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제사가 아니라 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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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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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둘째주일을 지나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함께 하시는 성령하나님을 기억하며 성령을 좇아 살아가는 맑은물 가족이길 바랍니다.

아울러 6월 5일 환경의 날을 맞아서 환경주일로도 지키는 날입니다.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지구환경을 생각하며 조금 불편하더라도 조금 더 나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삶이길 바랍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우리 삶에서 어떤모습으로 나타나야 할까요?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고 나타나야 할까요? 갑자기 참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것 같습니다.

주일성수-곧 예배를 빠지지 않고 잘 드리는 것, 성경 읽고 기도생활하고 바르게 사는 것, 교회 공동체를 중요하게 여기고 세워가는 것, 십일조와 헌금생활을 잘하는 것… 
이런 것들이 어떻게 보면 신앙생활의 한 모습이고 하나님을 믿는 삶의 한 단면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신앙생활, 하나님을 믿는 삶을 잘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 신앙생활,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 예수님의 말씀하신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은혜를 율법으로 바꾸는 이유들

호세아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러했고,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파 사람들도 그러했고, 오늘 우리시대의 그리스도인들도 동일하게 반복적으로 저지르는 실수와 잘못은 은혜를 율법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제사로 변질시키는 것이 아닐까요?

주일 성수를 잘 지키면, 예배를 빠지지 않고 잘 드리면… 괜찮은 그리스도인으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안주합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생활을 잘하고 있으면 나름대로 하나님과 가까워진 것 같다는 착각을하기도 하고 자신의 신앙에 만족해 합니다. 
거기다가 교회에서 봉사를 하거나 무언가 희생을 하면 비교 아닌 비교를 하며 저 사람보다는 낫다는 자부심이 생기기도합니다.

1.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했던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은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율법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은혜는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역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은혜는 우리에게 엄청난 위로와 용기와 기쁨을 주지만 철저한 은혜를 대면하고 직면하는 자리에 서면 우리는 어쩌면 그 은혜를 거부하거나 견디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은혜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내게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 내게는 스스로 나를 구원할 그 어떤 가능성이나 능력이 없다”는 철저한 영적 파산 선고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했던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자존심이 강한 자기중심성은 이 은혜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견디지 못합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철저한 무능을 인정하기 보다, 
차라리 내 수고와 땀을 바쳐서 하나님과 당당하게 ‘거래’하고 싶어 합니다. 
은혜를 율법으로 바꾸고 헌신과 희생과 봉사는 거래로 바뀝니다. 
집나간 둘째 아들이 돌아와 잔치를 여는 아버지를 받아들일 수 없고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나를 위한 은혜는 좋지만 타인을 위한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위한 은혜는 견디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며 같이 식사하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바리새인과 같습니다. 


2. 피조물인 인간이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을 떠났기에 가지는 실존적인 불안이 있습니다. 은혜와 사랑은 본질적으로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수동적’인 것입니다. 
갑없이 주어지는 은혜 앞에서, 사람은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모릅니다. 측정 가능하고 내가 무언가 통제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에 어려움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반면 율법과 제사는 매우 구체적이고 측정 가능합니다. 
주일성수, 십일조, 새벽기도, 큐티, 성경읽기, 기도 등의 행위들은 나의 신앙과 구원을 내가 스스로 통제하고 있다는 환상과 안도감을 줍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절대적 긍휼에 내 삶을 온전히 내어맡기는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하고, 계산 가능하고 측정가능하고 눈에 보이는 종교적인 시스템의 틀 안으로 도피합니다.

사람의 실존적인 불안은 은혜와 자비를 통제가능한 종교적인 시스템과 율법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3. 결국 이런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했던 인간의 본성과 그결과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인간의 실존은 끊임없이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며 경계를 만들고 우월감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려 합니다. 
율법은 필연적으로 ‘지킨 자’와 ‘지키지 않은(못한) 자’의 경계를 선명하게 긋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에 집착한 결과 그 율법을 통해 경계를 짓고 세리와 창녀 같은 ‘타자’를 정죄하고 배제함으로써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과 저들보다 우월하다는 거룩함을 돋보이게 만들었습니다. 자신이 지킨 도덕적 우위를 통해 그렇지 못한 이들을 평가하고 정죄하고 비난하게 됩니다. 은혜를 율법으로 치환하고 그 결과 경계와 배제와 차별을 정당화하는 삶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라는 호세아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끊임없이 율법이나 종교적인 시스템에 안주하려는 우리의 본성에 대한 경고등이나 표지판이 아닐까요? 
자기본성을 거스르고 타자를 환대하고 자신을 열어 내어주어야 하는 자기부인의 십자가의 무거움을 피하기 위해 종교시스템과 종교행위에 안주하려는 우리를 향해 참된 하나님을 예배하고 신앙하는 삶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이정표가 아닐까요?

오늘 우리 각자에게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호세아서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이 나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내 존재와 삶에 어떤 메시지로 들려지는지 이 말씀 앞에 서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종교생활에 안주하려 하고 있지 않은지?
하나님의 자비, 긍휼, 은혜, 사랑이 나의 존재와 삶에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
오늘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리의 집에 열린 환대의 식탁

오늘 마태복음 이야기에 등장하는 예수님은 경계가 없는 분으로 보입니다. 율법이 정해놓은 규칙을 넘어서는 위험한 분입니다. 부정한것을 가까이하는 파격적인 분입니다. 


예수님은 길을 가시다가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아마도 마태의 집이었겠지요. 그 집에 머물며 그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 앉아 밥을 먹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세관은 착취의 공간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가까이 가기 싫은 피하고 싶은 공간입니다. 예수님은 회당이나 성전이 아니라 가장 세속적이고 타락한 삶의 한 복판으로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는 민족의 반역자요 죄인으로 낙인찍힌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시고, 그의 집에 머물고 그와 함께 식탁에 둘러 앉아 밥을 먹으십니다. 
예수님 당시의 식탁은 “누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인가?”를 규정하는 날카로운 경계선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정결법을 잘 지키는 소위 의인들끼리만 식탁을 공유했습니다. 식탁이라는 분명한 경계선을 통해 자신들의 영적 우월성과 정체성을 공유하고 죄인들 세리들을 철저히 배제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배제의 식탁을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장면이었습니다. 
"어찌하여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과 어울려서 음식을 드시오?”라는 물음은 단순한 물음이 아니라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는 항의이고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협박이고 경고였습니다.

율법에 빠진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죄인들이요 경계를 분명히 하고 거리를 두고 정죄하고 배제해야할 대상이었지만
자비이신 예수님의 눈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자들이요 의사가 필요한 병든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경계를 허물고 그들과 가까이 하시고 이름을 부르시며 그들을 식탁으로 초대하시고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삼아주십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라는 배제의 식탁을 엎으시고
누구든지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하여 나아온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환대의 식탁을 여셨습니다.

도무지 용납할 수 없다는 항의를 하러온 바리새인들을 향해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율법의 지배가 아니라 자비의 지배
배제의 식탁이 아니라 환대의 식탁이 열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율법으로 변질시킨 바리새인들은 경계를 짓고, 그 경계안에 안주하며 배제와 정죄를 통한 자기 정당성을 지키고 기득권을 유지해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자비는 이 경계를 허물고 가까이 찾아가시고, 그들을 환대의 식탁으로 부르시고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초대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는 길은 율법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찾아와 나를 따라오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자신의 자리를 털고 일어나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 예수님이 초대하신 환대의 식탁에 둘러 앉은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나라의 백성입니다.

신앙의 삶이란… 종교시스템과 율법을 지켜가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하여 예수님을 따르고 차별없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그 식탁에 둘러 앉는 삶입니다. 은혜에 응답하고 자비에 젖어들고 환대의 식탁에 함께 머무는 삶입니다. 

경계를 허물고

제사가 아니라 자비를 율법이 아니라 은혜와 사랑을 원한다는 말씀을 다시 새겨봅시다. 
신앙의 본질은 종교적 행위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것,
그리고 사랑받는 자이시고 사랑하는 자이시며 사랑 그 자체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본받아 사랑받고 사랑하며 사랑에 자기를 열어 살아가는 삶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나와 이념이 다르고, 
경제적 효용 가치가 떨어지며, 
내 감정에 조금이라도 피로감을 주는 사람을 가차 없이 끊어냅니다. 
다름을 힘들어하고 상처받기 싫어서 스스로 타인과 단절을 시킵니다. 
우리는 '손절의 문화'를 나를 지키는 가장 합리적이고 지혜로운 처세술이라 여기는 사회에 삽니다.

그러나 나와 다른 이들을 불편해하고 어려워서 경계를 짓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타인과 단절된 무균실에 가두지만, 결국 그 고립된 무균실 안에서 극심한 실존적 우울과 영적인 질식사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타자를 향한 긍휼이 메말라버린 사회는 겉으로는 세련되어 보여도, 영적으로는 피를 흘리며 생명력을 잃어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경계를 넘고 세리와 죄인들의 자리에 찾아가고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함께 환대의 식탁의 자리에 둘러앉은 예수님의 모습은 경계와 배제가 아니라 환대와 손벌림과 끌어안음이었습니다.

배제와 차별, 손절이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정답이라고 가르치는 이세상 한가운데서, 우리는 자비하신 하나님을 닮아 자비의 삶을 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제사와 율법이라는 종교적 시스템에 안주하는 삶은 우리를 끊임없이 배제와 차별과 손절이라는 삶으로 이끌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에 내어맡기는 삶, 경계를 허물고 손을 벌리고 환대하는 삶, 자기를 열어 타인을 수용하고 기꺼이 자신의 편안함을 깨뜨리고 불편함으로 나아가는 삶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비로 그 자비의 삶으로 우리를 이끌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머뭅시다. 그 사랑을 기억합시다. 
오늘 내가 가진 것, 성취한 것, 누리는 것, 그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이며 은혜임을 기억하고 고백합시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임을 고백합시다. 
그리고 오늘 내가 마주하고 있는 이들, 사랑하는 가족, 매주 함께 예배하며 식탁에 둘러 앉은 가정교회 식구들, 맑은물교회 가족들, 직장에서 마주하는 이들, 이웃들, 내 삶의 자라에 있는 이들 
이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입은 사람이요 그 사랑이 필요한 사람임을 기억합시다. 나의 삶에서 경계를 허물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흘려보내야 할 사람들 관계는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성찬의 자리에서 우리는 자기 몸을 찢어 우리를 먹이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우리의 존재와 삶을 공동체와 이웃과 타자에게 열어보이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는 이 말씀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존재와 삶에 공명되고 자비의 삶이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