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받을 용기
보기 설정
본문
Celebration

아들러의 심리학 『미움받을 용기』는 이런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다른 메시지를 말하고 있지만 그중 하나는 이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억지로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당당하게 살아갈 용기입니다. 내가 내 삶을 올곧게 살아갈 때 누군가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숙제이지 나의 숙제가 아닙니다. 모두에게 사랑받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내가 살아야 할 삶을 살면 됩니다.
신앙의 삶에도 이런 용기가 필요합니다.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물론 배려는 필요합니다. 배려와 눈치는 다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믿는 바를 삶으로 살아내는 것. 오늘 말씀은 바로 신앙의 삶에서 미움받을 용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 피할 수 없는 갈등과 미움-두려움은 마주해야하는 것.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순간, 우리의 신분이 바뀝니다. 죄인에서 의인으로, 죄의 지배에서 성령의 지배로, 세상 백성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가치와 방식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존재론적 변화는 필연적으로 갈등을 가져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나를 미워했으니, 너희도 미워할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집주인과 종의 비유를 드십니다. 히브리어로 '집주인'은 '바알즈불(주거의 신)'인데,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이것을 '바알세불'로 비틀어 예수님을 귀신의 왕으로 조롱하며 비방했습니다. 오늘날 식으로 말하면 '국회의원'을 '국해의원'으로, '교수'를 '괴수'로, '목사'를 '먹사'로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조롱을 넘어, 프레임 자체를 바꾸어버리는 악의적인 공격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살리신 생명, 내쫓으신 귀신, 드러내신 하나님 나라를 그들은 귀신의 일로 뒤집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하나님나라의 역사를 귀신의 왕 귀신의 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집주인이신 예수님께도 이런 공격이 가해졌다면,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은 얼마나 더 심한 비난을 감당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갈등과 고난을 피할 수 없게 합니다. 32절 이후를 보면 세 가지 차원의 갈등이 등장합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세상과의 충돌을 만듭니다. 가장 친밀한 가족 관계 안에서도 신앙은 갈등의 씨앗이 됩니다. 그리고 내가 져야 할 십자가, 나 자신을 부정해야 하는 싸움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가족이 건강하고, 일이 잘 풀릴 것이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오히려 더 많은 불편함, 포기, 오해, 인내를 요구합니다. 거룩하게 살려 할수록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는 소외와 불편함을 만나고, 타인을 위해 희생할 수록 한계와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십자가 없는 부활을 말하지 않습니다. 헛된 위로나 장밋빛 미래만을 속삭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갈등과 고난이 닥칠 때, 이상히 여기지 맙십다. "올 것이 왔구나.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제대로 살려 하니 당연히 마주해야 할 것이 왔구나" 하며, 당당히 마주합시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말고 미움받을 용기를 가지고 예수님의 뒤를 꿋꿋이 따라 걸어갑시다.
2. 두려움의 방향 전환 — 하나님을 경외함
생존이 위협받을 때, 상황이 불확실하고 통제되지 않을 때, 관계가 끊어지고 사회에서 배제될 때, 사람은 두려움을 느낍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이 가장 두렵습니까? 나를 움추러들게 하고, 놓칠까봐 안절부절하고, 실패할까 두려워지는 그 무엇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몸은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도 몸도 둘 다 지옥에 던져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마태복음 10:28)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을 없애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두려움의 방향을 바꾸라고 하십니다. 사람과 세상의 것을 향한 두려움에서, 하나님을 향한 경외로 전환하는 것이 두려움을 이기는 열쇠입니다. 두려워하지마 두려워하지마 두렵지 않아 두렵지 않아를 되뇌이는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가장 큰 두려움, 가장 무거운 경외감에 사로잡힐 때 다른 상대적인 두려움이 아무런 힘을 못쓰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1990년 보이저 1호가 60억 킬로미터 밖에서 찍은 지구 사진을 '창백한 푸른 점'이라 불렀습니다. 광대한 우주 속에서 지구는 햇빛 속을 떠도는 희미한 먼지 티끌에 불과합니다. 우주의 그 거대함 앞에 서면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온 우주의 창조자이시고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향한 압도적인 경외심이 우리 안에 자리 잡을 때, 사람들의 시선도, 가난도, 죽음도, 세상의 권력도 상대화됩니다.
세상이 주는 두려움은 우리를 짓누르는 '공포(Terror)'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은 피조물이 창조주 앞에 서는 '거룩한 경외(Awe)'입니다.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던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나를 짓누르던 세상의 위협이 창조주 앞에서는 온 우주의 심판자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닝믈 깨닫게 됩니다. 이 순간 우리는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3. 두려움의 자리에서 하나님은…
예수님은 가장 두려운 최종적인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을 말씀하신 직후, 곧바로 참새 이야기와 머리카락 이야기를 덧붙이십니다. 이 연결이 참 놀랍습니다.
"네 영혼을 영원한 멸망에 던지실 수 있는 그 위대하고 두려운 분이, 사실은 네 머리카락 하나까지 세실 만큼 너를 사랑하시는 따뜻한 ‘아버지'이시다."고 말씀하십니다.
참새는 당시 시장에서 가장 값싸게 거래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보잘것없는 참새조차 아버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허락'은 단순한 허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동행의 언어입니다. 함께함의 언어입니다. 참새가 땅에 떨어지는 그 순간에도 아버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미움 속에 고통받을 때, 하나님은 멀리서 허가하시는 제3자가 아니십니다. 세상의 미움과 조롱, 고통과 고난의 한가운데에 친히 함께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신다는 표현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온전한 앎의 선언입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그 상황을 선으로 이끌어가고 계십니다.
어려움이 닥칠 때 우리는 무가치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동행과 세밀한 돌보심이 가장 가까이 임합니다. 우주에서 가장 두려우신 분이 내 작고, 보잘 것없는 존재와 삶에 함께 하시고 돌보신다는 이 믿음이 두려움의 자리에서도 미움받는 순간에도 용기를 가지고 믿음의 길을 걷게 하는 힘과 위로가 됩니다.
4. 두려움의 자리에서 우리는…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 사람을 시인할 것이다." (마태복음 10:32)
'시인하다'는 헬라어 **호모로게오(ὁμολογέω)**라고 합니다. '같은(호모)'과 '말(로고스)'이 합쳐진 말로, '공개적으로 동일시하다', '법정에서 누군가의 편에 서서 증언하다'라는 뜻입니다.
일상에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최후의 심판 자리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변호인이 되시는 근거가 됩니다. 반대로 일상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며 살아가면, 하나님 앞에서도 우리가 부인될 것입니다.
반대를 직면하는 자리, 미움 받는 순간, 생존의 위협과 관계의 단절과 불확실성으로 내몰리는 자리에서도 예수를 주라 고백하며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 호모로게오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것은 생존의 위협이었습니다. 황제를 주로 섬기는 로마 사회에서, 유대교 공동체 안에서, 예수를 주라 고백하면 고립되고 생계와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는 신앙 고백 자체로 생존이 위협받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살아갈 때 따라오는 것들이 있습니다. 가치관의 충돌, 관계의 어려움, 손해보는 것, 뒤처지는 듯한 느낌.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편에 서는 것,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되는 예수를 시인하는 것, 호모로게오하는 것, 미움받을 용기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에, 그 하나님이 함께하시기에, 그 하나님이 세밀하게 돌보시기에, 우리는 관계가 어려워져도, 손해를 입어도, 뒤처지는 것 같아도 예수를 선택하고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살아가야합니다.
5. 가장 가까운 관계일지라도…
세상으로부터 미움받을 용기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십니다. 세상으로부터의 미움은 감당할 수 있지만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도 미움받는 자리로 우리를 데려가십니다.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러 왔다." (마태복음 10:34-35)
참 당혹스러운 말씀입니다. 가족은 우리에게 가장 따뜻하고 안전한 울타리여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도 갈등이 생길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가족 관계를 파괴하러 오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깊어질수록, 가장 가까운 관계와 가족이 때로 그 길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냉정한 현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보십시오. 불의한 일에 타협하지 않으려 할 때, 가족이 "그냥 눈감으면 되지 않냐"고 말합니다. 신앙의 원칙을 지키려 할 때, 가족이 "너만 손해 보는 거야"라며 설득합니다. 공동체와 이웃을 위해 무언가를 내려놓으려 할 때, 가족이 "우리 가족 먼저 생각해야지"라고 붙잡습니다. 이 말들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에서 나오는 말들입니다. 그렇기에 더 어렵습니다.
가장 가까운 관계와 가족을 아끼고 사랑하고 돌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우선에 둘 수 없습니다. 가장 가까운 관계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걸림돌이 될 때, 그 관계 안에서 불화와 오해를 감수하면서도 예수님의 길을 걷는 것. 이것이 가장 가까운 관계와 가족 안에서 요구되는 미움받을 용기입니다.
이 자리가 어쩌면 가장 힘든 자리일 수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에게 미움받는 것은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해받고, 걱정을 끼치고, 때로는 갈등을 만드는 것은 다른 차원의 아픔입니다. 예수님도 사랑하는 가족들로부터 미친것 아니냐? 귀신들린 것이 아니냐?는 오해와 반대를 겪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삶은 가장 가까운 관계와 가족들에게서도 미움받을 용기를 요구합니다.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우선이 될 수 없고, 나이 신앙의 여정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최우선이어야 합니다.
6. 나 자신 마저도… — 십자가의 역설
세상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관계와 가족으로부터 미움받을 용기.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은 가장 깊은 자리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미움받을 용기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다."
1세기 로마에서 십자가는 공개 처형의 도구였습니다. 사형수는 자기 십자가를 직접 메고 처형장까지 걸어가야 했습니다. 본회퍼가 『나를 따르라』에서 말했듯이, 예수님의 "나를 따르라"는 말은 기꺼이 사형수가 될 각오를 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으로 부담스럽게 혼란스럽게 다가왔을까요? 예수님을 따른 다는 것은 세상 제국의 권력과 가치관에 맞서, 하나님 나라에 나의 모든 충성을 바치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자기 목숨을 버리지 않으면 따를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삶에서 오는 여러가지 어려움을 감당한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보다 더 깊은 차원으로 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죄의 본성은 자기중심성입니다. 나를 보호하고, 내 자존심을 지키고, 내 욕망과 안전을 스스로 확보하려는 모든 것에서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입니다. 죄된 본성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따르는 것 때문에 마음에 부침이 있고 갈등이 있고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정한 왕이시기에, 하나님이 나를 돌보신다는 고백 안에 살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나에 대하여 죽고 예수의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이 본문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너희 자아를 붙잡고 있으면 너희 자신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위해 너희 자아를 버리면 비로소 진짜 너희 자신을 찾게 될 것이다."
자기를 구원하려 애쓰는 사람은 결국 모든 것을 잃습니다. 그러나 예수로 인해, 예수를 위해, 예수님 때문에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드리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참된 생명을 얻습니다.
나가며
오늘 말씀은 부담스럽습니다. 세상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가족으로부터, 심지어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미움받을 용기를 가지라 하십니다. 거부하고 싶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길이 진정한 생명으로 이끄는 길입니다.
아브라함은 평생에 걸쳐 하나님을 따르고 알아간 끝에야, 이해할 수 없는 명령 — "네 사랑하는 이삭을 바치라" — 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그 명령 뒤에 오는 생명을 보았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이 자랐기 때문입니다.
세상으로부터, 가까운 이들로부터, 자기 자신으로부터 미움받고 거절당하는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함께하십니다. 머리카락 하나까지 세시는 그 세밀함으로 돌보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죽음으로 생명을 얻는 신비로운 역설의 자리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십자가는 수치스럽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실패도 끝도 아닙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고 이기적인 나에 대하여 죽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영광과 생명을 맛보게 됩니다. 그리고 가족과 이웃과 세상에 진정한 자유와 평화와 생명을 나누는 삶이 시작됩니다.
세상의 위장된 평화에 안주하지 않고, 미움받을 용기를 가지고 기꺼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뒤에 찾아오는 부활의 영광과 생명을 함께 누리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