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사랑하는 사람은

본문

Celeb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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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잘 보내셨나요? 아이들 존재가 주는 기쁨과 부모님이 함께 계신다는 감사가 한주간 맑은물가족 가운데 잔잔하게 머물었길 바랍니다. 

모두가 자신의 고독과 싸우고 있다.

최근 나의 아저씨, 나의 해방일지를 쓴 박해영 작가의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라는 드라마의 제목을 카피해서 써봤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외로움과 고독함을 숨기고 들키지 않기 위해 싸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정을 나누고 관계를 누리고 속마음을 털어 놓을 수 있는 누군가가 점점 사라지고 있진 않을까요?

몇가지 통계는 우리가 숨쉬고 발딛고 살아가는 우리 한국사회의 어두운면을 보여줍니다.

사회적 고립도 (아플 때나 힘들 때 의지할 사람이 있는가?): 통계청의 '2023년 사회조사' 등에 따르면, 한국의 '사회적 고립도'는 매우 심각한 수준입니다. 특히 "몸이 아플 때 집안일을 부탁할 사람이 없다"거나 "우울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고 응답한 비율이 약 30%를 상회합니다. 성인 10명 중 3명은 인생의 위기 순간에 철저히 혼자 버려진 '고아'와 같은 상태에 처해있습니다.

청년층의 은둔과 고립: 과거 고독이 노년층의 전유물로 여겨졌다면, 이제는 청년층으로 급격히 번지고 있습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타인과 의미 있는 교류를 단절하고 집 안에만 머무는 '고립·은둔 청년'의 규모가 약 54만 명(청년 인구의 약 5%)으로 추산됩니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수치심이 이들을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가두고 있습니다.

고독사(Solitary Death)의 가파른 증가: 보건복지부의 '고독사 실태조사(2022)'에 따르면, 2021년 한 해에만 3,378명이 아무도 모르게 홀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는 하루 평균 9명이 고독사하는 셈이며, 매년 그 수치가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특히 50-60대 중장년 남성의 비율이 절반을 넘어, 경제적 퇴직과 가족 해체가 빚어낸 참담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맑은물은 오랜동안 가정교회를 통해 서로 우정을 나누고 삶을 나누고 신앙을 나누는 삶을 살아오면서 이런통계가 피부로 와닿지 않지만 이런 통계들 이면에 나타난 이면의 다른 모습을 보면 우리도 한국사회의 거대한 고독의 증상들에 물들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과잉 연결' 속의 '존재론적 단절' (군중 속의 고독) / 현대인들은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를 통해 24시간 전 세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연결은 철저히 '피상적'입니다. 내가 누리는 소비, 행복한 순간만을 편집해서 보여주어야 하는 연결망 속에서, 나의 진짜 아픔과 수치심을 털어놓을 공간은 사라졌습니다. 접속은 넘쳐나지만 진정한 ‘접촉(만남, 사귐)'은 부재한 것이 현대 고독의 특징입니다.

자기 증명의 굴레와 '피로사회' / 독일의 철학자 한병철이 《피로사회》에서 지적했듯, 현대인들은 끊임없이 "너는 할 수 있다"는 성과주의의 압박 속에 살아갑니다. 과거처럼 외부의 압제자가 나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착취합니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삶을 희생하고 포기합니다. 나의 가치를 나의 성과, 외모, 연봉으로 끊임없이 '스스로 증명'해 내야만 합니다. 이 경쟁에서 밀려나는 순간 사회적 쓸모를 잃어버릴 것이라는 불안감, 그 불안감이 사람들을 극도의 피로와 고립으로 몰아넣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무조건적으로 나를 용납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은혜)'을 잃어버린 인간의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우주적 고아, 의미(Telos)의 상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의미를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내 고난에 어떤 목적이 있는지 아는 거대한 이야기(메타 내러티브)가 상실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창조주라는 닻을 잃어버린 인간은 넓은 우주에 우연히 던져진 먼지와 같은 존재로 자신을 인식합니다. 폴 틸리히(Paul Tillich)가 말한 '무의미의 불안'입니다. 내가 죽어도 세상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갈 것이라는 허무함이 사람들의 내면을 갉아먹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고 고도로 발달한 사회망 속에 살아가면서도, 정작 삶의 근원적인 위기 앞에서는 철저한 고독과 단절을 경험하는 시대. 이것이 우리가 마주한 뼈아픈 현실입니다. 모두가 고독과 외로움과 싸우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소비주의는 과도한 경쟁으로 우리를 몰아넣고 각 개인을 고립시키고 우리는 우정과 사랑과 관계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외딴섬처럼, 고아처럼 세상을 살아가게 합니다. 

고아가 아니다.

이런 고독과 외로움, 외딴섬과 홀로 버려진 듯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오늘 요한복음의 말씀은 무어라고 말씀하고 있을까요?

예수님은 18절에서 제자들에게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조금 더 깊이 알려면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4장은 요한복음 13-17장의 긴 고별강화의 중심부입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자리에서 이제 사랑하는 제자들을 떠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긴 유언을 남기십니다. 그리고는 보혜사 성령을 약속하시는데 14장에 한번, 15장에 한번, 16장에 1번 총세번에 걸쳐 약속하십니다.

제자들과의 이별의 사황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로마군인들에게 잡혀가 심문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입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왔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제자들을 떠날 것을 예고하십니다. 이 다락방에 둘러 앉은 제자들의 무거운 공기를 느껴보십시오. 예수님이 제자들의 유일한 울타리이고, 정체성이고, 미래였습니다.

어쩌면 제자들이 느꼈을 당혹감, 상실감, 버려짐에 대한 공포를 잘 대변해주는‘고아’라는 단어에 잘 드러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사회에서는 고아는 사회적, 경제적 법적으로 아무런 보호막이 없는 절대적 취약함을 나타내는 말이었습니다. 생존권이 완전히 상실된 상황입니다. 그리고 당시 랍비문헌을 보면 스승을 잃은 제자들을 일컬어 고아라고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초기 독자였던 요한의 공동체는 유대교 회당에서 쫓겨나는 출교를 당했습니다. 당시 유대교 회당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가족으로부터 호적이 파이고, 지역 사회에서 관계망이 끊어지는 어떻게보면 ‘사회적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예수님은 ‘고아’라는 단어를 쓰셔서 제자들이 맞이하게 될 상황을 알고 계시고, 이해하고 계시고 공감하고 계심을 나타내십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고아처럼이 예수님을 잃어버린 제자들의 상황을 잘 표현해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제자들이 겪는, 겪을 불안과 두려움과 상실과 무력과 고독과 외로움을 아시고 공감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아십니다. 혼자서만 세상짐을 다 지고사는 것 같지만 그 마음을 그 짐을 우리 주님이 아십니다. 우리가 겪는 당혹감, 고립, 무력함, 두려움 주님이 아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아픈 맘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모든 상황에 공감하십니다. 아무도 내 마음, 내 어려움, 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은 그 순간, 그 자리에도 예수님은 아십니다. 이해하시고 공감하십니다. 이 주님 앞에 우리가 가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가져갑시다. 우리의 상황과 마음을 이해하시고 공감하시는 주님께 우리가가진 고독과 외로움과 무력함과 절망의 마음을 열어 드립시다. 

보혜사-또다른 예수님

그런데 주님은 그저 이해하시고 공감하시지만 않으십니다.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주님은 어떻게 다시오시고 우리와 함께 하실까요?
16절을 읽어봅시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리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

여기서 '다른 보혜사'란 전혀 이질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다른은 전혀 다른 종류가 아니라 같은 종류의 다른 하나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과 완전히 동일한 본질과 성품을 지닌 분이 오십니다. 그분이 바로 보혜사 성령님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다른 위격인 성령님을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보혜사란,’곁에 부름을 받아 돕고 위로하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대리자가 아닙니다. 성령을 통한 예수님의 지속적인 임재와 현존입니다. 톰라이트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성령은 예수를 대체하지 않는다. 성령은 예수를 계속 현존하게 한다.” 우리가 찬양에서 불렀던 것 처럼 성령은 예수께로 예수는 아버지께로 아버지는 예수께로 예수는 다시 성령께로 인도하십니다. 보혜사 성령은 억울한 자리에서 변호인이요, 지쳐 쓰러진 자리에서 지원군이요, 슬픔의 자리에서 위로자가 되십니다.

그리고 이 성령님은 잠간, 오시고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영원은 단순히 시간적 무한이 아니라 우리 시대가 계속되는 동안에,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에 함께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눈에 보이는 육신의 스승은 떠나지만, 시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우리 내면에 머무시는 진리의 영으로 다시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5절은 성령을 가리켜 "양자의 영(the Spirit of adoption)"이라고 부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셨다는 것은, 우리가 우주에 홀로 던져진 고아가 아니라,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친자녀'로 입양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신비의 연합

이 놀라운 성령의 임재는 20절에서 기독교 신앙의 가장 신비로운 절정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그 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안에(in)'라는 단어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톰 라이트가 말한 것처럼, 이것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새 창조의 신비입니다. 멀리 떨어져 계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이 누리셨던 그 완전한 사랑의 연합(상호 내주) 속으로, 연약하고 흠 많은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세분이시면서 한분이시고 한분이시고 세분으로 존재하는 그 신비로운 연합으로 존재하시듯, 우리 또한 우리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현존하는 그 영광과 신비가 우리 삶 안에 이루어졌습니다. 실존적 절망의 어둠이 아무리 깊어도, 우리 안에는 이미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고동치고 있습니다. 19절의 말씀처럼, 주님이 살아계시기에 우리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주님이 살아계십니다. 우리는 우주에 둥둥 떠다니는 먼지가 아닙니다. 그 누구도 외딴섬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이 누추하고 좁은 존재 안에 거하십니다. 잠시 눈을 감고 상상해봅시다. 우리 존재 안에 우리의 몸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주보다 더 크고 무한하신 그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 안에 현존하십니다. 우리는 또한 그 하나님 안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현존 안에 거합니다. 이 놀라운 신비를 상상하고 느끼고 경험해봅시다.

우주보다 더 크신 분이 우리 안에 현존하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무한하고 충만한 사랑을 누리고 경험합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자유를 누리고 두려움 없이 사랑에 이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계명을 지킨다

그렇다면 이 생명과 연합의 신비를 누리는 자들은 하나님을 향해 그리고 세상을 향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15절과 21절에서 '사랑과 계명'이라는 단어로 이 놀라운 약속을 감싸 안고 있습니다. 봉투구조지요 수미쌍관법이라고도 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15절)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그저 가슴 뛰는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언약적 충성'이며, 굳은 의지가 담긴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사랑 없는 순종은 숨 막히는 율법주의가 되고, 순종 없는 사랑은 가벼운 감상주의로 전락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명'은 단 하나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는 사랑이신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거합니다. 그렇게 사랑은 우리의 존재와 삶을 통해 드러나고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계명을 지킵니다. 지켜야 한다는 명령이나 압박이 아니라 사랑하기에 나타나는 반응이요 기대이고 약속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의 말씀을 따라, 그의 계명을 따라 삽니다. 꽃이 피면 향기가 납니다. 사랑 안에 머물면 그의 계명을 지킵니다. 나를 내려놓고 타자를 이웃을 형제자매를 사랑합니다. 그의 계명을 지키고 따름으로 사랑 안에 머물고 하나님의 현존안에 거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함께 머무시듯
우리도 형제자매와 이웃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합니다. 
나와 너의 경계가 사라지고 연대하고 함께 보듬고 함께 더불어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맑은물 가족 여러분. 그러니… 고독에 외로움에 지지맙시다. 세상은 점점 개인주의화되고 점점 단절시키고 고립시킵니다. 누구도 먼저 다가가지 않고 누구도 먼저 손내밀거나 말을 걸지 않습니다. 몸으로 부름받은 교회공동체 안에서도 서로의 경계를 넘지 못하고 자신의 경계를 지키기에 바쁩니다. 
삼위 하나님 안에 머무는 사람들은 삼위하나님 안에서 하나됨을 경험하고 누립니다. 자신의 경계를 허물고 타자를 수용하고 나또한 타자의 경계를 넘어 그와 하나됨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막 섞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연합을 통해 나와 타자가 온전한 모습으로 빚어지고 자유로워짐을 경험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신비한 경험입니다.

세상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합니다(17절). 그렇다면 세상은 어떻게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알 수 있습니까? 바로 21절의 말씀처럼, "계명을 받아 지키는 사람", 즉 일상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해 내는 우리들의 뒷모습을 통해서만 세상을 향해 하나님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 사랑의 실천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지금 여기에서 평화의 다리를 놓는 일이 바로 새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환대하기 위해 두 팔을 벌리고 먼저 다가가는 것, 함께하는 공동체를 위해 정성껏 자리를 마련하고, 함께 모여 진실한 대화를 나누는 것, 공동체의 아픔을 보듬는 그 모든 발걸음이 바로 보이지 않는 성령님을 세상에 보여주는 거룩한 표적(Sign)이 됩니다. 우리가 서로의 곁을 지켜주는 '작은 보혜사'가 될 때, 우리 사회에 깊게 드리운 절망의 장막은 거두어지고, 그리스도의 샬롬이 나타날 것입니다.

맺음

우리는 결코 버려진 고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결코 우리를 고아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여러분의 깊은 한숨 곁에 서 계십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부활의 생명이 우리 안에 숨 쉬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받고, 서로 사랑하며, 계명을 지키며 살아갈 때, 세상은 우리를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합시다. 그러면 알게 될 것입니다. 알게 되면 더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더 사랑하면, 예수님이 자신을 나에게 우리에게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것이 이 본문이 우리에게 약속하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