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작은 위대함

본문

Celebration

이미지1

들어가며 — 물 한 잔의 기억

한여름, 뙤약볕 아래 땀을 흘리며 한참을 걷다가, 누군가 말없이 건네준 시원한 물 한 잔을 받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 한 잔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던지요. 메마른 목만 축이는 것이 아니라, 지친 마음까지 시원해집니다.


가까운분 중에 차재상형님이 있습니다. 아마도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요? 형님과 형수님은 환대를 아주 잘 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느교회의 청년부를 담당하고 떠났는데도 이후에 군대에서 첫 휴가를 나와서 제일먼저 찾는 집이 이집이었습니다. 그만큼 마음다해 상대방을 알아봐주고 환대가 몸에 벤 형님부부입니다. 
지금은 망미동 골목에서 작은 카페를 하고 있는데 동네 사람들이 형님부부의 환대를 알아보고 잠시 머무는 공간이 되고 있습니다. 가끔 이 카페에 가면 제돈 주고 커피를 사먹는거지만 대접받는 다는 느낌이 나고 “뭐주까?”하며 묻는 형님의 물음이 참 다정하고 좋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아니 일상에서 이렇게 나를 반겨주고 환대해주고 나의 상황을 알고 작은 친절을 베푼 사람들이 있다면 한번 떠올려 봅시다. 그리고 그 경험담을 잠시 가정교회에서 나눠봅시다. 누군가가 나를 알아봐 주었다는 것, 바쁜 걸음을 잠시 멈추고 나를 향해 손을 내밀어 주었다는 것. 그 작은 환대 하나가 마음에 위로와 힘이 됩니다.


오늘 예수님은 바로 그 '냉수 한 그릇' 이야기로 한 편의 길고 무거운 설교를 마무리하십니다. 천지를 뒤흔드는 기적도 아니고, 두려운 심판의 선언도 아닙니다. 가장 작고 흔한 물 한 잔. 그런데 그 한 잔 안에, 하늘과 땅이 만나는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비밀을 함께 살펴 보겠습니다.


이 짧은 세 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단어가 자꾸 반복됩니다. 어떤 단어인가요?
‘맞아들이다’라는 말이 무려 여섯 번 나옵니다. 그리고 ‘상’이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오늘 본문의 두 기둥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은 ‘맞아들임’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상’입니다. 이 둘이 만나는 자리에 오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1. 이 말씀이 놓인 자리 — 파송의 마지막 도장

먼저 이 말씀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0장 전체는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세상으로 내보내시는 '파송 설교'입니다. 우리는 몇주동안 지금까지 ‘파송 설교’를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다섯 편의 큰 가르침으로 짜여 있는데, 그중 두 번째가 바로 이 파송 설교입니다.

이 설교가 시작되기 직전, 9장 끝을 보면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처럼 시달리고 헤매는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추수할 일꾼이 부족하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일꾼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여라."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기도하라 하신 바로 그 다음 장면에서, 예수님이 그 제자들을 일꾼으로 세워 직접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늘 저 바깥에서, 누군가 다른 사람을 통해 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은 기도한 우리 자신을 그 응답으로 삼으십니다. "보내 달라"고 기도한 우리를 "네가 가라" 하고 보내십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기도의 내용이 내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하기가 참 꺼려지는^^ 조심스러운 이유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파송의 내용이 결코 달콤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매를 맞을 것이고, 법정에 끌려갈 것이고, 가족에게서도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 설교의 절정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제 목숨을 잃는 자가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칼과 분열과 십자가. 이 무겁기 그지없는 말씀들이 끝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돌연 음성을 바꾸십니다. '맞아들임'과 '상'이라는 가장 따뜻한 말로 이 모든 것을 끝맺으십니다.

저는 이 갑작스러운 전환 자체가 첫 번째 메시지라고 믿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외롭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외로운 길에서도 너희를 맞아주는 한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 사람이 건네는 작은 물 한 잔까지 하늘이 다 기억할 것이라고요. 무거운 사명 끝에 주시는 이 따뜻한 위로,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우리 주님의 마음입니다.

2. 갈등하는 자리 — 세상과 나 사이에서

보냄받은 제자의 삶에는 늘 갈등이 따릅니다. 우리 마음 한쪽에는 세상과 가까이, 좋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미움받고 싶지 않고, 부딪치고 싶지 않고, 모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둥글게 어울려, 평안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 다른 한쪽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는 부르심의 음성이 늘 존재합니다.

이 둘은 자주 충돌합니다. 복음대로 정직하게 살려 하면 손해를 봅니다. 약한 자 곁에 서면 나도 함께 약자 취급을 받습니다. 바른말을 하면 분위기를 깨는 사람이 되고, 양보하면 만만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망설입니다. 믿음을 드러내야 할 자리에서 슬그머니 입을 다물고, 손해를 감수하고 사랑해야 할 자리에서 계산기를 두드립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를, 무례한 이를 언제까지 참고 기다려야 하는지? 베드로의 물음이 우리 안에 차오릅니다. 자기를 내려놓는 일이 손해처럼 느껴질 때, 우리의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워집니다.

예수님은 이 갈등을 결코 모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를 보내시며 가장 현실적인 어려움부터 솔직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두려움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두려움 한복판에서, 우리가 끝까지 붙들 한 가지를 손에 쥐여 주십니다.

3. 질문 — 누가 이들을 맞아들이겠는가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우리가 지금 ‘파송설교’를 함께 나누고 있다고 이야기했지요! 파송하는 자리! 이렇게 적대적이고 차가운 세상에서, 그러면! 도대체 누가? 이 제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들을 맞아들이고 환대하겠습니까? 매 맞고 쫓겨 다니는 사람들, 세상이 보기에 별 볼 일 없고 가진 것 없는 이 작은 무리를, 누가 자기 집 문을 활짝 열어 받아 주겠습니까?

세상의 셈법으로 보면 답은 절망에 가깝습니다. 힘 있는 자, 가진 자, 쓸모 있는 자를 환영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 절망의 한복판에서, 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선언을 하십니다.

4. 그럼에도 — 맞아들이는 사람이 있다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너희를 위해 기꺼이 문을 여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맞아들이다'로 번역된 헬라어 ‘데코마이’(δέχομαι)는, 그저 받아준다는 정도의 말이 아닙니다. 손님을 집 안으로 들이고, 밥상을 차리고, 잠자리를 내어주는 아주 구체적인 환대를 뜻합니다. 여관도 드물고 길도 위험하던 그 시대에, 누군가를 맞아들인다는 것은 자기 안전과 재산을 걸고 그 사람 편에 서는 일이었습니다. 박해받는 제자를 맞아들이는 것은 그래서 단순한 친절이 아니라, 일종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그 사람 곁에 서겠다는 결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여기에 놀라운 연결고리를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맞아들이는 것이 곧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요,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 곧 나를 보내신 아버지를 맞아들이는 것이다”라고요. 
당시 유대 사회에는 '보냄받은 자는 보낸 이와 같다'는 오랜 상식이 있었습니다. 사자(使者)는 보낸 사람을 온전히 대표하기에, 사자를 영접하는 것은 곧 그를 보낸 사람을 영접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 원리 위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가장 작고 연약한 제자 한 사람을 향해 문을 여는 그 평범한 행위가, 사실은 하나님을 향해 문을 여는 거룩한 사건이라고요.

이것은 마태복음 전체를 관통하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18장에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영접하는 사람은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 하셨고, 
25장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은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로 시작해서,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로 끝납니다. 
그 사이에서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와 함께 계신지를 보여 줍니다. 권능과 위엄으로가 아니라, 보냄받은 작고 연약한 한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러니 그 작은 사람을 맞이한 식탁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자리로 바뀌는 것입니다.

5. 상이란 무엇인가 — 정산이 아니라 선물

예수님은 그렇게 맞아들이는 사람에게 '상'을 받는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상'을 오해하면 신앙이 거래로 변질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상의 참뜻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상'으로 번역된 헬라어 ‘미스토스’(μισθός)는, 본래 날품팔이 노동자가 받던 하루치 품삯이었습니다. 그날 받아 그날을 살아가는, 가장 가난한 자의 생존이 걸린 절박한 품삯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품꾼의 삯을 해 지기 전에 주라고 명했습니다. 그가 그 삯으로 그날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상이란 이렇게 일한 만큼 계산해 주는 '정산'이었습니다. 베풀면 갚아야 하고, 받으면 돌려주어야 하는 거래의 세계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시장의 단어를 가져다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성경에서 상을 주시는 분은 고용주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히브리서는 하나님을 가리켜 "상 주시는 분"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상은 정산이 아니라 선물입니다. 로마서는 이것을 날카롭게 대비시킵니다. 죄는 정확히 그 삯을 지불하여 죽음을 주지만, 하나님은 삯이 아니라 '선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요. 죄는 한 푼도 틀림없이 계산하지만, 하나님은 계산하지 않고 거저 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큰 상은 무엇일까요. 어떤 물건도, 어떤 자리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다." 상이 곧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참된 상은 상 주시는 분과의 깊은 사귐, 그분 자신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연합입니다. 온 우주의 창조자시요 마지막날 최종 심판자이신 그분 하나님과의 사귐과 연합입니다. 이 보다 더큰 상이 어디있을까요?

그리고 이 너그러우신 하나님은, 아무리 작은 것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룻기를 기억하십니까. 모압 여인 룻이 늙은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고, 낯선 땅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가운데 묵묵히 이삭을 주울 때, 보아스가 그를 향해 이렇게 축복합니다. 
"주님께서 그대가 한 일에 보답해 주시고, 그대에게 온전한 상을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아무도 보지 않던 한 이방 여인의 작은 충성을, 하나님은 다 보고 계셨고, 끝내 그를 다윗의 증조모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안으로 들이심으로 갚으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 새벽부터 일한 사람에게나 해 질 무렵에 온 사람에게나 똑같이 하루 품삯을 주시는 주인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일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 그 '부당해 보이는' 후하심이야말로, 하나님 나라 상의 본질입니다. 상은 노동의 정산이 아니라, 주인의 너그러움입니다. 
오늘 공정성을 이야기하는 세상에서 상주시는 이 하나님의 상이 가지는 메시지가 우리에게 또하나의 울림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냉수 한 그릇'의 비밀입니다. 예수님은 시장의 언어인 '상'을 빌려 오셔서, 시장의 논리를 완전히 뒤집으십니다. 가장 작은 자에게, 값도 받지 않고, 그저 찬물 한 잔 건넨 그 사소하기 그지없는 행위까지,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확실하게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절대로 그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하시는데, 이 '절대로'는 헬라어에서 쓸 수 있는 가장 강한 부정 표현입니다. 결코, 단 한 번도, 어떤 경우에도 잃지 않는다는 철통같은 보증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엄숙한 도장을 찍으시는 자리가, 거창한 예언자의 상이 아니라 바로 이 맨 마지막, 냉수 한 그릇의 자리라는 것도 참 놀랍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나팔 불며 구제하는 자들을 향해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다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여기 '이미 받았다'는 말은 당시 영수증에 찍던 '전액 수령'이라는 상업 용어였습니다. 사람의 박수를 산 사람은 그 박수를 영수증째 받았으니, 하나님께 받을 것이 남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골방에서 은밀히, 이름 없이 작은 자를 섬긴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친히 갚으십니다. 세상은 큰 것과 보이는 것을 셈하지만, 하늘의 회계장부에서는 가장 작은 환대가 가장 확실하게 기록됩니다.

6. 그러니 담대하게 나아가라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담대하게, 당당하게 하나님 나라를 살고,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복음을 전하고 예수의 제자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드러나고, 하나님이 나타나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증거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너는 복이 될지라"라고 하셨습니다. 복을 받는 데서 그치지 말고, 복이 되어 흘려보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복입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를 흘려보내는 통로입니다. 맑은 샘은 자기가 물을 가두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흘려보냄으로 맑음을 유지합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받은 은혜를 메마른 세상으로 흘려보낼 때, 우리는 비로소 살아 있는 샘이 됩니다. 맑은물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고, 더 나아가 "만물을 충만하게 채우시는 분의 충만"이라고 했습니다.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 공동체가, 사실은 하나님의 충만을 담아 세상으로 흘려보내는 거룩한 그릇입니다. 
매주 먼 곳까지 와서 짧게 예배드리고 가는 불편함과 교회인듯 아닌듯 한 가정교회의 모임과 늘 실패하는 것 같은 우리의 삶일지라도 우리가 교회이고 우리가 주님의 몸이고 우리가 하나님나라를 드러내는 실체입니다. 우리의 작은 환대, 우리의 작은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충만이 세상으로 번져 갑니다.

7. 머뭇거리지 말고 물러서지 말라

물론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적대적이고, 사람과의 관계는 자주 우리를 지치게 하고, 때로는 내 욕망과 나 자신을 깊이 내려놓아야 하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러나 머뭇거리지 맙시다. 물러서지 맙시다. 두려움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지 맙시다.

하나님 나라를 살기를, 복음을 전하기를, 예수의 제자로 살기를 주저하지 맙시다. 우리가 흔들릴 때마다 기억해야 할 단 하나의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를 보내신 분이 우리 뒤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혼자 보냄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의 작은 충성도, 우리가 흘린 작은 땀방울도, 우리가 건넨 냉수 한 그릇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당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당당함은 우리의 능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기억하시는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8. 환대의 공동체 — 맑은물 가족

이 모든 말씀이 마지막으로 우리 자신을 향합니다. 보냄받은 제자도 우리이지만, 그 제자를 맞아들이는 사람도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 이미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서로를 환대하고, 서로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일 때,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일구어집니다. 누군가의 지친 하소연을 끝까지 들어주는 것, 새로 온 한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자리를 내어주는 것, 형편이 어려운 이웃에게 말없이 손을 내미는 것. 우리의 이 작고 사소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환대와 베풂과 내어줌을, 하나님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그 너그러우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상으로 주시고, 마침내 하나님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 교회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맑은물'입니다. 생각할수록 놀라운 이름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냉수 한 그릇, 목마른 길손에게 건네는 시원한 물 한 잔, 바로 그 이름을 우리가 가족의 이름으로 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목마른 세상을 향해, 그리고 목마른 서로를 향해, 냉수 한 그릇을 건네라고 부름받은 가족입니다.

나가며 — 맑은물 한 그릇이 되어

사랑하는 맑은물 가족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주신 부르심은 결코 거창하지 않습니다. 큰 사역도, 대단한 성취도 아닙니다. 우리 곁의 한 사람을 향해 문을 여는 것, 지친 누군가에게 시원한 물 한 잔을 건네는 것, 작은 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 작은 환대 안에서 하늘과 땅이 만납니다. 그 작은 물 한 잔을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마침내 그분 자신을 상으로 주십니다.

적대적인 세상일지라도, 때로 관계가 힘겨울지라도, 나를 내려놓아야 하는 순간일지라도, 머뭇거리지 말고 당당하게 나아갑시다. 제자로 살기를, 제자를 환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맑은물 가족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