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선한목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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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ration

부활의 기쁨이 함께…
부활의 기쁨을 이어가는 부활절 넷째주일입니다. 하지만 한국역사에서 4월은 가슴 아픈 날이 많습니다. 제주 4.3이 그렇고 4.16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5.18도 여전히 가슴아프고 힘들 날입니다. 그리고 지구촌 곳곳의 전쟁과 분쟁의 소식은 우리를 마냥 기쁨에 머물게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그럴수록 우리에게는 부활의 소망과 기쁨이 필요합니다. 사망과 어둠의 권세를 깨뜨린 부활의 영광과 소망과 기쁨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하고 아픔과 눈물을 씻어줄 그 날에 대한 소망과 기쁨이 우리의 중심 깊은 곳에서 울려퍼져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이 아프고 고달프고 시린 세상에 위로와 격려와 용기를 줄 수 있지 않을까요? 다시한번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저와 우리 맑은물 한 사람, 한 사람 가운데 흘러 넘치기를 바랍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쁨을 일깨워주는 예배와 모임과 만남이 되기를 바랍니다.
선한목자에 대한 이야기
오래전 모교회에서 예배드리면서 말씀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목사님께서 시편 23편을 읽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은 선한목자이시고 우리를 좋은 곳으로 선하게 인도하시는 분이라고 선언하시고는 선한 목자를 잘 따르기 위한 양의 세가지 자세(3대지 설교를 자주 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에 대해서 설교하셨습니다. 말씀과 기도를 가까이 해야한다. 주의 일에 힘써야 한다. 교회의 지도자의 말에 순종해야 한다 등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대부분의 성도님들은 아멘하며 은혜를 받으셨고, 당시 IVF를 하며 좀 시니컬하고 비평적이었던 저는 많이 아쉽고 힘든 시간이었습니다(지금도 저의 설교도 그럴 수 있겠다 싶습니다^^/ 그리고 설교에 대한 피드백과 비평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어렵고, 말하는 사람도 어려움이 있겠지만 교회의 건강함과 서로의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이 시간을 빌어 어떠한 피드백도 환영하니 피드백을 위한 어떤 장치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제가 아쉽고 힘들었던 지점은 본문의 이야기는 양들의 자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기때문입니다. 목자되신 우리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 삶을 이끄시는지… 그래서 우리가 목자로 인해 얻는 풍성함과 유익과 그로 인한 고백이 무엇인지가 본문의 이야기인데… 우리가 잘하든 못하든 선한목자의 관대함과 은혜는 변함이 없을 텐데… 그것을 얻기 위해 노오려억 해야한다고, 무언가 이런 사람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그것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도 자칫 한쪽으로 치우쳐서 읽으면 좋은 양이 되기위해 목자의 음성을 들어야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이야기는 양이 어떻다는 이야기보다는 선한목자가 어떤 존재인지… 선한목자가 양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그들에게 주는 유익은 무엇인지를 이야기해주는 본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을때 아주 주요한 두가지 주제가 있습니다. 매일성경이라는 큐티책자에 나오는 대표적인 두가지 질문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늘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이 어떤분이신가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나에게 주는 말씀을 살피는 것이지요. 모든 본문을 다 이렇게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두가지 주제와 질문은 성경을 읽는 주요한 틀이 됩니다.
부활절 넷째주일 성서일과의 전체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어떤 인상을 받으셨습니까? 반복되는 주제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바로 목자되신 예수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부활절 넷째주일은 ‘선한목자’주일이라고도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 목자로, 선한목자로 함께 하심을 기억하고 묵상하며 선포하는 날이 선한목자주일입니다. 오늘 선한목자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존재와 삶의 선한목자 예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음성을 따르며 목자의 음성을 따라 살아가는 맑은물 가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진정으로 진정으로
6월 3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각 지역에서 자신이 이 지역의 충실한 일군임을 자처하고 시민들에게 표를 호소합니다. 자신들을 믿고 뽑아달라는 호소입니다. 누가 충실한 일군인지 누가 표를 얻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인지 잘 구분해야 할 시기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자기 선언입니다. 나는 참목자이다. 나는 선한목자이다. 나는 양의 문이다라는 자기 선언입니다. 선거기간 입후보자들이 자신을 뽑아달라고 자신이 진정한 이 지역의 일꾼이라고 선언하듯이 예수님은 양들인 제자와 무리들에게, 어쩌면 이 메시지를 듣는 모든 이들에게 예수님이 참된 목자되심을 예수님이 양의 문되심을 선언하는 선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는 진정으로 진정으로가 1절과 7절 두번에 걸쳐 나옵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사람은 도둑이요 강도이다.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양들의 목자이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이 진정으로는 히브리아 아민에서 파생된 단어로 아멘입니다. 우리가 기도 후에 아멘이라고 기도하는 바로 그 아멘입니다. 이 아멘은 ‘확실하다, 견고하다, 신뢰할만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구약에서는 주로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그리고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화답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에서 ‘아멘’은 “그 말씀이 진실임을 내가 믿으며,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응답적인 고백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용법을 뒤집으십니다. 문장과 이야기의 맨 끝에 등장하던 ‘아멘’이라는 단어를 문장과 이야기의 맨 앞으로 가져오십니다.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지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며 말문을 여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아멘이 두번 등장합니다. ‘아멘, 아멘’ 유난히 요한복음에는 ‘아멘, 아멘’이라는 단어가 25번이나 등장하고 있고(요한복음에는 나는 ㅇㅇ이다라는 주장이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25회에 걸쳐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짧은 이야기 속에 두번이나 강조해서 나타납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라며 자신의 말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외부의 권위를 빌어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진리 자체’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임을 스스로 보증하시는 신적권위로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진정으로’, ‘아멘 아멘’ 하며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 자신의 자기선언입니다. 선언의 내용을 강조하고 선언의 권위와 근원을 분명히 하는 의도적인 자기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여기에서 힘주어서 자신이 선한목자임을 양의 문임을 강조하고 주장하실까요?
본문 6절에보면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시지만 듣는 이들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전후문맥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권위의 문제, 정체성의 문제(요 10:20에는 귀신들려 미쳤다는 비난도 받습니다.), 신성모독의 문제(요 10:30에는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와 하나라는 주장에 대해 군중들은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합니다.)로 인해 예수님을 목자로 받아들이지 않는 전체적인 분위기 때문입니다. 적절한 예인지 모르지만 마치 국힘의 텃밭인 대구 경북지역에서 민주당의 백그라운드로 제가 진정한 이 지역의 일군입니다라고 선언하는 것과 유사한 느낌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멘 아멘하며 내가 참목자다. 내가 양의 문이라는 예수님의 자기 선언은 어떤 목가적인 조용한 시골마을에서 평화롭게 선언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굳어진 종교적 이데올로기와 기득권이 격렬하게 저항하고, 예수님을 미친 사람취급하며 끝내 돌을 들어 죽이려 했던 치열한 갈등의 현장 속에서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선한목자가 되신다는 고백과 신앙은 삶의 위험과 고단함과 갈등이 없는 예배적 상황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향한 비난과 거부, 모함과 거절의 상황 속에서 목자되심을 양들의 문 되심을 선언하셨습니다. 우리 일상의 가장 어둡고, 힘들고, 괴로운 자리 그 곳에서도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십니다. 그분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함께 계시며,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인도하십니다. 비난과 조롱, 거짓과 음해를 일삼는 원수들 앞에서 궁궐의 밥상을 차려주시고 내편이 되어 기름부어 주시는 목자가 되십니다.
아멘 아멘 나는 목자다, 아멘 아멘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그 예수님의 자기 선언 앞에 아멘, 아멘으로 응답하는 우리 모두이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자기선언 - 나는 양의 이름을 아는 목자다.
목자와 도둑의 결정적인 차이는 문을 통과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문을 통과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도둑이요 강도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유대의 양 우리는 밤이 되면 여러 목자의 양들을 한데 모아두는 공동 우리였습니다. 아침이 되면 목자들은 '문'을 통해 당당하게 들어갑니다. 문지기는 그가 참 목자임을 알기에 문을 열어줍니다. 참된 권위를 가진 자는 숨어들지 않습니다.
반면 도둑과 강도는 문을 통과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담을 '넘어' 들어옵니다. 비정상적인 방법, 편법, 폭력과 기만을 사용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에게 양은 사랑과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한 ‘수단’, 이용할 대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양을 어떻게 대합니까? 3절 하반절을 보면.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이끌고 나간다.”고 말합니다. 목자에게 양은 '무리'나 '숫자'가 아닙니다.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알고 그 양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릅니다. 다리가 불편한 양, 자주 길을 잃는 양, 유독 겁이 많은 양. 그들의 기질과 상처를 정확히 알고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무리나 대중으로 여기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 인격으로 대한신다는 이야기가 많은 위로와 힘이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이름을 아십니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한 사람이 가진 내밀하고 그만이 가지는 특징과 걸어온 삶과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뒤에서 윽박지르고 채찍질하며 빨리가라고 몰아대지 않고, 자신이 먼저 위험을 무릅쓰고 "앞서서 가며(4절)" 길을 엽니다.
그러나 반면 도둑은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려고 오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참 목자와 양을 도구화하는 도둑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도둑과 강도는 양을 이용하고, 대상화하고, 자기 배를 채우는 수단으로 삼고 마침내 양의 모든 것을 빼앗습니다.
이것이 목자와 도둑과 강도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문을 통하느냐 아니냐, 양을 위하느냐 아니냐가 목자와 도둑을 갈라놓는 차이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부패한 종교지도자들은 양을 무리로 대합니다. 그리고 양을 통해 자신의 기득권과 배를 채우기에 바빴습니다. 율법과 정결규례라는 무거운 짐을 지우고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을 죄인으로 낙인찍어 회당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앞선 본문에서 시각장애인이 눈을 뜨게 되자 그의 눈 뜸을 축하하지는 못할망정 그가 자신들의 권위와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그를 회당에서 쫓아 내었습니다. 이들은 종교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억압하고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순응하지 않는 이들을 쫓아내는 거짓목자 도둑이었습니다.
또 다른 한 축은 '강도'처럼 폭력을 선동하던 무장 독립투사나 거짓 메시아들입니다. 그들은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며 로마에 저항하자며 사람들에게 칼과 창을 쥐어주고 폭력과 전쟁의 사지로 몰아넣었고, 결국 수많은 백성들이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양을 희생시켜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 했던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시대의 도둑과 강도는 어떤 모습일까요? 오늘날의 도둑들은 칼을 들거나 담을 넘어오지 않습니다. 아주 매력적이고 세련된 얼굴로 우리 삶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옵니다.
어쩌면 이 시대의 도둑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네가 가진 소유가 너의 가치야. 남들보다 더 높이 올라가야 무시당하지 않아. 쉼 없이 경쟁해서 스펙을 쌓고, 더 많은 부를 축적해야만 생존할 수 있어." 이 이윤 중심의 자본주의와 성과주의 사회는 사람을 목적 그 자체로 존중하지 않고, 쓸모가 있으면 취하고 효용 가치가 떨어지면 가차 없이 내다 버립니다. 양의 털을 깎고 고기를 취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는 도둑과 같습니다. 이러한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처음에는 성공과 안락을 얻는 것 같지만 결국 남는 것은 철저한 소외와 불안, 우울과 영혼의 탈진뿐입니다. 도둑은 결국 우리의 영혼을 훔치고,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인간성을 죽이고, 평화로운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이뿐 아니라 신천지나 기독교의 탈을 쓴 이단들이 있겠고. 정상교회인듯 하지만 종교적인 권위로 가스라이팅하며 성도들을 이용해먹는 나쁜 목사들도 있을 것입니다.
도둑과 강도를 구분하는 것은 정말 나를 위한다고 하지만 결국은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참 목자이신 예수님은 도둑과 전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본문의 절정인 10절을 다 함께 읽어봅시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려고 오는 것뿐이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
예수님이 진짜 목자이신 이유는 우리를 유용하게 써먹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생명은 그저 숨만 쉬고 살아가는 연명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이 회복되어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나는 신적이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 생명은 홀로 고립되지 않고 관대함으로 흘러넘쳐 공동체와 이웃에 생명을 나누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그 생명을 그저 찔끔찔끔 주시는 것이 아니라, "더 넘치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양동이에서 물이 흘러넘쳐 주체할 수 없는,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의 흘러넘침입니다.
성서일과의 시편과 사도행전의 말씀이 바로 생명이 흘러넘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나의 목자가 되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내 잔이 넘친다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이 고백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섭니다. 우리 각 사람의 이름을 아시고 생명을 넘치게 주시는 목자되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소유를 움켜쥐지 않고 서로 공동으로 소유하고 필요한대로 나누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날마다 밥상공동체로 모여 밥을 나누고 삶을 나누고 서로를 나눕니다. 그 기쁨이 찬양으로 예배로 나타나고 구원받는 사람들이 더해갔습니다.
세상의 강도들이 심어놓은 경쟁과 이기심, 폭력이 사라지고 하늘의 평화(Shalom)가 임한 개인과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
예수님이 목자가 되십니다. 그분이 친히 문이 되시어 우리의 출입을 지키십니다. 오늘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양이 가지는 한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본문 4절과 5절은 양들의 특징을 아주 정확하게 짚어냅니다. "양들은 그를 따라간다.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양들은 결코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않을 것이고, 그에게서 달아날 것이다."
양은 시력이 매우 나쁘다고합니다. 그러나 양은 좋은 청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는 자기 목자의 음성과 억양을 정확히 구분해 내고 목자의 음성을 따라갑니다.
풍삶기 할 때 공부했던 말씀이 기억합니다. 가장 최근에 공부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라는 고린도후서의 말씀입니다. 때로는 믿음과 보는 것이 헤깔릴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멈추어 호흡을 가다듬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내가 믿음에 이끌리는 것인지, 보는 것에 이끌리는 것인지 압니다. 우리는 도둑과 강도의 음성을 따라 이것이 나의 욕망에 이끌리는 것인지, 목자의 음성을 따라 성령에 이끌리는 것인지 압니다. 그 사이에서 갈등할 뿐이지 우리는 누구의 음성인지 압니다.
분주함에 쫓기고 피곤함에 밀려서 살아가다보면 이것이 목자되신 주님의 음성인지, 세속적인 가치관에 휘둘리는 욕망의 목소리인지 구분이 안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 앞에 머물고, 호흡을 가다듬고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우리에게 똑똑히 들려오는 목자되신 주님의 음성을 발견합니다.
세속적인 가치와 나의 욕망의 목소리는 그것이 나에게 좋게 보일지라도 생명으로 이끌지 못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음성은 때로는 나를 내려놓아야 하는 자기포기와 자기 죽음의 길처럼 보일지라도 결국에는 생명으로 넘치는 풍성한 생명으로 나를 이끕니다.
내가 목자다. 내가 너희의 참된 목자다. 나는 너의 이름을 안다. 나는 너를 지키고, 먼저 이끌며, 생명을 주고 풍성히 넘치게 한다는 예수님의 자기 선언을 기억합시다. 목자되신 예수님께 나의 존재와 삶을 의탁하고 맡겨드립시다. 오늘 내가 고민하고, 고집하고, 움켜쥐고 있는 것이 있다면 내가 너의 목자다라는 예수님의 그 선언에 내어드립시다. 그분이 나를 푸른 초장으로 생명의 풍성함으로 이끄시도록 맡겨드립시다. 내 이름을 아신다는 내 이름을 부르시는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시다.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의 음성을 따라 살아감으로 사도행전의 풍성한 공동체의 열매를 경험하고 맺어가는 맑은물이길 소망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