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보기 설정
본문
Celebration

1. 삶은 고단하고, 삶의 무게는 무겁습니다
삶은 참 고단하고 무겁습니다. 나이가 들고 보니 부모님의 삶이 참으로 존경스럽고 대단하다고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구멍가게를 운영하시면서 새벽기도를 다녀와 아침 여섯 시에 가게 문을 열고, 밤 열두 시가 되어서야 문을 닫고 정리하셨습니다. 삼시 세끼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세 아들의 도시락을 두 개씩 챙기고, 그런 일상의 연속이었던 부모님의 삶을 생각하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삶은 고단하고, 삶의 무게는 무겁습니다.
노지가정교회를 생각하면 똑같이 고개가 숙여지고 존경스럽습니다. 나이가 들어 아픈 곳이 늘어나고 드시는 약이 늘어간다는 것은, 그만큼 견뎌 오신 삶의 고단함과 무게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큰일을 하지 않으셔도 그저 함께 계시는 것만으로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좋은 선배로, 형님과 누나로, 오빠와 언니로 언제나 함께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맑은물 사람들, 우리 모두가 저마다의 일상을 살아내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느라 애쓰고 수고합니다. 삶은 비교할 것이 못 됩니다. 저마다의 수고가 있고, 저마다의 삶의 무게가 있습니다. 자녀를 양육하고, 직장에서 수고하고, 삶의 자리를 찾기 위해 애쓰고, 고단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맑은물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이 참으로 귀합니다.
이렇게 고단한 일상을 살고 삶의 무게를 감당하다 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쉼을 바라고 안식을 찾게 됩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 식사, 운동이 끝나고 주어지는 샤워,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하는 치맥, 주말에 모여 치는 당구, 일상을 벗어나 휴가로 떠나는 여행. 이런 것들이 삶의 소소한 기쁨이 되고 쉼과 안식이 됩니다. 우리는 쉼과 안식을 찾고 있습니다.
2. 성경은 쉼과 안식의 책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성경은 쉼과 안식의 책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쉼을 주시겠다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창세기는 창조의 완성을 안식으로 그려 놓았습니다. 창조의 마지막이 사람을 지으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곱째 날에 하나님이 안식하시고 창조 세계 전체가 안식하는 것으로 창조를 마무리 짓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에 이 쉼과 안식은 깨어졌습니다. 노동이 수고와 땀 흘림과 고통을 동반하게 되었습니다. 삶이 고단해지고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다.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는 참된 쉼과 안식이 사라졌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그대로입니다. 우리 영혼은 하나님 안에서 쉼을 얻기까지 안식이 없습니다.
그 이후로 성경의 이야기는, 쉼을 주시려는, 안식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안식을 명하셨습니다. 평생 노예로 살던 이들에게 하루를 기억하며 안식하는 것은 놀라운 혁명이었습니다. 귀족들만, 왕들만 누리던 안식을, 이스라엘에 속한 모든 이들이 — 나그네와 종들까지도, 심지어 가축들까지도 — 누려야 했습니다. 안식년, 곧 일곱째 되는 해에는 땅도 쉬어야 했고, 안식년이 일곱 번 반복되어 오십 년째 되는 해에는 희년이라 하여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그야말로 참된 쉼과 안식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쉼을 주시겠다고 초대하시고, 바로 이어지는 12장 안식일 이야기에서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성경의 제일 마지막, 요한계시록의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며 창조 세계 전체가 안식하고 회복되는 이야기로 마무리됩니다.
고단한 삶과 삶의 무게에 지친 이들에게, 성경은 참된 쉼과 안식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그 쉼과 안식을 주시는 분으로, 쉼과 안식으로 초대하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3. 그러나… 사람들은 의심하고, 냉소하고, 거부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의심하고, 냉소하고, 거부합니다.
마태복음 11장은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10장에서 제자들을 파송한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11장에 접어들면서, 예수님의 사역과 그분을 향한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이 나타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정말 오실 메시아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고, 사람들은 요한이 와서 금식하며 곡을 하여도 거부하고, 예수님이 와서 피리를 불고 잔치를 열어도 거부합니다. 냉소적입니다. 무엇을 해도 시큰둥합니다. 자신들의 기대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거리를 두고 평가만 합니다.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된다고 핑계를 댑니다. 그리고 성서일과에는 빠져 있지만,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의 거부와 회개치 않음에 대한 예수님의 탄식이 20절부터 24절에 담겨 있습니다.
첫째로, 요한의 의심을 봅니다. 요한의 의심은 회의적인 의심이 아니었습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입니다. ‘어, 내가 기대하고 생각했던 메시아의 모습이 아닌데?’ 그러면서 예수님께 제자들을 보내어 묻습니다. 그 진지한 물음에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신앙에도 사춘기가 있습니다. 청소년 시절, 우리는 사춘기를 겪으면서 자기가 알던 세상과 실제 세상의 차이를 몸으로 겪고, 그러면서 자기만의 세계관을 형성해 갑니다. 신앙에도 어떤 면에서는 그런 시기가 있습니다. 맹목적으로 믿거나 목회자나 교회가 요구하는 틀에 맞추어 살다가, 자기만의 신앙의 주체성을 세워 가는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우리는 완벽하지 않은 모호함과 역설을 마주하게 됩니다. 내가 알던 하나님, 내가 바라던 교회의 모습과 다른 것을 느끼며 갈등하고, 때로 반항하고, 회의하는 시간을 지나갑니다. 그러나 정직한 질문, 절망, 회의와 고독을 통과하면서 우리는 하나님과 더 깊고 진실하게 만나게 되고, 조금 더 깊어지는 신앙으로 자라갑니다. 레이첼 에반스의 책은 어쩌면 신앙사춘기를 겪으며 씨름하며 성찰한 내용을 잘 기록한 책입니다. 교회를 찾아서, 헤아려본 믿음등은 이런 신앙사춘기를 엿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요한은 신앙의 사춘기를 지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은 그 물음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조용히 표징을 가리키시며, ‘걸려 넘어지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성장통의 시간에, 정직하게 아파하고 질문하지 않고 물러서 버리면, 우리는 냉소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이 둘째입니다.
본문에 ‘장터’라고 나와 있는 이 단어는 헬라어로 아고라입니다. 예전 다음 인터넷에도 ‘아고라’라는 공간이 있었는데, 주로 공론의 장이었지요. 마찬가지로 장터는 광장의 역할을 했습니다. 재판, 상거래, 소식, 놀이, 축제가 펼쳐지던 고대 도시의 공적 중심지가 바로 아고라, 장터, 광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광장에서 아이들이 어떤 곡조에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축제의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고 애가를 불러도 울지 않습니다. 이것은 바로 이어지는 요한의 이야기, 예수님의 이야기에 대한 은유입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자 ‘귀신 들렸다’며 냉소하고, 예수님이 와서 먹고 마시자 ‘먹보요 술꾼이다’며 냉소합니다. 그 어떤 것도 트집 잡아 거부하는 냉소주의입니다.
무엇을 해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참여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해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연락을 하면 연락해서 부담스럽다고 하고, 연락하지 않으면 무관심하고 애정이 없다고 합니다. 비평가로 자리 잡고, 그 어디에도 반응하거나 참여하지 않으면서 평가만 내립니다. 합리적인 척, 똑똑한 척하지만 마음이 얼어붙은 사람들입니다. 신약학자 톰 라이트는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스스로 판관의 자리에 앉아 하나님이 보내신 메신저들이 자기 기대에 맞추어 춤추기를 바라는 교만이라고 꼬집습니다. 자기 기대에 맞추어 모든 것이 움직이기를 바라는 교만한 마음입니다. 책임지는 자리에서 벗어나, 수고하는 이들에 대한 평가만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더 이상 상처받기 싫어서 마음을 닫아 걸어 잠근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기대를 낮추어 상처를 방어하려는 수단입니다. ‘어차피 인간은 이기적이야. 교회가 다 그렇지. 변하지 않아.’ 겉으로는 현실적인 것 같으나, 실은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일하심을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 사춘기의 성장통을 너무 심하게 앓다가 거기서 멈추어 버려, 마음에 쓴 뿌리만 남아 버린 것은 아닐까요?
셋째로,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을 향한 예수님의 꾸짖음을 봅니다.
이 세 고을을 향한 꾸짖음은 그들의 악행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가장 많은 하나님의 일을 경험하고도 반응하지 않고 거부하며 회개에 이르지 못하는 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꾸짖음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오늘날의 신앙인을 향한 경고입니다. 가장 많은 정보와 설교와 은혜가 넘쳐나는데도 계속해서 거부하며 회개의 자리에 이르지 않는, 우리를 향한 경고가 아닐까요? 늘 아버지 곁에 있었지만 아버지의 잔치 자리 초대에는 응하지 않는 큰형의 모습이고, 시간이 가고 신앙의 연수가 쌓여 가지만 변화 없고 성장 없어 마음에 굳은살이 박인 모습이고, 은혜 안에 있는 것 같으나 점잖게, 나이스하게 은혜를 거부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느 자리에 있습니까? 신앙의 물음을 가지고 묻고, 아파하고, 씨름하면서 자라고 있습니까? 아니면 냉소주의에 빠져서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아무런 반응 없이 평가자로만 남아 있습니까? 교회 안에 머물러는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예수님과 멀어져 있는 모습은 아닙니까?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쉼으로 초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쉼으로 초대하십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수고한 이들, 무거운 짐 진 이들 모두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안식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수고하며’에 사용된 단어는 탈진할 때까지 애쓴다는 뜻이고, ‘무거운 짐 진’은 이미 짐에 눌린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고단함과 삶의 무게를 아십니다. 그로 인해 나타나는 의문과 냉소와 무감각함을 아십니다. 예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를 높이십니다. 예수님에 대한 반응이, 은혜에 대한 반응이, 안식과 쉼으로의 초대에 대한 반응이 부정적임에도 불구하고, 광장에서 피리를 부시고 곡을 하며 애가를 부르십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시어, 회의하고 냉소하고 무감각한 우리에게도, 고단한 일상과 무거운 삶에 지친 우리를 향해 쉼으로, 안식으로 초대하십니다. ‘힘들지? 괜찮아, 이리 와. 맘 상하고 괴로웠지? 그래, 알아, 이리 와. 아프고 무서웠지? 그랬을 거야, 이리 와. 여기에 쉼이 있어. 여기에 안식이 있어. 여기에 회복과 자유와 평화가 있어.’ 이렇게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쉼과 안식에 해당하는 성경 원문의 뜻은 ‘멈춤’과 ‘깃듦’입니다.
멈춤은 내가 주인이 아님을 깨닫고 자기 주권을 내려놓는 멈춤입니다. 그리고 깃듦은 하나님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성경의 쉼과 안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자기를 내려놓고 하나님 안에 머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어 주셨다고. 내게로 오라, 나의 멍에를 메라, 나에게서 배워라.
쉼과 안식에 들어가는 비결은 어린아이가 되는 것에 있습니다. 여기 ‘어린아이’로 번역된 원래의 뜻은 말 못 하는 아이, 곧 젖먹이입니다. 아무런 자격도, 축적된 지식도 없는 무력한 존재입니다. 철저히 의존적인 존재입니다. 참된 쉼과 안식은 자기로 채워진 자가 아니라, 텅 빈 채 받는 자에게 열려 있습니다.
매달 첫 주에 우리는 성찬식을 합니다. 성찬의 의미 중 하나는, 우리는 그저 받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베푸신 식탁에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 주시는 분이 주시는 몸과 피를 받습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는 받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안식이 자기가 주인 됨을 멈추는 데서 시작하듯이, 자기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며 두 손을 펼치는 데서 시작합니다. 매 주일 예배의 흐름은, 우리가 주인 되기를 멈추고 시간과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주 되심을 몸으로, 삶으로 고백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 내 삶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내 시간, 내 계획, 내 돈, 내 재능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자리가 매주일 예배 리듬입니다.
바울은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한다며, 이런 자신의 한계를 두고 ‘나는 비참한 사람’이라 한탄합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느냐며 애통해합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살 수 없는, 하나님께 의존적인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애통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오늘 예수님의 초대입니다. 내게로 오너라.
그래서 예수님은 ‘나의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교에서 멍에는 토라, 곧 율법을 의미합니다. 랍비 문헌에는 ‘토라의 멍에를 메는 자에게서 나라와 세상 근심의 멍에가 벗겨진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 멍에’라는 표현을 통해, 참된 토라이신 예수님 자신을 말씀하시고, 그 멍에를 멜 때 쉼과 안식이 주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멍에는 은유입니다. 두 마리 소가 함께 메도록 나무를 깎아 만든 도구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예수님의 인도와 이끄심에 나를 맡겨 드린다는 뜻입니다. 이 멍에가 가벼운 이유는, 그분이 온유하시고 겸손하시기 때문입니다.
성서일과 전체에서 이 온유하신 분이 나타나십니다. 스가랴서에서는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온유한 왕의 통치를 말하고, 시편에서는 쓰러진 자를 붙들어 주시고 거꾸러진 자를 일으켜 주시는 분으로 나타나며, 로마서에서는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라고 호소하는 물음에 ‘내게로 오라’는 답을 주십니다.
쉼과 안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일상에서 도피하는 것도 아닙니다. 참된 쉼과 안식의 근원이신 예수님 안으로 깃드는 것, 그분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신약학자 스캇 맥나이트는 ‘멍에’가 랍비들이 제자들에게 자기 해석의 전통을 전수하던 언어였음을 지적하면서, ‘나의 멍에를 메라’는 말이 곧 ‘나의 제자가 되라’는 뜻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쉼과 안식은 안식으로 초대하시는 예수님 안에 거하면서, 그분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나에게서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배우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배움은 알고, 연습하고, 습관으로 만들고, 성품으로 형성되고, 존재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제자의 과정입니다. 배워야 합니다. 훈련해야 합니다.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성품으로 형성되고 존재가 변화되는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멈추면 안 됩니다.
성경 읽기와 기도하기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가장 기본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고차원적인 것입니다. 성경 읽기는 읽음을 통해 도리어 내가 읽히는 작업입니다. 기도는 말하기에서 듣기로, 간구에서 응답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경 묵상과 기도가 우리 삶에 자리 잡게 합시다. 가정교회, 맑은물의 미래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삶을 나누는 것에서 말씀으로 비춘 삶을 나누는 것으로, 마음을 털어놓는 것에서 기도로 성찰되고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대화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맑은물에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오는 괴리가 있습니다. 의문이 듭니다. 현실적인 어려움과 갈등이 있습니다. 그럴수록 정직하게 묻고 답하고 함께 씨름하는 자리로 나아갑시다. 받은 상처가 냉소주의가 되지 않도록, 현실적인 판단과 고려가 교만으로 자리 잡지 않도록, 은혜의 자리가 굳은살이 되지 않도록, 오라고 초대하시는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합시다. 주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고 익히고 훈련하며 성장하는 맑은물이 됩시다.
5. 부족하다는 메시지를 넘어, 초대에 응답합시다
우리는 늘 부족하다는 메시지 속에 삽니다. 세상의 메시지는 늘 우리에게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우리 스스로도 그 이야기에 현혹되어, 스스로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탈진하도록 살아갑니다. ‘일주일 동안 이렇게 힘들게 살았는데, 뭘 더 하라고 하지 마라.’ 말씀 묵상도, 기도도, 교회의 예배도, 나눔도 만사가 귀찮게 느껴지고 부담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젖먹이와 같이 자기를 비우고, 예수님께 철저히 의존하는 모습으로 나아오는 이들에게, 쉼과 안식의 비밀이 열립니다. 쉼과 안식과 여유를 상실한 세상에서, ‘내게로 오라’ 하시는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하고, 주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는 과정을 통해, 참된 쉼과 안식을 맛보고 누리는 맑은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쉼과 안식이 없는 세상에, 그 쉼과 안식을 드러내는 맑은물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