 주일을 ‘기쁨의 주일’ 혹은 ‘환희의 주일’이라고 했습니다.

회개에 이른 사람이 복되다고 말씀합니다.

회개에 이른 사람에게 과거의 수치를 없애버리셨다고 하십니다.

회개에 이른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되어 그리스도와 같이 화해의 직분을 주십니다.

회개에 이른 사람에게 하인 중에 한 사람이 아니라 잃어버린 아들의 회복으로 잔치가 열립니다.

회개로 가는 길은 부담스럽고 고통스러운 길이었으나 회개에 이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축복과 수치의 제거와 새로움과 신분의 회복의 잔치가 열립니다.

사순절 주님의 길을 묵상하는 한 가운데 네번째 주일에는 회개에 이른 사람에게 주어진 축복의 말씀을 묵상하며 복음으로 회복된 사람들에게 주어진 축복을 노래하는 기쁨과 즐거움을 말하고 노래하게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사회와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무거운 소식들이 계속해서 들립니다. 헌재의 선고는 여전히 오리무중에 있고 두려움과 걱정을 계속해서 키워나갑니다. 곳곳에 퍼진 산불로 인해 희생자는 더해가고 여전히 잡히지 않은 불길로 생애터전을 잃은 이들의 절망은 더해가고 산불을 진압하는 이들의 수고와 희생은 더 커져갑니다. 주말에 들려진 미얀마의 지진소식은 안전하고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을 더 크게 합니다. 고단한 삶을 살아야하는 전쟁터와 같은 일상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더 초라해지고 우울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는 중 사순절 네번째 주일 기쁨의 주일!, 환희의 주일!은 우리의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는 듯 합니다. 기뻐할 일, 즐거워할 일 하나없는 세상에서 기쁨의 주일, 더 나아가 환희의 주일은 너무 와닿지 않는 환타지 같은 말씀인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 교회력과 성서일과의 힘이 있지 않을까? 역으로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고 교회력과 성서일과의 말씀이 세상을 거슬러 하나님나라의 길을 순례하고 걷는 우리에게 삶의 이유와 방향과 힘과 소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 클수록 여기와 거기의 거리가 멀수록 우리에게는 이상을 향해, 거기를 향해 나아갈 다른 북소리가 필요합니다. 기뻐할 일이 있어서 기뻐하면 좋겠지만 기뻐할 일이 없어도 우리 안에 있는 근원적인 기쁨이 고단한 일상을 살아가는 힘과 위로와 소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이 알수도 줄수도 없는 기쁨과 삶의 이유가 우리 안에 샘솟고 있기에 어둡고 무겁고 불안하고 무기력한 세상의 이야기들 속에서도 일상을 가꾸고 주변 사람을 돌보고 세상을 경작하는 힘과 소망이 있기를 바랍니다.

어제 숲속기도산책을 하면서 구서체육공원에 이르렀을 때,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주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깔끔하게 비질을 해놓은 것이었습니다. 대나무빗자루가 쓸고간 땅에 비질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정돈된 공원의 모습을 보며 부끄럽기도하고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비질을 하고 간 이름모를, 얼굴도 알지 못하는 사람의 수고에 감사하고 내 삶이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에 부끄러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낙엽이 떨어지고 사람이 오가면서 자연스레 흐트러질 공원인데, 누구하나 알아주지 않고 이 자리를 비질했다고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 없음에도 자신만의 이유와 삶의 리듬을 가지고 공원을 정리하고 간 그이가 누구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어떤이의 남다른 삶의 모습에 작게 감동받고 내려왔습니다.

세상과 나의 정서와 일치하지 않는 기쁨의 주일, 환희의 주일 사순절 네번째 주일을 지납니다. 교회력 속에 주어진 말씀이 주는 남다른 삶의 이유와 소망과 힘이 고단하고 무거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존재와 삶에 가득 넘치길 기도합니다. 무겁고 어두운 시절을 지나는 세상 속에서 남다른 삶의 이유와 삶의 모습을 통해 작게 나마 주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들어가는 말이 길었네요!

웃지못하는 시국이지만 소망중에 기쁨 중에 거하는 맑은물이길 바랍니다. 

너는 특별하단다

맥스 루케도의 너는 특별하단다라는 그림책을 다들 아시지요?

1997년에 맥스 루케도가 글을 쓰고, 세르지오 마르티네즈가 그린 그림책이구요

한국에는 한일월드컵이 열리던 2002년에 출간되었습니다.

사랑받을 가치가 있음을 증명해야하는 고통스러운 삶에서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있다는 진리를 잘보여주는 그림책입니다. 안보신 분들은 꼬옥 한번 보시길 바랍니다.

간단한 줄거리를 이야기하자면

목수 엘리가 만든 웸믹이라는 나무인형 마을이 있었습니다.

웸믹 마을에는 한가지 관습이 있었습니다.

외모가 이쁘거나 멋지거나 재주가 많거나 칭찬 받을 일을 하면 별표를,

외모가 나쁘거나 재주가 없거나 실수를 하면 까만 점표를 받아야 했습니다.

주인공 펀치넬로는 점표만 가득 붙어 있는 자존감도 낮고, 주변 웸믹들에게 놀림을 받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금빛 별표도, 까만 점표도 없는 ‘루시아’라는 소녀를 만나고 의문을 가집니다. 어떻게 아무런 표도 없이 살 수 있는지? 루시아는 엘리라는 목수 아저씨를 만나보라고 소개하고 펀치넬로는 용기를 내어 엘리 아저씨를 찾아갑니다.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진 펀치넬로는 자신을 환영해주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며 ‘너는 특별하단다’고 말해주는 엘리 아저씨의 말을 마음에 새깁니다.

그렇게 엘리 아저씨를 만나고 나오는 길에 까만 점표 하나가 툭 떨어지는 경험을 합니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을 맺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상상력을 더 발휘해서 이후에 펀치넬로는 어떻게 살았을까? 상상해봅니다. 펀치넬로도 매일 엘리아저씨를 만나면서 별표와 점표가 늘었다 줄었다 하는 삶을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루시아처럼 별표도 점표도 없는 웸믹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지 않았을까요? 그러다 별표 가득한 웸믹을 만나서 별표도 점표도 없는 자신을 보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묻는 웸믹에게 엘리 아저씨를 소개하고 반대로 점표 가득한 웸믹에게도 자신의 이야기처럼 엘리 아저씨를 소개해줬을 것 같습니다. 

시편 32:1-11

우리는 복된 존재들입니다. 

오늘 성서일과의 말씀은 ‘너는 특별하단다’라는 그림책의 이야기로 모아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편의 시인은 거역한 죄 용서받고 죄허물 벗겨진 사람, 야훼께서 잘못을 묻지 않고 마음에 거짓이 없는 사람이 복되다고 노래합니다(시편 32:1-2).

별표도 점표도 없는 루시아 같은 존재이겠죠?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경험하고 누리는 사람, 마음 깊은 곳에서 ‘너는 특별하단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라는 근원적인 목소리를 듣는 사람일것입니다. “야훼를 믿는 자는 한결같은 사랑 속에 싸이리라”(시편 32:10)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세상 그 어느 것도 끊을 수 없는 사랑이 그를 둘러싸고 있을 것입니다.

일상을 살며 우리는 여러가지 메시지를 듣습니다.

너의 가치를 증명해 보여라! 그것 밖에 못하느냐? 너 때문에… 어떻게 너 같은게…

말로도 듣고, 눈 빛으로 쏘아지고, 손가락질과 말없는 몸짓으로 우리에게 전해져옵니다.

자본주의의 거대한 메아리는 우리를 흙수저로, 루저로, 하층민으로 보잘것 없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있는 나는 사랑받을 가치를 증명해야하는 고통스러운 삶이 아니라

이미 사랑받고 있다는 진리에 끊임없이 ‘그렇습니다’라고 응답하는 삶을 사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주 너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 구원을 베푸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너를 보고서 기뻐하고 반기시고, 너를 사랑으로 새롭게 해주시고 너를 보고서 노래하며 기뻐하실 것이다.”(스바냐 3:17)

이 하나님의 음성이 영혼 깊은 곳에서 메아리쳐 울리길 바랍니다.

세상의 소란한 메아리들 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잔잔하게 묵직하게 울려퍼지길 바랍니다. 

여호수아 5:9-12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수치를 굴러가게 합니다. 


엘리 아저씨는 펀치넬로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내가 너를 만들었고, 넌 아주 특별하단다. 나는 결코 좋지 못한 나무 사람을 만든 적이 없어!”

그리고 펀치넬로는 엘리아저씨의 집을 나서며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

그때 펀치넬로에게 붙어있던 점표 하나가 툭 떨어집니다.

펀치넬로의 몸에 알게모르게 붙어 있는 낮은 자존감, 방어기제, 수치심, 죄책감, 상처와 트라우마가 굴러떨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릅니다. 그곳에서 광야의 여정동안 행하지 못했던 할례를 행하고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습니다. 그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너희가 이집트에서 받은 수치를, 오늘 내가 없애 버렸다.”(수 5:9)

이집트에서 노예생활하던 백성이 노예의 수치를 벗고 약속의 땅에서 자유민으로 살아갑니다. ‘길갈’이라는 장소의 이름은 굴리다라는 의미인데 이집트의 수치를 굴러가게했다 없애버렸다고 하십니다.

펀치넬로도 엘리 아저씨의 집을 매일 같이 방문하면서 그의 몸에 붙어 있던 점표들이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가고 언젠가 루시아처럼 별표도 점표도 없는 삶을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웸믹들이 별표와 점표를 붙이지만 이내 곧 별표와 점표가 떨어져 나가고 펀치넬로의 있는 모습 그대로 나로 살아가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회개에 이르러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삶은 우리에게 참 자유와 평화를 가져옵니다. 살면서 여러가지 관계에서 생겨났던 과거의 상처와 수치심과 분노가 더이상 나의 현재의 삶을 좌우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새롭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수치를 굴러가게 하십니다. 과거의 상처를 없애 버리십니다. 지금은 비록 별표와 점표가 여전히 내 존재에 붙어 있고 그것이 중요한 것 같이 여겨지지만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삶이 별표와 점표로부터 자유케 합니다.

누구에게나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상처와, 수치심과, 죄책감과 분노가 있습니다. 들키고 싶지 않고 알려지게 될까 싶어 불안한 것이 있습니다. 과거나 나의 현재 삶의 발목을 잡고 앞으로 미래로 나아가는 걸 막아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삶이 이 모든 과거의 수치와 상처와 죄와 분노에서 자유케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한 나로 세상에서 나다운 삶을 살도록 이끄십니다.

내 안에 여전히 과거의 묶여 있는 상처와, 수치심과 죄책감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하나씩 하나씩 풀어 놓읍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과거로부터 자유케 하시며 새롭게 하시기를 맡겨드립니다. 이집트의 수치를 굴려버리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수치를 굴러가게 하실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6-21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화해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엘리 아저씨를 매일 만난다는 ‘루시아’는 별표도 점표도 붙어있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존재가 된 것이지요. 웸믹들이 와서 별표를 달고 점표를 달아도 이내 ‘툭’ 떨어지고 맙니다. 삶의 이유와 가치가 다른 전혀 새로운 존재가 되었으니깐요. 그리고는 별표도 점표도 없는 루시아를 신기해 하는 펀치넬로에게 엘리 아저씨를 만나보라고 소개합니다. 엘리 아저씨와 펀치넬로의 관계를 화해로 이끌고, 펀치넬로를 펀치넬로 자신과의 관계에서 화해하게 합니다. 루시아는 새로운 존재로 하나님과, 이웃과, 세상의 관계에서 화해케하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펀치넬로도 루시아와 같이 새롭게 된 존재로 화해케하는 평화의 삶을 살았겠지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17-18)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과거가 더 이상 우리의 현재의 삶과 미래를 방해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났고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아갈 힘과 능력을 부여받았습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나의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반영하는 존재로 삽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리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나타내며 삽니다. 우리에게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같이 화해케 하는 삶을 삽니다.

나를 작게 여기지 맙시다. 나는 새로운 존재로 하나님을 반영하는 존재입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과 세상을 나를 통해 하나님를 만나고 발견하게 됩니다. 나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상에서 화해케하는 직분을 받은 존재입니다.

내면 깊은 곳에서 울려퍼지는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과거의 상처와 수치가 굴러가 자유케된 자아로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갑니다.

새롭게 된 존재로 세상과 이웃에게 하나님을 중재하는 왕같은 제사장으로 화해의 삶을 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일하심으로 세상이 알수도 줄수도 없는 기쁨과 평화와 사랑이 나의 존재와 삶에서 조금씩 드러나고 나타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 죄에서 자유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 맑은물 가족이 보냄받은 삶의 자리에서 주님 안에 놀라운 평화를 누리며 평화를 일구고 전하는 화해의 사람으로 살아내길 바랍니다. 

누가복음 15:1-3, 11b-32

세상 한 가운데에서 잔치를 벌이는 삶! 


누가복음 15장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잘 알려지고 익숙한 말씀입니다.

일전에 탕자의 귀향이라는 렘브란트의 그림을 바탕으로 헨리누엔이 쓴 책의 흐름을 따라 탕자의 입장에서, 큰형의 입장에서, 아버지의 입장에서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화해의 삶, 회복의 삶은 잔치와 축제의 삶입니다. 관대한 낭비의 삶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꼴로 돌아온 아들을 향해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래서 그들은 잔치를 벌였다.” (누가복음 15:24) 잃었다가 되찾은 기쁨이 더 크기에 잔치를 벌이고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반면에 아버지의 관대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못마땅하게 여긴 형은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고 문밖에 서성입니다. 아버지 곁을 떠난 적없이 늘 아버지 집에 있었지만 아버지를 닮지 않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아버지의 행동은 당시 사회적 통념상으로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적 관습을 완전히 뒤엎는 놀라운 사랑의 표현입니다. 아버지의 집에 함께 있었던 큰 형도 아버지와 가까이 있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일반적이지 않은 아버지의 관대함과 사랑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이야기는 집 밖을 서성이는 큰 아들에게 같이 잔치에 참여하자는 아버지의 초대로 끝을 맺습니다.

“아버지가 그에게 말하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그런데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누가복음 15:31-32)
이것은 탕자의 비유의 배경이 되는 1,2절의 바리새인들의 수근거림에 대한 예수님의 초대입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에게 가까이 몰려들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투덜거리며 말하였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누가복음 15:1-2)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밥먹는 예수님을 바리새인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용납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관대한 사랑과 은혜는 늘 사람들의 관습과 통념을 뛰어넘습니다.

자격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적용될 때에는 기쁨과 감사와 감동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생각하기에 자격없다고 생각하는 이에게 베풀어질 때 우리의 마음은 불편해집니다. 그리고 나에게 불편하고 어려운 이를 하나님이 같이 아끼고 사랑하자 관대하게 베풀자고 초대하시면 그 초대 앞에 우리는 하나님께 큰형과 같이 화를 냅니다. 우리는 온갖 합리적인 이유를 대며 저 사람의 자격없음을 이야기하고 내 마음의 불편함을 정당화합니다.

아버지의 집에 오래 있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큰형처럼

신앙생활은 오래되었으나 하나님을 닮지 않은 우리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누가복음 15장은 우리에게 이 잔치에 함께 참여하자고 초대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닮아 이해할 수 없는 관대한 사랑의 잔치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여전히 늘 모자라기만한 통장 잔고이지만 사랑으로 흘려보내라 하십니다.

저 사람은 도저히 용서가 안되고 품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아끼고 사랑하라 하십니다.

삶은 여전히 무겁고 어두운데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어쩌면 누가복음 15장은 아버지됨으로의 초대입니다.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환대하시는 아버지의 넉넉함의 자리로의 초대입니다.

화해의 직분, 왕 같은 제사장의 삶은 그런 아버지를 닮아 관대한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나를 넘어 아버지의 기쁨과 삶을 사는 맑은물이길 바랍니다.

맑은물 한 사람 한 사람은 특별하니깐요.

어둡고 무거운 시기를 지나는 동안 맑은물로 인해 기쁨의 잔치가 열리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