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은 존재 보냄받은 존재-2026년 6월 14일 맑은물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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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수생각-fit 겸손은힘들다 뉴스공장 6월 10일 오프닝멘트
아침에 버스를 타려고 달려가는 외국인을 보았습니다. 삶은 참 고단합니다. 엄마는 아이들의 학원을 등록해 주기 위해 밤을 새웁니다. 삶은 때로 극성스럽습니다. 폭염이 쏟아지는 공사장에서 배고픔을 참으며 빵을 만드는 공장에서 노동자들은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삶은 무섭습니다. 어른들은 늙어 가고 아이들은 미래가 두렵습니다. 삶은 불확실하고 불안합니다. 그렇지만 삶은 숭고합니다. 고단하고 무섭고 때로 바보 같지만 그 모든 시간을 견디며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숭고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숭고한 삶을 살아내는 여러분은 보통 사람이 아니고 영웅입니다.
2026년 6월 10일 뉴스공장 광수생각입니다.
하루하루 숭고한 일상을 살아낸 맑은물 영웅들에게 들려주고 싶어 가져왔습니다. 함께 모여 예배하고 삶을 나누고 밥을 나누는 맑은물 가족이 서로에게 영웅을 일깨워주는 시간이되길 바랍니다.
에스퀼메노이, 에리메노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
삶은 고단하고 극성스럽고 무섭고 두렵습니다. 이렇게나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잘 드러내는 단어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있다’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원문의 단어를 풀어보면 훨씬 더 적나라하고 비참합니다.
ἐσκυλμένοι(에스퀼메노이) — 짐승의 가죽이 벗겨지듯 착취당하고 지쳐버린 상태. ἐρριμμένοι(에리메노이) — 내던져진, 쓰레기처럼 버려진 상태.
원문의 의미는 단순히 피로에 지쳐 축쳐져있는 상태를 훨씬 넘어섭니다. 구조적인 착취에 의해 인간 존엄이 벌거벗기고 찢겨진 상태, 그리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아 내팽개쳐진 버려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민중들이 느꼈던 삶의 무게가 이토록 고통스럽고 무거웠습니다. 로마의 정치세, 헤롯의 궁정세, 성전세와 십일조가 중첩되는 30-40%에 달하는 세금 구조 아래, 삶은 살수록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적인 배타주의가 사람들을 ‘죄인’으로 낙인찍고 소외되고 버려진 삶을 살았던 무리들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도 어쩌면 예수님 당시의 세상만큼이나 무겁고 고통스러운 삶의 연속입니다. 광수생각에서 표현했듯이 삶은 고단하고 극성스럽고 무섭고 두렵습니다. 성적으로, 연봉으로, 아파트평수로 줄세우는 세상에서 우리는 더 나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밀쳐내며 앞다투어 경쟁하는 구조속에서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아갑니다.
이런 세상에서 사람들은 찢어지고 버려집니다. 1. 우리가 사는 세상은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너의 쓸모를 증명하라’고 요구합니다. 사람 자체가 가치있고 존귀하다. 삶은 숭고하다고 말하지 않고 존재가치가 아니라 기능적 가치 쓸모의 가치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 쓸모가 다하는 순간 가차없이 버려진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차가운 세상에 우리는 삽니다.
2. 스스로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를 착취하는 삶을 삽니다. 더 나은 자리, 더 안전한 미래를 차지하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를 채찍질 합니다. 성취가 곧 너라는 메시지는 끝없는 자기개발과 도달할 수 없는 완벽함과 성과를 얻기 위해 내달리다가 거기서 조금만 밀려나면 깊은 우울과 번아웃을 경험합니다. 스스로 ‘소진된 자아’를 마주합니다.
3. 끊임없이 경쟁하는 사회속에서 우리는 이웃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고립된 삶을 삽니다. 경쟁과 각자도생의 구조속에서 타인은 더 이상 함께 짐을 져주는 이웃이 아니라 내가 밟고 올라서야하는 경쟁자이거나 나를 위협하는 잠재적 적이 됩니다. 타인에게 곁을 내어줄 여유조차 없어져 버립니다. 우리는 군중 속에 있으면서도 철저히 혼자인 것처럼 느기며 고독한 존재가 됩니다.
광수생각에서 “삶은 고단하고 극성스럽고 무섭고 두렵다”고 표현했다면 성경은 이런 세상에서의 삶을 사는 우리들의 모습을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있다”라고 표현합니다. ‘에스퀼메노이’-짐승의 가죽이 벗겨지듯 착취당하고 지쳐버린 상태, ‘에리메노이’-쓰레기처럼 버려진 상태가 오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
성경은 우리 인간을 착취하고 쓸모없어지면 버려지는 존재로 말하지 않습니다. 세속 사회가 인간을 착취하고 쓸모가 다하면 가차없이 내팽개치는 쓸모의 존재로 여기지만 성경은, 아니 하나님은 사람 자체를 존귀하고 귀하게 여기십니다.
1. 출애굽기 ”내가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나를 위해 데려온 것을 보았느니라" (출애굽기 19:4)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을 구출하시고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시내산에 도착한 직후에 모세를 통해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430년간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하던 히브루(별볼일 없는 사람들, 나그네, 이주민, 주변부) 사람들을 자유를 주시고 하나님 백성 삼으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비슷한 이미지가 신명기 32:11-12에도 사용됩니다. 독수리가 새끼를 날개에 업어 나르듯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렇게 이끄셨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의 이런 시적인 표현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신 능력과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압제에서 구원하셨는가를 잘 보여주는 메타포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수리처럼 거대하고 든든한 당신의 날개를 펴서 그들을 받으시고, 당신의 깃털 위에 그들을 업으셔서 구원하신 위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실제로 히브리인들은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열가지 재앙과 홍해 앞에서 그들은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고 광야로 약속의 땅으로 이끌림을 받았을 뿐입니다.
아무것도 아니던 별볼일 없던 노예 히브루는 그렇게 하나님의 전적인 권능과 사랑으로 구원을 입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권능과 사랑으로 하나님의 백성, 거룩한 나라요 제사장나라로 택함을 받았습니다.
2. 시편 “그가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의 것이요, 그의 백성이요, 그가 기르시는 양이다.” 시편 100:3 시편의 시인은 사람의 존재가 그냥 우연히 생겨난 아무런 가치 없는 존재가 아니라 삼위하나님이 지으시고,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백성이요, 선한목자 하나님이 돌보시는 양떼라고 노래합니다. 미술작품에 유명하고 뛰어난 작가의 낙관이 찍혀있다면 그 작품의 가치는 어마어마해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존재 심연에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하나님이 돌보시는 이라는 낙관이 찍혀 있습니다. 시편 23편에서 노래하듯이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 존재를 귀히 여기시고 돌보시며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3. 로마서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로마서 5:8 우리의 어떠함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세상은 사람의 효용가치 때문에 사람의 가치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엉망이었을 때, 나 조차도 나를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수치스럽고 사랑할 수 없을 때, 나도 나를 포기하고 싶을 때, 하나님은 그런 나를 위해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맞바꿀 정도로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 가운데 한없이 넘치도록 충만하게 부어졌습니다. 우리 안에 그 한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흘러넘칩니다. 믿음이 흔들리고, 어려움이 닥치고, 절망적인 자리에서도 십자가에서 우리 존재를 향해 한없이 가치있다, 보배롭다. 존귀하다고 하신 그 사랑이 오늘도 우리를 살게 합니다.
4. 마태복음 목자없는 양 같이 에스퀼메노이, 에리메노이/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진이들을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십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그저 ‘아이고 불쌍하다’는 수준이 아닙니다. “애가 끓는다”는 표현 들어보셨지요. 이 ‘애’는 창자입니다. 애 끓는다는 표현은 창자가 끊어지듯 고통을 느낀다는 의미입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성경의 원어의 표현도 똑같은 표현입니다. σπλαγχνίζομαι(스플랑크니조마이)는 창자가 뒤틀린만큼 깊은 연민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상대방의 고통을 내 온 몸으로 함께 고통하며 공감하는 깊은 연민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만난 사람을 향해 느꼈던 마음과 집나간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에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목자없는 양같은 이들,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진, 몸과 마음이 찢어져 너덜너덜해진 이들, 그 누구도 내 맘 알아주지 못할 것 같이 고립된 이들을 향해 σπλαγχνίζομαι(스플랑크니조마이) 불쌍히 여기시며 공감하시고 연민을 가지십니다.
사람을 효용가치로만 판단하는 세상에서 아픔과 고통과 괴로움은 지워야 할, 숨겨야 할 회피하게 되는 무엇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람의 모든 것을 아시고 공감하시는 예수님은 우리가 겪는 아픔과 고통과 괴로움에 여과없이 함께 하시고, 함께 아파하시고 같은 자리에 함께 서십니다. 어떤 백마디 말의 위로보다 같은 마음으로 곁을 지키고 함께 눈물 흘리는 것이 위로와 힘과 격려가 되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그렇게 같은 마음으로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입니까?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는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아니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푸신 은혜와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있습니까? 어미 독수리가 새끼 독수리를 그 큰 날개로 등에 업어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으신 존재,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이 돌보시는 양떼입니다. 가장 비참하고 비통한 상태 일지라도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십니다. 아무도 모를 것 같은 나의 아픔과 고통을 이해하시고 공감하시고 함께 아파하십니다.
나는 우리는 그런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한없는 능력과 사랑으로 구원받은 존재. 하나님께서 그렇게 아끼시고 귀하게 여기시고 존귀하게 여기고 돌보시는 존재. 나 조차도 나를 포기하고 싶은 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건없이 자신을 내어주기까지 사랑을 입은 존재. 예수님의 의해 나의 마음을 나보다도 더 잘 이해하고 아시고 공감하신 바된 존재입니다.
이것이 나입니다. 이것이 우리입니다. 세상에서는 별 가치없이 여겨질지 모르나 우리는 한없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존재입니다. 돈이 좀 없고, 백도 없고, 삶이 고단하고, 뭐하나 맘대로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입은 존재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들, 성령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바된 존재입니다. 내 안에 예수가 사십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존재합니다.
존재됨이 자유롭게 한다.
이 존재됨이 이 정체성이 우리를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합니다. 어려움과 환난을 만날 때 인내하며 소망을 붙들게 합니다.
심리학에서 ‘안정애착’이라는 개념이 있다고 합니다. 아주 건강하고 이상적인 인간관계 맺기 방식입니다. “나는 사랑받을 가치가 있고, 타인은 믿을 만하다”라는 단단한 중심이 자리잡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보거나 잘보이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편안하게 관계를 누리고 친밀감을 나눕니다. 누군가에게 의존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홀로 있는 시간에도 불안해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감정과 원하는 바를 솔직하고 부드럽게 표현할 줄 알고, 다른 사람의 감정에서 잘 공감합니다. 힘들거나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주저앉지 않고,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고, 툴툴 털고 일어납니다.
주로 어릴적 부모님으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고, 일관된 반응으로 양육된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형성된다고 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어릴적 육신의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과 안정된 정서적 교감을 누리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안정애착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이들이 대부분이지요. 가정교회를 하면서 더 깊은 관계로 친밀감을 나누고 누리지 못하는 하나의 이유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신앙이 성장하고 인격이 자란다는 것은 어쩌면 안정애착이 잘 형성되는 사람으로 변화하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눈치보고 주눅들고 안절부절하고 매달리고 분노하고 집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조건없이 부어지는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과 모든 상황에도 공감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면 알수록 우리는 우리를 얽어매는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 머물고 하나님이 어떻게 나라는 존재를 아낌없이 사랑하는 지를 경험하면 할수록 우리는 사랑받고 사랑하는 삶에 더 자연스러워집니다. 이 사랑이 우리 안에 있음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어려움과 위기를 만날 때 인내하고 이겨낼 힘을 얻습니다. 한 없이 무가치한 나를 사랑하셨던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깨달을 수록 우리는 동일하게 나와 다르고 나에게 무례하게 대하고 상처입힌 사람들까지도 참고 인내하며 용납하고 수용할 수 있는 자리로 나아가게 합니다.
숫자로 줄세우는 세상에서 숫자 앞에서 늘 작아지고 움추러듭니다. 성적으로 연봉으로 아파트 평수와 가격으로 통장의 잔고와 노후연금의 숫자 앞에서 불안해하며 염려합니다. 관계가 꼬이고 오해가 쌓이고 이해받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을 때 분노하고 비난하고 자존감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나의 계획이 실패하고,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고, 삶위 뒤죽박죽 꼬이고, 위기와 어려움이 닥쳐오는 순간에 좌절하고 낙담하고 염려하며 숨고 싶어집니다.
에스퀼메노이, 에리메노이 한 세상에서 우리의 존재는 작아지고 움추러들고 흔들리며 주저앉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나! 하나님 안에 있는 나,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입은 나, 하나님이 이해하고 계시고 공감하고 계심을 아는 나,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고 하나님께서 이끄심을 믿고 바라는 나는 이 모든 것에서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자유와 평화를 누립니다.
매 주일, 우리의 예배와 만남과 교제는 이것을 확인하고 기억하고 기념하며 증거합니다. 에스퀼메노이, 에리메노이한 세상에서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존재임을, 너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존재임을, 우리가 바로 그런 존재임을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6월 10일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에서 이광수님이 오프닝멘트로 이야기하며 우리의 삶을 숭고하다고 가치있다고 아름답다고 일깨워주고 당신이 바로 그 삶을 살아내는 영웅이다라고 말해주듯이 우리는 매 주일, 하나님 앞에 서는 예배의 자리에서, 그리고 서로 마주하는 대화와 눈빛에서, 함께 나누는 식탁의 교제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존재임을 우리가 하나님이 지으시고 돌보시고 이끄시는 존재임을, 나와 너의 말 못하는 그 마음 깊은 어려움을 주님이 다 알고 공감하고 계심을, 말해주고 일깨워주고 기억나게 하고 확인하는 자리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만남과 모임은 세상살이 힘들고 괴로움을 하소연에만 그치는 자리가 아니라 그럼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존재임을 보배롭고 존귀하고 아름다운 존재임을 기억나게 하고 확인하는 자리와 시간입니다.
오늘 우리의 만남이 모임이 서로가 서로에게 우리의 존재됨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일깨워주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서일과에 각각의 본문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깊이 새기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보냄받은 제사장들
하나님의 사랑은 경계 안에 가둬둘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움직이고 퍼져나가고 흘러넘칩니다. 별볼일 없는 히브루 이집트 노예를 불러내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제사장 나라로 세우십니다. 세계 가운데 열방 가운데 하나님의 드러내고 나타내는 제사장나라로 세우십니다. 추수할 일군을 보내어달라고 청하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은 친히 12명의 제자를 세우시고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상 가운데로 보내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며 거저받았으니 거저 나누라고 말씀하십니다. 조건없이 관대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그 사랑을 조건없이 관대하게 나누라고 말씀하십니다.
매 주일 예배 후 우리는 우리의 삶의 자리로 보냄을 받습니다. 우리의 일상의 자리에서 동일하게 경쟁하고 파편화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은 존재로서 사랑하는 존재로 살도록 보냄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삶을 삽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존귀하게 여기시고 돌보시고 인도하셨기에, 나도 상대방을 경쟁자가 아니라 인격체로 바라보며 관대함으로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원수되었을 때, 죄인되었을 때 나를 위해 죽으셨기에, 나도 때론 나를 내려놓고 희생하며 참고 인내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통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고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책 한권을 소개하며 말씀을 맺겠습니다. 헨리 나우웬의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라는 책입니다. 책소개에 나오는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존재 자체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경쟁하듯 증명하며 살아 할 고통스러운 세상이 우리가 직면해 있는 현실이다. 어떻게 하면 사랑하며 사랑받는 삶으로 매순간을 채울 수 있을까?
헨리 나우웬은 예수님이 ‘사랑받는 자’라는 신분을 받은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사랑받는 자라는 새로운 존재로 부르심을 입는다고 말한다. 그는 사랑받는 자란 누구이며, 사랑받는 자로서의 삶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며,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모든 이들이 이 책을 읽고 예수님처럼 선택받는 자로, 축복받는 자로, 상처받은 자로, 나나우어 주는 자로 살아 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
어쩌면 오늘 설교의 내용을 잘 담아내고 있는 것이 이 책일 것 같아 소개합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에스퀼메노이, 에리메노이한 세상에서 사랑받는 자,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는 맑은물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