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헤아리는 낭비
본문
Celebration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이 한 문장을 듣기위해 참 긴 시간을 맘 졸이며 보냈습니다. 장장 122입니다. 여전히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힘과 잘못된 결정을 바로잡을 수 있는 지혜가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길거리에서 밤을 지새우며 지켜온 수많은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맑은물 가족 여러분 ‘폭삭 속았수다’. 오늘 마음 같아서는 정관교회 마당에서 돼지라도 잡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런 마음으로 예배하고 서로에게 위로와 격려를 보냅니다.
최근 사순절을 보내며 성서일과의 말씀은 일정은 흐름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사순절 세번째 주일에는 회개하는 삶에 대해 묵상하며 회개의 필요성을 이야기합니다. 사순절 네번째 주일에는 회개하는 삶에 주어지는 축복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오늘 사순절 다섯번째 주일의 성서일과의 말씀은 앞으로 나타날 하나님의 일을 기대하며 사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듯 합니다. 이사야의 말씀은 이전의 수치를 기억하지 말고 앞으로 사막에 길을 내는 하나님의 일을 기대하게 합니다.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꿈꾸는 것 같았다는 시편의 말씀 또한 새로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게 합니다. 바울은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삶을 사노라 고백합니다. 오늘 마리아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준비하며 자신의 가장 소중한 향유를 깨뜨려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합니다.
일상의 고단하고 팍팍한 삶을 살지만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이루실 새일을 소망하며 가슴이 뛰는 맑은물이길 기대합니다. 그 뛰는 가슴으로 우리의 소중한 것을 하나님의 새일을 위해 내어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라고 비난하는 가룟유다의 말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
마리아는 어떤 마음으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을까요?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서 알 수 있듯이 마리아는 어떻게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할 마음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당시에 우리가 저 잔치자리에 앉은 제자무리들 중 한 사람이었다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오늘 이 질문을 가지고 성경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저자는 우리에게 이 일이 일어난 시간과 장소를 넌지시 알려줍니다. 12장 1절을 시작하면서 ‘유월절 엿새 전에’…라고 시작합니다. 무언가 묘한 느낌이 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세번의 유월절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이번 유월절은 마지막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십니다. 그러니 유월절 엿새 전에라는 이 표현은 예수님이 죽으시기 일주일 전이라는 말로도 바꿀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시간도 점점 빠르게 흐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전 베다니에 이릅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옆에 있으며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난 곳입니다. 얼마전 죽은지 사흘이나 되었던 나사로를 예수님은 살리셨고, 이 일 때문인지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고, 예수님은 사랑하는 나사로와 마지막? 시간을 보내기 위해 베다니에 머무십니다. 예수님에게는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의 여정에 나사로와 우정을 나누고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위로와 격려를 얻었을 것 같습니다.
마르다 이야기
2절에 재미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마르다는 시중을 들고 있었고, 나사로는 식탁에서 예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 가운데 끼여 있었다.
마르다는 시중을 들고 있었고… 아~~ 마르다… 이것이 마르다의 평소의 모습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늘 사람들을 대접하고 먹이는 일을 마르다는 참 잘했고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본문은 마리아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짧게 소개되어 있는 한결같은 마르다의 모습은 오늘 긴 여운을 줍니다.
공동체는 이렇게 자발적으로 나서서 일을 도맡아서하는 분들의 수고와 섬김으로 세워집니다. 잔치자리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주방에서 애쓰고 수고하는 이들의 노력이 있기에 잔치가 풍성하게 채워집니다. 공동체가 함께 모이면 알게모르게 품이 많이 들어갑니다.
가정교회로 모일 때는 가정을 오픈하고 집을 청소하고 사람들이 편안하게 머물다 갈 수 있도록 준비합니다. 그리고 함께 모이면 빠질 수 없는 것이 먹거리입니다. 밥과 간식과 음료를 미리 준비하고 셋팅하는 수고로움이 있기에 가정교회의 모임이 풍성하게 채워집니다. 알게모르게 늘 수고하는 손길이 있습니다. 이 손길이 귀합니다.
교회 전체가 모일때 그 수고로움이 더 커집니다. 맑은물이 전체가 모이는 첫째, 셋째 주일이면 모두가 자리에서 각자의 수고를 하는 모습을 봅니다. 방송…음향 및 영상 ppt/ 찬양팀/ 예배순서(노지, 시편기도-어린이, 기도, 아빠&삼촌이 들려주는 성경이야기)/ 교회학교 선생님들, 안전선생님등 그리고 예배 후 다 함께 청소하는 모습들. 이런 수고들이 모여서 맑은물이 모이고 맑은물이되고 맑은물이 흘러갑니다.
맑은물 마르다의 한결같은 수고에 감사합니다. 더 자발적이고 서로의 곁을 챙기는 맑은물 마르다가 많아지길 바랍니다.
가롯유다 이야기
잔치가 한창일 때 갑자기 마리아가 향유를 들고 등장합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예수님의 발 아래 멈추고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았습니다. 그리고는 향유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찼습니다. 향유냄새가 방을 순식간에 덮을 수록 잔치의 분위기는 갑자기 어리둥절함으로 갑분싸했습니다. 예수님도 멈칫하고 둘러싼 나사로와 주변 사람들도 뭐지? 뭐하는거지?하며 의아해했을 것 같습니다.
마리아는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일까요? 왜 이런 무모한 일을 하는 것일까요? 향유를 한 두 방울이 아니라 쏟아 붓고는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고 또 닦았습니다.
이 의아함을 참지 못한 가룟유다가 꾸짖습니다.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 돈맡았던 사람 답게 계산이 빠른 유다 덕분에 마리아가 쏟아부은 향유의 가치를 알 수 있습니다. 가룟유다는 마리아가 쏟아부은 향유가 동네 다이소에서 파는 싸구려 향유가 아니라 구하기 힘든 명품 향유인걸 단번에 알아차립니다. 삼백 데나리온… 1년을 꼬박 일해야 마련할 수 있는 향유였습니다. 1년의 삶이 녹아들어가 있는 가치가 마리아가 예수님께 쏟아부은 향유의 가치입니다. 이 향유를 마리아는 아낌없이 한번에 예수님의 발에 쏟아 붓고는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어루만집니다.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누구셨기에 기꺼이 값비싼 향유를 단번에 쏟아붓게 했을까요?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무엇이었기에 많은 남자들 틈에 비집고 들어가 향유를 쏟아붓고 자신의 머리칼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고 있을까요? 마리아에게 지금의 이 행동은 무슨의미를 지니고 있을까요?
이런 마리아의 마음과는 달리 마리아의 행동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가롯유다지요. 가롯유다는 총무답게 숫자를 제시하며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고 부어서 낭비한 마리아를 비판합니다.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 여러분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유다의 말은 일리있는 말처럼 들립니다. 마리아가 기분에 취해서 저 아까운 걸 쏟아부었으니 저걸 팔아 더 나은 선?을 행하면 더 효용성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유다의 말은 합리적으로 들리지는 모르나 지금의 예수님의 상황과 마리아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무의미한 말입니다. 더군다나 성경의 저자는 유다의 이 말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아니라 자신의 배를 불리지 못한 탐욕때문이라고 고발합니다. 유다의 말은 합리적이고 효용성있는 말처럼 들리나 정작 자신의 욕망을 채우지 못해 발화한 도둑의 말이었을 뿐입니다.
유다의 말은 잔치의 자리에 있는 예수님을 향하지도, 향유를 쏟아붓는 마리아의 마음을 이해하지도, 이웃을 향한 마음도 아닌 자신의 배를 채우지못한 분으로 쏟아내는 말일 뿐입니다. 유다는 지금 상황과 맥락을 살피지 못하고 보편적인 말로 마리아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자기 욕망에 취해 있기 때문에 마리아가 가진 맥락과, 예수님의 가진 맥락이 보이지 않습니다. 베다니 마을에 넘쳐났던 공동체적 기쁨도 보이지 않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자신의 마음의 불편함을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로 포장해서 사람들에게 전달합니다. 다 예를 들 수 없지만 그런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공동체 전체적인 상황이 보이지 않고 지금 나의 불편한 마음이 더 크게 보여서 그것을 공정이라든지 상식이라든지 합리적이라든지 옳지 않다든지라는 말로 표현을 합니다.
2,000년 부산 IVF여름 수련회에서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수요일즈음이었나 제가 담당하던 신라대학생들이 설교전에 특송을 했습니다. 약간의 랩을 섞어서 즐겁게 특송을 마치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강사님이 강단에 오르셔서 말씀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야하는 합당한 찬양의 모습과 형태가 있다고,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을 그렇게 따라하고 싶냐고! 본인의 불편함을 신학적인 권위와 설교자의 권위를 가지고 약 5분동안 설파하시고 설교를 시작하셨습니다. 즐겁게 찬양하고 내려와서 뿌듯한 마음으로 강단을 바라보던 학생들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고개가 다 떨궈지고 어깨가 축 쳐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목사님은 당시 청교도 설교가로 유명한 분이셔서 그분이 가지신 입장은 이해가가지만 학생수련회와 학생들의 상황과 맥락을 읽지 못하고 자신의 불편한 마음을 신학적인 잣대로 재단하고 학생들의 마음에 스크래치를 내었던 것이지요.
이런 일은 부지불식간에 일어납니다. 저도 예외는 아니지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살피지 못하고 자신의 아젠다가 더 커지면 그 아젠다로 상대의 말과 행동을 제단하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적이고 맥락적 사실을 본인의 아젠다로 왜곡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이런 사람이 어떤 지위를 갖거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면 그 파급력은 더 커집니다.
우리에게 유다와 같은 모습은 없는지 돌아봅시다. 자신의 관심사와 의제 때문에 합리적인 이유를 대며 다른 이들을 불편하게 하고 비난한적은 없는지! 자신의 욕구에 솔직해지고 욕구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고 훈련합시다. 상황과 맥락을 읽을 줄 아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말하기 이전에 왜 그랬을까?라고 생각할 줄 아는 마음이 생기도록 훈련합시다.
마리아 이야기-예수님의 발 아래 머무는 마리아
유다로 인해 더 갑분싸된 잔치의 자리에 예수님이 개입하십니다.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를 가만두어라!!! 비난하지 마라! 계속하게 두어라! 이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 먼저 긴장하고 있는 마리아의 마음을 잃고 마리아를 향해 있는 비난을 걷어 내십니다. 마리아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마리아는 나의 장례를 예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유다의 잘못된 합리적인 말도 흩어버리십니다. 가난한 자를 위해 구제하는 것은 옳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 여기에 해야할 일이 있다. 마리아는 지금 여기에서 해야할 일을 하고 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여러가지 단서들을 모으면 마리아가 무슨 마음으로 향유를 부었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습니다.
유월절 엿새전…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예수님…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닦는 행동은 아주 깊은 슬픔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
모두가 임박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엿새가 지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이라는 것을… 베다니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 거기서 로마의 병사들에 붙들려서 죽으시리라는 것을 마리아는 알았습니다. 어쩌면 오직 마리아만이 예수님의 마음을 예수님의 걸음을 이해하고 헤아리고 행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3년동안 예수님의 곁을 따랐던 제자들은 전혀 예수님의 걸음을 이해하지못하고 오히려 자리싸움이나 하고 있는 상황에서 오직 마리아만은 예수님의 걸음과 마음을 헤아리고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어떻게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까요? 가장 가까이 있는 제자들도 헤아리지 못했던 것을 어떻게 헤아렸을까요?
마리아와 예수님의 만남에서 보여주는 마리아의 위치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늘 예수님의 발 아래에 머물러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아래에서 예수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1장 오빠 나사로의 죽음을 예수님께 호소하며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간구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리아는 그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쏟아 붓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날 때 마다 마리아의 위치는 예수님의 발 아래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아래 머뭅니다. 예수님의 발 아래 머물며 그 발 아래에서 예수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발 아래에서 예수님께 기도하고, 발 아래에서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쏟아 붓습니다.
마리아의 이런 겸손한 머뭄과 귀기울임과 헌신이 지금 십자가로 향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게 된 배경입니다. 예수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제자들이 아니라 귀를 열고 예수님의 발 아래 머무는 겸손과 사랑과 헌신의 삶이 예수님의 상황과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자리, 눈에 띄지 않는 자리이지만 그 예수님의 발 아래 머물렀던 여인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큰 위로와 격려를 받으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마음이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살아가고 있나요? 저와 여러분이 그리고 맑은물이 머물러 있는 자리는 어디일까요? 자주, 그리고 오래 우리의 시선과 마음과 시간이 머무는 곳을 어디일까요? 유투브 쇼츠, 드라마, 예능, 맛집, 여행등등 분주한 일상이 우리의 마음을 앗아가는 것은 무궁무진합니다. 우리 삶에서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발 아래 머물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자리에 앉아서 다른 이야기와 관심사로 이내 흩어져버리고 맙니다. 의도적으로 주님의 발 아래 머무는 시간과 장소를 만드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펼쳐들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의 발 아래 엎드려 나의 필요와 세상의 필요를 간구하고 기도하며 주님의 발에 엎드려 나의 삶을 내어 드리는 맑은물이길 바랍니다. 사순절을 보냅니다. 주님의 발 아래 머무는 맑은물이길 바랍니다. 고난주간 묵상집 월드비전에서 매년 맑은물을 위해 자료집을 만들어냅니다. 15-20분 가량입니다. 큐알을 찍으면 읽어주고, 찬양도 들려줍니다. 아주 편리한 세상입니다. 주님 발 아래 머물며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맑은물이길 바랍니다.
마리아 이야기-마음을 헤아리는 낭비
예수님의 마지막 길이기에 예수님의 마지막 만남과 방문지이기에 마리아는 자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쏟아서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합니다. 삼백데나리온의 가치를 아끼지 않고 단번에 쏟아붓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감사와 마음이 이보다 더 잘 표현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사회적 통념과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예수님 앞에와서 향유를 쏟아붓고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을 표현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을 자신의 가장 소중하고 값비싼 향유를 쏟아 붓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이런 마리아의 헌신된 사랑의 표현을 보며 짐짓 마음이 부끄러워집니다.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전부이고 가장 소중한 것이고 가장 귀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삼백데나리온의 가치가 되는 향유를 아낌없이 쏟아 부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나의 마음은 어떠할까? 돌아보며 부끄러워집니다. 그러면서 다시금 마리아처럼 나의 마음도 우리의 마음도 그렇게 뜨거워지고 무모해지기를 소망해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이 표현되어야 하는 자리는 어디일까요? 그건 아마도 예수님의 발 아래 머무는 삶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발 아래 머무는 삶에서 예수님의 마음이 헤아려지고 헤아려진 마음의 자리가 우리의 사랑과 헌신 표현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맑은물이 예수님의 마음을 마리아 처럼 헤아리고 마리아 처럼 예수님께 사랑을 고백하고 헌신을 표현하는 맑은물이길 기도하고 바랍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서 낭비하는 삶을 사는 맑은물이길 바랍니다.
맑은물의 마음을 헤아리는 낭비
결론이 조금 생뚱 맞지만 이분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맺으려 합니다.
이번 헌재의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으로 주문을 읽은 문형배재판관은 2019년 헌법재판관 인사청문회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는 경상남도 하동에서 가난한 농부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독지가 김장하 선생 장학금을 고 2부터 대학교 4학년까지 받아 학교를 마치고 사법고시에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은, 자유에 기초하여 부를 쌓고 평등을 추구하여 불합리한 차별을 없애고 박애로 공동체를 튼튼하게 연결하는 것이 가능한 곳이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몸소 깨우쳐 주셨습니다.
고시에 합격 후 선생을 찾았습니다. 선생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고마워할 것은 없다. 나는 이 사회에 있던 것을 네게 주었으니 갚아야 된다고 생각하면 이 사회에 갚아라"
선생의 이 말을 저는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문형배 재판관을 낳은 것은 김장하선생의 자기를 돌보지 않는 남을 위해 낭비하는 삶이었습니다.
김장하선생의 헤아림은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배우지 못했던 원인이 오직 가난이었다면, 그 억울함을 다른 나의 후배들이 가져서는 안 되겠다 하는 것이고, 그리고 한약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돈을 번다면 그것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겠기에 그것은 내 자신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평생 한약방을 하며 번 돈으로 학교를 만들어서 국가에 기부하고, 1,000여명이 넘는 장학생들을 후원하고, 지역사회와 문화와 예술활동을 후원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김장하선생은 자신을 낭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김장하선생의 이야기는 어른 김장하라는 다큐영화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작년 맑은물 20주년을 보내며… 20년의 열매 다시 씨앗으로라는 주제로 보냈습니다. 앞으로 내다보는 20년, 10년 우리는 어떤 씨앗을 뿌려야 할까요? 우리 각자가, 그리고 맑은물이 헤아려야하는 주님의 마음은 무엇이고 우리가 낭비하며 쏟아부어야 하는 삶은 무엇일까요? 함께 그 답을 찾아가며 낭비하는 삶을 통해 씨를 뿌리고 열매를 맺어가는 맑은물이길 바랍니다.
기도
내가 머무는 자리는 어디인지 돌아봅시다. 주님의 발 아래 머무는 나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의 마음은 어떤지 돌아봅시다. 귀한 향유를 깨뜨려 주님의 장례를 예비한 마리아처럼 우리의 삶 또한 주님께 귀하게 드려지길 기도합시다.